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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奉大夫行祥雲道察訪府君狀蹟 조봉대부행상운도찰방부군장적
四柱 府君 甲戌丁丑庚午己卯 運六六 大定一九五四
사주 부군 갑술정축경오기묘 운육육 대정일구오사
사주 부군 갑술년 정축월 경오일 기묘시 운 66 대정 1954
妣 甲戌丁丑戊寅壬戌 運六六 大定一八九四
비 갑술정축무인임술 운육육 대정일팔구사
비 갑술년 정축월 무인일 임술시 운 66 대정 1894
府君姓申諱適道 字士立 自號虎溪 鵝州人也
부군성신휘적도 자사립 자호호계 아주인야
부군의 성은 신이며, 이름은 적도, 자는 사립이며 스스로 호계라 칭하셨는데 아주 사람이다.
九世祖諱祐 仕麗季 官至全羅道按廉使 以孝行名於世 父版圖判書 諱允濡卒 廬墓三年 朝夕號于墓 有双白竹生墓前 人以爲孝感 事聞旌閭
구세조휘우 사려계 관지전라도안렴사 이효행명어세 부판도판서 휘윤유졸 여묘삼년 조석호우묘 유쌍백죽생묘전 인이위효감 사문정려
구세조의 이름은 우, 고려때 입사하여 벼슬이 전라도 안렴사에 이르셨으며 효행으로 세상에 이름나셨다. 아버지 판도판서 윤우께서 돌아가시자 삼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는데, 아침저녁으로 묘 앞에서 호곡하니 두그루 흰 대가 묘앞에서 자라났다. 사람들은 그 효성에 감화된 것이라 하였는데 그 일이 알려져 정려받으셨다.
八世祖諱光富 中顯大夫 內府令 七世祖 諱士廉 彦陽縣監 六世祖諱錫命 成均生員 高祖諱俊禎承仕郞敎授 曾祖諱壽業儒素有令望 爲士類所推重 祖諱元祿 號悔堂 學問醇正 孝友回心 克紹按廉公之芳蹟 縉紳之過是道者 無不禮於其廬 以求見其面 旌表其閭 贈通政大夫戶曹參議
팔세조휘광부 중현대부 내부령 칠세조 휘사렴 언양현감 육세조휘석명 성균생원 고조휘준정승사랑교수 증조휘수업유소유령망 위사류소추중 조휘원록 호회당 학문순정 효우회심 극소안렴공지방적 진신지과시도자 무부례어기려 이구견기면 정표기려 증통정대부호조참의
8세조의 이름은 광부, 중현대부 내부령을 지냈다. 7세조의 이름은 사렴, 언양현감을 지냈다. 6세조의 이름은 석명, 성균 생원이었다. 고조의 이름은 준정, 승사랑 교수를 지냈다. 증조의 성함은 수, 유학을 공부하여 평소에 명망이 있어 사류들이 무겁게 여겨 추앙하는 바가 있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원록, 호는 회당이다. 공부한 바가 순정하여 효성과 우애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려 안렴공(9세조)의 아름다운 행적을 밝게 드러내시니 벼슬한 자들로 이 길을 지나가는 자들 중 그 여막에 들러 직접 뵙기를 바라지 않음이 없었다. 정려받아 통정대부 호조참의로 추증되었다.
祖妣淑夫人星山李氏 大提學堅幹之後 司諫院正言孟專之曾孫女 考諱仡 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
조비숙부인성산이씨 대제학견간지후 사간원정언맹전지증손녀 고휘흘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
할머니 숙부인 성산 이씨는 대제학 견간의 후손으로 사간원정언 맹전의 증손녀이다. 부친의 이름은 흘,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을 지냈다.
妣順天朴氏 贈淑夫人 父曰倫展力副尉 祖曰季卿 勵節校尉 曾大父曰璯縣監 高祖曰安命吏曹參判
비순천박씨 증숙부인 부왈륜전력부위 조왈계경 여절교위 증대부왈회현감 고조왈안명이조참판
어머니 순천 박씨 증숙부인의 아버지 윤은 전력부위셨다. 할아버지 이름은 계경이며 여절교위셨다. 증조부 이름은 회이며 현감을 지내셨고, 고조 이름은 안명으로 이조참의를 지내셨다.
以萬曆甲戌十二月二十九日庚午 生先考于義城鄕校前里第
이만력갑술십이월이십구일경오 생선고우의성향교전리제
만력 갑술 12월 29일 경오에 선고를 의성 향교 앞마을에 있는 집에서 낳으셨다.
稟質純粹 天資頴悟 不待耳堤面命 而於事無不通曉
품질순수 천자영오 부대이제면명 이어사무부통효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본바탕이 영글고 깨달음이 있어 귀로 듣고 직접 지시를 받지 않아도 하는 일마다 밝게 알지 못하는 바가 없으셨다.
事父母以孝 友兄弟以愛 及其事長睦族之道 待人接物之誠 皆出於自然而不由勉强
사부모이효 우형제이애 급기사장목족지도 대인접물지성 개출어자연이부유면강
부모 모시기를 효성으로 하시었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도리에 맞게 어른을 섬기고 친족과 화목하는 것이나 정성스럽게 사람을 대하고 사물에 접하는 것이 모두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었지 억지로 한 것이 아니었다.
誦詩說禮 手不釋卷 而循序漸進 日就月將 人知大有成就 而咸以德器稱之曰 求賢必於孝子之門也
송시설례 수부석권 이순서점진 일취월장 인지대유성취 이함이덕기칭지왈 구현필어효자지문야
시를 읽거나 예문을 이야기하시었고 손에서는 책을 놓지 않으셨으며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나아가시었으니 날로 달로 성장하시었다. 모두들 큰 그릇이라고 여기면서 이르기를, “어진 이는 반드시 효자 집안에서 구해야 한다.” 하였다.
