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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나침반 21 |
산행 때 문득 가을을 만났다.
들국화와 억새풀이 나부끼며 가을 문턱을 마중해 주었다.
햇살은 어느새 훨씬 부드러워졌고, 새털구름이 뭉실뭉실 떠도는 하늘은
예사롭지 않게 드높다.
언제 떨어졌는지 도토리 한 알이 풀잎 사이에 얹혀있다.
이내 툭~하고, 또 한 개의 윤기를 머금은 도토리가 내 발등 앞에 나뒹굴어
나를 본다. 나도 한참이나 바라보며 ‘외톨이’로 겨울날일이 염려된다.
‘길’은 ‘고요’를 음미하는 것이다.
바람 한 줄기 스쳐 하늘대는 풀꽃들이 무상無想의 ‘고요’를 알린다.
가을을 유혹하는 자욱한 안개···
오싹, 작은 한기가 느껴진다.
여름에 시달리고 지쳤던 몸이 휑한 바람 한줄기에 반갑다.
늘 다니던 산인데도 새로운 가을로 만난다.
들풀과 나무마다 조금씩 소멸해가는 모습은 비수悲愁인가 안식인가?
화려했던 삶을 마감하고 떠나는 잎새들···
깊은 산속에는 벌써 퇴색한 잎들이 흩어져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불현듯, 하루하루 삭아져가는 나를 본다.
집에 돌아와 신문을 펼쳤다.
언제나처럼 오늘 아침신문 소식도 우울하다.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서로물고 뜯는 정치판이나,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성폭행 사건의 보도를 보며,
나는 세상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외면해야 마땅했다.
나는 정치 뉴스는 그냥 흘리고, 경제와 과학뉴스에 더 관심을 두며,
문화와 아웃도어 정보는 물고 늘어진다.
어제와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우리의 정치작태가 한심스럽기 그지없다.
한국 사람에게 정치는 과연 필요악인가?
이런 근본적인 물음조차 회의懷疑스럽다.
권력과 기득권 확보를 위한 끊임없는 추태와 돈 추문,
오직,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확보와 출세만을 위한 그들만의 이익집단,
그리고 네거티브 난장판으로 얼룩진 치졸한 오합지중의 혼탁한 사회를
나는 경멸輕蔑한다.
그러나, 이를 ‘몬도가네 이야기’로만 돌릴 수 없다.
좋던 나쁘던 나와 우리들의 일인 것이다.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각해보자.
가정에서는 ‘월튼네 사람들’과 ‘초원의 집’의 드라마에 나오는 착한 아버지,
어머니와 순진난만한 딸 ‘로라’처럼 자연과, 조국과, 이웃과, 가족을 사랑하는
선량한 소시민이 되는 일이다
우리는 잘 살 수 있는 모든 기반을 온 국민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놓았는데도
지금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혼란과 위기를 맞고 있다.
전 세계의 경제와 지구환경의 전망은 극히 비관적이며,
모든 인간들은 건강과 평화로운 ‘힐링’을 인류의 최대 희망으로 삼고 있다.
이런 현상은 본격적인 선거철을 맞아 실험 되고 있다.
우리 서민들은 묵묵히 나라를 아끼는 백성들이다.
이에 반하여 정치권력의 맛에 현혹된 정치꾼과, 그들을 추종하는
일련의 정체불명의 자들이 서로 뒤섞여 떠벌리는 꼴은 추악하기 그지없다.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알고 싶다’며 호사가들이 제멋대로 아우성치며
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
이로 인한 사회적 상처와 사회자본의 손실은 너무나도 크며,
그것이 결국은 모두 국민의 부담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오직 표심에 의해서 정책과 국민의 뜻이 결정되는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 치러지는 선진 선거문화가 아쉽다.
‘민주주의 축제’라고 하는 선거가 요란스럽지 않고
케이크 자르고 와인 잔 치켜드는 가볍고 기분좋은 이벤트 축제로
후손들에게 이어졌으면 한다.
정치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라, 성숙된 국민의 길과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삶의 방식을 같이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원인과 처방이 난무하고 있지만
모두 남을 비난하는 것뿐이고 남의 단점만을 떠들어대기 일수다.
밉고 혐오스러운 일이지만 우리의 일이니, 시야를 넓혀 실상을 똑바로 보고
치유해 나가야할 수 밖에 없다.
이 병폐의 치유는 간단하다.
가정이 곧 사회이다.
가정이 치유되면 만사 OK!!
가정의 치유는 ‘가족’이 아니라 바로 ‘가장’을 저격한다.
