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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주선교기행
2. 제주여행 곽지과물해변
https://brunch.co.kr/@jejutravellab/6
3. 제주성안교회 곽지수양관
http://www.jejuseongahn.org/page/fs06#j
4. 제주 애월 금성마을 고려유적지, 문화재탐방_고영철의 역사교실
현재 금성교회, 1990년 건축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북제주군 애월읍에 위치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금성교회는 이기풍 목사가 제주에 오기 전인 1907년 3월 독립운동을 하다 순교한 조봉호 전도사가 평양에서 신학을 마치고 돌아와 전도한 조봉호, 양석종, 조운길, 이덕련, 이도종 등 8명이 예수를 믿어 양석봉의 집에서 회집예배하였다. 다음해인 1908년 봄 이기풍 목사가 제주지역 선교사로 정식으로 파송받아 (1907년 9월 조직된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노회에서 처음으로 안수받은 7명의 목사 중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제주선교사로 파송) 순회예배를 드리던 첫번째 교회가 되었다. 1923년 12월 금성리 591변지에 초가집 예배당을 짓고 이웃 부락인 곽지, 귀덕, 낙읍, 봉성, 애월까지 전도하다.처음 예배를 드리던 교회는 현재 다른 집터가 되었고 현재 보존되어있는 구교회는 4번째 교회 터로 1923년 세워져 계속 수리를 거듭하며 사용하였다. 초대 교인인 조봉호는 대한민국 독립군을 위한 자금모금등 독립운동하다가 일제에 의해 1920년 4월 28일 옥중 순국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이도종 은 후에 목사가 되어 복음전도 중 4.3 사건 때 폭도들애 의하여 1948년 6월 19일 피살 순교하다 김정권 은 1932년 예수를 믿음으로 주변환경에 온갖 어려운 저치에 있었으나 믿음으로 시련을 이기고 끝까지 주님을 섬기다가 1975년 8월 20일 소천하다. 90년 가까운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신앙인을 배출하였으나 이웃 부락의 교회창립과 이농 들에 따라 교회의 사정이 매우 어려워지고 교회당 마져도 좁고 낡아 복음선교에 어려움이 다다르게 되었다. 이에 김정권 집사의 2남인 김동빈 집사는 모태신앙인으로 소년기를 가족과 함께 금성교회에서 성장하였으며 현재는 미국 뉴욕에 거주하는 가운데도 선친의 유지와 모교회의 부흥과 선교에 새로운 전기를 갖기 위하여 현 위치의 대지매입비와 건축비 전액을 헌금하여 이 성전을 준공하다. 여기에는 본 교회 성도들의 기도와 제주성안교회, 제주노회의 여러 교회들의 도움과 함께 이 성전을 봉헌하게 된것이다. 새 성전의 헌당은 하나님의 섭리요 축복이며 지역사회의 복음화와 봉사에 헌신하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그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금성교회에는 현재 조봉호 전도사의 손자가 생존해있다. 현재의 신축교회는 1994년 부친때부터 교회를 섬겨오던 김동빈 권사(현재 미국 뉴욕 거주)가 고향교회를 위해 기도하던 중 대지 520평과 건축비 약 5억2천만원을 헌금하여 지워졌다. 김동빈 권사는 교회외에 지역 선교를 위해 노인회관도 건축해 주었다. 2008년은 제주 선교 역사로 볼 때 100주년이되는 해이다. 그러나 금성교회가 1907년 3월부터 예배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던것을 볼 때에 제주 선교 역사는 이보다 더 오래 되었다.
조봉호 전도사 (출처-http://sejulblog.blog.me/220193001439)
조봉호는 부유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경신중학교 유학하여 이때 복음을 받아들이고 숭실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로 고향 귀덕에서 쫓겨나 금성리에서 살게 된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다 8명의 성도와 함께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제주도에 입도한 이기풍 목사를 도와 조사(지금의 전도사)로 동역하였다. 조봉호는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자금 모금에 앞장서 1만원을 모금, 송금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쓰고 모진 고문 속에서 1920년 4월 28일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그이 나이 38세였다. 정부에서는 조봉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추서한다.