容貌出衆 端正方嚴 志操堅確 介如金石 其趨事靜以敏 居家樂爲善 在承旨公之側 愉色婉容 順其志而從其義 非法之言 未嘗出之於口 非禮之事 未嘗行之於身 求善繼善 述而能業其家者 先考是也
용모출중 단정방엄 지조견확 개여김석 기추사정이민 거가낙위선 재승지공지측 유색완용 순기지이종기의 비법지언 미상출지어구 비례지사 미상행지어신 구선계선 술이능업기가자 선고시야
용모가 출중하시고 단정하며 엄숙하시었으며, 지조가 굳기로는 금석과 같았다. 일을 하시면 조용하면서 민첩하시었다. 집안에 거하시면서 즐거우심을 좋아하시었다. 승지공을 모시면서 부드러운 낯으로 그 의지와 뜻을 따르고 순종하시었다. 법도에 어긋나는 말씀은 입밖에 내신 적이 없었고, 예의에 어긋하는 일은 몸소 하신 적이 없었다. 그 집안의 가풍을 이어서 능히 행한 자가 있다면 바로 선고셨다.
又嘗曰 家世以孝友相傳 而不肖殘孫 墜落餘風 則忝厥之罪 將何所逃免乎 以此而勉勵乎族 以此而敦行乎已 能盡職分之當爲 至窮不能奉養 則鄙賤之事 不恥爲之 晝則弋獵以供饌 夜則讀書刻苦爲文
우상왈 가세이효우상전 이부초잔손 추락여풍 칙첨궐지죄 장하소도면호 이차이면려호족 이차이돈행호이 능진직분지당위 지궁부능봉양 칙비천지사 부치위지 주칙익렵이공찬 야칙독서각고위문
또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집안이 대대로 효성이 전해내려 오는데 불초하고 미천한 자손이 이어져 나머지 풍조가 타락하고 있으니 흠을 더하는 죄를 장차 어찌하여 피하고 면할 것인가. 이로써 일족을 면려하고 이로써 행실을 돈독히 하여 능히 마땅히 해야 할 직분을 다하고 끝까지 봉양할 수 없다면 비천한 일이라도 부끄러워 하지 않고 해야 한다.”하시었다. 이윽고 낮에는 사냥하여 찬을 마련하여 공궤하고 밤에는 독서하는데 노력하여 글을 읽었다.
妣淑夫人 夙嬰疾病 長在床褥 身侍湯藥 衣不解帶者累年 學得醫術 萬方治療而疾愈 遠近見聞以爲孝誠所感 莫不嗟嘆 有識之人 頗愛敬之
비숙부인 숙영질병 장재상욕 신시탕약 의부해대자누년 학득의술 만방치료이질유 원근견문이위효성소감 막부차탄 유식지인 파애경지
비 숙부인께서 일찍부터 질병이 있어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계셨는데 몸소 탕약을 받들고 옷의 띠조차 풀지 않고 여러 해동안 모셨다. 의술을 공부하여 온갖 방도를 써서 치료하여 병이 나으셨으니 원근에서 보고 들은 자들이 이르기를 효성이 지극하여 감응한 것이라 하면서 차탄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식견이 있는 사람은 자못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에 “외롭게 홀로 선 채 신의 몸과 그림자만이 서로 위로할 뿐이었는데, 할머니 유씨가 일찍부터 병에 걸려 침상에 누워 계시니 신은 탕약을 만들어 모셔야지 일찍이 버리고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焭焭孑立 形影相吊 而劉夙嬰疾病 常在牀褥 臣侍湯藥 未嘗廢離〕”라고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이 문장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家有兩弟二妹 衣食皆仰於先考 先考於兄弟間 未有物我 衣則傳服 食則同案 膝下諸兒 雖凍餒而終無慽慽之容 二妹資粧 皆自營瓣 婚不失時
가유양제이매 의식개앙어선고 선고어형제간 미유물아 의칙전복 식칙동안 슬하제아 수동뇌이종무척척지용 이매자장 개자영판 혼부실시
집안에는 두 동생과 두 누이가 있었는데 의식을 모두 선고께 의지하였다. 선고께서는 형제에 대해서 너나를 가림이 없으셨으니 옷이 있으면 전해서 입도록 하였고 먹을 것이 있으면 밥상을 같이 하였다. 슬하의 여러 아이들이 비록 떨고 주려도 끝내 가엾게 여기는 모습이 없었으면서도 누이들의 혼인에 필요한 물품은 모두 직접 마련하여 준비하였고 혼인의 때를 놓치지 않도록 하였다.
親戚之困於飢寒者 必竭誠以恤之 人之陷於危患者 必盡力以濟之 有喪者亦匍匐以救
친척지곤어기한자 필갈성이휼지 인지함어위환자 필진력이제지 유상자역포복이구
친척 중에서 주리고 추위에 고생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정성을 다해서 구휼하였으며, 위험이나 근심에 빠진 이가 있으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다. 상을 당한 자는 역시 기어가서라도 도왔다.
有一親族 死於染病中 諸族皆畏忌 無斂襲者 先考親入病中 治喪草葬而出 父老咸曰 異哉 此人行人所不能行 始知瘟疾之不能相染也 尤尊敬
유일친족 사어염병중 제족개외기 무렴습자 선고친입병중 치상초장이출 부로함왈 이재 차인행인소부능행 시지온질지부능상염야 우존경
친척 중 한 사람은 염병으로 죽었는데 여러 친족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꺼려서 염습을 하려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선고께서는 직접 그곳으로 가셔서 상을 치르시고 초장을 해주신 후에 나오셨다. 나이든 이들이 모두 이르기를, “특이하도다. 이 사람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할 행동이로다.” 하였다. 이 때부터 비로소 염병은 서로 전염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으며 더욱 존경하였다.
之 先考持己以敬 存心以仁 其日用行事之際 無嶄絶崖岸之行 而好善惡惡之心 未嘗不發於中而見於外
지 선고지기이경 존심이인 기일용행사지제 무참절애안지행 이호선오악지심 미상부발어중이견어외
선고께서는 경(敬)으로써 자신을 지키셨고, 인(仁)으로써 본 마음을 보전하시었다. 그 일상 생활이나 일을 하심에 우뚝한 대단한 행동은 없으셨으나 선함을 좋아하고 악함을 미워하는 마음은 언제나 속 깊은 곳에서 나와 밖으로 보여지지 않은 적이 없으셨다.
