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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 인도자들의 허세와 헛발질
본문<롬2:17~24>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들 있습니까? 사랑을 입에 올리지만 정작 그 사랑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은 참 기이하고도 신비롭습니다. 즉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받아들이기도 어렵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함축하면 3가지로 표현할 수도 있는데요, 첫 번째는 찾아오시는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죄인을 사랑하시는 사랑이지요, 그리고 세 번째는 끊어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오늘 이 세 가지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확실하게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찾아오시는 사랑이시지요. 성경 어디를 봐도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얘기는 없습니다. 그것을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선악과 먹고 숨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 가셔서 부르시는 것으로 시작하시잖아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역시 찾아가셔서 불러내십니다. 그 전에 아브라함은 우상 장사 아비 데라 밑에서 역시 우상 장사를 배우던 죄인이었는데, 그 아사리 판에서 불러 내셔서 구원하십니다.
모세는 또 어떻습니까? 살인자가 되어 광야로 피신하여 80세가 된 소망 없는 늙은이를 하나님이 찾아가신 것이고, 다윗도 사무엘을 보내 찾아내십니다. 12제자도 주님이 다 찾아서 부르신 자들이고요, 바울 역시 율법 종교의 아성인 유대교에 깊이 빠져 있었는데, 주님이 찾아가셔서 불러내십니다. 이처럼 찾아 가시는 사랑을 하시는 배경에는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둘째, 죄인을 사랑하시는 사랑입니다. 행함이 반듯하고 훌륭한 사람을 찾아오시는 게 아니라 실패하고 천하고 멸시받고 약하고 미련한 자들을 찾아와 부르십니다.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자기 의가 바닥난 자들을 사랑하시지 자기 자랑, 자기 가치, 자기 의가 펄펄 살아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것 또한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면이지요(롬5: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IX가 우리 위해 죽으심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의 확증).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셋째, 끊어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자를 끝까지 책임지시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내치거나 취소하시는 게 없이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하십니다.
<롬8:38~39>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서 만나고 찾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이지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찾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안을 우리 의지로 들어가고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예수 안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시고 완성한 언약의 세계가 예수 안입니다. 언약의 세계지요. 우리를 그 예수 안에 부르셨다고 하는 것은 예수 안에서 예수님이 행하시고 예수님이 이룬 사랑과 은혜의 사건 안에서 우리를 대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잘하고 못하고 하는 우리에게 달려있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행하신 사랑과 은혜 안에서 우리를 대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루신 의로움 안에서 우리를 대하기 때문에 우리를 거룩하다 하신 거예요.
우리의 어떤 행동과 상관없이 예수님이 행하신 의로움 때문에 넌 거룩하고 넌 의로운 자야 이렇게 대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는 책망할 것이 없는 게 성도입니다. 이게 얼마나 자유롭고 가벼운지 몰라요. 책망할 것이 없다. 책망 받을 게 없는 거예요. 부족할 것이 없는 거예요(고전1:6~XI의 날까지 책망할 것이 없이 견고케 하시리라/아4:7~나의 사랑 너는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다.)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시고 나 같은 자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은혜가 믿어지기에 그게 감사가 되는 거.. 이게 예수 안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안은 사랑 안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 안은 성령으로만 들어가는 것이죠. 그 세계를 우리가 보고 그 안에서 주를 보게 되어지는 것, 이게 성령의 일이죠.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3가지로 압축해서 살펴보았는데요, 그 신비한 사랑의 이면에는 인간의 불가능성을 동반하여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구원이 뭔지 알아서 그 뜻에 부합한 일을 이루어서 구원을 쟁취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이하신 사랑이 더욱 빛을 발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 편에서 신앙에 입문할 때 필히 먼저 알아야 것은 사람의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먼저 받고 믿음도 먼저 받아야 복음을 영접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실 때에 인간 자신의 실체에 대해 눈이 열려서 나는 결단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존재가 못 된다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자기 불가능성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인간 자신이 하나님을 찾아 나서는 것이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반대로 알고 있는 것이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야 되는 것으로 알고들 있지요. 그래서 내가 믿음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고 여겨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배경에는 결국 내가 하나님을 찾아가서 그 사랑을 받아내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어 자기를 장식하고 꾸며 가지고 믿음이 특출한 어떤 신자, 믿음이 아름다운 그런 신자가 되어서 사랑도 받고 복도 받겠다는 이런 발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주일을 지킨다, 헌금한다, 기도한다, 구제한다, 전도한다, 이런 것도 결국은 자기의 어떤 믿음을 꾸미려는 장식품들이지요.
