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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씨앗교회 10주년 기념예배
하늘씨앗교회 창립 10주년 맞이 강연 및 좌담
사회자-오늘 설교 말씀을 들으며 여러 가지 희망이 생겼다. 희망을 찾을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야겠구나 그 화두를 심었다. 몇 년 전, <위기속에서 대안을 찾다>는 책을 가지고 함께 공부하던 기억이 난다. 이 책 제목처럼 위기 속에서 대안을 찾을 수 있는 강의와 질의와 응답이 되기를 바란다.
하늘씨앗교회 10주년 기념 김경호 목사 초청 특강 및 좌담.hwp
로마의 역사 안에서 시작한 초대 교회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교회라는 말, 10주년이 돼 교회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려고 하시기 때문에 오후 강연도 교회라는 것을 주제로 설정해 보았다. 우리가 교회라고 할 때 너무 조직된 교회, 그동안에 서구 역사의 가장 중심이 되었던 것이 교회다. 신성로마제국, 중세, 온 세계의 역사의 중심에 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제도화되고 조직화된 교회의 이미지가 우리들 몸에 배어 있다.
초대 교회, 처음 시작한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 로마의 역사 안에서 시작한 초대 교회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가 교회라고 할 때 교회를 희랍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한다. 두가지 말이 합성된 것이다. ‘에크’ 하면 ‘엑시스트’ 할 때 출구라는 뜻의 ‘밖으로’ 의미이고, ‘클레시아’의 원형은 ‘클레오’라는 동사이다. 이것은 ‘부른다’ ‘모은다’라는 뜻이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밖의 사람을 불러 모은다.”는 뜻이다. ‘에클레시아’라는 것이 희랍과 로마 역사의 중요하고 핵심적인 단어다. 희랍과 로마 역사에 근본으로 삼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민주정치다. 그래서 전 시민들이 ‘아고라’라는 광장에 모여서 시민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총회에서 왕도 거기서 뽑고 행정관, 집정관, 대사, 외교관도 뽑아서 파송한다. 임기는 1년에서 2년 정도로 하고 그 다음에는 민회라고 부르는 이 모임에서 재판도 하고 사형선고도 내린다. 소크라테스를 사형시킨 재판도 아고라 광장의 ‘민회’라는 시민들의 회의다. 희랍역사나 로마 역사에서 가장 긍지로 삼는 것이 이런 민주정치다. 회중들이 모여서 대표를 뽑고 선정한다는 긍지가 그들 속에 있다. 로마에서는 BC 509년에 공화정 정치가 시작된다. 우리는 지금도 광화문 앞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노래를 하는데 지금부터 2500년전 로마는 공화정 정치를 시작한 거다. 어마어마한 일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대표를 뽑고 집정관을 뽑고 원로원, 의회도 뽑았다. 의회나 원로원이 민회라고 하는 시민들의 공화정치를 돕고 거기에 자료를 내놓기 위한 자문기관이다. 최고의 권력기관은 민회라고 하는 전 시민들이 모여서 결정하는 것이다. 민회의 이름이 ‘에클레시아’이고 문자적으로 ‘밖에 사람들이 모인다’는 뜻이다. 이 에클레시아가 로마의 최고 권력 기관이다. 자기들은 민회에 의해 정치를 한다는 것을 긍지로 삼았다. 로마와 희랍 둘 다 도시 국가다. 폴리스의 연합인데 그 사람들이 페르시아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제국과 전쟁을 해서 이기게 된 것이다. 그것은 철저한 민주제도에 대한 긍지에서 나온 힘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도 공화정에서 나온 것이다. 공화정의 지도자는 시민 중에 뽑는 것이고 거기서 뽑히는 사람은 앞서서 전쟁에 나간다. 그런 헌신성이 없으면 대표가 되지 못한다. 서양의 귀족은 군대 면피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군대 나가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긍지로 삼는 전통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희랍과 로마의 귀족들의 참전하는 전통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우리가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부르는 전통이다. 우리 한국은 왠만한 사람은 군대에 가지 않는다. 국회의장, 안기부장, 여당 당수 전부 군대 안간 사람들이다. 군대도 가지 않는 사람들이 국가 방위는 제일 먼저 이야기 한다. 그들이 최고의 권력을 결정하는 기관이 ‘에클레시아’ ‘민회’또는 ‘공의회’라고 부르는 것이다. 민회에서 모든 것을 결정했다. 민회의 전통을 순조롭게 이어온 것은 아니다. 공화정을 시작할 때 왕정정치의 전통이 꺾인다. 얼마나 혁명인가? 왕당파들이 왕정 복귀를 위해 여러 가지 음모를 펼친다. 공화정에 의해 최고 집정관으로 선출된 사람의 아들 둘을 꼬여서 왕정을 복귀를 하려는 음모에 공화정 책임적으로 이끌어갈 집정관의 아들들을 가담시켰다. 그런데 들통이 났다. 이 최초의 집정관이 그 아들 둘을 민회 석상에서 즉시 사형시킨다. 로마법이 무섭구나 하는 로마법 전통이 서는 것이다. 그 다음에도 귀족에 의해 공화정을 깨려는 시도들이 오게 된다. 200년 동안 공화정이 흔들리고 귀족정치로 넘어가고 다시 투쟁하고 싸워서 공화정치를 회복한다. 로마 역사를 볼 때 공화정과 왕정, 예수 때는 황제에 대한 제정 시대가 된다. 그런 코드로 로마역사를 보면 재미있다. 사실 그것이 그들 역사의 핵심이다. 