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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에서 서쪽으로 약 35Km를
쾌속선 뉴골드스타호가 약 한시간을 달려 도착한 도초도 선착장
도초도에서 비금도를 가려면
사진에서 보이는 1996년도에 완공된 937m의 서남문 대교를 건너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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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에 들어서 그림산과 선왕산 쪽으로 마을버스?로 달리다보면
오래전 갯뻘을 개간해 만든 듯한 염전과 농경지 들이 끝없이 넓게 펼쳐져있다
비금도는 100여 년 전의 강화도처럼 현재 논의 60~70%가 바다였다
본래는 여러 개의 섬이었으나 간척사업을 무려 25차례나 진행하면서
수십 개의 섬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큰 섬으로 형성되어 현재의 비금도 모습을 갖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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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원평 강달어 파시로 유명했던 비금도가
소금의 섬으로 불리게 된 뒤에는 뛰어난 인재의 땀방울의 결과였다
1946년 이전에 신안지역은 천일염을 만들수 없는곳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 불문율을 깨트린 사건이 일어났다
평안남도 용강군에 위치한 주을염전으로 징용을 갔던
박삼만이란 사람이 해방이 되자 고향인 신안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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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강달어는 5~6월에 가장 많이 잡히며
우리가 흔히 황석어라 부르는 생선이 바로 강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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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강달이가 조기새끼인줄 알지만
조기는 입주변(대가리전체가)이 뽀족하고 강달어는 입주변이 둥그스름하다
크기도 많이 커야 15센치정도지만
5,6월 산란철에는 알도 꽉차고 뼈도 연해서 맛이 상당히 좋아진다
강달어는 젓갈로 많이 사용하지만
애주가들은 조림이나 튀김,구이등 술안주로 애용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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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만은 고향으로 돌아오자 갯벌을 막고 염전을 만드는 실험을 시도했다
그가 개척한 구림염전은 마침내 비금도를 소금의 섬으로 바꾸어놓는 기적을 창출하였고
구림염전에서 그가 시도했던 소금제조법은 이어서 다른 섬에까지 전해져 널리 확산이 되었다
당시 비금도에서는 450세대의 주민들이
대동염전조합을 만들어 1백여 ha가 넘는 광활한 염전을 만들어내는데.....
너나할것 없이 배고팠던 시절이라 섬사람들은 오로지
보리개떡과 나물죽으로 연명하며 박삼만을 따르며 대역사를 이루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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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삼만이 염전을 만들기 이전에 신안군에서는 천일염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전통적인 생산방법으로 자염을 생산했다
자염이란 바닷물을 가마솥에 붓고 장작불로 끓여서 증발시킨 후 추출하는 소금
자염생산 방법은 몇날 며칠을 줄곧 장작불을 지펴야 하니 연료비가 많이 들고 노동력 투입도 만만치 않다
그러던 중, 박삼만의 신기술 염전의 천일염은 연료비가 전혀 들지 않는 획기적인 신기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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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시의 소금값은 그야말로 금값이었다
5 · 16 쿠데타 직후 화폐개혁과 함께 소금값이 한 가마에 8백 원까지 뛰었다
당시의 소금 한 가마는 보리쌀 한 가마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었다
염전 근로자들의 호주머니 실밥이 터질 정도라는 이야기가 날라 다니며
날짐슴이 나르는 비금이 아니라 돈이 날아 다니는 비금도라 불리며
비금도의 천일염은 단기간에 유명세를 날리면서 전국으로 확장되어 성장속도가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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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비금도 소금의 빠른 유명세 만큼 몰락의 속도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1990년대 후반 소금시장이 개방되면서 수많은 염전이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
중국산 값싼 소금이 엄청난 물량공세로 밀고 들어오면서 비금도 천일염의 유명세도 밀리고 만다
염전들이 폐전이 진행되고 있는 비금도는
물길이 썩 좋지 않아 농지를 조성하기도 쉽지 않다
설령 조성한다고 해도 벼농사를 짓기 좋은 환경이 아니다
염전 근로자가 돈을 넣던 호주머니가 터진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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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염의 명성이 전 같지 않아 불항을 겪을때
또 다른 인재가 비금도에 활기를 불어 넣는데 그가 바로 죽림리에 살던 최남산이란 사람
최남산은 1958년 비금도에서 처음으로
시금치 종사를 구입해 재배하며 그 가능성을 꾸준히 타진했고....
