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여기에 인(印)을 붙여준 것은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다.그 말이요. 제법무아, 이 말은 모든 존재에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뜻입니다.이것이 불변의 진리라는 겁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모든 것은 인연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인연소생(因緣所生)이라고 그래요. 인연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영원한 실체라는 것은 없다. 좀 어려운 말이지요.
조금 어려운 이 교리 책자를 보면 ‘고정된 불변하는 실체는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 무아를 ‘딱 정해져서 고정되어 변화하지 않는 알맹이가 존재하는 그런 실체는 없다’라는 것이 제법무아의 해석입니다.
자, 가난뱅이가 있지요. 가난한 사람은 영원히 가난한 것이 아니어요. 영원히 가난할 수가 없는 거요. 또 부자도 영원한 부자가 없는 거요. 부자라고 하는 종자가 있는 것이 아니요.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도 부자가 될 수 있고, 부자는 또 가난해질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것을 재불삼대(財不三代)라고 하지요. 재산이 삼대를 못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또 권력도 명예도 그래요. 그래서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이 있어. 권세는 십년을 못 간다.
또 꽃도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그래요. 아름다운 꽃도 영원히 피어있으면 오직 좋아. 근데 안 그래. 열흘을 갈 수 없어. 이와같이 모든 것은 항상 변하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 남자는 항상 남자인가? 삼세를 두고 볼 때 안 그래요. 전생에 여자가 남자로도 오고, 금생에 남자가 다음 생에 여자로도 가고 얼마든지 그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지은 업에 따라서, 자기가 지은 연에 따라서 달라요. 그래서 ‘항상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하는 것이제법무아의 설명입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경전에는, 참 유명한 경전이 있지요? ⟪사십이장경⟫의 한 구절에 있습니다.
“도를 닦는 자는 항상 자기 몸을 연구해 보아라. 자기 몸뚱이를 연구해 보아라. 육신은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기운, 이 네 가지를 합한 것이다. 이 네 가지가 미구에 흩어질 날이 있으리니, 실상은 ‘나’라는 것이 없고, 이 몸뚱이는 실로 물 위에 거품과 같은 것이니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러한 내용은 여러분들이 제법무아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자, 그런데요. 이 제법무아인 가운데 무아(無我)라는 말이 대단히 깊은 의미 있어요. 소위 대승불교학자들이,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하는 학자들이 무아를 잘못 해석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문제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특히 유식(唯識) 계통의 학자들은 안 그러는데, 중관(中觀) 계통의 대승불교학자들은 다분히 무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佛性)이 있다고 하지요. 그 말 많이 들었을 겁니다. 불성이 있다.
그런데 그 ‘있다’ 까지도 꼬투리 잡아요. 불성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꼬투리를 잡아요. 이와같이 무엇이 있다고 한다거나, 어떤 실체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불교의 명제인 무아설에 배치된다. 그거요. 그러면 저기 바라문교의 아트만 사상과 다를 게 뭐냐? 하고 이렇게 꼬집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상이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는 사상이 있는데, 그 사람들은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여래장이라는 실체를 인정하는 것은 무아설에 어긋나기 때문에 그런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한테 질문을 던집니다. 자,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무아라 하자. 그러면 부처님이 대반열반하시면(부처님 죽음은 대반열반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몸뚱이도 부처님의 정신도 다 진짜가 아니고 무아라서 다 가짜라는 것이 됩니다.
또 근원자리로 되돌아간다고 하면, 부처님이 대반열반하시면 본래의 자리 혹은 적멸 그것과 하나로 계합한다고 하거든요. 자 계합한다고 합시다. 그럼 부처님이 다시 몸 받아 올 때, 그 무엇이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느냐? 그 무엇이? 이렇게 질문하면, 그 사람들은 설명을 못해요.
부처님이 불과를 이루어서 우주가 하나가 되어서 대반열반에 들 때는, 그 공(空)과 그 적멸과 하나가 되어버린다고 할지라도, 다음 세상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오시기도 하거든요. 부처님들이 오십니다. 오실 때는 업이 없으니까 그 태어날 국토와 시대와 부모와 모든 것을 정해서 내려오시거든요(원력수생). 업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한 왕궁으로 오신다고요. 왕족으로 몸 받아오신다고요.
