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유비무환( 有備無患 )의 달인 전라좌수사
정읍현감으로 있으면서 공석인 태인현의 밀린 서류까지 일사천리로 일을 처리 함으로써 지켜 본 사람들의 지지와 신뢰를 얻었던 충무공은 다음 해 고사리진(함경북도 강계) 첨사로 임명을 받게 된다.
하지만 대간들이 임명을 다 채우지 못 한 수령을 다른 곳으로 보낼 수 없다고 반대를 하는 바람에 취소가 된다.
대간은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언론기관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같은 해 조선 조정은 충무공을 만포진 첨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이유로 대간들이 또 다시 반대를 했다.
당시 조선시대에는 승진이 너무 빠르면 일종의 인사청문회 같은 것이 있어 대간들이 적임자가 임명이 되었는지 집안이나 개인에게 문제가 없는지, 너무 지나친 승진은 아닌지 그런 검정을 해 보아서 한 가지라도 결격사유가 있을 경우 그 승진을 취소하는 예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충무공께서 정읍현감으로 있을 당시 전운이 감돌았고 그래서 선조임금이
절차를 뛰어 넘어도 상관없다. 인재를 추천하라고 한다. 이런 것을 (불차탁용(不次擢用)이라고 하는데,
전운이 감돌고 있으니 순서를 뛰어 넘어 인재를 추천하라는 선조의 명에 따라
서애 류성룡이나 우의정 정언신 두 사람이 똑 같이 충무공을 추천하게 된다.
이 때 역시 대간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선조임금은,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며 임명을 강행했다 . '정말 이때만 해도...'
여기서 하나 상식적인 것을 언급한다면,
전라좌수영은 여수에 있다. 예전에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내려다보면 전라도 해남은 오른쪽 왼쪽은 여수라 전라우수영은 해남이고 전라 좌수영은 여수에 있었다.
똑 같은 맥락으로 경남우수영은 거제고 경상좌수영은 부산인 것이다.
전라좌수영 관할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5관5포가 있었다.
다시 언급을 해 본다면 5관은 순천부,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지금읜 고흥)이고 5포는 방답진, 여도진, 사도진, 발포진, 녹도진을 말한다.
정말 조선이란 나라가 대운이 있어 충무공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2개월 전에 전라좌수사가 되신 것이다.
사실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의 진급은 7단계를 뛰어넘는 인사라 말들이 많았지만 전운이 감돌고 그런 비상시에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이 대책 일 수도 있다는 서애 류성룡의 강력한 건의와 노력으로 가능했던 것 같다.
어릴적 잠깐 같은 동네에서 자랐고, 또 서애 류성룡의 사람 보는 혜안이 남달라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 많은 우여곡절 끝에 전라좌수사로 오신 충무공은 곧바로 전란에 대비한 방비책을 세워 실행에 옮겼다.
조카 이 분이 쓴 '행록'에 보면;
"공이 수영에 계실 때 왜적이 반드시 들어올 것을 알고 본영과 소속 포구에 있는 무기와 기계들을 모조리 보수하고 또 쇠사슬을 만들어 앞바다를 가로 막았다."고 기록 되어있다고 한다.
또 난중일기의 기록을 잠시 인용해 본다.
2월25일
'흐림. 여러 가지 전쟁준비에 결함이 많아 군관과 색리들에게 벌을 주었으며, 첨사는 잡아들이고 교수는 내어보냈다. 방비가 다섯 포구 가운데 가장 못한데도 순찰사가 포상하는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그 죄상을 조사하지 못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역풍이 크게 불어 출항할 수 없어 그대로 머물러 잤다.'
2월26일
'이른 아침에 출항하여 개이도에 이르니, 여도의 배와 방담의 마중하는 배가 나와서 기다렸다. 날이 저물어서야 방담에 이르러 공사례(공사간의 인사)를 마치고서 무기를 점검했다. 장전과 편전은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어 걱정했으나 전투선은 어느 정도 완전해서 기쁘다.'
일기에 보면 2월19일부터 27일까지 휘하 주요 군진5포를 순시했던 일이 상세하게 쓰여 있다.
그리고 좌수영 본영도 전비태세, 군기류 점검 수시로 주변의 성곽 해자 같은 방어시설을 둘러보고 또 활이나 갑옷, 투구, 전통, 환도 같은 군기로 점검도 수시로 하신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 군기류의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을 경우 담당자를 벌주거나 곤장을 때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예만 보더라도 충무공은 사전에 미리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서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발령을 받으시고 전라좌수영에서 거북선을 만들어 대비를 했다는 것만 보아도 이분의 유비무환의 자세는 우리 모두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꼭 기억해야 하고 본 받아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두 번 세 번 다시 생각해도 이런 리더가 조선이란 나라에 있었다는 것이 조선의 축복이고 행운이라고 본다.
충무공이 거북선을 만드는 배경을 보면 일본의 병법은 '등선육박전' 즉 '백병전'이었고 우리나라 군사들은 활을 쏘거나 포를 쏘는 것은 잘 했지만 백병전에는 약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런 심리적인 면을 잘 간파하고 있었던 충무공은 우리군사들의 약점을 보안 할 방법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다가 판옥선에 지붕을 씌우자는 생각을 했다고 하니
이것만 보아도 충무공의 부하사랑과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발령받아 와서 활쏘기 연습을 하는 부분을 일기에 언급하는 예는 수도 없이 많았고, 또 그 외 부하들과 회식을 하면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고 소통하는 장면들을 보면 충무공은 준비된 리더로서 완벽한 장수라고 보여 진다.
유비무환의 달인 전라좌수사가 있었기에 일본의 준비한 전쟁에 그나마 대처를 잘 했고 또 칠년전쟁의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도 각자 자신이 하는 일에 연구하고 늘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 충무공처럼 각자의 일에 보람을 느끼면서 큰 업적을 남기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한번 온 인생 충무공이순신 그분처럼 멋지고 근사하고 훌륭하게 살다가 가기 위해서.
첫댓글 하하하하하하! 드디어 전라죄수사가 되셨군요!
요즘 드라마 <징비록>을 즐겨 봅니다.
이 나라에 서애와 이순신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그리고 세상에 선조 같은 바보 멍충이를 임금으로 받들고 있었으니
왜란은 일어나고 말 것이 분명해보였습니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어야 할텐데 요즘 방산비리를 보면
또 국난이 닥쳐올까 두려워 집니다. 하하하하하하!
네, 선생님. 충무공의 사람됨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았고 류성룡대감이 알았고, 정언신대감이 알았네요. 그리고 400년을 훌쩍 뛰어넘어 남해 촌사람 저도 홀딱 반했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준비하는 자세로...
하는일에 보람을 느끼며...
많이 배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 글을 읽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운선님 덕분에 충무공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저는 감사합니다.
지금의 내자리가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임을 알고,
잘 가고있는지 점검하면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를 뒤돌아볼수 있는 계기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잘읽고 갑니다.
제가 감사하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