1970년대 이후부터는 그 재배가 더욱 활발해져서 재배면적이 넓어졌고 생산량이 확대되었다
특히 비금도에서 수심이 깊고 산도 많아 염전개발이 어려웠던 서부지역에서 시금치 재배가 더 일찍 발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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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시금치는 1996년 3월 비금농협에서
섬초라는 이름으로 상표등록을 함으로써 고유의 명칭을 얻는다
한겨울 추위 속에서 바닷바람과 눈서리를 견디느라 땅바닥에 붙어 자라며
직립형인 일반 시금치와는 달리 옆으로 퍼진 형태의 섬초
성장 환경 때문에 잎이 두꺼워 삶아도 흐물거리지 않아서 씹는 맛이 좋은데
개인적으로 섬초인줄 알고 먹어 보기는 지난 2010년 겨울
엿장수 아씨가 운영하는 "게눈 감추듯"에서 그 맛과 향을 제대로 경험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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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산-상왕산 산행은 임리마을 주차장에 내리면서 시작된다
산행은 시작부터 여유만만
애당초 산행계획이 오후1시반에 비금도를 출발하는 쾌속선에서
3시반 카페리로 바뀌면서 산악회에서도 "서두르지 마시고 여유있게!!..."
가까이 보이는 그림산은 마치 인왕산 모습도 보이고
어떻게 보면 황매산의 바위암산 모산재를 닮은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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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산이 날짐승의 머리부분이라면 선왕산은 날짐승인 새의 몸통 부분이란다
선왕산의 정상부군에서 좌,우로 뻗은 산줄기는 마치 비상하는 날짐승인 새의 양날개 같아서 飛禽島
그런데 그림산 암릉구간 전까지 등산로에 잔디가 폭신하게 깔려있어 마치 윤단을 밟고 오르는것 같아....飛錦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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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림산 정상에 섯을때 동쪽으로 펼쳐진 다도해의 진모습
살짝 깔려진 해무와 어울진 그 모습이 왜? 가보지도 못한 하롱베이가 생각났을까....
1969년 무안군에서 행정구역이 분리되면서 새로운 무안을 의미하는 新安
신안군의 시작은 군청사를 목포시내에 두고 유인도111개,무인도 719개 총830개의 순수한 섬으로 이루어진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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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체의 섬 25~30%를 소유한 신안군은 다도해를 표방하는 브랜드 사업을 펼치면서
정식적으로 등록이 않된 매립된 도서와
바다속에 잠겨있다 썰물때 들어나는 여까지 포함해 총1023개의 섬을 만들어내
2012년 섬 수를 9개 줄여 "천사의 섬 신안군"으로 조례를 개정했고 2013년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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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여유로운 산행을 우리만 즐긴것 아닌듯 싶다
선행자들이 선왕산 자락 양지 바른곳에 자리를 펼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선왕산을 향하면서 저 아래 한눈에 들어 오는 비금면소재지
비금도는 불세출의 천재 이세돌을 만들어낸 고장이다
평소 호쾌한 그의 바둑행마에 열열한 팬인 본인은
작년 3월 알파고와 대국에서 패하면서 "이세돌이 패한것이지 인간이 진것은 아니다" 라는
명언을 남기는 인간적 성숙미를 보이는 그에게 경외감까지 들게 하는 마력의 경외감이 들기도 했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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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은 자서전에서
"나는 이미 비금도에서 나의 바둑스타일을 완성했다"고 밟힌 바 있다
현재 저곳 비금면에서 홀로 생활하시는 이세돌 어머니는
"독학으로 바둑을 배운 아버지로 부터 바둑을 배우며 공부를 했다"고 교육 비법을 공개했다
이세돌의 첫째형 이상훈은 프로 바둑기사 9단,둘째와셋째 누나는 이대국문과 졸업
그리고 넷째형은 서울대에서 콤퓨터공학을 전공한 형재들 모두가 천재와 수재로 덩쿨을 이루어낸 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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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의 진산 선왕산 정상 표지석 부근에 보라색 쑥부쟁이가 한아름 무리로 피었다
가을꽃인 쑥부쟁이가 유난히 따스한 기온때문인지 아직도 전혀 활기를 잃지 않고 생생한 모습
아주 먼 옛날 가난한 대장장이가 살고 있었다
먹여살릴 자식은 많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다행히도 큰딸이 마음씨가 고와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큰딸은 매일 산속을 다니며 쑥을 뜯어 하루하루 끼니를 챙겼다
동네 사람들은 대장장이 딸이 쑥을 뜯으러 다닌다고 해서 ‘쑥부쟁이’라고 불렀다