그렇게 오시는데, 중관 계통의 대승불교학자들과 일부 선불교 수행자들도 무아를 이야기할 때,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고 해버리면, 나가 없다고 말하면, 부처님은 불과를 이루셔서 적멸로 돌아가서 계합이 되어버렸으니 다음에 중생제도 하러 오실 적에는 그 무엇이 생각하고 결정하고 판단하고 뜻을 일으켜서 오시냐? 그거요. 그 무엇은 뭐냐? 그거요. 그들의 말대로 한다면 올 수가 없지. 완전 공이 되어버렸으니까. 근데 오시거든요.
그다음, 너희들은 도대체 육도윤회를 인정하는 것이냐. 인정 못 하는 것이냐? 육도윤회를 인정한다면,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육도윤회를 해.
근데 주체를 부정해버리는 너희들 그러면 무엇이 윤회를 하느냐? 그거요. 윤회의 주체를 인정 못한다면, 무엇이 있어서 윤회를 하느냐? 그것이요. 그 기체(基體), 기본이 되는 몸뚱이인 기체까지도 너희들은 부정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중생이 윤회를 하느냐? 그것이요. 그들은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매우 어리석은 사람들이지요.
이와같이 무아설을 잘못 이해하면, 중관 계통의 대승불교 학자들과 일부 선불교 수행자들처럼 계율도 지키지 않고 허무주의에 빠져서 막행막식함으로써 외도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또 그들은 지옥·극락·귀신·영혼까지도 부인하는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승려가 되고, 부처라고 하는 실체가 없는데 불공은 뭣 때문에 드리고, 천도재는 뭣 때문에 하는가? 이건 완전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냐?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가끔 부처님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거나 그들의 코드에 맞지 않는 법문을 하면, ‘저 사람은 불교도가 아니다. 천마에 섭했다. 마경에 빠졌다’고 하는데, 그러면 마(천마) 요것은 실체가 아닌가? 엄연한 실체지요. 도대체 실체가 없다고 부정하는 너희들 천마는 또 무슨 말이냐?
그리고 부처님은 물론, 깨달아서 증한 성자들(큰 스님들)은 참 드물지만, 그분들이 반열반에 들 때, 그분들이 죽으면 반열반이라고 합니다. 그분들도 신문을 보면 ‘적멸과 비로소 이제 계합을 하셨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과연 적멸과 계합해서 무아가 되어 ‘나’가 없어진 것으로 보느냐?
또 아무리 확철대오한 큰스님이라 하더라도 내가 보기에는 억겁의 업장이 완전히 소멸된 것도 아니고, 또 탐·진·치 백팔번뇌가 완전히 없어져버린 것도 아니고, 다생의 습과·기도 완전히 없어지고 소멸되어야 거기가 붓다인데, 그 사람들은 붓다도 아니거든. 그러한 큰스님들이 죽으면 어디로 갔느냐? 그들도 무아가 되어 없어져 버린 것이냐? 그것이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못합니다.
무아라는 것은 없을 무(無), 나 아(我), 즉 내가 없다 그 말이에요.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그거요. 철저히 무아 입장에서 보는 그 학자들 내지 스님들에게 ‘들어봐라’ 혹은 ‘대답해봐라’하고 물었는데, 여러분 내가 없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내가 없다면. 이것은 종교도 아니고, 아무 가치가 없는 거요. 우리는 따를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완전히 나가 없다고 나를 부정해버린다고 하면, 이건 아니요.
우리는 희망도 없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것이요. 또 승려가 될 필요도 없고, 모두가 무고 허무인데 뭣 때문에 승려가 됩니까? 나라고 하는 실체를 완전히(깡그리) 부정해 버린다면, 그건 모순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정의·도덕·용기·미덕·사랑·자비·지혜를 강조할 이유가 없어요. 내가 없다면. 보람도 가치도 주장할 근거가 없어요. 효도도 염불도 모두가 필요 없어. 무엇을 위한 삶입니까? 그처럼 허무적인 무아라면, 머리깎고 수행할 필요가 없어요. 안 그럽니까?