그런데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면서 로마 시민이 되면 저절로 부자가 된다. 전 세계에서 잡아온 검투사들, 사실은 검투사가 외국 군대의 장군들이고 대단한 무사들이다. 그런 사람들을 원형 경기장의 노리개감으로 조롱을 한다. 내노라는 장군을 훈련 시켜서 로마 시민들은 국가에서 나누어준 빵을 뜯어 먹으며 피를 튀기는 실전을 하게 하고 구경하는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면서 전 세계를 희롱하는 것이 로마의 정치였다. 공화정으로 민주주의 정치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그들의 민주주의는 그들만을 위한 정치다. 팍스로마나다. 로마가 전 세계를 지배하면서 이제 세상에서 전쟁은 없어졋다면 로마의 평화시대를 자랑했다. 황제는 칼을 그냥 폼으로 차고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폼으로 칼을 찬 황제는 없었다. 살벌한 정치적 숙청과 피흘림 속에서 황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역사를 가지면서 로마의 시민이 되려면 남성이어야 한다. 여성은 시민권 없다. 18세 이상의 시민, 재산이 없으면 시민권이 없다. 자기가 살 수 있을 만한 자산, 토지가 있어야지 심사해서 시민권을 준다. 출신이 로마, 헬라인이어야 시민권을 주었다. 자기들이 자랑하는 로마의 시민정치라는 것은 그들만의 특권을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는 로마식 근교에 인공호수를 파서 배를 띄워서 잡아온 노예를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해전을 보는 것이다. 진짜 죽이고 죽는 것을 관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인의 오락을 위해 희생되는 것을 자기들의 시민됨의 권리로 누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초대교회가 시작되는 것이다. 초대 교회가 시작되면서 기독교인의 새로운 모임을 뭐라고 했는가? 당시 유대인들이 모이는 모임은 시나고그(회당)라고 했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된 기독교는 자기들의 모임을 유대인들의 모임인 시나고그라고 하지 않고 에클레시아라고 햇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전세계로 흩어진다. 흩어진 유대인들이 다시 모인 것이 회당이다. 그런 틈새에서 유대교가 산산조각이 날 때 기독교가 생겨난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 나라에 그대로 존속 했다면 기독교는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성전이 붕괴되고 예수살렘이 없어지니 다른 형태의 종교로 탈바꿈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 유대교의 전통과 예식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것은 유대교이고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지금은 변질된 유대교의 본래정신 히브리 노예를 해장시키는 해방의 역사를 복원하려고 하는 대안 공동체로 출범한 것이 기독교의 출발이다.
그런데 기독교 모임을 뭐라고 했나? 이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기독교의 모임을 ‘에클레시아’ 라고 붙였다.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다. 희랍인 로마인이 최고의 긍지로 갖는 에클레시아를 자기들 이름으로 가져왔다. 너희들이 하는 에클레시아는 진짜가 아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진짜다. 누가 복음 6장은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하나님 나라가 저희것이라.”고 한다. 로마에서는 배제되었던 무산자, 가난한 사람이 주인이 되는 참된 에클레시아가 이루어 진다는 의미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늘의 시민권을 주겠다. 남자나 여자 나누지않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초청한다. 종과 자유인 나누지않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초청한다. 그들 전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내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집사님이 아버지라고 부르면 우리는 자동으로 형제자매가 된다. 초대교회는 모두가 형제와 자매가 된다. 바울이 엄히 꾸짖을 때도 ‘형제들이여’라며 꾸짖는다. 교회 안에서 종과 주인의 관계가 파기되고 형제 자매의 관계가 된 것이다. 빌레몬서에 바울이 오네시모라는 사람과 지냈는데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집에 있던 노예이다. 도망친 노예로 숨어사는 신세이다. 그런데 마침 바울이 빌레몬을 잘 안다. 빌레몬을 돕기도 했다. 바울이 그 집에 있던 노예가 도망쳐 온 것을 알자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다시 오네시모를 그에게 돌려보낸다. 편지의 내용은 이렇다.
“전에는 이 사람이 당신 종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당신 형제로 대해주시오. 빌레몬 당신이 빚진 것이 있는 것은 묻지 않겠소. 그대신 이 종을 형제로 받아달라”는 편지 내용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모든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관계다.
