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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구원과 주의 이름 부르기가 무슨 관계?>의 줄거리: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남은 자인 참 선민에게 주어진 사명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기이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상태가 바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름 부르면 구원 얻는다는 것은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님 이름을 제대로 부름으로써만 하나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과 주의 이름 부르기가 무슨 관계?
(로마서 10:5~13)
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구원과 주의 이름 부르기가 무슨 관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구원과 주의 이름 부르기가 무슨 관계?”
9~10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축약해보면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의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제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에서도 이 말씀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중심으로 “구원과 주의 이름 부르기가 무슨 관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루신 사역의 근본 목적은 구원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수요일 말씀과 어제 온라인교회 모임과 오늘 본문에 걸쳐 주제가 되는 내용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상태가 구원받은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3절을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상태가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히 이루어지려면 어찌 되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만 합니다.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관계가 맺어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평생 언제 어디서나 할 일은 하나님의 이름 제대로 부르기입니다. 지금 직장에 있다면 직장에서 할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가정에 있다면 가정에서 할 일은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이고, 몸이 살아있는 동안 언제 어디서 어떤 문제가 터져도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 제대로 부르기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본문 말씀에서 언급된 대로 예수님의 이름 부르기는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름은 마음에서 반응을 일으킵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또 어떤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자장면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먹고 싶습니다. 돈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면 갖고 싶습니다. 명품 외제차의 이름을 떠올리면 타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릴 때는 마음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야 할까요? 그 반응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릴 때는 하늘에 계신 창조주가 유일한 있음으로 의식되고 유일한 좋음으로 열망되는 상태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릴 때는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만 좋아서 바라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리는데 돈이 좋아서 “하나님, 돈을 주세요.”라는 바람이 생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릴 때는 의식이 유일한 하나님의 있음만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인가를 빨아들여 채워지려고 하는 공백의 마음에서는 유일한 하나님만을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감만 의식하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흡입하려는 상태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사장님의 존재감이 가득히 느껴지는 중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유대지도자들과 바리새인과 산헤드린공회원들과 빌라도 앞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생각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감을 의식하지 못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존재감이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세가 바로 앞에서 섰을 때도 바로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공회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산헤드린공회의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리고 말하는 한 하나님의 존재감이 느껴져야만 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 앞에서 자기와 같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리는 동안 하나님만을 소망하고 하나님만을 가진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일은 중요합니다. 돈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에는 가지고 싶다는 마음의 반응과 함께 부르게 됩니다. 자녀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참으로 소중하다는 마음의 반응과 함께 부르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있음에서 유일하다는 의식의 반응과 좋음에서 유일하다는 마음의 반응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다면 정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릴 때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에 반응하며 부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만 제대로 이루어지면 어떤 행동규칙을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온전한 에덴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만 제대로 부르면 됩니다.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은 요엘서 2장 32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 또한 오순절 설교에서 동일한 말씀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요엘서를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름 부름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부름에 거리낌 없이 연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신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만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기계적으로 부른다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렸듯이 구원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상태입니다. 의식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을 느끼고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유일한 좋음을 열망하는 상태에서만 하나님의 이름은 제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자들이 남은 자들이고 선민입니다. 사도 바울과 사도 베드로가 거리낌 없이 예수님의 이름 부름을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 부름에 연결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만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는 상태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상태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제 온라인교회 모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성전 방식으로 불러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 부르기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한 방법으로 성전 방식을 규정해주셨습니다. “나의 이름을 부를 때에는 반드시 성전 방식으로 부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의 이름 부르기가 성전 방식을 완성시켰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온 지구 위에서 유일하게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성전에 두신 이유는 성전 방식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하심입니다. 