길게 이어지는 쑥부쟁이 전설이야기는 위기에서 자기를 구해준 사냥꾼을 연모하며
산속을 헤메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면서 그 자리에 피어난 꽃을 쑥부쟁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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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의 슬픈 이야기는
맑지 못한 기상때문에 깨끗하게 들어오지 않는 서쪽 바다의 우이도에 있었다
우이도는 일제가 가거도를 소흑산도로 개명하지 전까지 소흑산도로 불렸던 곳
정약용의 형 정약전은 1801년에 발생한 신유사옥으로 저곳 우이도로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이곳 우이도에서 일본 오키나와를 비롯해
필리핀과 마카오를 거쳐 표류하다 1805년 고향 우이도로 귀향해 저술한
"표해록"의 저자 홍어장수 문순득과 자기의 수발을 들어주던 젊은 여자 거무를 첩으로 들이면서
그들의 도움으로 불후의 명작 "자산어보"를 완성하지만 이곳 우이도에 마음을 주지 못하고
끊임없이 동생 정약용을 그리워 하고 정치적 복권을 끊임없이 기다리는 그의 마음은 항시 편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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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젊은 첩 거무가 매일같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주는 안주와 술로 세월을 보내고
유배생활 15년만인 1816년 그의 나이 58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유배지인 그곳에 "무"와"공"두 아들을 남긴다
그의 죽음에 동생 정약용은 다산시 문집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겻다
외로운 천지 사이에 우리 손암선생만이 나의 지기였는데, 이제는 잃어버렸으니
앞으로는 비록 터득하는 바가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함께 말할 사람이 있겠느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면 차라리 진작에 죽는 것만 못하다
아내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자식도 나를 알아주지 못하고 형제 종족들이 모두 나를 알아주지 못하는 처지에
나를 알아주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슬프지 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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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금도 산행 마무리는 수대선착장에서 배편을 기다리면 고운정에 오른다
설화에 의하면 최치원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우물을 파서 비금도의 물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이와 함께 최치원이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선왕산 산정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해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민중들에게 선인으로 추앙받던 최치원의 권능이 잘 나타나 있고 있는 부분
고운정 우물을 한 박아지 들이키시는 남보원 선생님.....
"마시기는 좀 거시기 했어도 맛은 쫗다고 표현해야지 ㅛㅛ!!"
글고보니 비금도는
예나 지금이나 인재들의 땀과 천재들의 향기가 두루두루 빛나는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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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로 돌아 나오는 카페리호
총무 말에 의하면 카페리와 쾌속선의 운임 차이는 속도에 반비례한단다
개인적으로 섬여행은 쾌속선보다 카페리가 더 마음에 든다
급하지 않게 천천히.....카페리에는 섬사람들의 삶의 체취를 듬북 느낄수있다
젊은시절 혼자 쏴 돌아다는 나에게 마누라가 불만을 표출하면 항상했던 변명
"나중에 나이들면 자기 데리고 다닐 여행지 미리 답사 다니중이녀~~!!"
정말 마누라에게 날렸던 이야기가 공수표가 아닌 현실이 되었을때
이런 카페리에 몸을 싫고 현지인들의 애환과 삶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유유자적 할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첫댓글 넘멋진사진에비금도의
역사해설과 산행기를
감명깊게 잘보고 잘읽고
잘느끼며 공부도
잘했읍니다.님재주가 부럽고 고맙습니다!
공공원님 필요한 사진은 직접 클릭 하셔서 가져 가시면 됩니다
난지님의 해박한 지식과 글 솜씨로 쓰신 비금도에대한 산행후기 감명깊게 잘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항상 깊은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세돌의 아버지는 돌로 세계를 지배하라는 의미로 작명하였고 세돌은 그 뜻을 달성했는데 이세돌바둑기념관 관람 못한 아쉬움이 일고, 세계 최고의 천일염 생산을 위하여 수리차를 돌린 박삼만 옹의 노력을 잊고 산것은 아닌가 싶다.나중에 부인을 위한 준비하시는 분 답게 연구한 흔적을 보며 대단하십니다라고 경의를 표합니다.
에궁~부끄럽습니다 ㅛ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