초대교회에 벌어지는 관계는 종과 자유인의 차별, 남자와 여자의 차별, 헬라인과 유대인의 차별이 파기되고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초대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모든 백성들이 주인이 되는 관계다. 그런 공동체를 시작한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로마 사람들이 교회가 전체적으로 대들거나 반기를 든 것은 아니지만 교회를 그대로 둬서는 로마가 존속하지 못하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초대 교회는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들 사이에 모든 차별이 파기되고 형제 자매의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사회에서 비전 없던 사람들이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주인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가 보니 이걸 그대로 두면 로마라는 사회가 존속할 수 없겠구나 생각해서 얌전한 교회를 박해를 시작한다. 그것이 초대교회가 받은 박해다. 베드로 전서는 박해에 대한 편지다. 박해를 견뎌라. 하나님께서 연단하는 자에게 시련을 주신다. 박해를 견디는 상황에 대해서 언급한다. 그러나 베드로전서는 한편으로 권력에 순종해라. 대들지 마라고 권한다. 그들이 권력에 순종하고 얌전한 공동체 인데 박해 받을 이유가 없다. 로마라는 사회가 무조건 박해하는 야만 사회는 아니다. 로마의 원리는 관용이다. 많은 사람들을 관용하고 민족적인 특성을 가진 모임도 존중한다, 유대교가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관용 때문이다. 클럽을 결성해서 자율성을 인정해 준다. 로타리 클럽이니 라이온스 클럽이니 하는 것도 이런 결사의 자유를 허용한 로마로부터 이어지는 전통이다. 그것이 로마의 정치다. 길드도 수공업인들의 자유를 인정해 준 것이다. 그런데 왜 로마가 기독교인을 박해했겠는가? 이것을 가만 두면 로마가 존속할 수 없겠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은차별을 인정하라고 한다. 종은 종이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니 거기에 맞게 살라는 메시지다. 그것을 깨면 박해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크리스천들의 교회는 우리는 형제고 자매의 관계를 지키겟다는 것이다. 종이고 자유인이건 그런 차별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밥이 될지언정 일체의 차별을 배제하고 서로의 형제됨,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초대교회 교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이다. 작은 공동체에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실현하고 이어간 것이다. 그 안에 어떤 물리적 강압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초대 교회의 모습이다. 아우구수티누스 황제가 들어오고 핵심적인 로마 권력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 예수가 온다. 황제의 제정으로 넘어오면서 황제는 호민관이라고 표현한다.황제를 에클레시아를 지키는 머리라고 했다. 호민관은 에클레시아 정치를 지키는 사람이고 평민 중에서 선출한다. 호민관을 살해하면 반역죄로 생각해서 처단하는 로마의 민주정치의 상징이다. 그래서 황제도 자기를 호민관이라고 언급하며 로마의 긍지인 에클레시아 제도, 원로원 제도, 민주정치의 기구를 파기하지 않고 놔둔다. 내용적으로는 황제가 임기제로 하던 것을 전횡하지만 형식상으로는 에클레시아 정치에 정면 도전하지는 않았다. 그만큼 로마의 긍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공동체를 에클레시아라고 불럿다는 것은 “너희들의 민주정치는 실패했다. 너희의 에클레시아는 실패다. 우리들의 에클레시아가 참다운 정치다.”라는 선언이다. 로마는 “에클레시아의 머리는 황제다”고 하는데 교회는 “에클레시아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다”고 한다. 우리는 그 말을 감동없이 받는데 엄청난 이야기다. 에베소서 1장을 보면 교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통치자와 권세자를 굴복시키고 참다운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실 때를 말하는 맥락에서 그리스도가 에클레시아의 머리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어 교회라는 종교 공동체에만 영향력을 미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에클레시아의 머리다는 말은 황제가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고통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신다.
교회에 대해 조그만 공동체인데 10년후 20년 후 존속할 것 같지않다고 생각하는 그런 분들은 자기가 교회의 머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내가 해가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교회의 머리다. 나는 지금 이순간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 나는 지금 내가 선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10년, 20년, 30년 후에도 존속할 교회를 찾으려면 대교회로 가야 한다. 교인들 중에 열가정 빠져 나가면 획 흔들리는 이런 교회는 올 필요없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께서 지켜 가신다. 초대 교회의 고백도 마찬가지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전쟁이 많이 일어난다. 로마 정치 안에 복잡한 코드들이 진행된다.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에 자료로 대신하겠다.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옛날에는 교회를 구원의 방주로 생각했다. 물에 빠져 헤메이는 세상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최대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선교라고 생각햇다. 아주 오래된 교회에 대한 생각이다. 1900년대 중반에 이런 생각이 깨진다. 교회가 선교의 주체가 아니고 하나님이 선교의 주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고통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 속에 직접 역사하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면 된다. 