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는 법궤가 들어있습니다. 지성소에 법궤가 들어있는 것은 우리 마음의 지성소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있는 것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이름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있어야만 합니다. 마음은 무언가 좋은 것을 흡입해서 채우려고 합니다. 그때 무엇으로 채워질 것인가는 이름을 통해 결정됩니다. 그 이름이 결정되는 장소가 바로 마음의 지성소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에서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으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돈을 가져서 채우고자 하는 추구함이 발생합니다. 분향단의 기도가 바로 이 추구함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추구하는 이유는 떡상이 의미하는 대로 배부르기 위해서입니다. 금촛대는 촛불이 빛을 발산하듯이 배부름의 기운이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됨을 의미합니다. 마음을 채우고 소망하는 대상의 기운이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사역을 하시며 성전 방식을 완성시키셨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붙잡은 상태가 빗나감이고 죄가 발생한 것입니다. 법궤의 덮개를 속죄소라 하는 이유는 바로 죄가 발생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성전 방식은 바로 이러한 빗나감의 죄의 상태를 번제단에서 죽일 것을 요구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붙잡은 인격을 번제단에서 어린 양과 함께 죽였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만 붙잡음으로써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만을 소망하고 떡상이 뜻하는 대로 하나님만으로 배부르고 금촛대가 뜻하는 대로 하나님의 기운과 뜻만이 말과 행동에서 나타나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런 성전 방식이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루신 일이 바로 성전 방식의 완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리스도 사역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사역 안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에 대해 의식과 마음이 반응하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르게 부르는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리면 “하나님은 나의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이시고 나의 유일한 좋음의 대상이시다.”라는 반응이 일어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그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삶 전체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에덴이 됩니다.
성전 방식은 곧 예수님의 그리스도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를 염두에 두고 본문의 5~8절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5절에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라는 말씀은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한 것이고, 6절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라는 말씀은 신명기 30장 1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과 말씀은 결코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올라가서 가져와야 될 것도 아니고, 바다 건너로 가서 가져올 것도 아니며, 너의 입과 마음에 언제나 가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깝다는 것은 성전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지성소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이시고 유일한 좋음이 되십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때의 하나님 말씀은 나의 마음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상태입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이유는 마음의 지성소에서 붙잡은 대상이 하나님 아니기 때문입니다. 재물이나 건강이나 자녀와 같은 세상의 대상을 붙잡은 상태는 나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다른 것이 끼어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졌기에 하나님의 말씀과도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를 제대로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지켜집니다. 구약시대에는 이것을 위하여 성막과 성전이 허락되었습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성전이 없었기에 성막의 방식이 존재했습니다. 본래 선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하고 하나님의 이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성막의 방식으로 부른다면 마음의 지성소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열망하고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는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가장 가까이에 계신 상태이기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말과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마음의 지성소에 돈이라는 이름이 들어와 있다면 돈을 열망하고 돈의 존재감을 가장 크게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는 하나님께서 돈에 의해 마음 바깥으로 밀려나신 상태입니다. 마음에서 돈을 좋아하기에 돈과 연관된 계명은 지킬 수 있지만, 마음 바깥에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지킬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아서 하나님 이름 부르기가 제대로 되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세가 말씀하시는 율법과 계명과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예수님에 대해 적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이 그리스도 연쇄과정이자 복음의 사건을 우리에게 가까운 말씀이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마음의 지성소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아서 성전 방식을 충족시킨 상태를 전제로 하여 말씀이 가깝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들려지고 주어질 때 마음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가까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의 의미를 성전 방식을 토대로 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무엇을 원하느냐, 무엇을 소망하느냐, 무엇을 가짐으로써 마음이 채워질 수 있느냐?”라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만족과 채워짐을 위해서 이름을 붙잡게 됩니다. 이때 성전 방식은 하나님 이외의 이름을 붙잡고 있는 상태를 알고 깨닫게 합니다. 성전 방식에 비추어 봄으로써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돈의 이름을 붙잡고 있구나. 하나님으로부터 거리가 떨어져 있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과의 거리를 느끼는 나의 마음 바로 가까이 바짝 다가오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이러한 빗나감의 죄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지 않고 다른 이름을 붙잡고 소망하고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빗나감입니다. 그리고 이 빗나감을 깨달을 때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과정은 말씀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부활 사건, 승천 사건을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바라고 소망하고 존재감을 느끼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상황을 깨달을 때마다 다가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거리가 느껴지는 순간마다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십자가 사건을 붙잡기만 하면 됩니다.