이도종 목사 (출처-한국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양지))
제주출신 제1호 목사인 이도종목사(李道宗·1891∼1948)는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다 순교하였다.제주읍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도종은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착실히 공부하며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성장했다.그의 나이가 열일곱이던 1907년,제주선교사로 부임한 이기풍목사를 만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접하게 되었다.평양의 폭력배였다가 복음을 받아들인 후 전도자가 된 이기풍목사는 색다른 전도를 하겠다는 결심으로 제주선교를 자원했던 것이다.이기풍목사가 부임한 1907년 당시 제주는 육지와 다른 이방지대였다.풍속과 말도 달랐고 외지인에 대해서는 무조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이 때문에 이기풍목사는 서양종교를 전한다고 몰매를 맞고 너무 굶어 쓰러지기도 하는 등 숱한 고생을 했다.그러나 특유의 뚝심으로 13년을 사역하며 제주 최초의 교회인 성내교회를 비롯해 삼양 내도 금성 등 15곳에 교회를 설립했다.이도종목사는 이기풍목사가 전도한 첫열매이다.이도종목사는 북제주군 애월읍 금성리 출신이다. 금성리 지역에서 이장이었던 이덕연장로의 장남으로 1892년 9월 13일에 태어났다. 제주 최초의 장로로 기록되고 있는 이덕연 장로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제주를 찾은 이기풍목사의 이야기를 듣고 그를 직접 초청해 금성교회를 세우는가 하면, 둘째 아들 이이종(일제강점기 행방불명)을 평안북도 오산중학교로,딸 이자민을 전주 스피아여학교로 보내 학문과 함께 민족교육을 시킬 정도로 식견을 가지고 있던 장로였다. 이덕연 장로는 장남 이도종을 우선 숭실중학교로 보내 학문에 정진 하도록 했다. 그에 앞서 제주시에 있던 제주공립농림학교에서 1년간 학문을 하기도 했다. 숭실중학교 졸업후 잠시 제주에 온 이도종은 2년여간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이당시 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조봉호 전도사의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에 참여하다 옥고를 치렀다는 기록이 짧막하게 있을 뿐 그의 자녀에게도 독립운동 내막을 알리지 않아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한 이도종은 1926년 당시 나이 34세로 신학교를 졸업하고 전라북도 김제지역에서 전도사 활동을 시작한다. 김제 농촌지역에서 전도사 활동을 하다 1928년 김제 신풍리지역에서 김제중앙교회를 설립,목사장립을 받았다. 나이 36세의 일이었다. 이때 가족으로는 김도전사모(1892~1977)와 1녀 4남을 두었다. 목사로 김제중앙교회를 섬기던 이도종목사는 항일에 대한 남다른 견해로 언제나 감시의 대상이었다. 어느날 지역 유지의 결혼식에서 축사를 맡은 이도종목사는 당시 시국과 관련한 연설을 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갔다. 일본 경찰은 이도종목사가 제주출신이라는 점에 그의 시국관련 행동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고 그의 아들 이영복씨(현재 80세)는 증언하고 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이도종목사는 제주행을 결심했다. 1929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곳이 고향이면 어떻고 타향이면 어떠하겠냐 생각하겠지만 이도종목사는 ‘고향 제주의 첫 목회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주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고자 제주에 다시 가자’라고 다짐했다. 아들 이영복씨는 “아버지 이도종목사가 고향으로 가면서 제주 지역 농어촌을 중심으로 활동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러나 제주출신 첫 목회자 이도종목사는 고향을 찾은 이듬해 부터 제주노회에 중심적인 활동을 하며 제주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다. 1930년 노회 서기를 시작으로 노회일을 맡으며 본격적인 전도활동에 들어갔다. 이도종목사의 시무지만 해도 서귀포, 고산, 금성,남원,서귀포제일,용수,협재,삼양,표선,남원,고산,중문교회이고 남원교회는 직접 설립했다. 당시 목회자들의 전도활동이 거의 비슷했지만 이도종목사는 교회 한 곳에서 오랫동안 시무하지 않고 제주지역 구석구석을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맹렬히 펼쳤다. 