주체가 교인을 만드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이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기지다. 하나님이 직접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역사하는 일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에 가담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에 고통에 참여하시는 역사에 참여하는 개념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면 교회의 모든 제도가 바뀐다. 하나님께서 세상에서 사역하고 세상을 정의롭게 하는 사역을 돕는 역할이 교회다. 선교라는 것도 교회 안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해방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다. 개인 구원이 목표가 아니고 이 세계의 평화와 세상의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 교회의 목표가 된다. 교회에 대한 사역이 이미 1950년대에 달라지게 된 것이다. 한국교회에는 달라진 선교가 들어오지 않는다. 이 세계의 평화와 세상의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 교회의 목표라는 것은 소수의 선각자들에 의한 이야기이지 여전히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 들이는 것이 교회의 유일한 선교로 생각한다. 개념이 달라졌기 때문에 세비어쳐치 같은 획기적인 선교의 모습이 나온 것이다. 왜 교회가 그런 선교를 하나? 예배보고 찬양하면 되지. 토기장이집, 요셉의 집 같은 다양한 사역을 감당하는 그것 자체를 교회로 인정하는 것이다. Cell Church 라는 것을 많이 한다. Cell 이라는 기본 단위가 교회다. 한국의 Cell Church 는 다시 교회로 불러들여 한데 묶을려고 한다. 그런데 본래 Cell Church는 하나하나의 세포가 교회다. 교회 예배에 전체가 참여할 필요가 없다. 셀 자체에서 예배하고 교육하고 상담하고 평신도가 세례도 준다. 설교, 세례, 성찬 모든 것을 평신도를 중심으로 하고 그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교회가 Cell Church이다. 한국은 구역 개념으로 Cell Church 를 한다. 잘못된 도입이다. 평신도 끼리 모여서 하나의 교회를 형성하고 해나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해나가는 세포단위가 되는 개념이 Cell Church 다. 교회와 선교에 대한 개념이 획기적으로 달라졌다. 교회 전통이라는 개념에만 묶이면 달라질 것이 없다. 작은 공동체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진장 많다. 그 안에서도 굉장한 일들을 펼쳐갈 수 있는 여력이 있고 가능성이 있다. 꿈을 세우고 도전하고 시도해 간다면 얼마든지 다양한 역할을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선교가 한층 더 발전되어 나아간다. 2013년 부산에서 WCC성령의 개념이 추가된다. 그래서 이제까지의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인간 구원과 인간에 중심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제 전 우주적인 생명교회로, 성령의 사역으로 온 피조물과 모든 문화권과 우주 자체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개념으로 확대하는 개념으로 10차 WCC 부산총회 때 선포하고 확대했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온 우주적 관계를 회복시키는 주인으로 고백한다. 그래서 인간의 권리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권리, 온 우주 사물의 자체적인 권리를 회복하고 생명의 권리를 보장하는 회복하는 주체로 예수그리스도를 본게된다.
여러분이 토론하신 자료를 살펴봤다. 우리 교회 이야기와 같다. 우리 교회도 공부랑 토론을 좋아한다. 너무 그런데 집중하다보면 머리만 발전하는 교회가 된다. 여성, 젊은이들은 시시콜콜 따지고 토론하는데 들어가기가 싫은 것이다. 그래서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장년 위주의 취향을 가진 분들의 교회로 국한되기 쉽다. 우리 교회도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리 교회는 결과를 중요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중요시 하는 것으로 바꾸어 가려고 노력하였다. 얼마나 같이 함께 해낼 수 있는가라는 과정 중심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절기마다 절기에 맞는 감자설기떡, 쑥버무르기 등등의 게절에 맞는 떡을 만드는 모임을 한다. 떡 만드는 것을 잘 아는 분이 주관해서 절기 떡을 만들어서 그 자리에서 온ㄴ 교우들이 달려들어 우리의 전통도 배우고 떡 만들어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여유분은 포장해서 판매를 하여 교회의 선교 기금으로 이웃을 돕는데 쓴다.
바느질 하는 모임도 한다. 남성들이 직접 바느질해서 조끼 만드는 모임을 했다. 남신도가 25명이 신청을 했다. 색동 조끼를 디자인해서 천을 사와서 자르는 것, 마름질해서 바느질 해서 꿰매는 법 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품을 만드는 것이 2-3주 걸린다. 자르고 엮고 하는데 남성들이 참여해서 생전 처음으로 바느질도 배우고 자기 손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남자로서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기쁨을 얻었다. 내손으로 옷을 해서 입을 수 있다는 것이 기적적인 일이었다. 그것을 성가대 가운으로 했다. 25개 색동옷이 탄생된 것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 살아가는 과정이 기쁨이다. 내 손으로 옷도 지어 입고 떡도 만들어 먹고 집도 짓는 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그런 것을 다 잊어 버리고 상품 세계에 뺏긴 것이다. 떡 만드는 법 몰라도 만원짜리 한 장 가지면 잘 만들어진 떡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상품으로 구입할 수 있는 사회에 산다. 그것들을 이루어가는 과정이 우리 삶의 기쁨인데 진짜 삶의 기쁨은 다 뺏긴 것이다. 돈을 쓰는 기쁨뿐이다. 돈을 쓰는 기쁨을 누리려면 잘 벌어야 하는데 잘 벌지도 못하니 불만만 쌓인다. 자꾸 쓰지도 않는 물건을 사들여 쌓아 노려니 더 큰 아파트가 필요하고 더큰 돈이 요구되는 악순환에 빠져 우리들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간다. 