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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호텔 창문으로 카스 시내를 조망하고 밖으로 나와 호텔 주변들 둘러 본다. 호텔 정문 옆 건물 벽면에는 카스의 역사를 새긴 부조가 걸려 있고 호텔 정문에는 "不到喀什不算到新疆(카스에 와 보지 않고는 신장에 왔다고 할 수 없다)"라 쓰여져 있어 카스가 신장의 중심도시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행지를 둘러보려면 취향에 맞는 사람들끼리 또는 목적지가 같은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같이 둘러 보게 된다. 카스가 모두 처음이다 보니 지도만으로 찾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아 가능하면 여럿이 같이 간다. 카스도 오랜 역사를 가진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라 역사적 유물들이 많이 있어야 하지만 수많은 왕조들이 이곳을 거쳐가 남아있는 유물이 많지 않아 관광객들이 가 볼 곳이 그리 많지는 않다. 이곳에서 제일 크다는 시장(바자르), 중국 청나라의 후궁이었던 향비가 묻혀 있다는 아바크 호자의 가족묘인 향비 묘와 이곳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이드 카 모스크 그리고 올드 시티 정도다. 카스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머물지만 첫날은 저녁 때 도착하고 3일째는 키르기스스탄으로 아침 일찍 떠나야 해 실질적으로 카스를 둘러 볼 수 있는 시간은 하루 남짓 밖에 안된다. 그래서 우선 순위를 정해 카스를 둘러 봐야 해 선배 부부와 협의해 우선 향비 묘를 보고 이드카 모스크, 카스고성 순으로 보기로 했다.
호텔에서 얻은 지도를 가지고 선배부부와 3명이 택시를 타고 향비묘로 간다. 향비원은 카스시에서 동북쪽으로 5km 떨어진 하오한촌(浩罕村)으로 향비묘 바로 옆은 위구르족 묘지인데 경건하고 엄숙한 묘가 아니라, 입구부터 테마파크 같은 느낌이다. 입간판에 쓰여 있는 글이 인상적이다. 不到喀什 不算到过新疆(카스에 가지 않으면 신장에 왔다고 할 수 없다.) 그만큼 카스가 신장을 대표하는 유명한 지역임을 표현한 것이다.
본명이 마쭈얼인 그녀는 아팍 호자 가문의 5대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아름답고 영리했으며,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 특이한 향기가 나서 새삼 옷에 향내를 피워 정갈히 할 필요가 없다는 소문을 건륭제가 듣고 위구르 출정을 떠나는 원정군 총사령관 조혜(兆惠)에게 그녀를 반드시 데려오라고 명했다. 위구르를 평정한 조혜가 그녀를 데려와 건륭제에게 바치자 건륭제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푹 빠져 향비란 직함을 하사할 정도로 건륭제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빼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지녔던 모양이다. 그러나 자금성에 들어온 그녀는 건륭제를 거들떠보지도 않자 몸이 단 것은 오히려 건륭제였다. 그녀가 궁중음식을 입에 대지 않자 고향 카슈카르에서 나는 재료를 특별히 구해 음식을 만들어줬고, 그녀에게 만은 위구르 전통 복장을 입을 수 있는 특권도 부여했지만, 그것으로도 안 되자 그녀를 위해 위구르 朝服을 챙겨주고, 터키식 욕실인 욕덕전을 지어주기까지 했는데도 향비는 늘 비수를 품고 있다 황제가 가까이 다가오면 칼을 빼들고 자신의 배를 찌를 자세를 취해 어쩌지도 못하게 했다. 이런 태도가 그녀의 명을 재촉했는지, 자금성에 들어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자살했다느니 살해됐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다. 자살 설은 그녀가 이미 정혼한 몸이라 항시 비수를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했다는 데서 나왔다.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걱정이 되어 그녀를 불러다 소원을 묻자“죽는 것뿐”이라고 말해 자살케 했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 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위구르인들의 믿음에 의하면 그녀는 대궐에서 절개를 지키며 살다가 3년만에 죽었고 그녀의 시신을 고향에 묻어주기 위해 다시 3년에 걸쳐 여기까지 운구해 왔다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죽어서 위구르인들의 가슴속에 길이 살아남은 잔다르크가 된 셈이다. 어찌 됐건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정복에 대한 위구르인들의 저항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시신이 묻히지도 않은 카스의 묘지를 굳이‘향비묘’라고 부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족들의 주장은 달라 향비로 전해지는 그녀는 건륭제의 후궁 가운데 하나인 용비(容妃)이며 55세의 나이로 1788년에 죽었고 건륭제의 무덤 부근에 묻혔다는 것이다.