특히 그는 노회 성경학원장으로 제주지역에서의 종교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직접 성경학원 운영자금을 위해 만주를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남다른 전도열정은 네번의 노회장 역할을 통해 충분히 알수 있다. 더욱이 농어촌 지역 목회활동을 위해 순회시무를 마다하지 않고 열심으로 복음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오직 전도를 위해 헌신한 목회자 였기에 우리는 그를 첫 순교자로 기억한다. 그리고 제주 출신 첫 목회자 였기에 우리는 안타까움을 느끼며 제주 선교의 큰 아픔으로 그의 순교를 기념해야 한다. 이목사는 제주 곳곳을 돌며 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를 개척해 나가는 일을 계속하기 시작했다.당시 일제치하였기에 어려움이 여간 많지 않았다.교회전도가 황국신민이 되게 하는데 지장을 준다며 교묘한 방법으로 예배를 방해했다.그러나 어떤 방법도 이목사의 복음전도 열정을 꺾을 수 없었다.외지에서 선교의 열정을 갖고 제주를 찾는 목회자도 적지 않았으나 주민들이 철저히 배척하는데다 일제의 간섭도 만만치 않아 거의 두손을 들고 돌아가곤 했다.1945년 8·15 해방을 맞았다.이목사는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기독교를 활발히 전파할 수 있게 된 것이 더 기뻤다.그사이 제주도에는 조남수(趙南洙)목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고 있었는데 두사람은 보다 효율적인 전도를 위해 상의를 했다.“조목사님이 제주 남쪽을 맡으시지요.제가 북쪽을 맡겠습니다.같은 곳을 두사람이 다니는 것 보다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거의 없는 교회들을 순회하는 일은 매우 힘들었다.예배를 요청하는 곳을 다니다 보면 항상 밤이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피곤한 육신이었지만 주님이 주시는 용기와 힘으로 하루하루를 이겨나갔다.1948년 4월 3일.한국역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사건이 제주도에서 발발했다.‘4·3제주폭동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민중봉기는 공산무장폭도에 의해 일어났다.정부는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관을 파견했는데 그들은 양민과 폭도를 구분치 못하고 난을 제압함으로 더 큰 사건으로 발전했다. 이럴 때는 조용히 숨어 있거나 선교활동을 제한해야 함에도 이목사는 담대함으로 예배를 드리는 일을 계속했다.예배를 원하는 곳이 있는데 목사가 신변의 위협을 받는다고 그것을 마다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이 사건의 여파가 점점 더 거세어지던 그해 6월의 어느날,이목사는 예전과 다름없이 자전거에 성경과 찬송을 싣고 화순교회 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떠났다.산을 넘게 되어 비탈길을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올라가는 중이었다.갑자기 공산폭도들이 산속에서 나타나 총구를 이목사에게 들이댔다.“손들어.어디 가느냐” “저는 목사인데 화순교회를 찾아가는 중입니다” “음.당신이 양놈들 사상을 전파하는 예수쟁이로구만.당신은 분명 미 제국주의 스파이로군.우리를 따라 오시오” 변명도 소용이 없었다.이목사는 자전거를 내팽개친 채 그들에게 끌려 산 속으로 들어갔다.산 속에 그들이 기거하는 막사가 있었는데 이 때 “이목사님”하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리니 얼마나 맞았는지 얼굴에 마른피가 엉켜붙었고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화순교회 이집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행방불명됐다고 교회에서 걱정했는데 여기에 끌려 와 있었던 것이다.이목사에 대한 취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목사님.뵙고 싶었습니다.예수교가 그렇게 좋다면 공산인민이 이 싸움에서 이기도록 간절히 기도좀 해주시겠습니까”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목사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죄없는 양민을 죽이는 무신론집단의 승리를 위해 기도할 수 없습니다” 조금도 양보의 기색이 없는 이목사를 그들은 다른 10여명과 함께 막사밖 숲 속으로 끌고 갔다.그리고 거의 실신할 정도로 두들겨 팼다.계속 찬송을 부르는 이목사를 크게 파놓은 구덩이에 생매장을 해버렸다. “주여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이목사는 생의 마지막을 기도로 마치며 숨을 거두었다.향년 58세였다.