見善人則雖貧賤 待之如貴人 愛之如兄弟
견선인칙수빈천 대지여귀인 애지여형제
선한 이를 보게 되면 비록 가난하고 천하더라도 귀한 사람처럼 대하셨고 형제처럼 사랑하시었다.
見惡人則疾之如仇讐 期於屛去而後已
견악인칙질지여구수 기어병거이후이
나쁜 사람을 보면 마치 원수처럼 꺼려하시었고 반드시 물리쳐 차단해버리시고 말았다.
是以知之寡而不知者衆
시이지지과이불지자중
이 때문에 (선고를) 알아주는 이는 드물었고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平生以淸儉自守 單瓢屢空而不謨資生之策 斗屋朽破而亦無庇廕之計
평생이청검자수 단표누공이부모자생지책 두옥후파이역무비음지계
평생 청렴하고 검박함을 스스로 지키며 사시어 밥그릇이나 표주박이 여러 번 비어도 생계에 보탬이 될 방도를 도모하지 않으셨으며 좁은 집이 낡고 무너져도 역시 가리고 덮으려는 계책을 꾸미지 않으셨다.
戊午己未年間 民困貧殘之政 流離失所 荒村丘墟 貧者據有而爲富 富者橫奪而益富 或有勸其爲子孫計者 先考正色不肯曰 田人之田 宅人之宅 是不義也 不義之事 子何勸之乎 遂不應 勸者乃止
무오기미년간 민곤빈잔지정 유리실소 황촌구허 빈자거유이위부 부자횡탈이익부 혹유권기위자손계자 선고정색부긍왈 전인지전 택인지택 시부의야 부의지사 자하권지호 수부응 권자내지
무오 기미 연간에 백성들이 곤궁해지고 극히 가난해지는 형편이라 거처하고 있던 곳들을 떠나 유랑하게 되니 마을은 황폐해지고 집터가 비게 되어 가난한 이들은 거기에 머물면서 부자가 되기도 하고 부자들은 마음대로 빼앗아 더욱 부자가 되었다. 어떤 이가 권하기를 자손들을 위하여 그리하라고 하니 선고께서는 정색하시면서 따르지 않고 말씀하시기를 “남의 땅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삼고 남의 집을 빼앗아 자기 집으로 삼는 것은 불의한 일이다. 불의한 일을 그대는 어찌 내게 권하는가. ” 끝내 응하지 않으시니 권하던 이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至於兄弟分異之日 奴婢之老弱者 田廬之荒頓者 必引以取之
지어형제분이지일 노비지노약자 전려지황돈자 필인이취지
형제간에 (재산을) 나누어야 하는 날에는 노비 중 노약자들과 논밭 중 황폐한 것을 굳이 자기 것으로 삼으셨다.
綾州李父 是先考末弟 而承旨公所愛也 沒身愛之不衰 且不計貧之 聚會族兒 糾之以繩墨 勸之以詩書 訓誨諄諄 誠意懇至
능주이부 시선고말제 이승지공소애야 몰신애지부쇠 차부계빈지 취회족아 규지이승묵 권지이시서 훈회순순 성의간지
능주 사는 이씨 어르신은 선고의 막내 동생이며 승지공께서 사랑하신 분이다. 종신토록 사랑하심이 덜해지지 않았으며 가난함을 개의치 않으셨다. 친족 어린이들을 모아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규제하고 가르치셨으며 시서를 읽도록 권하셨고 부드럽게 훈육하시었으니 정성이 간절하고 지극하시었다.
有異姓再從弟一人 取武科泣謁先考曰 兒時苟安承敎 得被笞罰 則必不至此 其感發於先考至誠誨人者深也
유이성재종제일인 취무과읍알선고왈 아시구안승교 득피태벌 칙필불지차 기감발어선고지성회인자심야
성이 다른 재종제 하나가 있었는데 무과에 급제하고는 선고께 울면서 이르되, “어려서 편안함만 구하다가 종아리를 맞는 일이 없었더라면 반드시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였으니 선고께서 지성으로 사람을 가르치심에 감격하여 분발하게 하심이 이와 같이 깊으셨던 것이다.
認齋崔監司晛 嘗稱之曰 若學問深造 則此姪成就 不可量也
인재최감사현 상칭지왈 약학문심조 칙차질성취 부가량야
감사 인재 최현은 일찍이 그를 일러 말하기를 “공부를 하여 깊이 나아가게 된다면 이 조카가 성취할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라 하시었다.
鼎峯公申弘道 乃先考再從兄也 以文名於世 以志行耿介 不容人過 親舊中有行己不正 處事悖義者 則必深惡而痛絶之 是以爲惡者 不到其門 爲善者 日見親信
정봉공신홍도 내선고재종형야 이문명어세 이지행경개 부용인과 친구중유행기불정 처사패의자 칙필심악이통절지 시이위악자 부도기문 위선자 일견친신
정봉공 신홍도는 선고의 재종형이라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고 지조있는 행동이 밝고 강개하시어 사람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친구 중에 행동이 바르지 않은 이나 처사가 의리에 어긋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매우 미워하면서 통렬히 절교해 버렸다. 이 때문에 나쁜 행동을 하는 자들은 그 집 문앞에 이르지도 못했으며 착한 행동을 하는 이들은 날마다 와서 만나고 친하고 신뢰를 쌓으며 지냈다.
先考 自幼至長愛學 鼎峯待之如親兄弟 凡大小事 必相議然後行之 常語於人曰 扶持門戶者 必此弟也 旅軒張先生 亦愛敬之 頻頻以書相問 恨不得源源之奉 而先考以風眩痰喘 半歲沈痼 未得往來於先生門下 此先考平生之一大恨也
선고 자유지장애학 정봉대지여친형제 범대소사 필상의연후행지 상어어인왈 부지문호자 필차제야 여헌장선생 역애경지 빈빈이서상문 한불득원원지봉 이선고이풍현담천 반세침고 미득왕래어선생문하 차선고평생지일대한야
선고께서는 어려서부터 나이드실 때까지 학문을 사랑하시니 정봉 김광헌 선생은 마치 친형제처럼 대하였고 무릇 크고 작은 일들을 반드시 상의한 연후에 행하였으며,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집안을 일으킬 자는 반드시 이 동생이다.”하셨다. 여헌 장현광 선생 또한 사랑하고 존중하여 여러 차례 편지로 서로 안부를 물었다. 그럼에도 자주 뵙고 받들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셨다. 또한 선고께서는 어지럼증과 담증, 천식이 있서 반년 가까이 꼼작 못하고 앓으셨기 때문에 선생의 문하에 왕래하지 못하였다. 이는 선고의 평생의 큰 한이었다.