香妃墓는 17세기 카슈가르를 중심으로 타림 분지 내 주요 오아시스 도시들을 지배했던 이슬람교 최고의 성자이자 지도자인 아팍 호자 마자르(阿巴克靍加麻札)와 그의 가족묘지로 약 72기의 묘가 있었으나, 1956년 지진으로 현재는 58개 묘지가 남아있다. 본래는 존경받던 꾸란 스승이자 호자의 아버지가 이슬람종교학교를 세웠던 곳인데, 호자의 아버지가 죽자 이곳에 묻혔고, 그 이후에 5대에 걸쳐 이곳에 묻힘으로서 묘지가 되었다고 한다. 이슬람교를 믿는 위구르인에게는 성지처럼 여겨지고 있다.
입구 앞 거대한 향비석에는 향비원(香妃园)이란 글이 쓰여 있고, 밑에는 다음과 같은 중국식 억지스런 글이 쓰여 있다. "향비석(香妃石)은 천산(天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불선을 탄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마치 소녀가 옆으로 누운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4가지 신비로운 숫자가 오래도록 전해지는데, 첫째는 봉우리가 지면에서 1734m 떨어져 있어 이는 향비가 태어난 1734년과 일치한다. 둘째는 봉우리 정상에서 지면까지 거리가 1788m인데, 이는 향비가 세상을 떠난 1788년과 일치한다. 셋째는 香(향) 자 꼭대기에서 지면까지의 거리가 1670m인데, 이는 건조 시기인 1670년과 일치한다. 넷째는 향비석 통로가 5.4m인데, 향비가 세상을 떠난 해와 태어난 해 사이의 54년과 일치한다. 이와 같은 천지의 섭리가 오직 향비를 위해 이루어진 듯하여, 인연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세상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다 여겨, 이 바위를 ‘향비석(香妃石)’이라 부르게 되었다."
향비원 관광센터에서 입장권(門票)을 산다. 외국인은 1인당 29위안이고, 위구르인은 1~5명은 30위안, 6~10명은 60위안, 11~15명은 80위안이다. 공연까지 보려면 1인당 120위안인데 우린 모두 70세가 넘어 입장료 30위안은 면제받고(여권 제시) 공연관람료 90위안만 내고 티켓을 산다. 재미있는 입장권이다.
잠시 후 직원의 안내로 매표소 뒤편 화장실 옆 통로를 따라 공연장으로 들어간다. 공연장은 무대를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벌써 좌석은 꽉 차고 서서 볼 수 밖에 없다. 관람료가 싼 것도 아닌데 좌석 수에 맞춰 티켓을 판매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연이 시작되자 연주에 맞춰 남녀 위그루족 무용수들이 밝고 활기찬 분위기를 띠며 춤을 추고 건륭제로 보이는 배우가 향비와 함께 무용수들의 춤을 관람한다. 공연의 줄거리는 대략 위그르 족에 마쭈얼이라는 절세미인이 태어났는데 어릴 적부터 각종 춤에도 능하고 미모가 뛰어났으며, 몸에서 신비로운 향이 났다. 이를 듣고 청나라황제 건륭제가 그녀를 황궁으로 부르자 가족과 이별하고 청나라로 간다. 청나라에 도착한 그녀는 건륭제로부터 향비 칭호를 수여받고 총애를 받고 살았다는 이야기를 춤과 음악으로 표현한 뮤지컬이다. 이 공연은 위그루인 입장이 아니라 순전히 중국 입장에서 만든 것이다. 공연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가이드의 신호에 따라 자리를 뜬다. 공연장에서 지켜야할 에티켓 조차 모르는 아직은 덜 성숙한 중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연장 분위기가 썰렁해지는데 무용수들은 늘 있는 일처럼 동요없이 공연을 마무리한다.