나는 그렇게 보거든요. 나(我)가 없는 건 아닙니다. 무아라고 해서 나가 없는 건 아닙니다. 유식학파에서는 아뢰야식(阿羅耶識)을 인정합니다. 잘 본겁니다. 나가 없는거 아니요. 불교 이전에 바라문교, 지금 힌두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합니다. 아트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불교·힌두교(바라문교)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자이나교가 있습니다. 자이나교도 사상적으로는 대단히 깊습니다. 완전 무소유를 주장하고, 또 거리를 활보할 때도 완전히 나체로 다니는 구도승이 있습니다. 그 자이나교입니다. 이 자이나교에서도 윤회의 주체를 인정을 했습니다.
영혼에 업이 부착된 일종의 신체, 곧 업신(業身)이 있어서 새로운 삶을 이렇게 자꾸 이어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정확한 진리는 아니지만, 일리 있는 말인 거요. 근데 대승불교학자들은 그걸 외도설이라고 합니다. 아니어요. 여기에 일리가 있어요. 이 말은 맞는 거요. 내가 볼 때는 여기다가 조금 더 추가하면 좋겠다 그거요. 한 걸음 더 나갔으면 좋겠다 하는 거요.
지금 힌두교 신자들이 십억이 됩니다. 그 철학은 대단히 오묘합니다. 그 힌두교처럼 포용력이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걸 함부로 깡그리 폄훼한다는 것은 너무한 거요. 자기들 눈도 못 떠놓고. 눈떠보니까 이건 일리가 있어. 이 말은 맞아요.
그러나 불교의 무아. 더 깊은 의미가 있지요. 자, 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어려운 말입니다. 비본질적인 것,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업장·탐욕·습기 등 이런 것들이 더덕더덕 나한테 붙어있어요. 그처럼 업력으로 오염된 나를 부정한겁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한 건 아니어요. 그 오염된 나는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에 찌꺼기를 빼버리라 그거요. 찌거기를 다 빼버리고 남는 이것은 찌꺼기가 빠진 정도에 따라 아라한이요, 보살이요, 붓다입니다.
부처님은 완전히 그 찌꺼기가 다 빠져버린 거요. 저번에도 스님이 이야기했나요? 아라한에서 붓다가 되는 데는 정말 많은 찌꺼기가 씻어져 내려가야 된다고. 스님이 아마 드럼통 이야기를 했을겁니다. 열 드럼도 더 된다고 찌거지가. 검은물, 먹물. 수행하면 그것이 빠져나간다고요.
그래서 그것이 다 빠져나고 다 빠져나가고 하면 청정한 나 자신을 얻습니다. 청정한 그 경계로 들어가면 어떠한 경계를 맞이해도 흔들림이 없어요. 아무리 절세미인이 유혹해도 흔들림이 없는 거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거요. 내가 또 아무리 화가 날 그런 경계를 당해도 화가 안 나는 거요. 이 정도로 청정해져야 거기가 아라한이라고 합니다.
근데 아라한이 생을 바꾸어서 보살이 되고 붓다가 되기 위해서 다시 인신을 받아온다고 했잖아요. 그때에는 그릇을 키워 옵니다. 그래서 두타행을 하고, 보살행을 하고, 잘 수행하면은 그 찌꺼기가 더 빠진다고요. 빠지고 더 빠지고 씻어지고 더 씻어지고 정화되고 더 정화되고 하여 보살 정도에 가면 몸에서 광휘가 난다고요.
이 몸뚱이도 기 공부나 명상을 많이 한 사람들은 큰스님에게서 나가는 것을 좀 볼 겁니다. 보살정도 되면 그 영체가(영혼체가) 빛을 띠고 있습니다. 아주 현란한 빛을 띠고 있고, 그 정도로 청정해지면 또 찌꺼기가 억겁에 또 억겁에 그리하여 나유타겁 동안의 모든 업과 번뇌와 습과 기 등등이 전부 씻어져 내려가 버리면 빛을 발하는 거요.
빛을 발해. 청정한 몸이 아니라 인제 빛을 발하는 거요. 더 나아가면 빛덩어리가 된다고 했잖아요. 그 정도 돼가면 완전히 생사해탈이 되고 자재해 버립니다. 붓다가 되면 대자유를 얻는다는 것, 대열반을 얻는다는 것, 완전히 생사에서 자재한다는 것.