先考少有乘射四方之志 結髮初年 値壬辰兵燹 欲從事軍門 承旨公禁呵之 終不得遂意 常自慨然歎曰 男子事業 豈區區一科名而止哉 遂博覽群書 通念曉析 雖攻擧業 而未嘗刻意必得
선고소유승사사방지지 결발초년 치임진병희 욕종사군문 승지공금가지 종불득수의 상자개연탄왈 남자사업 기구구일과명이지재 수박람군서 통념효석 수공거업 이미상각의필득
선고께서 어리실 때 말타고 활쏘기하며(무반으로 나아가며) 사방에 다니시고 싶은 뜻이 있으셨고, 성인이 되자마자 임진년의 병화를 만났으므로 군문에 종사하려 하였다. 그러나 승지공께서 금하고 꾸짖으셨으므로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언제나 스스로 개연히 여기시면서 탄식하여 이르시기를, “사나이의 할 일이 어찌 구구한 과명(과거 급제)하나 얻는데서 그쳐야 하겠는가.”하시었다. 드디어 여러 분야의 서적을 두루 읽으시고 밝고 환히 그 뜻을 깨달으시었다. 비록 과업에 종사하시었으나 반드시 급제하겠다는 각오를 가지신 적은 없으셨다.
乙巳赴發鮮鄕試擢第二 西崖先生見其文異之曰 着力深思 推究義理如此 不但爲科文而已
을사부발선향시탁제이 서애선생견기문이지왈 착력심사 추구의리여차 불단위과문이이
을사년에 향시에 응시하시어 2등으로 뽑히셨는데 서애 선생(유성룡)이 선고께서 쓰신 글을 보고 기이하게 여기시면서 이르시기를 “매우 힘쓰고 깊이 생각하여 의리를 추구함이 이와 같으면 문과에 급제할 뿐이겠는가.”하시었다.
中丙午進士 來游泮中 爲時輩所指點而排斥 退處江湖 終老不起
중병오진사 래유반중 위시배소지점이배척 퇴처강호 종로불기
병오년 진사에 급제하시고 성균관에서 공부하시었는데 당시 시류에 영합하는 무리들이 꺼리고 배척하는 바 되어 물러나 강호에 거처하시었고 늙도록 벼슬하지 않으셨다.
嘗爲永溪院長時 鄭造爲方伯 勢焔恭恭 有嫁禍士林者 則去鄭造姓名於尋院錄 憸小之徒 謟附營門 陰囑方伯 星火督囚 爲院任者 率皆洶懼失措 奔走逃匿 夜惕晝危 惟恐形迹之或洩
상위영계원장시 정조위방백 세염공공 유가화사림자 칙거정조성명어심원록 섬소지도 도부영문 음촉방백 성화독수 위원임자 솔개흉구실조 분주도닉 야척주위 유공형적지혹설
일찍이 영계서원 원장이 되었을 때에 정조(1559-1623, 광해군 때 권신인 북인 이이첨의 무리)가 관찰사가 되어 기세 등등하였으니 사림들에게 화를 일으킬 듯 하였으므로 정조의 성명을 심원록에서 제거하였다. (그러자) 간사한 소인배들이 감영에 무함하여 방백(정조)를 부추켜 성화같이 가두라고 독촉하였다. 이에 서원의 임원들이 모두 황망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분주히 도망가거나 숨었다. 밤낮으로 두렵고 위태한 상황이라 떨면서 혹시라도 빠져나갈 수 있을까 두려워 하였다.
而先考凝然不動 從容就囚 極諫冤枉之事 雖暴虐如鄭造 亦豈無感動之心哉 遂得釋而還 其不屈於威武也如此
이선고응연부동 종용취수 극간원왕지사 수폭학여정조 역기무감동지심재 수득석이환 기불굴어위무야여차
그러나 선고께서는 장중하게 동요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옥에 갇히셨으며 원통하고 억울한 일에 대해 극력 말씀하시었다. 이에 비록 정조같이 포악한 자라 할지라도 어찌 감동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드디어 석방되어서 집에 돌아왔으니 그 위세나 무력에 굴복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先考亦嘗有意於扶護學宮 廟宇之頹敗者 皆葺理焉 士風之委靡者 亦振起焉 學資蕩竭 則收取而盈焉 祭器破缺 則改舊而新之
선고역상유의어부호학궁 묘우지퇴패자 개즙리언 사풍지위미자 역진기언 학자탕갈 칙수취이영언 제기파결 칙개구이신지
선고께서는 역시 일찍이 학궁(서원)을 부지하고 보호하는데 뜻을 두시었다.(마음을 쓰시었다.) 묘우가 퇴락하고 무너지면 모두 수리하고 고치셨으며, 선비들의 기풍이 흔들리고 위축되면 역시 떨쳐 일어나도록 하시었다. 학궁 유지 자금이 탕갈되면 거두어 들여서 가득 차도록 해주시었다. 제기가 깨지고 빠진 것이 있으면 낡은 것을 새것으로 바꾸어 주시었다.
書冊有闕 則使鄕吏免役而納之 生徒不講 則與鄕人立規而勸之 其篤於校塾之事 以衛斯文之功 豈曰小補之哉
서책유궐 칙사향리면역이납지 생도부강 칙여향인입규이권지 기독어교숙지사 이위사문지공 기왈소보지재
서책에 빠진게 있으면 향리의 역을 면제해주고 채워넣도록 했으며, 생도들이 강학에 열심하지 않으면 동리 사람들과 함께 규약을 세워 권면하였으니, 학교의 일에 정성을 기울여 성리학을 지킨 공이 어찌 적은 보탬이었다 말할 수 있으리오.
