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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 대신 붓 잡은 소설가 ‘무진기행’의 김승옥
소설가 김승옥이 지난달 말 서울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와 필담을 나누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기차 용산역 오후 8시에게 같습니다. 화요일 메일 원고에게 같습니다. 안녕!”
‘용산역에 오후 8시에 도착해 화요일에 원고를 메일로 보내겠다’는 소설가의 문장은 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지난달 말,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75)의 휴대전화 답 문자메시지였다.
▲ 김승옥의 ‘정지용 문학관’ (2009.12)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등으로 1960년대 한국 현대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연 김승옥은 2003년 뇌졸중이 찾아와 말과 글을 잃은 후 천천히 회복해가는 중이다. 뇌졸중 이후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된 그는 절망에 잠식되지 않고 펜 대신 붓을 잡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국을 다니며 작은 스케치북에, 그를 매료시킨 아름다운 풍경들을 수채화로 담았다. 어느덧 60여편이 모인 수채화 작품으로 8일부터 서울 혜화아트센터에서 그림 전시회를 갖는다.
▲ 김승옥의 ‘다산초당’ (2009.2)
서울 혜화동에서 지난달 말 두 차례 그를 만나 필담을 나눴다. 한때 세련되고 현대적 문체로 수많은 독자를 압도했던 노작가는 간단한 단어(명사)들을 연결해 천천히 답을 했다. 형용사와 부사는 사용이 어렵고, 동사도 적절하게 쓰기 힘들다고 한다.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느낌표와 화살표를 자주 사용했다. 그의 주머니엔 여러 색깔의 다양한 펜이 들어 있다.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 필담.
근황을 물었더니 가지고 온 꼬깃꼬깃한 흰 종이에 쓰기 시작한다.
“2003년 2월25일/ 세종대 교수(낮), 성결대 대학원 신학공부(밤)/ 이문구(소설가) 별세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김승옥 자동차→뇌졸중!”
최근 10여년 동안의 삶을 설명하는 한 줄이다. 낮에는 세종대 국문과 교수로, 밤에는 신학생으로 살고 있던 2003년 동료 문인인 이문구 소설가의 장례식장에 다녀오는 길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얘기다. 갑자기 종이 위에 최하림 시인, 이청준 소설가, 최인호 소설가, 김치수 평론가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으며 “친구들/ 별세!”라고 쓴다. 선한 얼굴에 투명하고 슬픈 웃음이 스친다.
고향인 순천과 서울 번동 집을 오가며 성경과 소설, 월간 잡지들을 읽으며 지낸다고 한다. 지금은 책을 보내준 서영은 작가의 소설을 읽고 있다. 언어를 잃은 뒤 TV 드라마를 즐기게 됐다고도 한다.
그림은 어떻게 그리게 됐을까.
“옛날 1952년 순천 북초등학교 김승옥 학생+신(申) 교사(화가)→수채화!”
화가이기도 했던 신 선생님으로부터 초등학교 때 수채화를 배웠다는 것이다. 당시 선생님께 검은색은 쓰지 말라고 배워, 지금도 그림에 검은색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후 그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1960년대엔 한 경제지에 만평 ‘파고다 영감’을 연재할 정도로 소질을 보이기도 했다.
인터뷰 도중 약을 복용한다. 알약 7알이 들어 있는 뇌졸중 약이다. 무슨 약인지 궁금해하는 기자에게 가지라며 빈 약봉투를 건넨다.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그림을 보고 싶다고 하니 작품들이 들어 있는 허름한 플라스틱 파일을 천가방에서 꺼내 조심스럽게 연다. 파일 윗면엔 ‘2008.10-2010.12 김승옥(金承鈺)의 그림 편지’라고 쓰인 손글씨가 붙어 있다. 가장 아끼는 작품을 보여달라고 했다. 분홍색 들판이 보이는 그림과 벚꽃 그림이 예쁘다고 하니 얼굴을 찌그러뜨리고 손을 휘저으며 “에이에이”라고 한다. 갓난아기라도 다루듯, 조심스레 한참을 고르다 ‘2009년 2월 다산초당’ ‘2009년 12월 정지용 문학관’이라고 쓰인 그림을 내놓는다. 초록빛을 띠는 색감의 밝은 그림들이다.
언젠가는 새 소설을 쓸 계획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말, 글 X”라고 재차 썼다. 갑자기 종이를 뒤집어 사람 머리를 그리기 시작한다. 뇌의 한가운데에 세로 줄을 그어 절반으로 나누더니 앞쪽에 100%라고 쓴다. 뒤쪽 뇌는 다시 위아래로 선을 긋더니 위쪽엔 50%, 아래쪽엔 뇌졸중이라고 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앞으로 소설을 다시 쓰긴 어렵다는 답으로 들렸다.
인생에 난관을 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느냐고 하니 1983년 이승과 저승을 왔다갔다하는 체험을 하며 진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필담으로 설명한다. 스리랑카에 선교를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쓴다. “불교 국가”라고 설명한다. 한참을 생각하더니 x축과 y축을 만들어 오른쪽 위로 치솟고 있는 그래프를 그린다. 자신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친구와 교보문고에 간다고 한다. 무슨 책을 살 거냐고 물으니 “마종기, 황동규”라고 쓴다. 김승옥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후배들이 마련한 전시회는 21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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