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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곡의 한국 현대사가 시를 쓰게 했다 / 이승하
역사에 대한 관심
제가 낸 평론집 중에 <한국문학의 역사의식>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책에는 <6.25전쟁 수행기의 한국시> <4.19혁명을 시인들은 어떻게 이해하였나>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시적 형상화 작업> 같은 논문이 실려 있습니다. 제목에 날짜가 들어가 있습니다. 지금은 앞의 날짜를 때어내고 한국전쟁, 사월혁명,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쓰고 있지만 역사적인 기념일에는 반드시 숫자를 붙여 쓰고 있습니다. 1.4후퇴, 3.1만세운동, 제주도4.3사건, 5.16군사쿠테타, 7.4남북공동성명, 8.15광복, 9.18수복, 10.26사태, 12.12사태----. 그만큼 사건이 많았던 지난 한 세기였습니다.
저는 1960년 4.18일에 태어났습니다. 4.19혁명 바로 전날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때 정복을 입고 출근하는 경찰관으로서 경북 의성군 안계면의 지서주임이었습니다. 서울지구에 근무하고 있었다면 시민과 학생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4.19혁명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되었습니다.
저는 가요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따가울 정도 비애를 느낍니다. 그 가요의 모델이 바로 제 외할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제 외할아버지 박성우님은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떨어졌습니다. 3년 뒤 제2대 국회의원 공고가 나자 주변의 권고로 다시 출마했고 1950년 5월 30일에 시행된 선거에서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한 달이 못 되어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지요. 서울에서 하숙을 하면서 국회에 나가던 외할아버지는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철사줄고 두 손 꽁꽁 묵인 채로 맨발로 절며 절며 미아리고개를 넘어 갔습니다. 제 어머니는 남편의 행방불명에 매일 넋을 놓고 눈물을 흘리는 당신의 어머니와 끼니를 잇기 어려운 여섯 동생을 먹여 살리게 되었습니다. 일제감정기 때 경성여자사범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했다는 제 어머니는 졸지에 소녀가장이 되어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반공포스터를 그려야 하는 6.25사변일이 되면 외할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2005년에야 외할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 지는 알게 되었습니다. 2005년 7월 27일 동아일보 기사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평양시내에 새로 만들어진 납북 및 월북인사 묘역에 안장된 62명의 전체 명단이 한국 측에 처음 공개됐다. 월간지 <민족 21>은 지난해 5월호에 완성되기 전의 이 묘역을 소개한 바 있다. 북한은 20~25일 평양 등에서 열린 남북민족작가대회 기간 중 남측 참가단의 요청에 따라 평양시 용성구역 용국1동에 있는 '재북인사(납북및 월북인사) 묘역'을 공개했다.
이곳에는 소설가 춘원 이광수, 국문학자 위당 정인보, 안재홍 전 민정장관, 현상윤 고려대 초대총장, 김약수 초대 국회부의장, 송호성 전 국방방위대 총사령관, 백상규 전 적십자사 총재, 애욱지사 박열 등 한국전쟁 당시 납북 및 월북 저명인사 62명의 묘가 조성돼 있다. 이 중 제헌의원을 지낸 이는 23명,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는 21명이다.
저의 외할머니는 남편이 1954년 2월 4일에 돌아가신 것도 모르고 20년 동안이나 자식들에게 식탁에서 숟가락을 들 때마다 "아버지 진지 잡수십시오."라고 크게 외치게 했습니다. 밥을 따로 한 그릇 밥상에다 올려놓고선 말입니다.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행방불명이 되지 않았더라면 큰 외삼촌은 서울공대를, 둘째 외삼촌은 서울미대를 졸업했을 것입니다. 제 외갓집에는 분단이 큰 상처를 주었는데 그래도 자식이 전장에 나가 죽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라 해야할까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조회시간에 합창을 했습니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그 이름 맹호부대 용사들아/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학우가 훈장을 학교에 갖고 왔습니다. 이 훈장을 받은 삼촌 자랑을 하더니 나중에 풀이 죽어서 삼촌 얘기를 잘 꺼내지 않았습니다. 크게 다쳐서 돌아와 집에서 술에 취해 화만 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시청에서 틀어주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로 시작되는 새마을 노래를 매일 들으며 중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1975년에 김천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2개월 재학으로 그만두고는 많이 방황했습니다. 1979년에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들어갔지만 심신이 피폐하여 휴학계를 내고는 고향 김천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그곳에서 들었습니다.