<전통 위그루 춤>
공연이 끝나고 남아있던 중국인들을 따라가니 실내공연장이 나온다. 미리 야외공연장을 떠났던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공연장 좌석을 선점하고 있어 우린 또 서서 볼 수 밖에 없다. 이곳의 공연은 전통음악 공연으로 위그루 전통악기를 든 남녀 악사들이 긴 목과 작은 공명통을 가지고 있는 러와프, 위구르 전통 북 돕(Dop), 긴 목을 가진 전통 현악기로 독특한 구슬픈 음색을 지니고 있는 사타르(Satar), 길고 가느다란 목을 가진 현악기로, 다양한 음색을 낼 수 있는 탄부르(Tambur), 바이올린과 비슷한 활로 연주하는 현악기로 주로 감정적인 선율을 표현할 때 쓰이는 가자(Ghijak), 대나무로 만든 전통 피리 나이(Nay) 등의 악기가 합주 또는 단독으로 위그루 전통음악을 연주하며 관객들의 흥을 돋우고 있다. 연주에 맞춰 남녀 위그루족 무용수들이 밝고 축제나 결혼식에서 자주 공연된다는 전통 춤 산암(Sanam), 보다 강한 리듬과 힘찬 움직임이 특징으로, 유목생활과 사냥문화를 반영한 춤 돌란(Dolan), 우아하고 서정적인 춤으로, 손과 팔의 부드러운 동작이 강조되는 룩숨(Luksum) 등의 전통춤을 30여 분에 걸쳐 보여준다. 청춘남녀들의 만남과 사랑 등이 주제인 것 같다. 마지막엔 관객들을 무대로 초청하여 함께 춤을 추며 막을 내린다. 위구르족은 음악과 춤에 매우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는데, 서사시를 노래하는 무캄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예술적 가치가 높으며, 현악기의 선율에 맞춰 화려하고 역동적으로 몸을 움직이는 그들의 전통 무용은 실크로드의 이국적인 정취를 가득 담고 있다.
공연을 보고 측문을 따라 들어서니 비타민나무가 보인다. 봄에 꽃이 피면 온 시내가 이 꽃향기로 뒤덮인다고 한다. '카스가 살만한 것은 비타민나무 꽃이 있기 때문이다' 는 속담(金花銀葉)이 나올 정도로 향기가 좋다고 한다. 향비는 어렸을 때부터 이 꽃과 열매로 목욕하고 품고 잤다고 한다. 민족마다 약간의 다른 냄새가 있는 건 아무래도 자연환경이나 음식이 같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흔히 우리표현에 서양인들은 노린내가 난다고, 한국인은 마늘냄새가 난다고 한다. 위그루 족에게는 양을 먹는 민족이라 흔히 '양 내가 난다' 고 한다. 양 내는 익숙하지 않은 냄새로 처음 맡아보는 사람은 참 역하다. 위그루 족 냄새에 관한 얘기가 있다. 굴속에 숨을 스컹크를 잡기 위해서 중국인, 미국인, 위그루 족이 모였는데 스컹크가 굴속에서 나오지 않으니 잡으러 들어가야 하지만 냄새 때문에 모두 주저하고 있는데 중국인이 나서더니 굴속에 들어간 10분 뒤에 빈손으로 나오며 냄새 때문에 죽겠다고 해 이어 굴속으로 들어간 미국인 20분 만에 튀어나오며 내 평생 이런 독한 냄새는 처음이라고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어 마지막으로 굴속으로 들어간 위그르 족, 30분이 지나자 스컹크가 튀어나오며 한마디 하는데 이건 인간의 냄새가 아니라고 하더란다.
보월루(寶月樓)의 측문으로 들어가 보니 안으로 들어가니, 건륭제와 향비의 숙소를 재현한 곳이었다. 먼저 꽃잎이 수많은 욕조가 눈에 들어왔는데, 저렇게 매일 목욕해서 몸에서 향기가 난 것이 아닐까?
인근에 독특한 구조물이 보인다. 위구르 전통의 목조 기둥을 다단(多段)으로 쌓아올린 모습이었는데, "노루즈 당" 또는 "노루즈 탑" 등으로 불리며, 관광 안내문 등에서는 위구르 전통 축제와 건축미를 알리는 상징적 조형물로 소개되어 있다. 노루즈는 중앙아시아 민족의 전통 새해 명절로, 신장 위구르족 사회에서는 공동체 축제를 정원·광장에 있는 노루즈당 앞에서 축제를 연다. 따라서 이 구조물은 노루즈당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조형물로 보이는데, 천장과 기둥의 장식적 패턴, 뾰족한 꼭대기 장식 등은 새해, 풍요, 번영의 상징과 연관된다고 한다.
