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나무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이 마구 가렵다
주민등록번호란을 쓰다가 고개를 든
내가 나이에 당황하고 있을 때,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일정 시대 관공서 건물 옆에서
이승 쪽으로 측광을 강하게 때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내가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렇게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등뒤에서 누군가, 더 늦기 전에
준비하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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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황지우
12월의 저녁 거리는
돌아가는 사람들을
더 빨리 집으로 돌아가게 하고
무릇 가계부는 가산 탕진이다
아내여, 12월이 오면
삶은 지하도에 엎드리고
내민 손처럼
불결하고, 가슴 아프고
신경질나게 한다
희망은 유혹일 뿐
쇼윈도 앞 12월의 나무는
빚더미같이, 비듬같이
바겐세일품 위에 나뭇잎을 털고
청소부는 가로수 밑의 생을 하염없이 쓸고 있다
12월의 거리는 사람들을
빨리 집으로 들여보내고
힘센 차가 고장난 차의 멱살을 잡고
어디론가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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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 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 세상 떠 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에서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공원 뒤편 순대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 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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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친 괘종 시계
황지우
나, 이번 생은 베렸어
다음 세상에선 이렇게 살지 않겠어
이 다음 세상에선 우리 만나지 말자
......
아내가 나가버린 거실
거울 앞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는 사나이가 있다 치자
그는 깨우친 사람이다
삶이란 게 본디, 손만 댔다 하면 중고품이지만
그 닳아빠진 품목들을 베끼고 있는 거울 저쪽에서
낡은 쾌종 시계가 오후 2시가 쳤을 때
그는 깨달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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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나무로부터 봄 나무에로
황지우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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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
황지우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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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황지우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 보면
朝鮮八道,
모든 명령은 초소다
한려수도,內航船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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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
황지우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미아리 점쟁이 집 고갯길에 피었습니다
진달래꽃이 피었습니다
파주 인천 서부전선 능선마다 피었습니다
백목련 꽃이 피었습니다
방배동 부잣집 철책담 위로 피었습니다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상상봉 구름 밑에 피었습니다
라일락꽃이 피었습니다
이화여자대학 후문 뒤에 피었습니다
유채 꽃이 피었습니다
서귀포 앞 남마라도 산록에 피었습니다
안개풀꽃이 피었습니다
망월리 무덤 무덤에 피었습니다
망초 꽃이 피었습니다
동두천 생연리 봉순이네 집 시궁창에 피었습니다
수국꽃이 피었습니다
순천 송광사 명부전(冥府殿) 그늘에 피었습니다
칸나꽃이 피었습니다
수도육군통합병원 화단에 피었습니다
백일홍 꽃이 피었습니다
태백산 탄광 간이역 침목가에 피었습니다
해바라기 꽃이 피었습니다
봉천동 판자촌 공중변소 문짝 앞에 피었습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경북 도경 국기 게양대 바로 아래 피었습니다
그러나,
개마고원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영변 약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은율 광산에 무슨 꽃이 피었는지
마천령산맥에 백두산 천지에
그렇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무-슨-꽃-이-피-었-는-지
무슨 꽃이 피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는 못 보았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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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여러번 살아서 좋겠다
황지우
11월의 나무는, 난감한 사람이
머리를 득득 긁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 이 생(生)이 마구 가렵다
어언 내가 마흔이라는 사실에 당황하고 있을 때,
하늘은 컴퓨터 화면처럼 푸르고
환등기에서 나온 것 같은, 이상하게 밝은 햇살이
왜정 시대의 로마네스크식 관공서 건물 그림자를
가로수가 있는 보도에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11월의 나무는 그 그림자 위에
가려운 자기 생을 털고 있다
내가 어떻게 마흔인가
병원을 나와서도 병명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처럼
나는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11월의 나무는
아직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환자처럼, 추하다