1980년부터 대학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봄'이 왔다고 잠시 좋아했지만 연일 데모하는 시국으로 바뀌었습니다. 선배들이 부추켜 데모에 참여했는데 학교에 다니는 것 자체를 힘들어하던 때라 데모대열에서 빠지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 근-현대사에 관한 책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교련교육의 일환으로 군부대에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고 있을 때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광주 현장에는 없었지만 외신을 통해 접한 광주의 참상은 분노를 넘어 이 땅에서의 삶에 절망케 했습니다.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가 뭉크와 함께>는 고문 정국을 다룬 것이었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은 4.19 때 발포경관이었던 아버지와 5.18 때 진압군으로 투입된 공수특전단원 아들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시대가 그런 작품을 쓰게 했습니다.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는 지상이 연옥 내지는 지옥임을 개탄하면서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쓴 시 모음집입니다. 세계사 편집장인 최승호 시인의 권유로 시집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와 <폭력과 광기의 나날>을 세계사에서 내게 되었습니다. 시집 제목을 <정신병동 시화전>으로 하겠다니까 한사코 반대하면서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로 바꿔주었는데 시집 어디에도 '욥'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최승호 시인은 시집 원고를 읽는 내내 욥의 고난을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저는 '폭력'과 '광기'를 평생의 화두로 삼게 되었습니다. 폭력이 없는 세상을, 광기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일을 멈추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우리들의 유토피아>는 우리가 꿈꿔야 할 세상이었고 <폭력과 광기의 나날>을 부정해야 할 세상이었습니다. 두 편의 등단작은 제 평생의 문학적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내 인생의 스승들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스승은 한두 분이 아닙니다. 김천성의중학교 권태을 국어선생님은 3년 내내 글쓰기 지도를 해주셨습니다. 원고지를 철끈으로 묶어 문집을 만들어 시든 뭐든 써 보여드리면 빨간색 만년필로 첨삭지도를 해주셨습니다. 문학에 빠져들수록 성적이 떨어지니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서울법대 법학과에 들어간 형에 비하면 전교 1등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전교 3등에서 계속 추락, 반에서 5등 안에도 못 드니 글쓰기를 그만둘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일장이 있을 때마다 저를 데리고 간 선생님께서 상의를 드렸더니 담임선생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가정방문을 하셨습니다. 문인이 될 자질이 있는 아이이니 성적이 어떻게 나오더라도 꾸지람하지 말고 아이의 기를 살려주라고 부탁을 하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졸업을 앞두고 한 번 더 찾아와서 당부하고 가셨습니다. 고등학교에 가면 입시에 대한 중압감을 느끼지 않도록 그저 책이나 많이 읽게 하라고 부탁하고 가신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2개월 재학으로 퇴학을 당하자 저를 아는 모든 사람이 걱정을 하는데 오직 선생님만은 제 연하장을 받고 다음과 같이 격려 답신을 보내주셨습니다. '지난해는 네 인생에 전기가 마련된 해였다. 절망없는 노력과 예지의 힘이라 믿자. 너는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으로 올려놓을 사람이 될 긍지로 노력해주기 바란다. 새해에는 더욱 겸허한 자세로, 더욱 노력하는 사람으로 열심히 살기 바란다. 승하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백일장에 나가 정원도 몇 번 했지만 중학생 주제에 글을 잘 썼으면 얼마나 잘 썼을까요. 세계문학 운운은 낙심해 있을 제자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배려임을 제가 모를 턱이 없었습니다. 학교에 안 가고 빈둥걸는 저를 분에 넘치는 칭찬으로 격려해 주셨으니, 선생님의 사랑이 눈물겨울 따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그 후 석사-박사 학위를 받고 1982년 국립상주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2005년 2월에 정년퇴임했습니다. <상주한문학> <식산 이만부 문학연구> <낙강범월시> 등을 낸 고전문학자의 길을 걸어가신 선생님의 연세가 어언 여든이 넘었습니다. 건강하시기를 빌고 있을 따름입니다.