결국은 모든 신앙생활의 모습은 잘 보이기 위한 위선이고 가식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서 ‘나 괜찮지?’ 이렇게 자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자기를 뽐내고 있는 것이죠. 그런 것들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가는 사랑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그런 헛된 일에 자꾸 마음을 늘 뺏겨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신앙을 하게 되면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종교의 특징이 사람이 신을 찾아 나서는 것이지요.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종교적 열심과 정성으로 신을 받들지요. 그것이 가인의 제사인데 일거에 거절당하잖아요? 사람의 그 어떠한 것도 일체 기각하신다는 뜻입니다.
창4:3절 이하를 보면 아벨과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두 제사의 의미를 아주 이미 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아벨이기에 아벨의 제사를 드린 것이고 가인은 가인이기에 가인의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지요.
‘가인’이라는 단어의 뜻은 ‘얻다, 있다, 창, 칼’의 의미 값을 가집니다. 즉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는 용어이지요. 이처럼 자기 가능성에 가치를 둔 자들은 필히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며 찌르고 잘라냅니다. 율법적 신앙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난 뭐든지 다 할 수가 있어, I can do everything!, 즉 ‘율법을 다 지켜 행하겠나이다.’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모든 선악과 따먹은 모든 천연적인 자들의 정체성은 자아실현과 자기 가치 챙기기를 생명으로 삼습니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을 섬긴다면 당연히 복도 받고 구원도 받기 위해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열심을 낼 것입니다. 이 같은 정신 사고를 가지고 제물을 마련하였기에 가인의 제사를 한마디로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벨’이라는 단어의 뜻은 ‘허무, 없음, 실패, 무가치’입니다. 자기부인이 일어나서 자기 의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용어입니다. 한마디로 ‘아임 낫팅’ 이지요. 나는 죽은 자가 맞습니다. 즉 ‘도저히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저주의 자식이 맞습니다.’는 고백을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런 아벨이기에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리잖아요. 양의 첫 새끼는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그 기름은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로 비유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상징합니다. 즉 아벨은 자신은 죄의 저주로 죽어야 할 자인데 오직 주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감사의 제사를 드렸으니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요약하면 아벨은 그 이름값이 아벨(허무, 무가치)이기에 아벨의 제사를 드린 것이고, 가인은 그 이름값이 가인(나 있음, 자기 의, 자기 자랑)이기에 가인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과 아벨의 제물, 그리고 가인과 가인의 재물이라는 표현을 성경은 하는 것이지요. 내면의 어떠함대로 신앙이 표출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알고 보면 아벨은 할례자를 뜻합니다. 마음의 가죽이 잘라내져서, ‘나는 죄의 저주로 죽은 자 맞습니다.’라고 자신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고백을 하는 자이이지요. 반대로 가인은 마음의 할례가 없는 자입니다. 그래서 자기 가능성에 방점을 찍고 사는 자입니다. 자신이 율법을 잘 지켜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을 받겠다는 유대교의 바리새인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율법 행함에 가치를 두고 신앙하는 자들의 행태를 고발하는 내용입니다.