그래도 나무는 여러 번 살아서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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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 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욱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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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기다림
황지우
아직도 저쪽에서는 연락이 없다
내 삶에 이미 와 있었어야 할 어떤 기별
밥상에 앉아 팍팍한 밥알을 씹고 있는 동안에도
내 눈은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간
현대중공업 노동자 아래의 구직난을,
그러나 개가 기다리고 있는 기별은 그런 것은 아니다,
고 속으로 말하고 있는 사이에도
보고 있다
저쪽은 나를 원하고 있지 않음이 분명하다
어쩌다가 삶에 저쪽이 있게 되었는지
수술대에 누워 그이를 보내놓고
그녀가 유리문으로 돌아서서 소리나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을 때도
바로 내 발등 앞에까지 저쪽이 와 있었다
저쪽, 저어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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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맞는 대밭에서
황지우
단식 7일째
도량 뒤편 눈 맞는 대밭에
어이없이 한동안 서 있다
창자 같은 갱도를 뚫고
난 지금 박장을 막 관통한 것이다
눈 맞는 대밭은 딴 세상이 이 세상 같다
눈덩이를 이기지 못한 댓가지 우에
다시 눈이 사각사각 쌓이고 있다
여기가 이 세상의 끝일까
몸을 느끼지 못하겠다
내 죽음에 아무런 판돈을 걸어놓지 않은 이런 순간에
어서 그것이 왔으면 좋겠다
미안하지만, 후련한 죽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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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황지우
원효사 처마 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 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달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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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 가는 아내에게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어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굽을 훔치거나
그대 옷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 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 주었지
그런 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기 힘든, 그러나 속에서는
몇 날 밤을 잠 못 자고 단련시켰던 뜨거운 말:
저도 형과 같이 그 병에 걸리고 싶어요
그대의 그 말은 에탐부톨과 스트렙토마이신을 한알 한알
들어내고 적갈색의 빈 병을 환하게 했었지
아, 그곳은 비어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이었지
너무나 벅차 그 말을 사용할 수조차 없게 하는 그 사랑은
아픔을 낫게 하기보다는, 정신없이,
아픔을 함께 앓고 싶어하는 것임을
한 밤, 약병을 쥐고 울어버린 나는 알았지
그래서, 그래서, 내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된 그대는 차츰
내가 살아갈 미래와 교대되었고
이제는 세월이라고 불러도 될 기간을 우리는 함께 통과했다
살았다는 말이 온갖 경력의 주름을 늘리는 일이듯
세월은 넥타이를 여며주는 그대 손끝에 역력하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아침 머리맡에 떨어진 그대 머리카락을
침 묻힌 손으로 집어내는 일이 아니라
그대와 더불어, 최선을 다해 늙는 일이리라
우리가 그렇게 잘 늙은 다음
힘없는 소리로, 임자, 우리 괜찮았지?
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때나 가서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때나 가서
할 수 있는 말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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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에서
황지우
바람 속에
사람들이......
아이구 이 냄새,
사람들이 살았네
가까이 가보면
마을 앞 흙벽에 붙은
작은
붉은 우체통
마을과 마을 사이
들녘을 바라보면
온갖 목숨이 아깝고
안타깝도록 아름답고
야 이년아, 그런다고
소식 한 장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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等雨量線 1
황지우
1
나는 폭포의 삶을 살았다, 고는 말할 수 없지만
폭포 주위로 날아다니는 물방울처럼 살 수는 없었을까
쏟아지는 힘을 비켜갈 때 방울을 떠 있게 하는 무지개 ;
떠 있을 수만 있다면 空을 붙든 膜이 저리도록 이쁜 것을
나, 나가요, 여자가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아냐, 이 방엔 너의 숨소리가 있어야 해
남자가 한참 뒤에 중얼거린다
2
이력서를 집어넣고 돌아오는 길 위에 잠시 서서
나는, 세상이 나를 안 받아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파트 실평수처럼 늘 초과해 있는 내 삶의 덩어리를
정육점 저울 같은 걸로 잴 수는 없을까
나는 제자리에 그대로 있는데 아이들이 마구 자라
수위가 바로 코밑에까지 올라와 있는 생활
나는 언제나 한계에 있었고
내 자신이 한계이다
어디엔가 나도 모르고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차마 내 앞에선 말하지 않는
불구가 내겐 있었던 거다
커피 숍에 앉아, 기다리게 하는 사람에 지쳐 있을 때
바깥을 보니, 여기가 너무 비좁다
3
여기가 너무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인도에 대해 생각한다
시체를 태우는 갠지스 강 ;
물 위 그림자 큰 새가
피안을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기저해 쓰러져버린 인도 청년에 대해 생각한다
여기가 비좁다고 느껴질 때마다
히말라야 근처에까지 갔다가