대학에 들어가서 만난 스승들의 은혜도 백골난망입니다. 시문학사는 함동선 선생님께 배웠습니다. 석사논문-박사논문 지도교수로서 박사논문이 통과되던 날 아내에게 전화를 해주셨습니다. 그간 아내의 고생을 치하하고 위로하여 제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10년 넘게 한 샐러리맨 생활을 때려치우고 수년째 시간강사 생활을 하면서 논문을 쓰느라 집의 쌀독에 쌀 한 톨 안 남은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아내가 어디서 돈을 꾸어 와 생활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김은자 선생님이 처음 전임으로 강단에 서신 것이 중앙대 문창과였습니다. 시론 과목을 가르쳤는데, 김은자 선생님을 통해 '현대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서정주 선생님을 생각하면 지금도 애증이 마음속에서 교차됩니다. 시집 <취하면 광대가 되는 법이지>를 내면서 해설을 싣지 않고 서정주 선생님과의 인연을 아주 상세하게 기술했습니다.
구상 선생님은 저의 스승이자 대부입니다. 6개월 동안 교리공부를 해 영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의도로 전화를 드렸더니 얼마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불편하지만 그날 꼭 가겠노라고 하셨습니다. 1985년 12월 7일에 여의도에서 흑석동 명수대성당까지 택시를 타고 오셨습니다. 그날 선물로 수상록 <나사렛 예수>와 천주교 경전 <준주성범>을 주셨습니다. 예수의 생애를 성경에 입각해 풀어낸 <나사렛 예수>를 여러 차례 읽은 덕분에 올해 시집 <예수-폭력>을 낼 수 있었습니다. 구약도 그렇지만 신약성경의 내용은 한 명 예수를 향한 집단의 폭력으로 귀결됩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인류의 구원으로 연결되는 아이러니를 탐색해 보았습니다.
<준주성범>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네가 무슨 기술이 있고 무슨 지식이 있다고자랑하지 말 것이며, 차라리 얻는 지식에 대하여 두려워하라.' '네게 무슨 선한 것이 있다면 남들에게는 이보다 더 선한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여 겸손한 마음을 보존하도록 하여라.' 이 책을 보면서 저는 제 자신을 낮추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2007년 이후 세상의 그 어떤 구설에도 무저항으로 일관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책입니다.
구상 선생님은 자신의 문학세계와 삶의 발자취를 토로하는 인터뷰를 하게 되었을 때, 꼭 저를 인터뷰어로 지목했습니다. <현대시> <라쁠륨> <국민일보>의 요청으로 사진기자를 대동하고 여의도 관수재를 방문해 평소에 잘 몰랐던 스승의 문학세계와 회고담을 경청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심이 흔들릴 때면 관수재로 하와이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대부님은 떨리는 글씨체로 답장을 보내주셨습니다. "자네의 병약도 파란도 그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임을 깨닫고 정녕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함께 지는 용기와 인내와 사랑으로 나아가세. 그때 비로소 신령한 변화를 그 모두에게서 맛볼 것이네."
영결미사 때 스승의 약력 발표를 하는 영광이 제게 주어졌습니다. 사흘 꼬박 영안실을 지켰습니다. 1987년에 웅진출판사 위인전기 시리즈의 하나로 <김대건>을 냈고 2017년에 평전 <최초의 신부 김대건>을 냈습니다. 신앙심이 약해질 때마다 이런 책을 쓰면서 마음을 다잡곤 했습니다.
