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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는 스승의 사후 「만장」, 「제문」, 「묘지서」, 「묘지명」 및 『계산기선록』을 짓기도 하였다. 이 중에서 후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스승의 언행을 기록한 『계산기선록』이다. 이 책의 목판본과 필사본은 모두 『간재집』에 실려 있는데, 전체적으로 내용은 거의 비슷하지만 木版本과 筆寫本은 체제와 條數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다. 목판본은 16절 140조와 1571년에 저자가 쓴 「기선총록」을 수록한 뒤, 권말에 1665년에 쓴 김응조의 「발문」을 붙였다. 필사본은 권두에 1571년에 저자가 쓴 「서분」(「기선총록」과 내용 같음)에 이어 16절 115조를 수록한 뒤, 권말에 1665년에 쓴 김응조와 1666년에 쓴 김만휴의「발문」을 붙였다. 이 책은 퇴계의 학문이나 인품, 생활 태도 등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많이 실려 있어 퇴계연구의 기초자료로서도 매우 중요하며, 뒤에 편찬된 ‘퇴계언행록’에서도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간재가 파악한 퇴계 선생의 모습이 어떠했던가를 이 책에서 몇 조목만 살펴보자.
◦선생은 심경을 읽어 본 뒤에 처음으로 심학의 연원을 알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그는 평생 동안 이 책을 神明과 같이 믿고 嚴父와 같이 존경했다. 1) ◦선생은 점치는 이에 대해서 그 이론을 알고 계셨으나 직접 점치기를 좋아하지 않으셨다. 2) ◦선생은 새벽에 일어나 큰 소리로 『심경』을 외우고 곧 이어 『논어』를 공부하셨으며 쉬지 않고 노력하시기를 이렇게 하였다. 3) ◦산수가 맑고 아름답거나 폭포가 흐르는 곳이면 어디나 직접 가서 구경하고 시를 읊은 뒤에 돌아오지 않은 곳이 없었다. 4) ◦개울에서 낚시를 하다가 고기가 낚이면 도로 놓아주었다. 5) ◦어떤 중이 생강을 바치니 선생은 거절하면서 “너는 이것으로 살아가는데 내가 그 값을 지불할 수 없으므로 사양한다.”라고 하셨다. 6) ◦고향에 계실 때에는 남보다 먼저 부역을 하시니 사람들이 다 이를 본받았다. 7) ◦선생은 고향에 계실 때 비록 비천한 사람이라도 한결같이 공손하게 대접하시고 기쁜 일에는 경축을 슬픈 일에는 조문을 하며 아픈 사람을 구조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서 힘이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시고 성의를 다하셨다. 8)
간재가 스승인 퇴계를 얼마나 존모하였는지는 그가 남긴 많은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간재는 퇴계의 생전에 편지에서 이미 ‘夫子’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했다. 퇴계는 이에 대해 ‘부자’ 두 글자를 지우고서 답서에서 비웃음을 당할 것이니 쓰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夫子’는 존칭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9), 공자의 제자들이 오로지 공자만을 ‘부자’로 이른 뒤로는 후세에 ‘스승’의 칭호로만 쓰이게 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보통 ‘先生’의 의미보다는 다소 격이 높은 말이기에 퇴계는 자신을 일컫는 말로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퇴계의 생각은 자신을 낮추려는 겸허한 마음에서 우러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간재는 존경하는 스승께 이 말을 쓰는 것이 부당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제자 중에서는 처음으로 직접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부자’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 월천과의 대화에서는 스승 퇴계를 참된 ‘聖賢’으로 표현했다.
趙月川이 덕홍에게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聖賢의 모습(軀殼)이 있다.” 하기에, 덕홍이 말하기를, “선생께서는 平實하고 白直한 道理와 虛明하고 洞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니, 어찌 단지 모습뿐이겠습니까?” 하였다. 10)
이 대화는 구체적으로 어느 해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화 내용으로 추측해 보면 위의 편지를 받은 뒤로 생각된다. 월천은 단지 겉으로 보아 ‘聖賢의 모습(軀殼)’이 있다고 한 것에 비하여, 간재는 겉으로 성현의 모습을 가졌음은 물론이고 속으로도 성현의 마음까지 지녔다고 말한 것이다. 11) 이는 퇴계에게 남 못지 않은 친자를 받은 두 고제가 퇴계를 평한 말로 묘한 대비를 느끼게 한다. 이 말로 미루어 보면 간재는 월천보다도 더 스승 퇴계를 존모하였다고 보아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유가에서 쓰는 최상의 용어인 ‘聖賢’을 쓴 자체로도 그가 스승인 퇴계를 얼마나 마음으로 열복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墓誌敍」에서는
아! 학문이 끊어진 뒤에 나셔서 전해지지 아니한 실마리를 얻어 벼슬에 나아가거나 물러나며 道를 행하거나 숨음에 시종 법도에 맞은 분을 考亭(朱子)의 뒤에서 찾는다면 오직 선생 한 사람일 뿐이다. (중략) 중국 文士들이 「聖學十圖」를 읽고 종일 완미하면서 말하기를, “동쪽 나라(朝鮮)에도 또한 이와 같은 인물이 있는가? 그의 학문은 程子나 朱子의 학문과 다름이 없다.”라 하였다. 使臣 洪天民이 南京에서 듣고 온 말이다. 12)
라고 하였다. 간재는 여기서 더 구체적이고 自尊에 찬 평가를 내렸다. 곧 학문이 끊어진 뒤에 나셔서 전해지지 아니한 실마리를 얻어 시종 법도에 맞은 분을 朱子의 뒤에서 찾는다면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중국에서 찾더라도 오직 퇴계 한 사람일 뿐으로 주희 사상의 진정한 계승자는 퇴계라는 道統說을 세우고, 중국 文士들이 평가한 말을 인용하여 퇴계의 학문 수준 13)을 중국의 程子나 朱子와 같은 수준이라고 당당하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간재는 퇴계가 그의 스승이라서 맹목적으로 찬양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퇴계의 학문수준을 근거로 객관적 입장에서 위와 같은 평가를 내렸던 것이다. 간재의 이러한 평가는 다른 여느 문인들보다도 구체적 증거까지 들어 퇴계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서 간재가 퇴계를 얼마나 경앙했는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려니와, 주자 이후 제1인자라고 하여 조선의 퇴계가 아닌 ‘세계의 퇴계’라고 자존에 찬 목소리로 당당하게 외쳤다는 점에 그 의의는 대단히 크다 하겠다. 간재 이후 퇴계에 대한 그 어떤 사람의 평가도 간재의 평가를 뛰어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퇴계를 ‘동방의 주자’라고 불러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정순목은 『간재집』에 나와 위의 기록에 대해 “홍천민 14)은 牛溪의 문인으로 언제 중국에 다녀왔는지는 상고할 수 없으나 「十圖」를 가지고 가서 江南士類와 교류하였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퇴계가 「십도」를 완성한 직후의 무렵이라고 짐작된다. 15)"고 하였다. 또 『廣瀨本 退溪先生 年譜補遺』(이야순찬)에서는 『간재집』에 실려 있는 홍천민이 남경에서 듣고 온 말이 1568(무진)년 條의 말미에 聖學十圖 및 箚子를 올린 사실 다음에 실려 있는 것 16)으로 보면 이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17)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