작은 마당과 문을 지나 주 건물인 아팍 호자의 묘를 가는 길은 깨끗하다. 작은 연못과 화단을 앞에 두고 서 있는 묘 외관은 아담한 여느 사원의 모습과 다름이 없다. 녹색과 청색 타일장식은 소박하면서도 아름답다. 중국인들이 이슬람사원을 통칭해 청진사라고 부르는 건 맑은 영혼을 일깨우는 곳이란 성소의 의미가 있다. 덧붙여 이슬람사원에는 어디건 청색타일이 장식을 주조를 이룬다는 미학적 관점에서 보면 청진사(靑眞寺)라 불러도 좋을 법 하다는 생각을 한다. 또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녹색타일이 많이 사용되고 있음도 본다. 카슈가르라는 단어의 뜻이 ‘녹색타일의 왕궁’이라 하는데 그 의미가 어쩌면 이것과 연관되어져 있지는 않을까 상상을 해 본다.
아팍 호자 묘당은 인도 아그라의 타지마할을 닮았는데, 1640년 전후 창건되었지만 1948년 지진으로 묘실이 대부분 파괴돼 1956년~1982년 네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수리한 후, 1988년 국가보호문화재로 지정됐다고 한다. 높이 40m의 모자이크 첨탑과 원형 아치 지붕이 궁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건물모퉁이 4개의 뾰족탑이 하늘로 치솟아 신장지역의 화려한 이슬람 건축술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위그르인들의 자존심을 담고 있다고 한다. 타일은 떨어져 나가고 색은 바랬으나, 옛날의 찬란한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묘당은 두 개의 타일 원기둥을 좌우에 거느린 門樓와 문루 좌측의 아담하고 화려한 작은 모스크, 묘당 서쪽에 있는 큰 모스크, 북쪽에 있는 돔형 경전강의당, 묘당의 핵심인 지름 17m의 중앙 돔의 묘실 등 다섯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경전 강의당 왼쪽 모서리엔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한 네모꼴 구멍이 나 있는데, 스타인이 강의당 내부의 물품을 훔쳐가기 위해 몰래 뜯고 들어 온 흔적이라고 한다. 지금은 대충 판자로 막아 놓았는데 스타인 같은 서양인들이 염치없는 도굴꾼 내지 도둑놈이라고 비난받는 이유다.
네 귀퉁이에 타일 원기둥이 서 있는 묘실은 외벽부터 화려하다. 주로 쪽빛 타일로 벽을 모자이크했는데 이 타일은 신장 동쪽 하미(哈密)에서 200만 명의 손을 거쳐 가져 온 타일인데 지금은 그런 타일이 없어 벽이 망가져도 수리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묘당은 1640년경 이 지역의 이슬람지도자 아바 호자가 선친을 위해 지은 것인데, 그의 사후 일가족 5대 72구의 시체가 묻혀 있다고 한다. 희미한 불빛 속에 가까이 갈 수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크기가 제각각인 관들은 대체로 석관으로 비문도 새겨져 있는데 가운데 가장 큰 관이 아바 호자의 관인 것 같다. 무덤은 무슨 보물을 덮어 놓듯이 묘지를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덮어 놓았는데, 먹다만 밥상을 상보를 덮어 놓은 것 같았다. 왜 그런지 귀신들이 사는 집과 같은 느낌이 들어서 몸이 으시시했다.