석사 시절에 숙명여대에 가서 강의를 두 학기 들은 김주연 선생님도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생명에서 물건으로>란 시집을 문학과 지성사에서 낼 수 있게 해주셨고 해설도 써주셨습니다. 비평가의 철학은 사회에 대한 올바른 비판의식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관심의 조화에 있다고 말씀하셔서 <한국 현대시 비판>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욕망의 이데아>를 낼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 신상운 선생님은 제가 소설을 쓸 수 있도록 인도했습니다. 작가란 그 시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고서 사회와 정치의 난맥상을 짚어내지 않으면 글 쓸 자격이 없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가 쓴 소설을 보고 "앞으로 소설 쓰지 마!"라고 일갈하셔서 더더욱 펜을 갈고 다듬었습니다. 신춘문예 소설 당선 소식을 알려드리자 시큰둥하게 반응하실 줄 알았는데 크게 기뻐해 주셔서 어리둥절했습니다. 저는 20대에서 30대에 걸쳐 10년 반 직장 생활을 했습니다. 쌍용 시사편찬실에 7년 반 있었고 문예출판사, 금강기획, 편집회사 사람들에서 1년씩 근무했습니다. 그래서 초기시에는 샐러리맨의 애환을 다룬 시가 꽤 됩니다.
이상과 실천의 갈피에서
제가 낸 시집 중 <감사와 처벌의 나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2016년에 낸 이 시집의 앞 절반은 교도소와 구치소와 소년원 방문기입니다. 뒤의 절반은 정싱병원과 요양병원 방문기입니다.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거의 전부 구체적인 제 체험담입니다.
2008년인가, 처음 안양교도소에 시창작 강의를 하러 간 계기는 중앙대학교 문예창작전문가과정을 다닌 두 제자 허전과 손옥자 시인의 요청에 의해서였습니다. 법무부 교정 프로젝트를 신청해 선정되었다, 교도소에 시창작 강의를 몇 개월 하러 가게 되었는데 중간에 한두 번 특강을 해줄 수 있냐고 요청해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소설 쓸조재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흔쾌히 응했습니다. 안양교도소는 제가 면회 장면이 소설에 들어가기 때문에 일부러 한 번 찾아간 적도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저와 종종 춘천교도소, 춘천 소년원(신촌정보통신학교), 육군 모 부대 등을 방문했습니다. 가수 이남이와도 같이 여러 번 교도소를 방문하였고, 이남이 씨 작고 이후에는 따님 이단비 씨와도 여러 번 교도소에 같이 갔습니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에서 석사를 받은 후 평택 대학교 재활 상담학과에서 박사를 받은 서경숙 시인과의 인연도 저를 교도소로 이끌었습니다.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여러곳 교도소의 소장과 안면을 튼 서 시인은 이전한 서울남부교도소와 구치소, 안양교도소, 의왕소년원(고봉중고등학교) 등에 가서 시창작 강좌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곳에 드나들면서 만난 수인들과의 사연은 하도 많아서 나중에 소설로 써도 수십 편이 나올 것입니다. 강좌가 끝난 뒤에 그들로부터 받는 편지가 수십 통, 제가 말주변은 없지만 진심이 통했구나 하는 생각은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무기수와의 펜팔은 5년이나 지속했는데 "시가 퇴보하고 있습니다."라는 저의 호된 꾸지람에 낙담하여 편지를 보내오지 않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달래는 편지를 보냈는데 회신이 없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을 '밖'에 있는 사람처럼 대했으니 제가 잘못한 것이었습니다.
저의 이런 활동을 법무부가 주시했는지 사회복귀과라는 곳에서 2012년에 연락이 왔습니다. 재소자들이 쓴 글을 발표하는 <새길>이라는 문예지가 있는데, 테마수필 심사를 해달라고 연락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때 이후 법무부 사회복귀과에서는 3개월에 한 번씩 전국 교도소와 구치소에 방송을 해 모은 테마수필 100여 편을 제게 보내주었고, 그중 20여 편을 골라 심사평을 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아, 정말 온갖 사연을 다 접했습니다. 3개월마다 며칠은 식탁에서 장탄식을 하다가 숟가락을 내려놓곤 합니다. 심사평이라는 것은 작품의 질적 함량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개과천선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당부도 하고 앞으로는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여 살아가라고 부탁도 합니다. 재작년부터 '용서의 글'이란 코너가 신설되어 읽고 써야 할 글의 양이 배로 늘었지만 사명감을 갖고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시사평 두 개만 소개해 드릴까요?