우리들은 필요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 자기 삶을 누려보지도 못하고 돈만 버는 기계로 살아간다. 우리 삶에서 직접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을 교회에서 경험하도록 그래서 삶의 기쁨을 찾도록 교회에서 도와주는 것이다. 강원도에서 온 사람, 전라도에서 온 사람이 서로 음식만드는 법, 장만드는 법이 다 다르다. 그것들은 한번씩 다 익혀보는 것이다. 강원도의 장 담는 법을 배우고 익히고 교인들에게 판매도 하고 기금을 만든다. 삶의 모든 영역에 얽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교회 안에 신바람 나는 사람이 늘어난다. 교회 안에서 장만들고 바느질하는 분이 교회 안에서 주인이 된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기쁨을 찾고 생전 말 한마디 하지 못하던 연세든 권사님이 그런 일을 통해 주인이 된다. 교회에서 토론, 성경공부만 하면 머리만 발달하고 말 잘하는 분들만 드러나고 나머지는 다 숨어버리게 된다. 다양한 모든 것을 실행할 수 있는 과정을 실행하는 것이 교회의 일이 되면 그런 과정 속에서 서로 배우고 익히며 그 사람의 존귀함을 새롭게 익힌다. 내가 먹는 장 하나가 이렇게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그런 일을 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주인으로 세우고 칭찬해 준다. 장을 만드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고 그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람을 새워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를 향해 칭찬하고 박수 치고 그분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과정에서 모두가 기쁜 것이다. 그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이 다 중요한 역할을 하게된다. 우리의 진보적인 삶의 목표는 상품 세계의 결과물을에 매몰되지 않고 삶의 모든 과정에서 우리들의 주인됨을 찾아오는 것이다. 화폐에 매이지 않아도 우리끼리의 삶을 공동체의 삶을 회복해 가면 대안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런 대안 공동체를 찾아가는 토대를 교회 안에서 만드는 것이다. 열 사람이 꿈이 있으면 열가지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서로를 격려하고 세워줄 수 있는 에너지 넘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란다. 교회라는 것은 서로의 관계, 사랑이 없으면 교회가 아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하셨다. 우리 손에 가시가 들어왔을 때 그에 대한 감각이 없으면 건강한 사람이 아니다. 손가락 하나가 가시에 찔리더라도 온몸이 ‘앗’하고 소리치고 놀라는 것, 그런 유기체성이 없다면 교회가 아니다. 누가 아픔을 당하면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유기체적인 공동체다. 누가 자랑스런 일이 있으면 내가 나서서 자랑해 주는 것, 그래야 살맛이 있다. 기쁜 일이 있어도 기쁜 일을 나눌 수 없으면 기쁘지 않다. 아무리 좋은 경치를 봐도 저 혼자만 보면 별 감흥이 없다. 새로운 경치의 감흥을 나누고 함께 기뻐할 사람이 있어야 관광을 해도 기쁘다. 서로 나누는 사람이 있을 때 유기체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때 교회가 교회 다운 것이다. 그런 관계가 깨질 때, 개인주의라는 고약한 것이 들어와 유기체적인 관계를 거슬러 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남의 비리를 들추어내면 내가 더 의로워 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 아니다. 그 사람이 옳지 못하면 나도 옳지 못한 것이다. 구약에 보면 아간 하나가 범죄했을 때, 전 민족이 댓가를 치른다. 아간이 털외투와 동전 몇 개 숨겼다고 온 민족이 전쟁에서 패하고 수만의 사람이 죽게 된다. 연대적인 책임이다. 우리 안에 부끄러움을 당했으면 우리 모두가 감싸주고 보호해 주고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형제 자매의 관계이고 유기적인 관계다. 그 사람이 다시는 고개를 못 들 정도로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에 대해 아픔을 가지고 조심스레 보호하고 감싸주지 못하면 교회가 아니다. 누가 기쁜일이 잇는데 “저만 잘났나? 맨 자기 자랑만 해?”라고 하면 교회가 아니다. 그가 자랑하기 전에 먼저 자랑해 줘야 한다. 그런 유기체적인 관계가 있을 때 우리 교회가 살맛나는 것이다. 서로가 물고 비난하면 거기 서면 불안하고 빠지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 교회 안에 정말 서로를 위해주고 하나가 되는 공동체성을 회복해 주면 자라나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그런 관계가 회복되는 하늘씨앗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질의와 응답
1. 목사님 저는 현재 감사하고 감격스럽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교회가 나아갈 길,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데 하늘씨앗의 고민이기도 하다. 그 부분 명쾌하게 짚어주셔서 감사하다. 하늘씨앗교회가 지향할 것들 말씀해 주셨는데 청년들, 여성들이 궁금하고 답답한 것에 대한 답을 주셔서 감사의 말씀 드린다.
=남성들이 모여서 면생리대 만드는 모임도 한다. 여성들의 화학 생리대가 안좋아서 면생리대 만드는데 남녀가 토론하면서 면생리대를 만든다. 그러면서 남성과 여성을 이해한다. 교우 한분이 교사인데, 학교 간부 수련회를 하면서 남학생 여학생 역할 바꾸기를 했다. 여학생들은 회의를 하고 남학생은 음식준비를 한다. 수련회 하는 동안에 남학생들이 생리대를 3박 4일 동안 착용하게 한다. 나중에 끝난 다음 소감을 이야기 하는데 놀랍게도 남학생들이 내 친구들 여학생들이 이렇게 불편하게 사는지 몰랐다. 누가 생리하면 놀려주고 괴롭혔는데 이렇게 불편하게 생활하는 것을 알았고 내가 잘못한 것 같다. 회개도 한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자기가 몰랐던 것을 알고 이해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역할들을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남성들이 물주머니를 배에 차고 임산부 경험을 해본다. 엎치락 뒤치락 이틀만 하면 자기 부인이 얼마나 위대한지 10개월 동안 고생한 것을 알고 부인을 위하지 않을 수 없다. 남의 입장에 서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성령의 역사다.