정치, 사회와 제도 그리고 딴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지만 가장’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만사는 도로아미타불이다.
가정에서 ‘가장’들의 생활문화가 구태의연하고 특히 노는 방식이 그러하다.
‘가장’들은 직장이나 사회에 나가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첨단의 문화생활을 하면서, 유독 집에 돌아와서는 표리가 다르게 딴 사람이 되어
진부한 생활에 젖어든다.
자녀는 학교, 직장에 가고 가족은 온갖 사회교육을 받아보았자 집안에서는
‘가장’의 생활습성을 따를 수밖에 없는‘가정+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주적이다.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삼권을 쥐고 있는 가장’이 변하는 것만이 문제해결의 열쇠이다.
가장’의 성역 불가침을 부숴야한다.
‘가장’이 안돼하면 그게 법이다. 이런 구조를 우리는 미덕쯤으로 여겨왔다.
특히, 자연과 노는 다양한 문화면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사회학자나 언론, 정치권 등에서 이를 문제 삼는 것을 본적이 없다.
그렇다면 단 한번뿐인 인생 무엇으로 살아야하나?
자연과 연관된 것들과 그에 따른 레저 활동과 문화생활을 삶의 존재 의미로 삼아
가족과 공유한다. 이 취향의 재미를 ‘가장’이 앞장서면 만사 해결된다.
자연을 마다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흔히들 돈을 번 후에 취향문화를 즐겨야 한다고들 하지만
그런 사람은 그 생각을 무덤까지 끌고 간다.
더 간과 할 수 없는 착각은 자식이나 가족은 성장· 변화하지 않고
돈 벌릴 때 까지 멈추어있는 듯 그리고 세상은 변화하지 않고
마치 정체해 있는 듯 여기는 자기중심의 생각이 밉살스럽다.
밖에서는 그렇게 활달하고 일 처리를 깔끔하게 잘하던 ‘가장’이 집에서는
유난히 가부장적인 무뚝뚝하고 무표정한 사람으로 변모하는 상투성이
문제인 것이다.
‘가장’이 앞장서서 가정의 취향문화를 꽃 피워 평화롭고 엘레강스elegance한
가정을 만드는 것 말고 그 외에 또 무엇이 중요한 것이 있겠는가?
가정적이여야 한다는 말은 ‘가장’이 그냥 가정에 칩거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가족을 신명나게 하는 감성어린 분위기를 늘 조성하며
야외 레저생활에 중점을 두고 리드한다는 뜻이다.
‘가장’은 늘 파릇파릇하고 지적위트wit가 넘쳐나는 세련된 앞서가는 인품의
자격을 갖추어야한다. ‘가장’의 요건은 숙련된 기술자 이어야만 한다.
‘가장’이 가족을 변화 시키면, 세상은 내버려두어도 가족에 의해 점차적으로
바뀌어져 나가며 가족의 힘으로 이루어낸 국민의 나라가 된다.
정치꾼들이나 잡것 들이 사회개혁이니, 무슨 민주화니, 복지니 하면서
자꾸 국민을 길들이려고 비집고 들어올 틈새를 주지 말아야한다.
국민의 문화세련화로 내적 삶이 풍요로워지면 세상을 겁낼 것이 없다.
가족의 행복권이 든든한 무기이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문화설계자는 CEO인 ‘가장’이고, 가족은 땀 흘려 일하며
아웃도어를 즐기는 세계인이고 놀이터는 초원의 캠프이다.
우리는 지금,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정도의 좋은 세상에서
너무나 편리하게 살고 있다.
마트가 집 부근에 널려있고, 대중교통망은 전 세계에서 제일 잘되어있고,
IT문화는 첨단을 걷고, 사회간접자본 시설은 거의 완벽에 가깝고,
전 국토가 1일 생활권으로 형성 되어있고, 집집마다 차량을 보유하고 있어 편리하기
이를데 없다. 세계가 부러워할 지경이다.
그런데도 편리해진 것은 보이지 않고 모두가 못살겠다는 사람뿐이다.
지진 없고 수려한 조국강산 들판에 나가 마음껏 걷다 캠핑하고
나무에 해먹hammock 걸고 비박하는 재미로 산다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가장’이 집에서 앞치마를 두르면 가족은 SNS로 띠울 것이다.
온 가족이 ‘싸이’가 되어 방방뛰는 말 춤을 출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상업주의 물결에 휩싸여 낭비를 일삼고 산다.
가정은 소비만 하는 곳이다.
정해진 수입으로 소비를 잘하는 것이 버는 것이다.