至於國有亂 則忠義奮發 有冒刃赴敵之心焉 丁卯之亂 收聚義糧 詣闕陳疏
지어국유란 칙충의분발 유모인부적지심언 정묘지란 수취의량 예궐진소
나라에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는 충의 정신으로 떨쳐 일어나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적과 싸움에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었으니, 정묘년의 난리(정묘호란)때에는 군량을 모으고 대궐에 나아가 상소문을 올리니
聖上嘉之 奉承傳除授祥雲道察訪 牧疲殘郵 竭力奉公 郵人之前所不便 及所願欲而不得者 皆破行之 郵人喜蒙其是[○]澤 樹善政碑
성상가지 봉승전제수상운도찰방 목피잔우 갈력봉공 우인지전소부편 급소원욕이불득자 개파행지 우인희몽기시[○]택 수선정비
임금께서 가상히 여기시고 상운도 찰방으로 제수하였다. 피폐하고 잔약해진 역을 맡아서 힘을 다해 공무를 받드니 역졸들이 전에 불편하게 여기거나 원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고치거나 들어주니 역의 사람들이 그 은혜입음을 기뻐하며 선정비를 세웠다.
先考一生用功 專在於廉潔自守 而爲一臺諫所誣陷 罷歸田里 每以荒墜先訓爲痛
선고일생용공 전재어염결자수 이위일대간소무함 파귀전리 매이황추선훈위통
선고께서 일생을 바쳐 힘쓰신 것은 오로지 청렴결백하며 자기 분수를 지키는 것이었는데 한 대간이 무함한 바에 걸려 파직당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셨으니 선조들의 가르침을 어겼다 하여 언제나 애통해 하셨다.
其後宰相薦之 除授齊陵參奉 以病肅謝而歸
기후재상천지 제수제릉참봉 이병숙사이귀
그 후에 재상의 천거로 제릉참봉이 되었으나 병들었다는 이유로 사은숙배만 하고 귀향하셨다.
丁丑之亂 又擧義旅 洒泣誓衆曰 君父被圍 臣子豈敢一日安坐 遂以孤軍弱卒 馳赴嶺底 凜然有向敵之意 武夫關其口而奪之氣 亂定後又以義糧獻于闕下 除授健元陵參奉 以老病亦肅謝而退
정축지란 우거의려 세읍서중왈 군부피위 신자기감일일안좌 수이고군약졸 치부영저 늠연유향적지의 무부관기구이탈지기 난정후우이의량헌우궐하 제수건원릉참봉 이로병역숙사이퇴
정축년의 난리(병자호란)가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일으키셨는데 눈물을 흩뿌리며 무리들과 맹세하면서 이르시기를, “군부께서 포위당하셨는데, 신자된 도리로 어찌 하루인들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겠는가.”하시었다. 드디어 외롭고 약한 군사들을 이끌고 고개 아래에 달려갔는데 늠름하여 적과 맞서려는 뜻이 있으니 무사들은 입을 꽉 다물고 적을 무찌르려는 기세가 있었다. 전란이 끝난 후 의롭게 모은 군량을 다시 궐하에 바치니 건원릉 참봉으로 제수되셨다.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로 역시 사은숙배만 하고 물러나셨다.
全參議提挽而止之 而先考以祿不及養爲風樹之痛 老境薄宦 豈其本情哉 遂辭謝而歸 自此已無意於人世矣
전참의제만이지지 이선고이록부급양위풍수지통 노경박환 기기본정재 수사사이귀 자차이무의어인세의
전참의가 붙잡고 만류하였으나 선고께서는 “녹봉이 어버이를 모시기에 넉넉하지 못하니 나이들어 낮은 벼슬하는 것이 어찌 본 뜻이겠습니까.” 하시고는 끝내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오시었다. 이후로는 인간 세상에 뜻을 두지 않으셨다.
乃於雲水鄕築數間精舍 白髮蒼顔 頹乎其間 採山釣水 美茹鮮食 吟風咏月 消遣世慮 人呼地上仙 咸曰 眉壽無强 昊天不吊 降割偏酷
내어운수향축수간정사 백발창안 퇴호기간 채산조수 미여선식 음풍영월 소견세려 인호지상선 함왈 미수무강 호천부적 강할편혹
이에 구름있고 물이 있는 동리에(자연과 벗 삼을 수 있는 곳에) 몇칸짜리 정사를 짓고는 백발의 노쇠한 모습으로 그 안에 물러나셔서 산수를 즐기시면서 몸에 좋은 깨끗한 음식 드시고 음풍농월하시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고 지내셨다. 사람들은 지상의 신선이라 불렀으며, 모두 말하기를 “건강한 몸으로 오래오래 사실 것이다.”하셨다. (그러나) 하늘이 돕지 않아 잔혹한 형벌을 우리에게 내리셨다.
白髮蒼顔: 소식(蘇軾)의 〈원일과단양명일입춘기노원한(元日過丹陽明日立春寄魯元翰)〉에 “백발 늙은 얼굴을 누가 기억해 주랴. 새벽에 자주 재채기함은 누구 때문인가.〔白髮蒼顔誰肯記 曉來頻嚔爲何人〕” 하였다. 중국의 속설에 재채기를 하는 것은 누군가 자신의 얘기를 하기 때문이라고 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蘇詩補註 卷11》
癸卯七月初一日丙寅巳時 終于正寢 彼蒼者 天胡寧忍此 嗚呼痛哉 嗚呼痛哉
계묘칠월초일일병인사시 종우정침 피창자 천호녕인차 오호통재 오호통재
계묘년 7월 초 1일 병인 사시에 정침에서 돌아가셨다. 저 푸르른 하늘이여! 어찌하여 차마 이럴 수 있는가! 아아 애통하도다. 아아 애통하도다.