2. 들꽃향린교회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보면 30대 젊은이들이 보이던데 교회 평균 연령은?
=30-40대가 중심이다. 50-60대도 계신다. 그런데 젊은이가 많다. 아무래도 처음 교회 시작한 30대가 40대가 됐다. 젊은이들이 많아서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다.
3. 곱고 여성스러우시네요. 귀엽고 감사합니다.
4. 들꽃향린교회에는 주일 11시 예배후 찬양예배나 기도회는 어떻게 하나요?
=예배는 11시 주일 예배만 있다. 1부 예배로 교회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9시 30분에 예배를 드린다. 오후에 바쁜 분들이 오기도 한다. 오후에는 부서별, 신도회별 모임을 갖는다. 주일 날 교인들이 그룹별 모임하면서 교회 안에 머물러 있다. 주중에도 동아리 모임이 많다. 여기도 찬송에 국악이 많은데 향린공동체에서 국악 찬송가를 만들었다. 예배시간에 해금과 피리, 가야금 등 악기들을 배워서 국악으로 반주를 한다. 악기를 배우기 위해서 주중에 선배되는 사람이 후배를 가르치는 모임을 갖는다. 교회 안에서 국악을 배우는 것이다. 그런 악기 배우는 모임이 주중에 진행된다. 풍물을 배우는 모임도 있고 주중에는 동아리 모임이 많다. 수요일은 성경 공부를 한다. 제가 리더가 되어 오픈강좌를 한다. 우리 교인도 있고 절반 정도는 밖에서 오신다. 영성모임, 기도모임은 한달에 한번 정도 한다. 경우에 따라 1박 2일 가든가 교회 안에서 토요일 날을 잡아서 기도모임을 진행한다. 자율적인 동아리 모임이 활발한 편이다.
5. 사회참여는 어떤 식으로 하나요?
하늘씨앗교회 여러번 왔다. 예수살기 모임 때문에 주중에 왔다. 교인들과 직접 만나는 기회는 처음이다. 김남규 목사님이 좋은 기회를 주셔서 고맙다. 제가 들꽃향린교회를 시작하고 보니 그때 한국 교회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기 시작한 때다. 개독교라는 말을 들었다. 한기총이 일어나고 기독교의 대표기관처럼 되면서 기독교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를 위해 새로운 모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한상렬 목사님이 전국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기에 저도 함께 예수살기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회원이 300명 정도다. 아직은 작은 공동체이지만 그때 예수살기를 안만들었다면 한국교회가 어찌 되었을까 싶었다. 송기득 교수님도 도움을 주었고 순천에서 모임이 시작되었다. 순천지역 모임은 잘되었다가 안되다가 그런 상태에 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모임이 조직적으로 잘되고 있다. 서울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들어오게 되면서 투쟁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전에 있던 기독교 단체들이 두 번의 민주정부를 하면서 대거 여권으로 유입되었다. 여당입장이 되어 야의 역할을 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그 분들이 공을 세워서 여권에서 필요한 역할을 하지만 정치 세력으로 가담하면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노무현 정권 때도 대추리 사건 등이 있었고 FTA도 체결하게 된다. 진보적 기독교인사들이 정치권에 들어가니 자유롭게 말할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살기 모임을 만들었다. 광우병 사태로 밑바닥에서 민중들이 나오는데 그동안 대추리, FTA 등에 부정적이었던 기독교인들이 갑자기 거리로 나와도 지도력이 안 생긴다. 그때 예수살기가 촛불을 들고 앞장을 섰다. 보수 정권에 들어서면서 집회 결사의 자유가 막혀. 집회를 열려면 예배를 드리고 이야기하는 장을 열어 주어야 집회가 가능하게 되었다. 맞춤으로 예수살기가 만들어졌다. 촛불집회가 사라지게 되면서 촛불교회라는 것도 만들게 된다. 집회가 잘 안되던 때라 밖에서 예배드리던 모임 얼마나 갈까 많은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봤다. 그런데 6년 넘도록 매주 목요일 고난 받는 현장에서 예배를 드린다. 용산 참사 났을 때 철거된 빌딩 사이에 얼마나 춥고 쓸쓸한지 모른다. 한겨울에 영하 20도 내려갈 때는 정말 예배드리기가 어렵다. 그런 날 가보면 골목 끝까지 사람들로 가득 찬다. 연세든 분들 이 옷을 몇 개 씩 입고 거기에 나오신다. 추운날 어찌 나오셨나요? 여쭈면 “오늘은 너무 추워서 아무도 안나올 것 같어서나라도 머릿수를 채우려고 나왔네”라고 하신다. 그런 날은 골목 끝까지 채워서 예배를 드린다. 용산, 쌍용차, 기륭전자, 재능 교육, 광우병, 등 어려운 현장에 나가서 현장에 다니면서 박해받는 노동자들, 그들을 대변하고, 말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기독교 권에 알리고 함께 하는 자리를 6년째 계속하게 된다. 예수살기를 토대로 촛불교회를 만들고 기독교와 사회 현장의 연결 고리를 촛불교회가 한다. 예수살기와 촛불교회가 이 엄혹한 정치현실을 뚫고 나가는 중요한 축이 되고 있다. 저희 교회는 힘을 다해서 거기에 함께 참여하고 있다.