불요불급한 소비를 없애야한다. 소박한 삶의 아웃도아 생활에 맛들이면
가계지출은 30%정도는 절약된다. 소박한 생활이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주말농원을 중심으로 하는 레저생활로
가계지출을 50%정도 줄였다.
술 문화, 결혼문화, 미용과 성형, 옷치장, 외식, 사우나, 노래방,
쾌락소비를 극도로 줄이면 시골에 농장이 생긴다.
‘가장’이 열성적으로 앞장서서, 자기가정을 감성어린 낙원으로 만들어
가족과 사회 양쪽의 고민이 해결 되게 하는 ‘부르디외’가 주창하는
구별짓기의 ‘아비투스habitus 문화’로 삶의 질을 높일 것을 권유한다.
빈곤의 대물림은 문화자본의 결핍이며, 취향문화의 부재이다.
이는 철학이며 ‘가장’은 가족을 취향문화로 무장시킬 책무가 있다.
이는 이상론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시급한 일이다.
사고방식이 구태의연하고 완고한 ‘가장’이라도 자신의 가족에게
참된 행복의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생각을 바꿀 것이다.
우리 국민의 기질은 혈통을 중히 여기고 가족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는
본태성이 너무도 강하다.
다만, 사회의 인습에 갇혀 살다보니 보다 좋은 생활방식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남 따라 살고 있을 뿐이다.
야외 취향 문화생활이 목가적인 낭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자진해서 개혁할 것이다.
주말을 즐기는 프로젝트를 만들어,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세포조직을 활성화하여,
홍보와 운용방법에 따라서는 동조자가 많을 것으로 예상 된다.
그 이유로는 ‘초원의집’을 벤치마킹하면 그 삶을 선망하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모델링을 보여주는 구조적 시스템이 없어서 활성화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잠재적 수요자들은 옛 날로 말하면 상록수 계몽자거나 서구의 살롱문화에 해당된다.
그 누구도 자신의 가정을 ‘초원의 집’과 같은 자연과 같이하는 화목하고
사랑스러운 삶을 마다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파트’는 생활업무지원 후방기지로 규정하고,
‘초원의집’은 씨 뿌리고 레저를 즐기는 전방 베이스캠프로 삼는 전략을 말한다.
“Home Sweet Home”은 이동주택 텐트 캠프 파라다이스이다.
‘즐거운 나의 집’
1852년 4월 10일 미국의 한 시민이 알제리에서 사망했다.
그가 죽은 지 31년이 지났을 때 미국 정부는 그의 유해를 본국으로 이송해 왔다.
유해를 실은 군함이 입항하는 순간, 군악대의 연주와 예포 소리가 울려 퍼졌고,
대통령과 국무위원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이 거대한 환영 퍼레이드를 했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사실은 환영 퍼레이드의 주인공이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토록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하게 만들었을까?
이유는 그가 작사한 단 한곡의 노래 때문이었다.
무엇이 가장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한 메시지와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 이리
꽃 피우고 새 우는 집, 내 집 뿐 이리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을 작사한 ‘존 하워드 페인’이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삶의 근본이 되는 ‘가정의 행복’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근 제공-
‘가장’이 이뤄내는 ‘즐거운 나의 초원의 집’ 텐트, 캠프, 다챠!!
미쳐서하면 가족이 서로 자립되고 자유를 얻는다.
그리하여 초월적 사랑을 하게 된다.
초월치 못하는 한 평생 고통을 달고 산다.
초월은 인식· 경험 밖에 존재하는 순정이다.
利害영역 범위 밖에 있는 숭고한 사랑이다.
바로, 자연이 그러하다.
현재를 사는 일에 열정을 다 할 수 있는 모티베이션motivation은
‘제로Zero 스트레스 베이스캠프’가 진원지震源地이다.
이 캠프를 “작은 즐거운 나의 집” 이라 이름 짓고, 둘러메고 다니거나
차에 싣고 다니며, 아무데서나 “레저 베이스캠프”를 펼친다.
야릿야릿 휘어지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유연하고 보들보들한 감성어린
프로스킬pro skill한 생활공간을 만들어낸다.
시원스런 지성과 보헤미안이 융합한 생활현장을 늘 생산하는 것이다.
나에게 세상은 야생과 내 발끝에 있다.
밭을 가꾸고 산야를 돌아다니다보니 야지의 식생植生들과 친구가 되어,
사랑하며,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한 기쁨으로 충만하다.
나에게 가을은 여행이며 직업이다.
