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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의 징계도 수준이 돼야 받는다>의 줄거리 :
아들의 잘못이 보이는 한 아버지는 징계합니다. 하늘 아버지의 징계를 받아 보신 적이 있나요? 우리는 죄에 찌든 존재들이고 저주받음 속에 있기에 생각하나 말하나 행동하나 모두가 다 잘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계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받을 수 없다면 하나님과 아버지 아들의 관계를 아예 이어갈 수조차 없습니다. 실제로 생활 현장에서 내게 임하는 하나님의 징계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징계도 수준이 돼야 받는다
(히브리서 12:3~13)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징계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수준이 징계받을 수준에 이르러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잘못이 있기 때문에 징계하는 것이기에 받을 수만 있으면 유익한 일입니다. 징계를 잘 받아들이면 잘못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드렸듯이 여기에는 믿음과 영적인 차원의 수준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권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리시는 징계를 받아보신 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딱히 징계라고 여겨질 만한 일을 당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많이 행하시는 일은 징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과 은혜가 가장 빈번하게 표현되는 방식이 바로 징계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제일 많이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 뒤에 가끔 잘못하는 게 아니라 잘못만 하면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으로 믿어 하나님의 아들 될 자격을 얻었습니다. 과거의 모든 죄악 된 삶을 십자가에서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저주받음 속에 빠져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저주받은 상태에서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잘못이 없어 보이는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동일지라도 내 존재가 저주 속에 빠져있는 상태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판단과 생각과 말과 행동은 저주에 채색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죄에 찌든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아무런 잘못이 없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다 잘못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입장에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고 말과 행동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가장 많이 하시는 일은 징계입니다. 이 징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아들답게 성장하고 개선될 가능성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가장 빈번하게 징계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본문 4절을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는 이야기입니다. 죄는 곧 하나님 앞에서의 잘못입니다. 이 잘못을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자각을 가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은 징계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이 징계가 무엇인지 모르고 징계를 받아누릴 수 없다면 신앙은 올바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주시는 징계의 내용이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고난을 징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고난이란 육체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수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정확한 이해는 아닙니다. 물리적, 환경적으로 육체가 느낄 수 있는 고통만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실패합니다, 건강에 치명적 문제가 생깁니다,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납니다, 자연재해를 통해 어려움을 당합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코로나가 대표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은 것일까요? 우리가 스데반 집사님처럼 극한의 고통을 당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육체의 고난이나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면 스데반 집사님의 죽음은 분명히 징계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7장 55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는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현장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실 리는 없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사도 바울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을 보면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4~2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당한 여러 고난이 자세하게 언급됩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전도하면서 이렇게 다양한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말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징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올바르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신앙은 성장할 수 없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다운 모습이 될 수 없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 아버지와 친하지 못하다는 뜻이며, 하나님을 가지지 못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누리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알고 징계를 받아들일 수 있음은 신앙에 있어서 무척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을 보면 징계에 대한 언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징계로 번역된 헬라어 파이데이아스(παιδείας)는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파이스(παῖς)를 어원으로 합니다. 어린아이를 훈육하여 올바르게 자라게 함을 징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말해 ‘너 그러면 안 돼!’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요즘 자녀를 양육할 때 절대로 ‘안 돼’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말이 아이들의 창의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고 세상의 초등학문이 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라’는 말보다 ‘하지 말라’는 말을 더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너 그러면 안 돼! 또 그럴래? 다시는 그러면 안 돼!’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징계인 꾸지람과 채찍질은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요? 3절을 보면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을 거역하는 인간들은 노아 홍수 때의 인간들과 똑같습니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때문에 쓰레기 인간들을 멸하지 않고 계십니다. 이들 중에서 택한 자들의 마음이 아들 되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거역했음에도 참으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참으심을 언급하며 피곤하여 낙심하지 말 것을 요청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거역을 당할 때 피곤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같은 자들에게 거역당하셨음을 생각하면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나를 거역하심으로 나타납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시간에 우리는 믿음의 경주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2절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였습니다. 100미터 달리기에 출전한 선수의 마음으로 십자가에서부터 보좌 우편까지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서 전력 질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음의 전력 질주란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을 향하여 바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열망하며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경주는 생활 현장 어디에서나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잘못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절 하반절에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의 마음은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해 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세상에 머물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해 바람을 갖게 될 때 잘못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가졌으면 좋겠다,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원수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단 하나의 잘못입니다.