미래제가 다하도록 자기 원에 따라서 언제라도 나고 죽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부처의 경계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왜냐하면 삼신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불과(佛果)를 이루면 이 몸을 화신이라고 합니다. 저기 절대 세계에 보신이 있다고 했거든요. 빛으로 이루어진 빛의 존재인 불신, 이것을 원만보신 또는 보신이라고 했지요? 무량광으로 이루어진 불신을 둔다고 그랬습니다. 스님이 이건 모두(冒頭. 첫머리)에 말씀을 드렸지만, 이건 정말로 깊은 이야기입니다.
그 보신은 능력이 무한합니다. 우주 자체인 빛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주적인 능력을 행사한다고요. 여러분의 몸뚱이는 둘로 나투지 못하잖아요.
그렇지만 저 불신은 동시에 백천만억으로도 나툴 수 있습니다. 신통도 항하사수 신통을 할 수 있어요. 일체에 자재할 수 있어요. 그 붓다의 존재까지 부인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 이런 사람이야 말로 외도인 것입니다.
제법무아 에 대해서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스님이 그 동안에 천도재도 많이 하고, 직접 주관도 하고 했기 때문에 그 사람들한테 이런 말을 던집니다. 그 사람들은 명부(冥府)들어간다는 말을 이해 못합니다. 경전에는 없어요. 중유(中有)라고만 있어요.
가운데 중 있을 유 중유. 중유라는 말은 윤회하는 삶의 가운데 존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은 후 오백년, 천년이 지나가더라도 명부에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칠팔 백년전 노비로 살다가 자살한 총각의 중음(中陰) 시간은 정지가 됩니다.
그러니까 죽을 때 그 모습 그 얼굴 그 생각입니다. 그래서 불러서 대화도 가능해. 너는 어떻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냐? ‘저는 평생 노비로 살았습니다.’라고 말해서 알지요.
여러분, 아마 여러분 가운데 천도재 하신 분들은 여러분 집안에 윗대 무주고혼으로 아직도 명부에 못 들어간 분들을 스님이 불러주었을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그 죽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 쪽, 가령 이 정도는 천도해 주어라. 5명, 7명, 10명 정도는 천도해 주어라. 해서 딱 보여주는데 노비로 살다 자살한 총각을 보여준다고요. 그 자살한 장면을요.
부처님의 능력이 무한하다니까요. 여러분은 상상도 할 수 없다니깐. 근데 부처님 이야기를 하면 외도라고 하고 사이비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무아’라고 들이대는 그들이 알고 보면 외도입니다. 부처님을 능멸하고 부처님의 실존을 믿지않는 그들이 진짜 외도입니다. 그래서 지금 말하는 거요.
한 500년 전에 산에서 나뭇짐을 지고 오다가 쭉 미끄러져서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은 아저씨가 있더라고요. 그대로 그 장면을 부처님이 보여주신단 말이오. 총천연색으로. 그러면 받아쓰는 거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있어. 몇 대 선조인지도 알 수 있고, 당신 몇 살 때 죽었소?
하고 물으면, ‘나는 32살 때 죽었습니다.’ 라고 말을 합니다. 태풍으로 집이 무너져 압사한 일가족 5명, 부모 그리고 애들. 몇백 년 전에 죽어서 지금도 그 중음세계에서 명부에 들지 못해서 배가 고프고 춥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배가 고프고 춥고 이것을 해결하는 것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그 이후는 상상해 보세요.
남편의 매질에 못 이겨 약 먹고 자살한 여자. 그대로 자살한 장면을 보여준단 말이야. 소 발길질에 채여서 죽은 농부. 낚시질하다 실수로 물에 빠져 죽은 50대 남자. 치매로 집 나가 웅덩이에 빠져 죽은 여자 등. 자 경전만 연구해서 학자네 하고 영혼이 없다고 하는데 이거 알 턱이 없지요. 알 수가 없지요.