先考 小心謹愼 以敬爲主 威儀可畏 容止可觀 辭氣可樂 德行可象 而亦未嘗張而不弛 弛而不張 待人則和氣滿顔 言語欵洽 處鄕則卑以自牧 不敢以智先人 是以上下俱得其歡心 而沈靜敦重 終始守正 不苟同於時 此不見用於世而平居 嚴勝於寬 威勝於和 子弟侍側 使不敢談笑俚近之語 衣冠不整 則飭以整之 行步不節 則責以節之 亦必敎之以義方 訓之以順德 雖孩童亦不敢使之戱謔於前 而洒掃應對 正襟危坐 勤勤誘誨
선고 소심근신 이경위주 위의가외 용지가관 사기가락 덕행가상 이역미상장이부이 이이부장 대인칙화기만안 언어관흡 처향칙비이자목 부감이지선인 시이상하구득기환심 이침정돈중 종시수정 부구동어시 차부견용어세이평거 엄승어관 위승어화 자제시측 사부감담소리근지어 의관부정 칙칙이정지 행보부절 칙책이절지 역필교지이의방 훈지이순덕 수해동역부감사지희학어전 이세소응대 정금위좌 근근유회
선고께서는 마음 쓰시고 근신하셨으며 경(敬)을 주로 하셨으며 위세와 외모는 존중할만 하였고, 용모와 행동거지는 볼만 했으며, 말씀이나 기세는 좋아할만하였고, 덕업이나 행실은 본받을만 하였다. 그리고 또한 언제나 팽팽하여 느슨하지 않으셨으며, 느슨하실 때에는 팽팽하지 않으셨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온화한 기색이 안면에 가득하였고, 정답게 말씀하셨다. 향리에서는 낮추어 스스로 덕을 기르셨고, 감히 지혜로써 남보다 앞서려 하지 않으셨다. 이에 위아래 없이 모두 환심을 얻으셨으며, 조용하고 돈독하고 신중하시어 처음부터 끝까지 바름을 지키셨으며 시속과 하나되지 않으시었다. 이 때문에 세상에 쓰이지 않으셨으나 평온히 사시었다. 관대하기 보다는 엄정하시었고 온화하기 보다는 위엄이 있으셨다. 자제나 곁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은 웃으며 떠들거나 비루함에 가까운 말을 감히 못하게 하시었다. 의관이 정제되지 않으면 신칙하여 바로 잡도록 하시었고, 걸음걸이에 절제가 없으면 책망하여 절제되도록 하시었다. 또한 반드시 의롭고 방정하도록 가르치시었고, 순하고 덕스럽도록 훈계하시었다. 비록 어린 아이들일지라도 역시 감히 앞에서 희롱하면서 까불지 않도록 하시었다. 깨끗이 씻고 청소한 후 응대하도록 하며, 옷깃을 바로 하고 꿇어 앉도록 하시어 삼가고 삼가도록 타이르고 훈계하시었다.
卑以自牧:《주역》 〈겸괘(謙卦) 초육(初六) 상(象)〉에 “겸손한 군자는 몸을 낮추어 자신의 덕을 기른다.〔謙謙君子 卑以自牧也〕”라는 말이 나온다.
婢僕不敢仰視而屛息 奔走門庭 肅肅若朝廷然諸姪群族
비복부감앙시이병식 분주문정 숙숙약조정연제질군족
노복들은 감히 눈을 치켜뜨지 못하고 숨을 죽여 조심스레 행동하였고, 뜨락에서 분주히 다니면서도 엄숙하고 조용한 것이 마치 조정에서 그러한 것과 같았다.
後生少年 有口問業者 則先以孝悌忠信 反覆開諭 有謁見者 則亦以先祖懿行戒飭遵奉
후생소년 유구문업자 칙선이효제충신 반복개유 유알견자 칙역이선조의행계칙준봉
나이 어린 후생 가운데 학문에 대해 묻는 자가 있으면 먼저 효제충신을 반복하여 타일러 주었다. 뵙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먼저 선조들의 아름다운 행실을 몸소 따르도록 훈계하였다.
每端坐一室 靜觀書史 有意會處 則便欣然忘食 至於聖賢切要之言 則必使子弟誦之曰 聖賢言語 切已不可 只作一場說話 而汝等尋常放過 此所以爲下等人物也 又勸誦小學曰 今世之人 從幼便驕惰壊了 到得漸長扞格難入 鮮有行其孝悌者 汝等須只據現在箚住做去 如孝悌忠信 禮義廉恥等事 都要理會 久久成熟 則便曉此道理
매단좌일실 정관서사 유의회처 칙편흔연망식 지어성현절요지언 칙필사자제송지왈 성현언어 절이부가 지작일장설화 이여등심상방과 차소이위하등인물야 우권송소학왈 금세지인 종유편교타괴료 도득점장한격난입 선유행기효제자 여등수지거현재차주주거 여효제충신 예의염치등사 도요리회 구구성숙 칙편효차도리
언제나 방 한 가운데 단정히 앉으셔서 서책과 역사서를 고요히 읽으셨고, 뜻이 가는 곳이 있으면 문득 기뻐서 끼니를 잊으셨다. 성현의 간절하고 중요한 말씀을 접하게 되면 반드시 자제들로 하여금 낭송하게 하고 이르시기를, “성현의 말씀이 절실하기 이를데 없도다. 다만 한바탕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야 하지만 너희들은 심상히 여기고 그냥 지나쳐 버리는구나. 이야말로 하등 인물이 되는 까닭이다.”하시었다. 또한 소학을 암송하기를 권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오늘날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교만하고 나태하여 정신이 무너져 점점 성장하여 뜻을 이루는 것은 막혀 있다 여기면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에 그 효제를 행하는 자가 드물게 되었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다만 현재의 상태에 의거하여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효제충신이나 예의염치 등의 일에 대해 모두 요체를 이해하고 오래 성숙시키면 문득 이 도리를 밝게 깨닫게 될 것이다.” 하시었다.