6. 목사님이 주축이 되면 교인들은 얼마나 참여하고 있나요?
참 어려운 것이 교회라는 곳은 다양한 공동체다. 마음이 있는데 시간이 안나는 분도 있고 그런 역할이 무서운 분들도 있다. 오금이 떨려 견디지 못하는 분도 있다. 저도 겁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나가는 것이 어색하고 천성적으로 어려운 분들도 있다. 저는 그런 모든 분들을 같이 끌어 안을 수 있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사는 모든 사람을 품어 안는 역할을 한다. 기도하는 분은 기도하고 나가서 활동하는 사람은 나가서 활동한다. 그러나 나가는 사람은 저분들의 기도 덕에 나가서 한다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저 분들이 나가서 싸워줘서 고맙다고 생각한다. 각각 자기의 몫이 있다. 다 자기 역할이 있는 것이다. 그들을 품고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것이다. 저희가 소속한 노회에 내는 상회비 적지않다. 그러나 촛불교회나 예수살기에 지원하는 몫이 그보다 훨씬 많다. 그런 몫을 지원하고 관심이 있고 시간이 되는 분들이 참여하게 돕는다. 못나오는 분들에게 당신들은 왜 안나오냐고 비난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다양성을 존중한다.
7. 들꽃 향린교회는 기장 교단에 속해 있다. 우리는 무소속 평신도 대안교회다. 교단에 속해 있는 것이 구속이 되지않나? 여차하면 이단삼단하는데 대안 교회의 가능성은 어떻게 보나?
제가 속한 교단은 비교적 자유롭고 열려 있는 교단이기에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교단에 속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는 것이 교육의 문제다. 어린 아이들, 청소년을 교육하는 신학생 공급을 받지 못한다. 신학생들은 목사 안수를 받는 과정이라 교단 소속이 없으면 그런 공급이 끊긴다. 목회자 모시는데도 어렵다. 교단에 속하고 안속하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다. 장단점이 있다. 그런 모든 점을 감수하니 문제는 안되리라 생각한다. 좀 보수적인 교단에 소속한 분들은 교단의 입장에 따라 재갈 물리고 활동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 예수살기 활동하는 분들 중에도 보수적인 교단에 속한 분들이 있다. 자유로운 양심에 따라 활동하지 교단 내에서 그런 활동이 드러나면 왕따를 당하거나 인사의 불이익을 받는 것을 보게된다. 그런 면은 불편한 점이다.
8. 교회도 하나의 유기체라고 하셨다. 유기체는 정신도 있지만 몸도 있어야 한다. 교회도 좋은 뜻으로 죽을 자리를 찾는 곳으로 그런 뜻을 펴는 곳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람들이 자꾸 들어오고 질적인 성장도 필요하다. 적절한 균형과 조화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 교회의 경험을 비추어 보면 양적인 성장이라는 것이 어려울지는 알고 있는데 들꽃에서 조직적인 성도관리, 교육, 양육 등 노하우를 듣고싶다.
=저희도 잘 못하는데 노하우를 말씀하라니 난처하다(웃음)..저희가 10년 동안 생각하면..하늘씨앗교회는 열분이 시작했는데 많이 성장했다. 들꽃도 강남향린교회에서 26명이 분가해서 시작했다. 10년 지나서 결산해보니 많은 성장을 했다. 인원으로는 500%, 교회 자산은 400% 성장, 예산 규모도 성장해왔다. 우리는 느려 터지고 왜 이렇게 성장 안하나 싶었는데 지나보니 많이 자랐다. 특별히 교회 성장을 위한 프로그램을 하지는 않았다. 자기 교회를 사랑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성장이 된다. 부지런히 교회자랑, 목사님 자랑을 해라. 여기 대안이 되는 교회가 있다. 세상 밖에서 상처를 받아서 교회를 나갈 수도 안나갈수 없고 이걸 고민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왜 그런 사람들 모셔오지 못하나? 기회 있을 때마다 권고도 하고 해서 한 사람씩만 찾아와도 금방 배가 된다. 양적인 성장도 해야 좋은 일도 할 수 잇다. 우리는 왜 성장 안되나 그런 폐쇠적인 생각에 스스로를 가두면 안된다. 사기를 위해서도 늘어나는 것이 좋다. 그런 일이 생겨야 긍지도 있다. 생명체는 뭔가 자꾸 자라야 생명체다. 밖에 나가 자랑하고 사람들을 자꾸 초청하고 함께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진보적인 교회는 잘 안 된다는 그런 한계를 스스로 재갈 물릴 필요가 없다. 진보적인 교회니까 우리는 잘 되리라고 해야 한다.