벼락 맞아 죽은 할아버지, 짚불에 타 죽은 부자(아버지와 아들), 심장마비로 죽은 남자, 무당으로 살다 죽은 50대 여자, 신주단지 모셔놓고 빌며 살다 죽은 할머니, 아기 낳다 난산으로 죽은 25세 여인과 갓 태어난 애, 약 먹고 자살한 아저씨, 정신이상이 되어 자살한 20대 여자, 군에 가서 생매장 당해 죽은 총각. 50년 전에 가설무대에서 노래 부르다 병들어 객사한 남자, 집 나가 떠돌다 목매 자살한 남자, 개가 된 남자, 자, 축생으로도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축생으로 먼저 가는 사람도 있어요. 심장마비로 물속에서 죽은 여자. 간질병으로 결혼 못하고 죽은 여자, 중풍으로 살다 자살한 아주머니, 열병으로 죽은 5살 먹은 동자, 강간당하고 목 졸려 죽은 여자, 길에서 피살당한 남자, 간경화로 죽은 남자, 교통사고로 죽은 아주머니,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자살한 남자, 백혈병 앓다 죽은 남자, 문둥병으로 살다 죽은 여자 등 많은 무주고혼들을 접합니다.
그들을 접해보면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들은 저 세상이 없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여전히 있다는 거요. 그런데 그 무주고혼들은 살았을 때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4번 영체로 사니까.
스님이 영체에 대한 법문은 아직 안 했습니다. 1·2·3·4번 영체가 있다 했습니다. 이것은 바라문교에서 이야기는 아트만이나 또 자이나교에서 이야기하는 그 업신이나 비슷한 개념으로 봐도 좋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의 업신·아트만 사상을 인정해 줍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걸 깡그리 부인해버리고, 무아가 불교인 양, 부처님의 가르침인 양, 무조건 들이댑니다. 무아를 잘못 해석하면 중 될 필요도 없다니까요. 여러분! 그런 무아라면 불교 믿을 필요도 없어. 뭣 때문에 불교 믿고 착하게 살아야 하나요? 적당히 살아야지요.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한다면 말입니다. 여러분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그것이 말이 됩니까?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요 병 때문에, 탐욕·집착 때문에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니, 집착·탐욕 이런 것을 털어버려라 하는 의미에서 무아를 말씀하신 것이요. 실천 수행하라고 방편으로 무아를 말씀한 것이요. 자기의 더러움을 털어 버리라는 의미에서, 나라고 하는 주체까지도 부정해버리라는 무아가 아니라, 나에 대한 집착, 그로 인해 이기적이고 소아적인 것을 털어버리라는 의미에서 무아를 말씀하신 거요. 그래서 무아가 아니고 실제로는 비아(非我)가 맞는거요. 아닐 비, 나 아. 비아가 더 적절해요.
중생들은 탐·진·치가 나의 피와 살이 되어버렸어. 그러한 그것을 부정한 거요. 그러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거기서 모든 탐·진·치 삼독, 교만, 또 의심, 백팔번뇌,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업, 지은 업장, 또 습, 기 이런 것을 전부 닦아서 씻어버리라는 의미에요. 그러니까 붙어있는 그것을 비아(非我)라고 해요. 이것은 ‘참 나’가 아니지. 오염된 영체의 비본질적인 것을 비아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데 그냥 송두리째 무아 해버리면 안 된다 그거지.
그 다음에 이 현상세계의 진리로
세 번째는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합니다. ‘일체개고인(一切皆苦印)’, 이것은 여러분들이 나보다 더 잘 압니다. 모든 것은 괴롭다. 전부 고통이다, 모든것은 괴로움이다. 여러분 세상 살만 합디까? 대부분 ‘아이고 지겹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일체개고라고 그럽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고통이 왜 오는 걸까요? 무상은 무상으로 봐야 하는데, 집착·탐욕을 갖고 보거든. 특히 여성들은 아름다운 얼굴을 백년 천년 유지할 줄 알아. 천년만년 살 줄 알아. 무상을 무상으로 봐야지 그렇게 보면 안되지요. 그래서 고통이 오는 거요. 죽는 것도 고통이고, 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통이요, 또 원수진 사람하고 외나무다리에서 만날 때도 있는데, 이거 고통스러운 거요. 좋은 이야기도 많은데, 오늘은 교리 시간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