죄에 빠지고 저주에 빠진 인간이 범하는 잘못은 다양해 보이지만 결국 그 내용은 하나입니다. 100미터 달리기에 출전한 선수가 목표를 향해 전력 질주하듯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 예수님을 따라 질주하지 않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해 바람을 갖는 것이 잘못입니다. 자녀가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직장인들은 은퇴한 뒤에 이루어질 삶을 꿈꿉니다. 바로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해 바람을 갖는 일이야말로 모든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유일한 잘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에 대해 거역하십니다.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게 징계하십니다.
어린아이가 밥상 예절을 배우는 모습을 생각해 봅니다. 아무런 예절을 모르던 시절에는 맛있는 음식이 보이면 손을 뻗어서 집어먹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아이의 손을 잡고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쳐줍니다. 아이의 바람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밥상에서뿐만 아닙니다. 아이는 독극물이 있어도 일단 입에 넣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거나 집어먹지 않도록 바람을 차단하고 먹어서는 안 됨을 가르쳐야만 합니다. 또 아이가 젓가락을 콘센트에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러한 바람은 차단되어야만 하고 징계가 주어져야만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는 차단되어야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저주에 빠져있고 죄에 물든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서 좋음을 느끼고자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좋음을 바라지 못함이 곧 저주받은 것입니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소망만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눈에 보이는 것들은 좋게 여겨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이 질주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하여 바람을 갖는 단 하나의 잘못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내리십니다. 그 징계는 무조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대한 바람이 하나도 허용되지 않고 좌절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피곤하여 낙심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낙심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바라는 일이 요만큼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정말 삶이 피곤하고 우울하고 짜증나고 불만이 생기고 화가 나서 죽겠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그렇습니다.
본문을 보면 징계가 ‘꾸지람과 채찍질’이라는 표현을 통해 언급됩니다. 이러한 표현은 내가 세상에 대해 갖는 바람이 잘못된 것이라면 고통이 가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바람 자체의 중단보다는 잘못된 행동에 대한 형벌이 주어지는 것을 징계라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징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편중독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아편 중독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징계는 아편을 못 하게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금단현상에 괴로워하더라도 3일을 버텨내야만 마약을 그만둘 수 있다고 합니다. 금단현상을 겪는 기간이 마약 중독자에게는 가장 괴롭고 지옥 같은 시간입니다. 열이 납니다. 구토를 합니다. 온몸이 떨리고 아픕니다. 환각이 보입니다. 환각 때문에 밀려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이기기 위해서 손톱이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벽을 긁어댄다고 합니다. 이처럼 아편 중독자에게는 아편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최고로 큰 형벌입니다.
우리의 상태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것은 돈 중독에 걸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돈 중독에 걸린 사람에게 내리시는 징계는 다른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닌 돈에 대한 바람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돈 중독인 사람에게는 최고의 징계입니다. 자식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우리 아이가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저렇게 되어야 하는데.’라고 생각이 멈추지 않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자식에 대한 바람을 하나도 이루어 주지 않으십니다. 자식 중독에 걸린 부모를 감옥에 넣고 자녀에 대한 금단현상을 일으키게 만드십니다. 자식이 부모의 바람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니 괴로워서 미칠 지경이 됩니다. 부족할 것 없는 환경을 마련해주는데도 하라는 공부를 하지 않으니 우울하고 화가 납니다. 요즘 콘텐츠 제작들은 유튜브의 클릭 수에 연연하고, TV 프로 제작자는 시청률에 연연합니다. 그런데 클릭 수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시청률도 오르지 않습니다. 모두 저주 속에서 중독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으로만 채워져도 이 세상에 대해 바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이 바람의 대상이라면 저주에 빠진 상태입니다. 바람의 능력, 소원하는 인격적 기능이 저주에 채색되고 저주에 물든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철저하게 봉쇄하시고 세상에서 바라는 것들이 단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지금 내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불만을 갖고 화를 낼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징계로 받아들이고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고 있구나. 이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기 위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목표를 항해 달려가듯이 하늘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달리기 선수가 시합에 앞서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인 것들을 떨어버리듯이 십자가 붙잡고 다 떨어버리고 하늘로 달려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좀 철이 들 때가 됐습니다. 세상에 대해 바람을 가질 때마다 스스로 깨닫고 ‘내가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아야 한다.’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칠전팔기를 강조합니다. 안 되면 되게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칠전팔기는 십자가를 향해 할 수 있는 말이지 결코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한 번 바랐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잘못된 바람이었고 하나님이 막으셨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거역’이라는 표현을 통해 언급하였습니다. 본래 거역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반발입니다. 내가 이 세상을 향해 바랄 때 나는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향하여 생각하고, 판단하고, 무엇인가를 바라고, 바라는 대로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본래 우리는 이 세상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각의 기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의 기능은 위의 것을 찾기 위한 기능이지 땅의 것을 찾기 위한 기능이 아닙니다. 