<롬2:17~20> 17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19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20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은 족속이라고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 자긍심을 뽐내던 자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율법을 유대인에게만 주셨지만, 그들이 잘났거나 영적인 탁월함이 있어서 준 게 아니라 샘플로 삼아 준 것입니다. 어떤 샘플일까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킬 수 없음을 증명하시기 위함인데 그 샘플대상을 단지 유대인으로 삼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옛 언약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실 때에 그냥 주신 게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쌍무계약을 맺고 주신 것입니다. 잘 지키면 복을 받되 못 지키면 저주를 받아 멸망할 것이라는 내용이었지요. 결국 하나님의 예상대로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그 계약을 따라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북조와 남조로 분열되는 저주를 받더니 계속해서도 율법을 못 지키자 마침내 북조는 앗수르에 망하고 남조는 바벨론에 망해서 지구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인 조상들의 율법 행함에 대한 열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초림 당시에도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 나라를 잃어버린 상태로 겨우 연명하며 살았고 지금 바울의 로마서 집필을 하는 때에도 역시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하나님의 사랑이 녹아 있는 복음으로 돌아서지 않고 여전히 율법 행함에 가치를 둔 어둠에 갇힌 어리석은 율법 신앙을 꼬집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그 율법을 가진 것이 무슨 커다란 벼슬이라도 차지한 자처럼 행세를 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자신들이 뭔가 뛰어난 자질이나 자격이 있는 것처럼 우월주의에 빠져 으스대고 자랑하며 율법을 받지 않은 이방인을 무시하고 개나 돼지 취급을 했습니다.
게다가 똑같은 유대인끼리도 율법을 잘 못 지키는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고 무시하기는 마찬가지였지요. 애당초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자들을 어린양의 피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세워진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유대교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는 상실되고 종교지도자들과 기득권자들을 중심으로 율법 행함에 대한 열심이 좋은 신앙으로 여기는 종교로 변질된 것입니다.
방금 읽은 19절~20절을 보면 가관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그렇게 높이고 뻐기며 살았다는 폭로입니다. 한마디로 자신들을 어둠에 갇힌 백성들을 인도하는 자칭 뛰어난 선생이요 스승이라고 여겼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바울이 21절 이하에서 신랄하게 비꼽니다. 네가 그렇게 훌륭한 선생이냐? 그런데 너도 왜 같은 죄를 짓고 있지? 적어도 선생이면 네가 말한 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어? 라는 지적이지요.
<롬2:21~23> 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22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도적질을 말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너 자신도 도적질을 하느냐고 바울이 핀잔을 주네요. 그렇다면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정말 도적질을 했을까요? 지난주에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그들이 얼마나 경건하게 살려고 몸부림 친 자들인데 도적질을 합니까? 절대 아니지요. 문제는 십계명의 모든 조항들은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다 영적인 비유들이지요.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런 영적인 뜻을 몰라서 문자적으로 가르치다보니 도덕 선생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도둑질(도적질)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 말씀을 훔친 것을 말합니다.
<렘23:30~31> 30 여호와의 말씀이라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둑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3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여호와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아니라 스스로 꿈을 꾼 것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며 전하는 자들에게 내 말을 도둑질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말씀의 숨은 뜻을 전하는 게 아니라 문자대로 전하거나 사람의 소견대로 덧붙여서 전하면 다른 뜻이 되어 구원이 아니라 망하는 길로 안내하는 꼴이 되니 이것이 도적질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봉헌물에 대한 도적질입니다.
말1:7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이 제사장들을 꾸짖는 내용이 열거됩니다. ‘너희가 내 상에 더러운 떡을 드리고도 언제 우리가 주의 상을 더럽혔냐고 잘도 반문하는데 보라, 너희가 끌고 온 것들은 모두 눈먼 것, 저는 것, 병든 것이 아니냐? 이런 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리면 그들이 받겠느냐?’ 질타를 하십니다.
이런 말도 다 영적인 비유들입니다. 유대인들은 번제 화목제 속죄죄 등의 제사에 쓰여질 우양을 좋은 것만 골라서 드렸지만 그것들이 모두 몹쓸 것이라고 하신 이유는 제사의 의미는 실종되고 맹목적이고 습관적인 제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즉 자신의 죄를 대신해서 흠 없는 짐승을 끌고 와서 제사를 드릴 때에 자신의 죄 때문에 아무 연고도 없는 저 짐승이 대신 피 흘리는 것에 대해 미안하고 애통해 하는 심령으로 잡아야 하는데 매너리즘에 빠져 죄의식이 없이 드렸다는 뜻입니다.