이곳은 임진강 들녘 풀숲이다. 기러기는 추수가 끝날 무렵에 4,000km의
먼 러시아에서 날아오는데 성미 급한 놈은 벌써 날아와 석양의 외로움을
한껏 더해준다. 기러기는 고향과 타향 두 곳으로 산다.
한국이 고향인지, 북국이 타향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가을의 기러기가 내 마음의 고향이다.
기러기는 낮에는 보기 드문데 아침저녁에는 영락없이 강가로 날아들었다
떠난다. 아침햇살을 받으며 날아드는 기러기 떼와 저녁 석양에 날아가는
그 풍경과 질감은 완연히 다르다.
아침의 기러기는 힘차고, 저녁 무렵에 물든 수평선 너머 어디론가 떠나는
기러기는 애잔한 비수 아득히 멀어져간다.
밤은 흘러간다. 떠난 후에야 찾아온 가을 빗소리...
‘투 둑~ 투두둑’ 텐트를 적시는 그 소리에 가슴 시리다.
가을과 도시는 기어코 나에게 텐트를 메게 했다.
어둠이 자욱하게 내린 억새풀 숲에 비가 내린다.
혼자의 밤이 더없이 작은 우주를 품게 해주었다.
다음 날 또다시 산을 찾았다.
청정한 시원의 숲에 잠긴다.
심산의 질감이 은연히 스민다.
심오深奧한 풍광들이 아슴푸레 저미어온다.
이 산속에 이런 곳도 있었네.
서서히 날이 저물어가며 산자락 들풀에 머금은 이슬이 랜턴 빛에
어른거리고, 간간이 끊겼다 이어지는 구슬픈 풀벌레소리 시름겹다.
달밤에 “자연의 사치 페스티벌”이 펼쳐진다.
관객은 나 홀로···
달리는 구름사이로 스러져가는 달빛, 마냥 밤은 써늘하니 깊어간다.
더없이 흡족하고 고마운 밤이다.
일교차가 10도나 났다. 하룻밤사이 사계절을 겪으니 족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학습된 억지웃음으로 복이 오고 건강해진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자연에 부대끼며 사람과 자연과의 소통을 통해 마음이 편해지고
건강해진다고 여긴다.
기쁨의 여신이 허락한 이 밤은, 평생을 살아낸 모든 밤이
이 하룻밤을 위한 축제이다.
숲의 힘은 참으로 무섭다.
이 글을 읽는 독자여, 단 한번 만이라도, 만물이 쇠락해가는
이 가을밤에 홀로 나앉아, 밤을 지새워 우는 풀벌레와 친구가 되어
새벽 먼동 트일 때까지 밤이슬 맞아가며 골똘하게 고뇌해보기를
간절히 권한다.
한 번, 직접 경험해보면 안다.
그대여!! 仲秋를 맞이하여 소멸, 이별, 상실, 외로움, 쓸쓸함, 가난 등의
음울陰鬱한 인생의 무상함을, 속절없이 떠나는 가을 마음에 풀어 또 다른
자기와 마주치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새로운 생이 보일지도 모른다.
큰마음 먹고 한번쯤은 외로운 밤하늘에 누어 볼 일이다.
행운은 도전하는 자에게 걸려든다고 하지 않던가.
아마도 그대는 쓸쓸한 달빛 아래, 복받쳐 흐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집에만 집착 하지 않고 ‘전원과 모든 야지’를 집의 연장선상으로 여기고
“즐거운 나의 집”을 짊어지고 다니거나 차에 싣고 다니는 것을 낙으로 삼아 허허로이 간다.
현대의 산업화와 지식사회에 들어와 ‘아파트’의 편리한 생활이 삶의 합리화라는 이유로
삶을 망쳐놓고 있다. 감성 없는 삶은 무의미하다.
‘아파트’는 하숙집으로 생각하고 ‘푸른 정원의집’ 텐트캠프를
소꿉놀이 즐기는 곳으로 만들자.
‘Home Sweet Home’을 들고 다닌다.
집이나 여행지의 호텔에 맞춰 아웃도어 동선을 짜는 것이 아니라,
아웃도어 동선 안으로 ‘Home Sweet Home’ 텐트 캠프를 데리고 다닌다.
이렇게 사는 것이 신명나는 삶이며 모두가 바라는 희망일 것이다.
자연의 투명하고 올곧은 ‘안식’을 거울삼아 홀로 간다.
안으로 정조情調한 ‘고요’와 향기로운 실존에 산다.
문명을 비켜선 천연한 “레저캠프를 생의 구심점”으로 삼아,
씨 뿌리고 꽃 피우면 나비가 날아드는 ‘샹젤리제 낙원’의 여백을 즐긴다.