산그늘이 잡아당기면 딸려들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여행자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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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를 위한 覺書
황지우
불 속에 피어오르는 푸르른
풀이어 그대 타오르듯
술 처마신 몸과 넋의 제일 가까운
울타리 밑으로 가장 머언
물 소리 들릴락말락
(우리는 어느 溪谷[계곡]에 묻힐까 들릴까)
줄넘기하는 쌍무지개
둘레에 한세상 걸려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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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 대한 반가사유
황지우
해 속의 검은 장수하늘소여
눈먼 것은 성스러운 병이다
활어관 밑바닥에 엎드려 있는 넙치,
짐자전거 지나가는 바깥을 본다, 보일까
어찌하겠는가, 깨달았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었을 때
알지만 나갈 수 없는, 無窮(무궁)의 바깥
저무는 하루, 문 안에서 검은 소가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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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작
황지우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이거
우주 기적 아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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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우체통
황지우
버즘나무 아래
붉은 우체통이
멍하니, 입 벌리고 서 있다
소식이 오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思想이 오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여, 비록 그대가
폐인이 될지라도
그대를 버리지 않겠노라
고 쓴 편지 한 통 없지만,
병원으로 가기 위해
길가에서 안개꽃 한 묶음을 사는데
두 다리가 절단된 사람이
뱃가죽에 타이어 조각을 대고
이쪽으로 기어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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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그친 새벽 산에서
황지우
비 그친 새벽 산에서
나는 아직도 그리운 사람이 있고
산은 또 저만치서 등성이를 웅크린 채
槍 꽃힌 짐승처럼 더운 김을 뿜는다
이제는 그대를 잊으려 하지도 않으리
산을 내려오면
산은 하늘에 두고 온 섬이었다
날기 위해 절벽으로 달려가는 새처럼
내 希望의 한 가운데에는 텅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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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황지우
귀밑머리 허옇도록 放心한 노교수도
시집간다고 찾아온 여제자에게
상실감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하물며,가버린 낙타여
이 모래 바다 가는 길손이란!
어쩌면 이 鹿苑은
굴절되어 바람에 떠밀려 온 신기루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모래밭과 풀밭이 갈리는 境界에 이르러
나는 기를 쓰고 草錄으로 들어가려 하고
낙타는 두발로 브레이크를 밟고 완강히 버티고
결국,어느 華嚴 나무 그늘에서
나는 고삐를 놓아버렸지
기슭에 게으르게 뒹구는 사슴들,
계곡에 내려가지 않고도
물의 찬 혓소리 듣는 법을 알고
목마름이 없으므로
'목마름'이 없는 뜨락
멋모르고 처음 돌아오는 자에게도
돌아왔다고 푸른
큰 나무 우뢰 소리 金剛 옷을 입혀 주는구나
내가 놓아버린 고삐에 있었던 낙타여
내 칼과 한 장의 지도와 經 몇 권 든 쥐배낭
안 그래도 무거운 肉峰에 메고 어느 모랫바람 속에서
방울 소리 딸랑거리고 있느냐
새 길손 만나 왔던 길을
初行처럼 가고 있지 않은지
내 귀밑머리 희어지도록 너를 잊지 못하고
내가 슬퍼하는 것은 그대가 나를 떠났다는 것이지만
내가 후회하는 것은 그대를 끝끝내 끌고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것,
차라리 그대를 내 칼로 베어버리고
그 칼을 저 鹿溪에 씻어줄 걸
씻어줄 걸
☆★☆★☆★☆★☆★☆★☆★☆★☆★☆★☆★☆★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 (群)을 이루며
갈대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쭬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죽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雪景
황지우
날 새고 눈 그쳐 있다
뒤에 두고 온 세상.
온갖 괴로움 마치고
한 장의 수의(壽衣)에 덮여 있다.
때로 죽음이 정화라는 걸
일러주는 눈발
살아서 나는 긴 그림자를
그 우에 짐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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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고요
황지우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밖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렸을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없는 방, 라디오에서 일기 예보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 그림자
그리고 투명하고 추운 하늘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 버스에서 힐끔 보았을 때
백미러에 國道 포플러 가로수의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야산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일 때
흰 영구차가 따뜻한 봄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한없이 나른하고 無窮과 닿아 있다
자살하고 싶은 한 극치를 순간 열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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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에 대한 예배
황지우
학교 뒷산 산책하다, 반성하는 자세로,
눈발 뒤집어쓴 소나무, 그 아래에서
오늘 나는 한 사람을 용서하고
내려왔다. 내가 내 품격을 위해서
너를 포기한 것이 아닌,
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나를 이렇게 휘어지게 할지라도.