즉 짐승의 상태가 눈멀고, 절룩거리고, 병들었다는 말은 자신의 죄에 대한 통절한 회개가 없이 그냥 뻣뻣한 마음으로 ‘나 죄졌네, 할 수 없지 아깝지만 양 하나 바쳐야지’라는 식으로 제사를 드리는 영혼 없는 습관적 태도를 병든 짐승의 모습으로 비유해서 말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제사를 드리는 것을 더 이상 못 참겠다면 누가 저 성전 문을 좀 닫아버리라고 분노하십니다(말1:10).
도적질의 세 번째 의미는 십일조를 잘못 알고 드린 것을 뜻합니다.
<말3:8~10>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 했다고 하십니다. 헌물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제사에 드리는 우양의 짐승이지요. 흠 없는 짐승은 모두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IX)를 상징합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이지요. 제가 여러 번 반복해서 십일조를 설명합니다만 결론부터 말하면 십일조는 예수님입니다.
최초의 십일조를 들어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창14장을 보면 조카 롯과 그의 식구들이 그돌라오멜 연합군에 의해 잡혀 가지요. 소돔과 고모라의 5개 나라 연합군을 격파한 아주 강력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고작 집에서 일하던 목동들 318명을 데리고 뒤쫓아가서 롯의 식솔들을 구해오다가 살렘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그러자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네가 승리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라는 말을 듣게 되지요. 그때서야 아브라함이 승리의 이유를 비로소 알고 감사의 표시로 십일조를 드립니다. 짧은 내용이지만 여기에 십자가 복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새 언약을 상징하지요.
그리고 소돔성에 살던 롯과 그의 식구들은 바로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게 간음이라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세상을 탐하고 돋보고 소유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살아가는 자들이지요. 즉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죄의 미혹에 실패를 거듭하며 사는 우리들입니다. 마귀의 세력에 잡혀 양다리 걸쳐 사는 한심한 자들이지요.
그런 롯과 그의 식속들을 아브라함이 구원하여 온 것은, 구원 받을 아무 자격도 능력도 없는 자들을 예수님이 조건 없이 구원하신 것을 말합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은 바로 IX의 예표적 인물입니다. 그돌라오멜 연합군에 맞서 싸워 승리한 것처럼 로마라는 세상 세력과 유대교의 율법 종교체계라는 강한 세력들과 홀로 싸워 이기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함축해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때 롯을 구원한 아브라함이 승리에 대한 감사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는데 무엇을 드렸을까요? 노략물 중에 좋은 것으로 드렸답니다. 즉 전리품 중의 좋은 것이란 마귀의 손에서 구원한 택한 백성의 영혼을 드린 것이지 물질을 드린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것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것만 받으시지요. 잃어버린 당신의 백성을 다시 찾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란 하나님 입장에서는 주님의 피 값으로 다시 찾은 거듭난 우리 영혼을 상징하고, 우리의 입장에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십자가 피(복음)를 말합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곧 우리의 십일조입니다. 이것을 마23:23절에서 모든 율법과 십일조는 하나님의 의와 인과 신이라고 해석을 해 줍니다. 의(IX)와 인(사랑, 긍휼)과 신(믿음)을 줄이면 곧 IX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를 모르고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허접하게 성경을 문자대로 가르치면 종교인으로 양성하게 되니 모두 멸망에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영혼을 훔쳐서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악용하는 이것이 도적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다시 본문 로마서 2장22절로 갑니다.