인간의 삶은 1회적인데 우리는 무병장수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루가 가면 하루가 준 것이겠지요. 즉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는데 많은 사람이 나태하고 방탕하게 삽니다.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남이 노력해 이룩한 것을 교묘하게 빼앗기도 합니 다. 천주교 교리를 공부해 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정해 보이겠다는 굳은 결심 하에 나간 교리반 공부. 1년 만에 세례를 받은 과정은 코미디 같지만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텐, 나인, 에잇---- 에라잇, 멋지게 살아봅시다.
우리 속담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것이 있습니다. 투자정보를 제공하여 얻어낸 신뢰를 바탕으로 억 단위의 가상화폐를
편취했으니 사상누각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꿈이 큰 것은 좋지만 그것이 허황되다면 버려야 하는데 우리 인간은 나쁜 꿈에 매
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상화폐시장이 그대에게 꿈을 심어주었는데 그만 악몽이 돼버렸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땀으로 번
것이 아니면 그 재화를 멀리 하십시오. 세상의 이치는 땀의 가치만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그대를 따뜻하게 안아 줄 날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시기를.
이런 글을 3개월에 수십 개 씩 쓰고 있는데 제가 떨어뜨린 글을 쓴 분들에게 미안해 죽을 지경입니다. 수용자들은 좁은 감방 귀퉁이에서 무릎을 굻은 자세로 볼펜을 글을 썼습니다. 의자와 책상이 어디 있습니까. 노트북과 컴퓨터가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쓴 글들의 글을 읽으며 일희일비하는 것이 2012년부터 지금까지 제 삶이 되었습니다.
제 자랑 같지만 10년 전부터 세이브더칠드런에, 5년 전부터 국경없는의사회에 매달 얼마씩 기부를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 졸시 <이 사진기 앞에서>가 실렸기 때문입니다.
식사 감사의 기도를드리는 교인을 향한
인류의 죄에서 눈 돌린 죄악을 향한
인류의 금세기 죄악을 향한
인류의 호의호식을 향한
우리들을 향한
나를 향한
소말리아
한 어린이의
오체투지의 예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자정 넘어 취한 채 귀가하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음식물을 게운
내가 우연히 펼친 지의 사진
이 까만 생명 앞에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이런 시를 쓴 제가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굶어죽는 것을 외면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금을 보내게 되었을 뿐. 제게 인류애니 사해동포사상이니 하는 것이 있을 리 없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리공부를 시작했고 영세를 받았습니다. 견진성사도 받았습니다. 정신병원에 면회 가는 일은, 종합병원에 문병 가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병원 전체가 고느적한데, 면회를 신청하면 환자복을 입은 가족과 간호사가 같이 나옵니다. 면회실에서 대화를 나누고 가져간 음식을 먹고---. 교도소와 마찬가지로 모든 창문이 철창으로 되어 있습니다. 시집 <폭력과 광기의 나날>과 <감시와 처벌의 나날>도, 시선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도 외면할 수 없는 현실공간을 그린 것입니다.
장모님이 10년 동안 요양병원과 일반병원을 오갔습니다. 한두 달에 한 번은 면회를 가다 보니 옆 침대 할머니들의 용태도 자연히 보게됩니다. 치매, 반신불수, 광증의 부르짖음, 거식증, 식탐, 헛소리 중얼거림---. 대부분의 할머니가 혼자 힘으로침대에서 자기 몸을 일으키지도 못합니다. 좀 젊은 할머니가 퇴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드문 일이고, 연세가 높은 할머니들은 임종을 맞이함으로써 침대가 빕니다. 빈 침대는 금방 다른 환자로 채워집니다. 이분들은 모두 회복이나 퇴원을 꿈꿀 수 없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요양병원에서 연명합니다. 제 어머니는 췌장암으로 아버지는림프종 암으로 입원해 4개월, 6개월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인간 생로병사의 비의는 제게 <생명에서 물건으로> <뼈아픈 별을 찾아서>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생애를 낭송하다> 같은 시집을 내게 했습니다.