9. 우리 아이들 둘이 서울에 있다. (웃음) 교회 자랑을 하신다면?
젊은이들이 많고 자유롭다. 생각이 열려있고 교우들 간에 이해와 공감의 폭이 넓다. 저는 텔레비전에서도 보셨겠지만 사회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제가 목회를 하면서 또한 받는 공격은 우리 목사님이 보수화됐다. 개량적이다는 이야기를 항상 듣는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나보다 진보적인 삶을 사는 것 같지도 않는데 끊임없이 그런 공격을 듣고 산다. 그런 공격 때문에 서로가 상처를 받는다. 진보적인 교회에서 어른들이 권위가 서지 ㅇ낳는다. 항상 그런 공격에 노출된다. 교인들끼리 그런 상처를 받는 것에 우리가 자유롭자. 그만한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공격을 하면 귀엽게 봐주고 사랑스럽게 바라보자.
송기득-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내가 엄청난 소리를 해도 사람들이 관용해서 그런지 아무 소리도 안한다. 공격을 좀 했으면 좋겠다. 공격받는 것은 축복이다.
9. 기독교의 절대성에 대해 묻고 싶다. 다원주의 문제 솔직해져야 한다. 목사님의 입장은?
=제가 우리 아버지를 존경한다. 우리 아버지를 최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내 아버지가 멋있고 좋은 분이니까 너희들은 오늘부터 내 아버지를 너희들의 아버지라고 불러라”라고 하면 폭력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저는 나면서부터 기독교 신앙 밖에 모른다. 제 평생 연구의 대상도 성경 말씀으로 산다. 그렇지만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내 신앙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 내가 내 아버지를 자랑하고 사랑하는 것은 나의 긍지이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나도 나의 권리가 있고 다른 사람은 다른 권리가 있다. 세상이 다원적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양하게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다원주의라고 이야기 하는 자체가 뭔가를 전제하는 것이다. 세상이 원래 다원적이다.
10. 건강한 모습 감사하다. 이스라엘 멸망 후에 유대교의 본래 정신으로 시작된 것이 기독교라고 말씀하셨다. 유대교의 본래 정신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 기독교라고 하셨는데 기독교는 실제로 예수의 삶과 죽음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구약의 종교라는 것이 출애굽부터 시작한다. 히브리 노예를 해방한 이야기 이고 자기들의 땅을 얻고 나라를 얻고 자기들의 공동체를 갖는 것이 구약의 역사다. 구약 역사의 핵심은 히브리 노예 해방의 역사다. 신약도 예수님이 로마 식민지 변방에 있는 사람이 가난한 자, 죄인으로 억압 받는 자. 어린 아이, 여성 이런 사람들을 본래 사람다운 대접을 받는 하나님 나라에 초청하신 것이다. 본래 성경의 정신이 그렇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본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고 유대교는 종교적 형식과 전통을 유지하는 데에 비해 기독교는 근본적이고 래디칼한 것이다. 유대교를 혁파하는 종교가 기독교엿다는 뜻으로 그렇게 말씀드렸다.
11. 성경에 구원이 나온다. 목사님이 생각하는 구원은?
구원이라는 말이 구약에 보면 히브리어로 ‘가알’이라고 이야기 한다. 본래 히브리 사회에서 ‘고엘’ 이라면 가알의 명사형인데 친척이라는 말이다. 친척 간에 갖는 의무가 있다. 친척이 땅을 잃어버리면 친척이 선매권을 행사해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아준다. 노예로 가면 대신 돈을 내주고 찾아온다. 속전이라고 한다. 그 집이 먹을 것이 없으면 다음 농사지어서 추수할 때까지 무이자로 음식을 대여해 준다. 상속자가 없으면 상속자를 대신 내준다. 남에게 어려운 상해를 입으면 그것을 복수를 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다. 친척들끼리 서로 도와주면서 삶의 자리에서 몰락하면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친척의 의무였다. 친척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 가알이다. 그 말을 신약이 그대로 따왔다. 예수는 우리를 속량한다는 말은 무슨 세탁기 선전하듯이 예수의 피로써 깨끗하게 속량이 되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인 사회적인 프락시스가 있는 것이다. 친척이 땅을 잃어버리면 땅을 되찾아주는 구체적인 구원의 행위가 행해지는 것을 구원한다고 한다. 그것을 속량한다고 이야기 한다. 지금은 사회적은 것은 삭제되고 개인적인 것을 가지고만 말한다. 본래의 모습을 잊어버린 것이다. 본래의 사회적 구원, 삶의 위치를 회복시켜주는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구원한다는 말이 그런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회적인 면은 생략이 되고 심리적인 것으로 축소되었다. 잘못된 교회사를 통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사회자 마무리- 우리 토론회 내용을 자세히 보시고 오늘 맞춤형 진단과 처방을 해 주신 것에 대해 더욱 감사드린다.
지난 정권의 잘못된 점을 저항하며 6년 반 동안 길거리에서 집회를 하셨다. 유튜브에 경찰차에 실려 가는 동영상이 실렸다. 박수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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