양석봉(1890-1931)
제주 금성교회 시작 예배를 드린 장소를 제공한 교인(17세 - 결혼함) 으로 1919년 독립만세 사건과 조봉호 조사 군자금 모금 사건으로 인해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하다가 병을 얻어 귀국 후 41세의 일기로 소천하였다.
기독교 성지 순례길의 시발점 금성교회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금성교회는 제주시에서는 18km정도이고. 중문에서는 25km, 서귀포에서는 30km 정도에 위치해있다.
금성교회 옛 예배당(Old Kumseng church)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금성교회의 첫 번째(1907년) 예배처소는 양석복의 집(금성리 534번지)였으며, 두 번째(1912년) 예배처소는 조봉호씨 생가(귀덕리 중동 1292번지)였다.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순교한 조봉호 선생은 청년시절에 다녔다. 4.3 사건 당시 순교한 제주 출신 첫 목사 이도종 목사가 어린 시절에 다니던 교회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 최초의 목사 7명 가운데 한명인 평양출신 이기풍 목사가 제주시 성내교회에서 전도를 위하여 이곳으로 와 조봉호 등과 함께 예배를 드렀다. 세 번째(1915년) 예배처소는 이덕련 장로의 집(이도종 목사 부친 귀덕리 상동 690번지)였으며, 네 번째(1923년) 예배처소는 금성리 591번지에 초가집을 짓고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다. 1930년 초가집 지붕을 함석으로 개량하였으며, 1970년 그 자리에 벽돌로 예배당을 건축한다. 현재의 예배당은 1990년(돌판에는 1970년) 지은 것이다. 예배당 안마당에 있는 사택은 처음에는 목회자가 사용하였지만 나중에는 집 없는 주민을 위해 쓰였다.(돌판에서)
네번째 교회 (출처-http://sejulblog.blog.me/220193001439)
네번째 교회 (출처-http://sejulblog.blog.me/220193001439)
네번째 교회 (출처-http://sejulblog.blog.me/220193001439)
네번째 교회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네번째 교회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구교회 (출처-http://blog.naver.com/dochannom/50019220453)
구교회 내부 모습 (출처-http://blog.naver.com/dochannom/50019220453)
초기 교회 터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초기 교회 터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현재 금성교회, 1990년 건축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현재 금성교회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현재 금성교회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옛 종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옛 사택 (출처-http://dongilelder.tistory.com/174)
제주 지역 기독교 선교역사
제주에 기독교가 전파된 것은 1908년. 1907년 9월 조선야소교장로회 독로회(이하 독로회)가 조직되고, 7명의 한국인목사가 처음 탄생된지 1년만이었다. 독로회는 그해 겨울 평양출신 이기풍목사를 제주선교사로 파송하는데, 그가 도착한 것은 1908년 봄이었다. 당시 제주는 일명 ‘이재수의 난’으로 서양종교에 대한 인식이 좋지않은 때였다. 그는 제주성을 중심으로 금성 한림 모슬포 법환 조천 등지에서 기독교를 전파했다. 초창기 교인들은 대부분 개인 집을 기도처로 삼고 예배를 올렸는데, 그후 예배당은 초가나 창고를 개조한 목조 함석지붕에 돌집 형태였다. 