不肖孤哀等 不能奉承庭訓 於是書做得來也 淺只作這樣人不孝之罪 當如何也
부초고애등 부능봉승정훈 어시서주득래야 천지작저양인부효지죄 당여하야
(그러나)불초한 우리 고애자들은 집안의 교훈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고 이같이 글로 남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저 이모양인 사람이니 불효의 죄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先考氣力强健 八十年前 則不廢行祭 以致如在之誠
선고기력강건 팔십년전 칙부폐행제 이치여재지성
선고의 기력이 강건하여 80세 이전에는 제례를 행하는 것을 폐하지 않으셨으며, 마치 계신 듯이 정성을 다하였다.
固窮安貧 一不語及於生産
고궁안빈 일불어급어생산
실로 가난하였으나 안빈의 도를 지켜 한번도 먹고 사는 일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생산에 대해 한 말씀도 없으셨다.)
年旣耄耋 情神不亂 每値考妣諱 則必進素饌 子弟極諫 則終始不聽 其終身至慕 可見矣
연기모질 정신불란 매치고비휘 칙필진소찬 자제극간 칙종시불청 기종신지모 가견의
연세가 이미 오래 되셨어도 정신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으셨고 매양 선고와 선비의 제사일이 되면 반드시 직접 소찬을 올리셨다. 자제들이 극력 간하였으나 끝내 따르려 하지 않으셨다. 그 평생토록 지극히 흠모하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先考老來 風熱極重 寒署之際 不能愼攝 六月二十七日 乃承旨公諱日也 屢問不知 盖自是日病勢已鞏 而全不省事 言語不通 趂此中風未發之前 藥以治療 則精神氣力 應享百歲遐齡 而只得年九十 此實孤哀子等 惡積罪盈 禍延先考之致 五內分崩 日夜叫號而已
선고노래 풍열극중 한서지제 불능신섭 육월이십칠일 내승지공휘일야 루문부지 개자시일병세이공 이전불성사 언어불통 진차중풍미발지전 약이치료 칙정신기력 응향백세하령 이지득연구십 차실고애자등 악적죄영 화연선고지치 오내분붕 일야규호이이
선고께서는 나이 드시니 풍질과 열이 극히 위중해지셔서 춥거나 더운 때에 신중히 조섭하지 못하셨다. 6월 27일은 승지공의 휘일이라 여러 차례 여쭈어도 알지 못하셨다. 대개 이때부터 병세가 이미 심각해져서 전혀 일을 살피지 못하셨고 말씀도 통하지 않았다. 이때까지만해도 중풍이 나타나기 전이라 약으로 치료하면 정신이나 기력이 돌아왔으므로 응당 백세까지 보통 이상으로 오래 사시리라 생각하였는데 다만 90세까지만 누리실 수 있었다. 이는 실로 고애자 우리들의 악업이 쌓이고 죄가 넘쳐서 그 화가 선고께 미친 것이니 오장이 찢기고 무너져 밤낮으로 울부짖고 호곡할 뿐이다.
先妣令人尹氏 坡平君諱坤之九世孫 執義諱師哲之玄孫女也 曾祖諱琢金泉道察訪 祖諱希曾 贈嘉善大夫戶曹參判 考諱淳奉政大夫軍資監僉正 妣生稟懿性 允恊先考之德 端嚴執婦道慈仁多積善 事舅姑以孝 奉祭祀以誠 宗族稱其孝 里閭歎其誠 咸曰 此可爲範於壺內也 家世淸寒 凡事板蕩 妣專任家事 服行勞苦 甘腝奉養靡所不用其極 自晨至昏 無惑怠 夜則舅姑命適私室 退而達曙紡績以衣舅姑
선비영인윤씨 파평군휘곤지구세손 집의휘사철지현손녀야 증조휘탁금천도찰방 조휘희증 증가선대부호조참판 고휘순봉정대부군자감첨정 비생품의성 윤협선고지덕 단엄집부도자인다적선 사구고이효 봉제사이성 종족칭기효 리려탄기성 함왈 차가위범어호내야 가세청한 범사판탕 비전임가사 복행로고 감부봉양미소부용기극 자신지혼 무혹태 야칙구고명적사실 퇴이달서방적이의구고
선비 영인 윤씨는 파평군 곤의 9세손으로, 집의 사철의 현손녀시다. 증조 탁께서는 금천도 찰방이셨고, 조부 희증은 증가선대부호조참의셨다. 아버님 함자는 순이며 봉정대부 군자감첨정을 지내셨다. 선비께서는 태어나실 때부터 아름다운 성품을 받아 가지고 계셔서 선고의 덕을 잘 도와주시었다. 단아하고 엄하게 부녀의 도리를 지켰으며 자애롭고 인자하여 선한 일을 많이 하시었다. 효성으로 시부모님을 모셨고,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었으니 종족들은 그 효성스러움을 칭송하였고, 동리에서는 그 정성에 탄복하였다. 모두 이르기를, “이는 이 일대에서 모범이 될만하다.”고 하였다. 집안이 청렴하나 빈한하여 범사가 어지러웠는데 선비께서는 집안일을 도맡아 주관하시면서 몸소 노고를 다하였고 좋은 음식으로 봉양하기 위해 정성을 쏟지 않음이 없으셨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조금이라도 나태하지 않으셨고 밤에는 시어른께서 처소로 가라고 명하셔야 물러나셨으며 새벽까지 베를 짜서 시어른들 옷을 지어드렸다.
令人: 문무 4품관 부인에게 주는 칭호.
及小節小姑婚姻資裝 一從先考之令 躬自織紝 其視世俗好貨財 私其有者 豈可同日而語也 與先考同年生 而月日後於先考 生于甲戌閏十二月初八日戊寅 歿于庚子正月十三日己巳
급소절소고혼인자장 일종선고지령 궁자직임 기시세속호화재 사기유자 기가동일이어야 여선고동년생 이월일후어선고 생우갑술윤십이월초팔일무인 몰우경자정월십삼일기사
가을이 되어 손아래 시누이가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하나같이 선고의 말씀에 따라 직접 짜서 바느질하여 준비하였다. 세속의 재물을 좋아하여 사사로이 챙기려 하는 자와는 어찌 같은 하늘 아래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선비께서는 선고와 같은 해 태어나셨고 나신 달, 일은 선고보다 늦으셨으니 갑술년 윤12월 초 8일 무인에 나셨고, 경자년 정월 13일 기사에 돌아가시었다.