땅의 것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잘못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 대해, 건강에 대해, 일과 사업에 대해, 돈 문제에 대해, 인간관계에 대해, 세상에 대해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잘못입니다. ‘그러면 안 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라는 대로 되지 않게 징계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람이라는 우리의 기능이 하늘을 향하게끔 만드십니다. 세상을 향해서 바란 것이 한 번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징계임을 얼른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향한 바람이 잘못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향한 열망과 소원이 잘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아들이 젓가락을 콘센트에 넣으려 할 때 막을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이 벌리면 좋은 이유는 돈이 아편같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일류대학에 들어가면 좋은 이유는 아편같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좋은 일이라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아편처럼 거짓 좋음을 주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바람은 아편 중독자가 아편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아편 중독자의 아편에 대한 바람은 그야말로 간절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담의 후손인 모든 사람은 이 세상 것들을 간절하게 갖고 싶어 합니다. 중독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독자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징계는 아편과 같은 세상 것들에 대한 바람을 차단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하나님의 징계를 빨리 깨닫기를 바랍니다. 다시 4절을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순교나 박해를 당하더라도 배교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죄와의 싸움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죄와 싸우려면 반드시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피를 흘리면서 죄와 싸울 수 없기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로 죄와 싸울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죄란 눈에 보이는 세상 것들에 대해 소망하는 것과 바라는 것입니다. 큰 바람이든 작은 바람이든 세상을 향하고 있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어떤 분에게 딸이 있는데 마흔이 되도록 시집을 가지 못해 오랫동안 고민이 많다고 합니다. 이분은 딸의 형통이라는 아편을 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딸의 형통이라는 아편을 막고 계신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이 상황에서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딸의 형통을 바라는 것은 아편을 바라는 것이다. 내 마음이 바랄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뿐이다. 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야만 한다.’라고 생각하며 십자가 붙잡고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하고 바라고 열망하는 죄는 저주의 증상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며 저주의 증상을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싸움을 포기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죽음을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 사건을 내 사건을 받아들일 때 죄와 싸울 수 있습니다. 눈곱만한 바람이라도 세상을 향한 것이라면 없애야 합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멀리서 신호등의 파란불이 보이면 빨리 가겠다는 바람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런 사소한 바람조차도 본래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규정 속도로 달리다가 빨간불이 되어서 멈추더라도 아쉬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파란불이 꺼지기 전에 가고야 말리라는 바람이 생겨나는 이유는 습관이기 때문입니다. 맨손으로 반찬을 집어 먹으려고 하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시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좋다고 확신하는 나를 보며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내리기 전에 십자가로 나 스스로를 징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바람을 가지면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 단계로 넘어가면 하나님의 징계가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해 바람이 생길 때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저주의 특성인 죄와 싸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가 목표를 향해 달려가듯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해 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달려가도 괜찮은 이유는 하나님은 생각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와 관련된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없는 경우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털 하나, 몸속에 있는 수 조개의 세포까지도 생각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부분은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계획이 없는 부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바라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에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안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제쳐두고 세상 것을 바라는 것은 아편을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바람이 겉으로 드러나 말과 행동으로 추진되는 단계까지 간다면 하나님께서는 거역하심으로 징계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 바란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버리는 일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대상은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의 거역하심과 징계를 이제는 그만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대신 스스로를 징계하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들들의 모습으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수준이 있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망망대해에서 끝도 없이 허망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가두시고 붙잡으시고 멈추게 하시면서 하늘을 향하도록 이끌어 주시오니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습니다. 우리의 수준이 어디까지 임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징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나의 상태가 얼마나 깊이 죄와 저주에 중독되어 있는지 아는 단계에 이르게 하셔서, 하나님의 징계가 낭비되지 않고 효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