금성교회는 이기풍 목사가 오기전 해인 1907년 독립운동으로 순교한 조봉호 전도사에 의해 복음을 받아드린 양석봉, 이도종씨 외 6명의 성도를 중심으로 첫 예배를 드리므로 시작하였다. 모슬포 교회는 1910년 태동하였고 1913년 대정읍 하모리 988번지 초가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다, 1923년 하모리 1075번지 60여 평의 목조기와 예배당건물(현 모슬포 제일교회)을 지었고, 1959년 5월 현 교회당 옆 하모리 1218번지 애기무덤이 있는 대정면 소유의 공유지에 세번째 교회당을 건립했다. 교회의 분리로 불가피하게 대지 250평 건평 80평 규모의 새 성전을 지었다. 새 교회 목재는 구 교회건물의 일본 자재를 사용했다. 목재가 귀해 인근 모슬포 훈련소 소나무를 베어다 썼고, 발동기로 나무를 재제했다. 교회 건물은 일본 목수의 힘을 빌었다. 당시 근방엔 15평 정도의 건물이 고작이었고, 기둥이 없는 큰 건물을 지어본 경험있는 목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회건물은 현무암 벽체의 석조 슬레이트 지붕 형태로, 교회 앞면에 박공벽(측벽 부분에서 지붕의 형식에 따라 벽체가 삼각형으로 보이는 형태의 벽)에 포치를 두어 출입하고, 측벽부엔 버팀기둥을 두었다. 버팀 기둥은 바람에 견디기 위해 덧붙인 것이었다. 그러나 교회 건물이 완공될 즈음, 그 해 9월 추석 전날 제주에 덮친 사라호 태풍으로 교회는 큰 피해를 입었다. 교회 지붕틀이 주저앉았고, 종각이 파손되어버렸다. 태풍피해를 본 교회는 4개월 뒤인 12월에야 준공됐다. 교회가 이곳에 세워진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 교회 지봉수 원로장로(79)는 김씨 땅이 많아 ‘짐개동산’으로 불렸던 이 교회부지엔 당초 대정중학교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당시 이 교회 조남수 목사는 교회분리로 인한 아픔이 있었지만, 학교가 들어설 경우 대정의 중심지로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교회부지를 결정했다고 한다. 또 주민들이 반대하지 않은데다 공유지였던 점도 한 이유이었다. 주민들은 서쪽방향이 터지면 가난하다고 믿었는데, 바로 마을 서쪽이 교회 부지여서 반발이 없었던 것이다. 바람 세기로 유명한 한경면 고산리 2192번지 구 고산교회당. 제주도내 몇 곳 남지않은 현무암 벽체의 교회건물이다. 이곳은 1916년 인근 용수리 김기평의 전도를 받아 서관옥 추씨산옥 등이 예수를 믿는데서 교회가 태동했다. 첫 기도처는 고산초등교 뒷편 개인집이었다. 교회당이 건립된 것은 그로부터 20여 년 뒤인 1935년이었다. 추씨 할머니가 당시 290원 상당의 부지와 초가 3간을 기증함으로써 이뤄졌다. 고산리 2192번지 구 고산교회당은 이렇게 건립됐다. 추씨 할머니의 기증과 교인들이 힘을 보태 36평 목조 함석지붕의 첫 예배당과 사택 초가 15평이 세워진 것이다. 첫 예배당엔 현무암 기단위에 벽돌로 쌓은 종탑도 건립됐다. 교회 종은 줄을 메달아 쳤는데,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종탑은 건재하다. 두번째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64년 10월이다. 고국현(78) 은퇴장로는 제주성내교회의 모태인 서부교회를 모델로 목수일을 하는 강정교회의 한 장로의 도움으로 지어졌다고 말했다. 교회 건물은 현무암에 모래를 섞어 바른 벽돌건물(41평)이다. 교회 전면은 반듯지만, 벽체는 오각형 육각형 돌을 깨서 박고 시멘트를 쳐 넣었다. 이때 쓴 모래는 고산 수월봉 절벽 10m아래 ‘한장알’에서 교인들이 달구지에 실어온 검은 모래였다. 현무암 벽체는 안쏠림 기법을 썼는데, 바람에 건물이 견디도록 한 것이다. 함석지붕이 부식돼 슬레이트로 지붕을 교체했지만, 40여 년간 고산 교인들의 성소로 쓰였다. 현재 구 교회당 남쪽의 새 교회당은 2002년 부지를 매입하고, 구 교회부지를 개인에게 팔아서 2004년 9월 완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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