나의 마음이 하나님과 거리가 벌어져서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들을 붙잡고 있다는 깨달음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 말씀은 가까이 옵니다. 그 십자가를 붙잡기만 하면 나의 마음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부를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의 대상이시고 유일한 좋음의 대상이신 외통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지는 성전 방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의 지성소에서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있습니다. 이 상태가 법궤의 덮개인 속죄소가 의미하는 대로 죄가 발생하는 현장임을 깨닫는다면 예수님은 다가오십니다. 돈이라는 죄의 상태를 고민할 때에 예수님께서는 다가오셔서 “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자.”라는 제안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의 지성소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이름을 붙잡아서 하나님과 거리가 벌어졌음을 느낄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옵니다.
이것을 깨달을 수 없다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습니다. 성전 방식을 모른다면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은 상태에서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돈을 소원하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 예수 이름이 전해진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이름은 제대로 불릴 수 없습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돈을 붙잡고 소원하는 상태는 빗나감의 죄가 발생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죽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 부르기가 성전 방식대로 될 수 없기에 구원도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것이 죄임을 깨닫게 해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돈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돈을 추구하는 상태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것을 방치한 채 예수 이름을 전한다면 기독교는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기독교 종교인들이 예수님의 이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지성소에서 돈의 이름을 붙잡고 돈을 소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녀의 형통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자녀의 형통만을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건강을 바랍니다. 그렇게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들을 붙잡고 있는 중에 분향단이 뜻하는 대로 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이름도 부르고 예수님의 이름도 부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실제 구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사는 동안에 마음의 지성소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천 번이라도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들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순간들에 성전 방식을 기억해서 “이건 아니다. 나는 번제단에서 죽어야 한다. 이제는 번제단 대신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한다.”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마음의 지성소가 하나님 이외의 이름을 붙잡은 상태를 방치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 얻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 얻는다.”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2장 24절에서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전 방식을 모르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그리스도 사역이 성전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기로 택하신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려면 성전 방식이 아니면 안 됩니다. 성전 방식은 마음의 지성소로부터 시작해서 분향단이 의미하는 추구와 떡상이 의미하는 만족과 금촛대가 의미하는 드러남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담긴 이름이 하나님이 아닐 경우에는 분향단과 떡상과 금촛대가 모두 타락하고 부패한 것이기에 번제단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이 성전 방식을 예수님께서 완성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곧 그리스도 연쇄과정이라는 사역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 속으로 의식과 마음이 들어가야만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요지는 성전 방식에 준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성전 방식에 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도 부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름을 성전에 두셨습니다. 관계의 시작은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나의 의식과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은 반응이 일어나는 상태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과 관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성전 방식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전 방식을 완성시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성전 방식의 완성인 그리스도 연쇄과정 안으로 나의 의식과 마음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의식은 오직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좋음만을 열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 공짜로 살고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그리스도 사역 안으로 들어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9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의 사역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마음이 예수님과 묶여서 하늘까지 따라간 상태를 삶의 현장에서도 풀지 않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묶여서 하늘까지 올라가면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아무것도 끼어있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사람들 틈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만을 소망하는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상태를 삶의 현장에서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성전 방식대로 불러야 합니다. 그리스도 연쇄과정은 성전 방식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성전 방식을 모르면 예수님 이름 부르기는 주문에 불과하며 기계적인 장난이 되어버립니다. 마음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 이외의 것을 붙잡은 상태는 절대로 간과되어서는 안 되며, 이것을 놔둔 채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이름 부르기는 멈춰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이 하나님의 이름임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게 하여 주셔서 진정한 구원받음이 무엇인가를 우리의 삶에서 날마다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