‘22절~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간음과 우상 숭배와 신전 물건을 훔친다는 내용인데 결국은 하나를 말합니다. 간음이 곧 우상숭배이고 그것이 신전물건을 훔치는 것이라는 뜻이지요. 약4:4절을 보면 세상을 사랑하는 게 간음이라고 합니다. 호세아서도 음녀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지만 다른 남자를 찾아 계속 집을 떠나는 음녀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다시 데려와 살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그러하다는 비유이지요.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을 남편으로 믿고 의지하여 살아야 하거늘 세상의 부요와 성공출세를 부러워하는 것이 곧 간음입니다. 문제는 말씀을 맡은 교회의 인도자들이 그런 땅의 것, 세상 것을 탐하지 말고 위엣 것을 소망하며 살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거꾸로 가르친다는 것이지요. 소위 번영신학의 고지론 입니다.
그들의 주장은, 믿는 자들이 열심히 힘쓰고 노력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만사에 형통해서 성공출세를 한다면 그것 자체가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리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라고 호도합니다. 완전한 거짓말이지요.
지금 인도자들이 어떤 죄를 짓고 있나요? 간음을 조장하는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악한 죄인지 모른다는 겁니다. 사단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데 정작 자신은 거룩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여기고 있지요. 이런 경우가 여자가 여자를 가르친다는 말이고, 아직 씨가 없는 어린 아이가 교회 강대상을 차지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요.
<사3:12>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이 세상 복이면 그 모든 섬김이 우상숭배가 됩니다. 다른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것이 결국 이 세상 복이고 그들의 신을 섬기는 이유 역시 그것들을 받기 위함이잖아요. 그들처럼 교회에서 그들이 받드는 신의 이름만 하나님으로 부를 뿐이지 내용이 이 세상 복에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 숭배이고 간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22절 마지막에 교회 인도자인 너희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한다고 폭로합니다. 성전에 크고 작은 많은 그릇과 기구와 도구들이 있습니다. 번제단, 물두멍, 떡상과 등대, 금향단, 언약궤 그리고 번제에 쓰이는 크고 작은 삽과 받침대, 빗자루, 땔감용 나무, 부짓갱이 등등이 있는데 다 IX와 연합된 성도를 상징하는 물건들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과연 이 같은 물건을 훔쳤다는 말이 아니라, 아까 십일조를 도적질 했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내 백성의 영혼을 율법 종교에 몰아 넣어 깊은 어둠에 빠뜨려서 그 영혼들을 죽이고 있다는 말이지요. 눅11:52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서도 자기는 안 들어가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고 하십니다(마23장: 배나 지옥자식 만듦)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여 영혼의 구원을 받고자 성전을 찾고 교회를 찾는 자들에게 진리의 복음을 전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하지 못하고 율법 행함을 잘하면 구원도 받고 복도 받는다고 거짓을 말한다면 말하는 자도 망하고 듣는 자도 망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교회가 이처럼 세속화 되어 변질된 가장 큰 원인 제공자가 목사들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 간음을 조장하고 우상 숭배를 조장하는 곳이 되었는데 이를 누가 알겠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지적처럼 자칭 하나님의 종이라는 작자들의 농간 때문에 교계가 음풍으로 가득합니다.
<사42:18~19/ 22> 18 너희 귀머거리들아 들으라 너희 소경들아 밝히 보라. 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 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 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소경이겠느냐 22 이 백성이 도적맞으며 탈취를 당하며 다 굴속에 잡히며 옥에 갇히도다 노략을 당하되 구할 자가 없고 탈취를 당하되 도로 주라 할 자가 없도다
그러니까 롬2:22절에서 누구에게 도적맞고 탈취를 당하는 걸까요? 가장 믿어야 할 자기들의 선생들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사기 당하는 거지요. 세상에서의 물질적 손실을 당하면 그래도 견디겠지만 영혼이 도적맞으면 치명적이지요. 지옥의 영벌로 떨어져 다시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하잖아요. 누구에게 이를 갈까요? 속임 수를 쓴 거짓 선생, 거짓 선지자들이지요.
다시 롬2장 본문으로 갑니다.