조붓한 산길을 뚜벅뚜벅 걸었다. 가끔씩 걷고 싶은 길이 따로 있다.
외로운 산모퉁이를 지나 꾸불꾸불 심심하고 무료한 길을 걷는다.
과거와 나 사이를 낙서질 하며 장난친다.
누군가가 왜? 이런 길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몹시 불편하다.
왜? 라는 물음 속에는 나의 속내를 알아차렸을 개연성이 높다.
‘길’은 연민에 순응하는 싸움터이다.
노추老醜는 몸을 채찍질 해가며 더 천연한 곳을 찾는다.
가을 산속에 들어 나를 본다.
산에 비친 나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내가 나를 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대체로 ‘꽃’의 이름과 모양을 통해 그 꽃을 연상한다.
마찬가지로 세상만사를 이미 학습된 지식, 언어, 가치, 신념체계를 통해
해석한다.
선입견을 갖고 판단하거나, 주관적 오류에 빠지거나, 이성을 넘어선
신비한 영역으로 치부하기 쉽다.
심리학의 분석틀을 빌려 마음의 과학을 생각한다.
‘사유의 멈춤’ 즉 ‘자아 침묵’을 통한 시공의 실존 인식이다.
안으로 성근誠勤한 ‘고요’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다시 적는다.
‘생각하면 환상이고 즉, 감성의 왜곡’이고
‘그냥 바라보면 자유다’ 즉, 기능이 아니라 ‘의미’를 알게 된다.
무위無爲자연을 근원으로 바라본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루소’는 갈파했다.
가던 길 멈춰서서 물들기 시작한 단풍잎을 만지작대며, 능선을 쳐다보았다.
파란 가을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짓눌렸던 무게가 풀린다.
이제 꿈 많던 어린나이로 다시 돌아간다.
도시여 안녕!!
배낭 하나에 담아온 여행, 아무렇지도 않게 캠퍼가 됐다.
‘캠핑폐인’이란 책이 있다. ‘폐인’이 되어 보아야만 안다.
긴장 벗어던지고 “제로스트레스 캠프”를 펼친다.
나무 잎 하나가 동그마니 텐트에 얹혔다.
저 많은 나무 잎 가운데서 마지막까지 버틸 하나의 잎 새가 궁금하다.
마지막 행상行喪 길로 떠나는 ‘바삭’소리를 마음에 그득 담을 것이다.
영혼의 정화와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하는 맑고 정갈한 야지는
우리나라 산촌에는 널려있다.
요즘은 들국화, 억새풀, 구절초, 갈대 등이 가을을 알리는 계절이다.
이 들꽃들은 외로운 여인네가 슬픔을 띠고, 스산하게 어른거리는
가을살결 같다.
곧 단풍이 온 산에 물들어 만추를 아쉬워 할 날이 멀지 않았다.
단풍잎 뚝뚝 떨어져 가을이 떠나는 날,
나의 외로운 그림자는 가는 가을 잡고 서성일 것이다.
내 나이 90세 되어도 할 일이 많다.
자연이 있는 한 그곳이 일터이고 오락장이다.
아흔이 되어도 세상을 살기에 늦은 나이가 아니다.
나에게 세상은,
길 위에 있고,
걷기에 있고,
씨 뿌리고 밭 가꾸며 야생화 보듬고,
생명수업 하는데 있다.
이런 현요眩耀한 이완弛緩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모든 것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 스스로 해내는데 보람이 있고,
흐르는 강물처럼 한순간도 쉬지 않고 자연과 공생하는 존재방식을 개발하고
개선하는 일을 유일한 낙으로 삼는다.
상식을 깨부수고, 다양한 자유를 엮어내는 모더니티modernity한
문화구현이 절실하다.
늙어가는 데는 별난 기술이 필요하다.
노인은 박물관이 아니다.
노인의 덕담을 말하지만 늘 갇힌 말만하는 진부한 덕담은 오히려 공해다.
지성이 뻔뜩이고 앞서가는 스마트파워 행동으로 길이 되어주는
진정한 ‘멘토’를 후학들은 바랄 것이다.
깨져야한다.
옛날만 답습하면 고인물이 된다.
미래를 향해 활짝 열린 새로운 생활공간을 만들어내는
‘벤처 인생’을 경영해 나가야 한다.
‘Home Sweet Home’의 성공은
즐긴다는 기분으로
마음의 짐을 내린다
캠프나비 벗님들이여!
애타게 권하는 내목소리 들리는지 묻습니다.
<2012년 9월에. 깐돌이, 박상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