묘실 오른쪽 노란 꽃다발이 놓여 있는 작은 석관이 향비의 석관으로, 당시 관습대로 어머니 묘 옆에 묻혔다 한다. 향비의 본명은 마쭈얼(馬贞儿, Ma Zhener)이라 전해진다. 향비는 아팍 호자 가문의 5대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아름답고 영리했으며, 특히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 건륭황제의 후궁이 되어 향비(香妃)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후궁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 그녀의 죽음과 관련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하며, 그의 실제 무덤은 청나라 황제들이 묻힌 북경의 동릉인 건륭제 무덤 유릉비원침(裕陵妃園寢)속에 건륭제의 36명의 여인들과 같이 묻혀있다고 한다. 그러나 카슈카르 사람들은 124명이 특별한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북경에서 향비의 시체를 운구한 다음, 호자가문의 묘에 묻어 주었다고 믿고 있으며, 카슈가르 사람들은 요즘에도 죽은 뒤 이 향비 묘 가까이에 묻히는 것을 바란다고 한다. 어찌 됐건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정복에 대한 위구르인들의 저항의식과 맞닿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의 시신이 묻히지도 않은 카스의 묘지를 굳이 ‘향비묘’라고 부르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족들의 주장은 사뭇 다르다. 향비로 전해지는 그녀는 건륭제의 후궁 가운데 하나인 용비(容妃)이며 55세의 나이로 1788년에 죽었고 건륭제의 무덤 부근에 묻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正史)에는 향비가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실존을 증명하는 근거는 이탈리아 출신의 화가·건축가이자 예수회 멤버로서 건륭제를 보좌한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중국명 郎世寧)의 그림 <향비융장상(戎裝像)>이 유일하다. 이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무장한 여인이 그려져 있는데, 그 아래에 <사략>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향비는 위구르의 왕비로서 자색이 뛰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나서 새삼 옷에 향내를 피워 머리를 감고 몸을 깨끗이 할 필요가 없었다.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위구르로 출정을 떠나는 원정군 총사령군 조혜(兆惠)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위구르를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얻어 경사(京師)에 데려와 바쳤다.” 보는 시각에 따라 한 여인의 순애보로 볼 수도 있고 청나라와 위그르족의 대립이나 융화로 볼 수도 있지만, 16세기 이곳이 카슈가르 칸국의 수도로 있다가 청나라가 침입하자 반청운동의 기원지가 되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감안하면 위 이야기들이 가능할 것도 같다.
아팍 호자 묘당 주변은 위그루인들의 묘지로 둘러 쌓여 있는데 한결 같이 그들의 무덤은 메카쪽을 향하고 있다.
아팍 호자의 묘당에서 나오니 왼편 작은 모스크가 눈길을 끈다. 1533년 카스의 통치자가 그의 동생이 죽자 이곳에 매장한 후, 청진사로 개수하여 매주 금요예배를 추가하였다. Friday mosque(Juma Mosque)라고 불린다. 고저사원(高低寺院, Upper and Down Mosque)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원이 돋보이는 이유는 아래쪽(Down)사원의 기둥이 섬세하게 조각된 나무로 되어있으며 마치 불교사원의 단청처럼 아름답고 고색창연한 채색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위쪽(Upper)사원을 기도처로 사용하다가 겨울에는 입구의 작은 아래쪽(Down)사원을 사용한다는 설명이 곁들어져 있다. 나무기둥의 질감과 채색이 고풍스럽다. 건물을 떠받치는 기둥뿐만 아니라 처마 밑을 연결하는 작은 보 하나까지 이슬람식 문양들이 그려져 있는데 동양적인 느낌이 난다. 처마에 달려있는 기다란 물 대롱이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곧 떨어져 내릴 것 같은 분위기다.
모스크에서 나와 원두막 같은 것이 있는 쉼터를 지나니 한쪽 벽에 건륭제 와 향비의 스토리를 묘사한 부조가 길게 펼쳐져 있다. 부조 벽면의 끝자락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香妃景祠 향비의 본명은 마쭈얼(馬贞儿, Ma Zhener)이라 전해진다. 어려서부터 아름답고 영리했으며, 특히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고 해서, 나중에 향비(香妃)라는 이름이 붙었다. 건륭제는 특별히 그녀를 궁궐에 들여 총애하였고,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천산의 요정이라 부르며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향비는 곧 용비(容妃)이다. 그녀는 건륭제의 후궁들 중 가장 전설적 색채를 띤 인물이었다. 26세에 궁중에 들어와 ‘화귀인(和贵人)’으로 봉해졌고, 3년 후에 빈(嬪)으로 승격되었으며, 35세에 다시 비(妃)로 올랐다. 그녀는 자주 건륭제를 따라 북으로는 목란(木兰) 사냥터에 가고, 남으로는 강남을 순행하며 건륭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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