제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이 地表 위에서 가장 기품 있는
建木 소나무, 머리의 눈을 털며
잠시 진저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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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씻는다
황지우
하루를 나갔다 오면
하루를 저질렀다는 생각이 든다
내심으로는 내키지 않는 그 자와도
흔쾌하게 악수를 했다
이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될 것들을
스스럼없이 만졌다
義手를 외투 속에 꽂고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코리아나 호텔 앞
나는 共同正犯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비누로 손을 씻는다
비누가 나를 씻는 것인지
내가 비누를 씻는 것인지
미끌미끌하다
☆★☆★☆★☆★☆★☆★☆★☆★☆★☆★☆★☆★
수은등 아래 벚꽃
황지우
사직공원(社稷公園) 비탈길,
벚꽃이 필 때면
나는 아팠다
견디기 위해
도취했다
피안에서 이쪽으로 터져나온 꽃들이
수은등을 받고 있을 때 그 아래에선
어떤 죄악도 아름다워
아무나 붙잡고 입맞추고 싶고
깬 소주병으로 긋고 싶은 봄밤이었다
사춘기 때 수음 직후의 그
죽어버리고 싶은 죄의식처럼,
그 똥덩어리에 뚝뚝 떨어지던 죄처럼
벚꽃이 추악하게, 다 졌을 때
나는 나의 생이 이렇게 될 줄
그때 이미 다 알았다
그때는 그 살의의 빛,
그 죄마저 부럽고 그립다
이젠 나를 떠나라고 말한,
오직 축하해주고 싶은,
늦은 사랑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서
나는 비로소
이번 생을 눈부시게 했던
벚꽃들 사이 수은등을 올려다본다
☆★☆★☆★☆★☆★☆★☆★☆★☆★☆★☆★☆★
아직은 바깥이 있다
황지우
논에 물 넣는 모내기철이
눈에 봄을 가득 채운다
흙바닥에 깔린 크다란 물거울 끝에
늙은 농부님, 발 담그고 서 있는데
붉은 저녁 빛이 斜繕으로 들어가는 마을,
묽은 논물에 立體로 내려와 있다
아,
아직은 저기에 바깥이 있다
저 바깥에 봄이 자운영꽃에 지체하고 있을 때
내
몸이 아직 여기 있어
아직은 요놈의 한세상을 알아본다
보릿대 냉갈 옮기는 담양 들녘을
노릿노릿한 늦은 봄날, 차 몰고 휙 지나간 거지만
☆★☆★☆★☆★☆★☆★☆★☆★☆★☆★☆★☆★
안부 1
황지우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어머님 문부터 열어본다.
어렸을 적에도 눈뜨자마자
엄니 코에 귀를 대보고 안도하곤 했었지만,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침마다 살며시 열어보는 문;
이 조마조마한 문지방에서
사랑은 도대체 어디까지 필사적인가?
당신은 똥싼 옷을 서랍장에 숨겨놓고
자신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는
생을 부끄러워하고 계셨다.
나를 이 세상에 밀어놓은 당신의 밑을
샤워기로 뿌려 씻긴 다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빗겨드리니까
웬 꼬마 계집아이가 콧물 흘리며
얌전하게 보료 위에 앉아 계신다.
그 가벼움에 대해선 우리 말하지 말자.
안부 2
안녕하신지요. 또 한 해 갑니다
일몰의 동작대교 난간에 서서
금빛 강을 널널하게 바라봅니다
서쪽으로 가는 도도한 물은
좀더 이곳에 머물렀다 가고 싶은 듯
한 자락 터키 카펫 같은
스스로 발광하는 수면을
남겨두고 가대요
그 빛, 찡그린 그대 실눈에도
對照해 보았으면, 했습니다
마추픽추로 들어가는 지난번 엽서,
이제야 받았습니다
숨쉬는 것마저 힘든
그 空中國家에 제 생애도
얼마간 걸쳐놓으면 다시
살고 싶은 마음 나겠지요마는
연말연시 피하여 어디 쓸쓸한 곳에 가서
하냥 멍하니, 있고 싶어요
머리 갸우뚱하고 물밑을 내려다보는
게으른 새처럼
의아하게 제 삶을 흘러가게 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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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황지우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줄 수도 없고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 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상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
먼 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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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으로
황지우
이 문으로 들어가면 넓고
이 문을 나오면 좁다
이 문에는 종교성이 있다
풀잎 하나가 풀잎의
전체를 보여 준다
제자리 걸음으로
수십 킬로 먼 곳까지 다녀온다
끼니 때마다 내 밥의
1/3을 비둘기에게 던져 주고
갇혀 있음으로
내 몸이 무장무장 투명해진다
새들이 내 흉곽으로 기어들어와
날개 짓는 소리가 소란하다
내려가고 싶다
유리 같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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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고요
황지우
맑고 쌀쌀한 초봄 흙담벼락에 붙어 햇볕 쬐는데
멀리 동구 바깥으로 수송기 지나가는 소리 들릴 때
한여름 뒤란 감나무 밑 평상에서 낮잠 자고 깨어나
눈부신 햇살 아래 여기가 어딘지 모르게 집은 비어 있고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 건너올 때
아무도 듣지 않는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들릴 때
오래된 관공서 건물이 古宮으로 드리운 늦가을의 짙은 그림자
그리고 사람들이 땅만 보면서 바삐 지나가는 것을
재판 받으러 가는 호송버스에서 힐껏 보았을 때
빽밀러에 國道 포플라 가로수의 먼 소실점이 들어와 있을 때
목탄화 같은 겨울숲이 저만치 눈보라 속에서 사라질 때
오랜만에 올라온 서울, 빈말로라도 집에 가서 자자는 놈도 없고
불 꺼버린 여관 앞을 혼자 서성거릴 때
