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과나무
모과나무가 한사코 서서 비를 맞는다
빗물이 어깨를 적시고 팔뚝을 적시고 아랫도리까지
번들거리며 흘러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비를 맞는다, 모과나무
저놈이 도대체 왜 저러나?
갈아입을 팬티도 없는 것이 무얼 믿고 저러나?
나는 처마 밑에서 비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모과나무, 그가 가늘디가는 가지 끝으로
푸른 모과 몇 개를 움켜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끝까지, 바로 그것, 그 푸른 것만 아니었다면
그도 벌써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왔을 것이다 *
* 염소의 저녁
할머니가 말뚝에 매어 놓은 염소를 모시러 간다.
햇빛이 염소 꼬랑지에 매달려
짧아지는 저녁,
제 뿔로 하루 종일 들이받아서
하늘이 붉게 멍든 거라고
염소는 앞다리에 한 번 더 힘을 준다
그러자 등 굽은 할머니 아랫배 쪽에
어둠의 주름이 깊어진다.
할머니가 잡고 있는 따뜻한 줄이 식기 전에
뿔 없는 할머니를 모시고 어서 집으로 가야겠다고
염소는 생각한다. *
* 빗소리 듣는 동안 - 안도현
1970년대 편물점 단칸방에 누나들이 무릎 맞대고 밤새 가랑가랑 연애 얘기하는 것처럼
비가 오시네
나 혼자 잠든 척하면서 그 누나들의
치마자락이 방바닥을 쓰는 소리까지 다 듣던 귀로, 나는
빗소리를 듣네
빗소리는
마당이 빗방울을 깨물어 먹는
소리
맛있게, 맛있게 양푼 밥을 누나들은 같이 비볐네
그때 분주히 숟가락이 그릇을 긁던 소리
빗소리
* 원추리여관
왜 이렇게 높은 곳까지 꽃대를 밀어올렸나
원추리는 막바지에 이르러 후회했다
꽃대 위로 붉은 새가 날아와 꽁지를 폈다 접었다 하고 있었다, 원추리는
어쩔 수 없이 방을 내어주고 다음달부터 여관비를 인상한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했다
멀리서 온 것이나 키가 큰 것은 다 아슬아슬해서 슬픈 것이고
꽃밭에 널어놓은 담요들이 시들시들 마르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가을이 되면 어린 잠자리들의 휴게소로 간판을 바꾸어 달아도 되는지 면사무소에 문의해볼까 싶었지만
버스를 타고 올라오기에는 너무나 멀고 낡은 집이어서 관두기로 했다
원추리 꽃대 그늘이 흔들리다가 절반쯤 고개를 접은 터였다 *
달량달량 먼저 소리를 만들어서는 귀속 내실로 들여보내고 말 것 같은,
마치 내 귀에 여름 내내 달려 있는 당신의 말씀 같은,
귀걸이를 달고 봉숭아는
이 저녁 왜 화단에 서서 비를 맞을까
왜 빗소리를 받아 귓불에 차곡차곡 쟁여두려고 하는 것일까
서서 내리던 빗줄기는
왜 봉숭아 앞에 와서 얌전하게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일까
빗줄기는 왜 결절도 없이
귀걸이에서 튀어오른 흙탕물을
빗방울의 혀로 자분자분 핥아내게 하는 것일까
이 미칠 것 같은 궁금증을 내려놓기 싫어
나는 저녁을 몸으로 받아들이네
봉숭아와 나 사이에,
다만 희미해서 좋은 당신과 나 사이에,
저녁의 제일 어여쁜 새끼들인 어스름을 데려와 밥을 먹이네 *
* 안도현시집[북항]-문학동네
* 늙은 정미소 앞을 지나며 - 안도현
왼쪽 어깨가 늙은 빨치산처럼 내려앉았다
마을에서 지붕은 제일 크지만 가재 도구는 제일 적다
큰 덩치 때문에 해 지는 반대쪽 그늘이 덩치만큼 넓다
살갗이 군데군데 뜯어진 덕분에 숨쉬기는 썩 괜찮다
저녁에는 나뒹구는 새마을 모자를 주워 쓰고
밥 냄새 나는 동네나 한 바퀴 휙 둘러볼까 싶은데
쥐가 뜯어먹어 구멍난 모자 속으로 별들이 쏟아질까 겁난다
어두워지면서 못 보던 쥐들이 찾아와서 쌀통이 비었네,
에구, 굶어죽게 생겼네, 투덜대며 뛰어다니는 통에 화가 좀 났다
그럼 바닥에 수북한 까맣게 탄 쌀알 같은 쥐똥은 뭐란 말인가
밤이 되니 바람이 귓밥을 파주겠다며 달그락거린다
그렇다고 눈물 질금거리는 전등 따위 내걸지 않는다
혹자는 이미 죽어 숨이 넘어간 목숨이라는데
아직은 양철 무덤을 삐딱하게 뒤집어쓰고 버틸 만하다 *
* 안도현시집[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현대문학북스
* 시집 - 안도현
어탕국수를 만들기 위해 물고기 배를 따는 것은
그들이 평생 단 한 번도 벗지 않았던 옷을 벗기는 일
속을 들여다보면 요지경이다 창자의 길이가 일만 오천 자나 되는 물고기도 있고
부레의 크기가 황소 하품만 한 물고기도 있고 간의 두께가 나비의 날개처럼 얇은 물고기도 있다
지느러미 끝에 창을 꽂아 내 손톱 속을 찌르는 물고기도 있고
뱃속을 다 훑어냈는데 꼬리로 냄비 바닥을 치는 물고기도 있다
나는 사다리 내리고 물속을 들어가 볼 엄두도 내지 못하였으나
그들은 한시절 남달랐다 그들은 연못을 뚫는 은빛 총알이었고
밑바닥을 떼로 모여 다니는 버드나무 잎사귀였다
그들은 사상 검열의 그믈에도 걸리지 않던
수면을 찢어 붉은 깃발로 만들고 싶어 하던 어족들
하여 나는 시래기를 양념에 버무리고 마늘을 다져넣고 어탕을 끓이면서
뜨겁고 매운 연못을 한 그릇씩 들이켜던 식성 좋은 입들을 서러이 그리워한다 *
* 山에 대하여 - 안도현
山은 저 홀로 푸르러지지 않는다네
한 山이 그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山에게 자기를 넘기면
그 빛깔 흐려진 山이 또 빛깔 흐려지며 그 너머 山에게 자기를 넘긴다네
山은 또한 저 홀로 멀리 사라지지 않는다네
한 山이 한 山을 받아 앞에 선 山에게 짙어진 빛깔 넘기면
그 山은 또 그 앞에 선 山에게 더 짙어진 빛깔 넘기고
그 빛깔 넘겨받은 山은 그 앞에 선 山에게 더더욱 짙어진 빛깔 넘긴다네
소나무 푸른 것은
우리 동네 앞산
우리 동네 앞산은
소쩍새를 키운다네
모든 첫 만남은
설레임보다 두려움이 커서
그대의 귓볼은 빨갛게 달아오르겠지만
떠난 다음에는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걸어갈 길이 더 많은 우리가
스스로 등불을 켜 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있어
이 겨울 한 귀퉁이를
밝히려 하겠는가
* 찔레꽃
봄비가 초록의 허리를 몰래 만지려다가
그만 찔레 가시에 찔렸다
봄비는 하얗게 질렸다 찔레꽃이 피었다
자책, 자책하며 봄비는
무려 오백 리를 걸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