한국문예창작학회에서의 나날들
대한민국의 하고많은 학회 중에 한국문예창작학회라는 곳이 있습니다. 2001년 11월 10일 문학의 집 - 서울에서 창립총회를 했을 때 저는 출판편집이사로 참여했습니다. 전국 각 대학에 문창과 붐이 일어난 시점이었고 새천년의 출발에 발맞춰 문창과 교수들이 의기투합해 학회를 만들었는데 보다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존의 국문학과 중심의 학회에 논문을 투고하면 '이것은 논문이 아니라 평론입니다'라는 평과 함께 게재불가 판정을 받곤 했습니다. 60년대까지가 현대문학이었고 그 이후는 연구의 영역이 아니라 평론의 영역이라고 못박는 관행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창작방법론, 국어교육론, 스토리텔링, 인문콘텐츠, 문학지형학 등에 대한 다양한 논문을 실을 학회지의 발간은 초미의 일이라 학회를 만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학회지 <한국문예창작>이 금방 등재후보지가 되고 등재지로 발돋음할 수 있었던 것은 해외교류 지표가 다른 학회에 비해 월등히 높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첫 번째 해외 나들이는 바이칼주립대학으로 정했습니다. 저는 2002년 8월의 '바이칼 국제 창작 심포지엄'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그 뒤로는 자주 참가해 견문을 넓히게 되었습니다. 학회는 2003년 멕시코, 2004년 티키, 2005년 스페인, 2006년 중국 연변,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 2007년 이집트, 아프리카 케냐, 2008년 페루, 2010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와 체코, 2011년 그리스, 2012년 쿠바, 2013년 인도 뉴델리, 일본 북해도, 2014년 러시아 바이칼, 2015년 러시아 모스크바, 2016년 일본 시모노세키와 후쿠오카, 미국 L.A, 2017년 호주 시드니, 미국 알래스카, 2018년 일본 도쿄, 2019년 오스트리아와 크로아티아에 가서 국제행사를 가졌는데 저는 2/3 정도 간 것 같습니다. 역대 회장은 김수복, 이사라, 박덕규 교수였고 저는 2016년부터 2019년까지 4년 동안 회장을 지냈습니다.
미국 LA에 가서 교민을 만난 이후 학회가 방향을 좀 틀기로 했습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 교민 문인의 작품을 들여다보기로 했습니다. 미국 알래스카, 호주 시드니, 유럽 오스트리아 방문도 그곳의 교민 문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집 떠난 이들의 노래 -재외 동포 문학 연구>발간의 연장선상에서 교민들의 문학을 살펴보는 데 목표를 두고 방문했던 것입니다. 2004년과 2005년 미주문인협회의 초정으로, 2009년에 미주시인협회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서 했던 강연도 재외동포문학에 대해 연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덕에 국제PEN 한국본부가 주최하는 세계한글작가대회에 1회부터 4회 대회까지 참가해 논문 발표를 하거나 좌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시와 평론을 쓰고, 소소하게 봉사활동을 하면서 남은 생을 가꾸어 가려고 합니다. 그간 눈을 혹사해 눈에 실핏줄이 터져 안과에 다녔는데, 눈이 멀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세계시인 25인을 연구해서 쓴 615페이지짜리 책 <세계를 매료시킨 불멸의 시인들>들을 쓰면서 실명에 대한 두려움을 느꼈고, 요즈음 또다시 그것을 겁내고 있습니다.
찬양 아침 / 이승하
발작이 멎고……고비를 넘겼다
밤이 물러가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창 열고 하늘의 끄트머리를 본다
한 뼘의 하늘이 파들파들 떨고 있다
일찍 일어난 새의 무리가
먼동을 어슬어슬 트게 한다
갈증 날 때 마시는 물처럼 차디찬 공기
환호하며 뜀박질하는 공기의 입자들
수억의 폐포를 낱낱이 일깨우며
생명이 생명인 것을 확인케 한다
머리맡에 있는 몇 송이 꽃
힘겨운 밤을 함께 넘기느라
고개 푹 수그리고 있다
돋을볕 들자 그대 두 눈 가득 고인 눈물과
이마 가득 돋아난 땀방울이 반짝인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아침이다
너와 나의 머리 뒤로 놀빛이 번지는
이 경건한 아침을 위해
나 이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살아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