初葬于縣之北鷄卵峙 先考歿於後癸卯十二月二十八日辛酉 合堋于縣西安平卯向之原
초장우현지북계란치 선고몰어후계묘십이월이십팔일신유 합붕우현서안평묘향지원
처음에는 현 북쪽 계란치에 모셨다가 그후 계묘년 12월 28일 신유에 선고께서 돌아가시니 현서쪽 안평 묘향(동쪽방향) 언덕에 함께 모셨다.
有四男三女 男長㙫歲辛丑已卒 其配判官朴夢琚女 無后而次子均之子慶錫繼嗣
유사남삼녀 남장집세신축이졸 기배판관박몽거녀 무후이차자균지자경석계사
4남 3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집(㙫)은 신축년에 일찍 죽었다. 그 부인(첫째 며느리)는 판관 박몽거의 딸이다. (집의) 후손이 없으므로 (선고의) 둘째 아들 균(均)의 아들 경석(慶錫)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도록 하였다.
次均埰坫 坫亦先考妣夭
차균채점 점역선고비요
(집의) 아래로 균, 채(埰), 점(坫)이 있다. 막내 점도 선고, 선비와 마찬가지로 일찍 요절하였다.
女適士人金尙珏 次適縣監鄭復享 無后而歿 次適平山申命元
녀적사인금상각 차적현감정부향 무후이몰 차적평산신명원
딸들 중 맏이는 사인 김상각과 혼인하였고, 둘째는 현감 정복향과 혼인하였는데 후손 없이 죽었으며, 막내는 본관이 평산인 신명원과 혼인하였다.
均娶聞韶金致弘女 生二男二女 長慶錫爲㙫主後 娶天嶺朴滢女 生女四一男皆幼 次爾錫娶士人朴㙉女 生四男二女 長適士人李一吾 生四女 次適士人呂咸和 生一男一女
균취문소김치홍녀 생이남이녀 장경석위집주후 취천령박형녀 생녀사일남개유 차이석취사인박전녀 생사남이녀 장적사인이일오 생사녀 차적사인여함화 생일남일녀
(둘째 아들) 균은 문소 김치홍의 딸과 혼인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그 중) 맏이 경석은 집의 후사가 되었으며 천령 박형의 딸과 혼인하여 딸 넷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모두 어리다. (균의) 둘째 아들 이석은 사인 박전의 딸과 혼인하여 4남 2녀를 두었다. 맏딸은 사인 이일오와 혼인하여 딸 넷을 두었다. (이석의) 둘째 딸은 사인 여함화와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埰娶永嘉權益昶女 生二男二女 男長禹錫 娶延安李世美女 生一男一女皆幼 次文錫 娶月城孫鉉女故左參贊 月城君仲暾之玄孫也 生一男一女 女長適承旨琴복[僕-亻+忄]之孫文操 餘未嫁
채취영가권익창녀 생이남이녀 남장우석 취연안이세미녀 생일남일녀개유 차문석 취월성손현녀고좌참찬 월성군중돈지현손야 생일남일녀 녀장적승지금복[복-인+심]지손문조 여미가
(세째 아들) 채는 영가 권창익의 딸과 혼인하여 2남 2녀를 두었다. (채의) 맏아들 우석은 연안 이세미의 딸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채의) 둘째 아들 문석은 월성 손현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좌참찬을 지낸 월성군 고 손중돈의 현손이다. 1남 1녀를 낳았고 그 중 맏딸은 승지 금복의 손자 문도에게 시집보냈다. 나머지는 아직 혼인 전이다.
坫娶佐郞金淮女 生二男四女 長昌錫娶月城朴弘鼎女 生一男二女 女長適士人朴守元 生一女一男 次適士人申邦彦 餘皆未嫁
점취좌랑김회녀 생이남사녀 장창석취월성박홍정녀 생일남이녀 녀장적사인박수원 생일녀일남 차적사인신방언 여개미가
(막내) 점은 좌랑 김회의 딸과 혼인하여 2남 4녀를 두었다. (점의) 맏아들 창석은 월성 박홍정의 딸과 혼인하여 1남 2녀를 얻었다. 맏딸은 사인 박수원과 혼인하여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두었다. 둘째 딸은 사인 신방언과 혼인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혼인 전이다.
金尙珏生二男 長舜佐娶延陽南海準女 生二男四女 次碩佐先娶郡守朴廷蓍女 生二男 後娶裵潤全女卽翰林龍吉之孫也 生一男一女
김상각생이남 장순좌취연양남해준녀 생이남사녀 차석좌선취군수박정시녀 생이남 후취배윤전녀즉한림용길지손야 생일남일녀
(맏사위) 김상각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 순좌는 연양 남해준의 딸과 혼인하여 2남 4녀를 얻었다. 둘째 석좌는 먼저 군수 박정시의 딸과 혼인하인 아들 둘을 두었고, (박씨가 죽자) 배윤전의 딸을 후취로 얻었으니 한림 용길의 손녀다.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다.
(세째사위)申命元生一女 適進士權晟 生二男
(세째사위)신명원생일녀 적진사권성 생이남
신명원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진사 권성과 혼인하여 아들 둘을 두었다.
側室有有二女 皆嫁而有子有女
측실유유이녀 개가이유자유녀
측실을 통해서도 딸 둘을 두었는데 모두 혼인시켰고 아들도 있고 딸도 있다.
內外孫曾男女總五十餘人
내외손증남녀총오십여인
이처럼 내외 손과 증손이 남녀 합하여 모두 50여 인이다.
丙午 正月日 子進士埰感泣 而略敍世系 及先考處心
行事之迹 以爲他日永誌文之資云(12면 첫줄에서 옮김-이렇게 이어져야 할 듯)
병오 정월일 자진사채감읍 이약서세계 급선고처심
행사지적 이위타일영지문지자운
병오년 정월 어느날 아들 진사 채가 느꺼워 울면 세계(世系)와 선고의 마음 쓰심과 있었던 일들의 자취를 간략히 서술하여 훗날 오래 남을 지문을 만드는 자료가 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