<롬2:23>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종교 지도자들이 율법을 어겼다고 하네요. 율법의 중심 사상이 의와 인과 신인데, 즉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신 메시야 IX를 믿는 것이 율법의 본 목적인데, 이런 의도를 모르고 문자대로 율법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곧 율법을 어긴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율법 실천을 자신들의 신앙의 중심으로 삼으면 필경 잘하는 자에게는 칭찬을 하고 못하는 자에게는 저주 받은 자로 치부하여 차별을 하겠지요. 그런 행태가 이미 율법을 어기는 것인데 그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지요. 온 백성을 신앙 경쟁을 시키는 곳이 율법 신앙입니다. 거기가 이미 어둠이고 지옥입니다.
창1장에서 혼돈과 공허와 깊은 흑암의 상태에 있던 자들에게 빛을 주시기 위해 빛이 있으라 하시자 빛이 있기 시작했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거든요. 즉 예수님이 복음이라는 참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첫째 날의 빛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요1장에서 반복하시잖아요. 율법이라는 어둠에 갇혀 있던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참 빛으로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오셨지만 아무도 그 빛을 알아보지 않았지요.
그런데 누가 그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했다?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 그 빛 되신 예수님을 영접했지요. 알고 보면 복음은 이 세상의 정서와 맞지 않기 때문에 영접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하여 모두 감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이 복음이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거지요.
따라서 복음이 그냥 믿어지는 자들은 자기 실력이 아니라 성령의 간섭으로 된 일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믿어지는 것은 기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기적이지요. 기적이요.. ‘아니 75억 인구 중에서 내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니?’ 이게 기적 아닙니까? 복음에 비토를 하지 않고 저절로 믿어지세요? 그럼 대박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가 믿는다는 복음은 누룩이 잔뜩 섞인 다른 복음일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복음에 사람의 의를 섞지 않으면 안 팔이니까 섞어찌개를 만든다니까요. 그래서 어찌하든지 사람의 행함을 조금이라도 끼워 넣기를 해야 진짜로 여겨 잘 팔립니다. 그게 뭘까요? 죄를 원죄와 자범죄로 나눕니다.
그래서 십자가 대속은 원죄만 해결한 것으로, 구원 받기 전의 죄를 예수님이 처리했다고 하면서, 구원 이후의 죄는 인간 내가 죄를 책임져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 이런 고집을 피울까요? 사단의 사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예수를 믿지 말라고 방해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열심히 믿으라고 합니다. 단 은혜 100%짜리 복음을 거부하라고 종용하지요. 그래서 어찌하든지 사람의 의를 가미시키지요. 이렇게 인간의 가능성을 부추기는 것이 사단입니다.
<롬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하나님은 언제 영광을 받으실까요? 예수의 십자가 복음의 의미와 가치와 능력을 깨닫고 감사하고 기뻐할 때에 영광 받으십니다. 복음은 인간 자신의 죄가 드러나서 마땅히 죽어야 할 자임을 아는 자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이 땅의 것에 마음이 그다지 쏠리지 않아요.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대로 비천에 처하면 거기서 아멘, 풍부에 처하게 하면 거기서도 아멘입니다.
그러나 자기 가능성을 가지고 행함에 가치를 둔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게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으로 여기고, 반대로 실패하거나 가난하면 믿음이 안 좋은 자로 비쳐지니까 기를 쓰고 성공출세를 하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이방인의 시각은 어떨까요? 뭐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뭔 욕심이 그리 많아? 우리보다 더 심하네? 그런 비아냥 소리 여기저기서 듣게 되니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게 됩니다.
신앙의 푯대를 이 세상에 두느냐 아니면 하늘에 두느냐에 따라, 그리고 자기 가능성이 있느냐 아니면 자기 부인과 불가능함을 가지냐에 따라 신앙의 기조가 달라집니다. 거기에 따라 좁은 문으로 가는 자와 넓은 문으로 가는 자로 나뉘게 되는 거지요. 이 모든 일도 역시 하나님의 허락하심으로 되는 일이니 구원은 과연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 자격 없는 우리를 이런 복음 안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