흰 여구차가 따뜻한 봄 산으로 들어갈 때
그때, 이 세상은 문득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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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
황지우
개가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게 색종이 뿌리듯
가을 금남로 은행잎들이 마구 쏟아지는 걸
넋 놓고 잠시 바라보았더니
뒤에서 빵빵거린다
뒤돌아보며 은행나무를 가르키자
영업용 택시 기사도 은행나무를 가리키며 웃는다
차라리 모르는 얼굴에는 인간의 光背가 있다
집에 도착해서도 프라이드 차창에 붙어 있는
금빛 스티커 오늘은 하느님이 색종이 뿌려 주시는
황금나무 밑을 지나온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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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포스티노
황지우
자전거 밀고 바깥소식 가져와서는 이마를 닦는 너,
이런 허름한 헤르메스 봤나
이 섬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해보라니까는
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답한 너,
내가 그 섬을 떠나 너를 까마득하게 잊어먹었을 때
너는 밤하늘에 마이크를 대고
별을 녹음했지
胎動하는 너의 사랑을 별에게 전하고 싶었던가,
네가 그 섬을 아예 떠나버린 것은
그대가 번호 매긴 이 섬의 아름다운 것들, 맨 끝번호에
그대 아버지의 슬픈 바다가 롱 숏, 롱 테이크되고;
캐스팅 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휘파람 불며
新村驛을 떠난 기차는 문산으로 가고
나도 한 바닷가에 오래오래 서 있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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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스런 사랑
황지우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생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체온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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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아니면 사랑하기 뿐
황지우
내가 먼저 待接받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러나
하루라도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다시 이쪽을 바라보기 위해
나를 對岸으로 데려가려 하는
환장하는 내 바바리 돛폭.
만약 내가 없다면
이 강을 나는 건널 수 있으리.
나를 없애는 방법,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뿐!
사랑하니까
네 앞에서
나는 없다.
작두날 위에 나를 무중력으로 세우는
그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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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하는 새
황지우
새는
자기의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자기가 앉은 가지에
자기가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새는
자기가 앉은자리에
자기의 투영이 없다.
새가 날아간 공기 속에도
새의 동체가 통과한 기척이 없다
과거가 없는 탓일까
새는 냄새라는
자기의 체취도 없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없고
영영 빈 몸으로 빈털터리로 빈 몸뚱아리 하나로
그러나 막강한 風速을 거슬러 갈 줄 안다
生後의 거센 바람 속으로
갈망하며 꿈꾸는 눈으로
바람 속 내일의 숲을 꿰뚫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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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동진(和光同塵)
황지우
이태리에서 돌아온 날, 이제 보는 것을 멀리 하자!
눈알에서 모기들이 날아다닌다. 비비니까는
폼페이 비극시인(悲劇詩人)의 집에 축 늘어져 있던 검은 개가
거실에 들어와 냄새를 맡더니마는, 베란다 쪽으로 나가버린다.
TV도 재미없고 토요일에 대여섯 개씩 빌려오던 비디오도 재미없다.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그건 자꾸 혼자 있고 싶어한다는 점이다.
뜯긴 지붕으로 새어들어오는 빛띠에 떠 있는 먼지.
나는 그걸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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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이 지나갈 것
황지우
아내가 말했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안 어울리는 사람이야
당신이 지독한 뜻을 알기나 해? "
쾌종 시계가 두 번을 쳤을 때
울리는 실내:그는 이 삶이 담긴 연약한 막을 또 느꼈다
2미터만 걸어가면 가스벨브가 있고
3미터만 걸어가면 15층 베란다가 있다
지나가기 전에 흔적을 지울 것
쾌종 시계가 들어가서 아직도 떨고 있는 거울
에 담긴 30여평의 삶 지나치게 고요한 거울
아내에게 말했었다:" 그래,내 삶이 내 맘대로 안 돼"
서가엔 마르크시즘과 관련된 책들이 절반도 넘게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석유 스토브 위 주전자는 김을 푹푹 내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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