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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이남 공주강 이북 지역은 충남 서북부,아산,천안,청주,충주,제천,강원도 원주,횡성,춘천,철원,
강릉까지 이어지는 지역을 말한다.
(초록색 안 사이 지역)
훈요십조[訓要十條].
훈요십조[訓要十條] 제8조는 고려사, 고려사절요에 나오는 그대로이다.
일제 식민 사학자 금서룡[今西龍/이마니시 류]과 이병도가 난독 오류를 일으켜
잘못 해석한 것에서 부터 출발한다.
왕건시대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치 역사에 정통한 인지도만을 내세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잘못 해석해 놓은 것이며
이들을 잇는 후배들에 의해서 그대로 이어지면서 발생한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경상도 지방의 입장에서 지은것이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은 경기 안산에서 과거의 책을 편집하면서 실수를 일으켰고 각 지방으로
단 한번도 돌아다녀 보지 않고 과거의 지리책을 보고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저술한 것이었다.
이중환의 택리지 역시 풍수지리설에 근거하여 저술한 책이다.
그러나 정작 풍수지리설의 아버지이자 창시자는 도선국사이고,
도선국사는 고려 왕건에게 고려왕조 창업의 비밀을 알려주는 도선비기를 전한 주인공이었다.
도선국사는 전남 영암군 출신이었다.
신라말 후삼국 시대의 도참설 창시자이자 원류였다.
도교[道敎]에서 도참설이 나오는데 가장 일반적인 도술이 도참설에서 나온 것이다.
도술과 방중술이 너무 흔하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보통 도술이라고 알려져 있다.
무술과 결합한 도참설은 기의 원리를 이용한 도술이고,
사이비 과학과 결합한 도술은 은단이나, 금, 은, 수은, 비소 등 중금속을 이용하여
불로 장생한다는 도술이있으며, 천문과 결합한 도술이있고, 주술과 결합한 도술도 있으며,
풍수지리와 결합한 도술이 대표적인 도참설이다.
도참설은 미래의 길흉화복에 대해 예언을 함으로써 그 예언을 믿는 사상이다.
형이상학적인 도학으로 이상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이며 비과학적이며 비합리주의적인 사상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해먹으려다 도사가 만든 수은을 불로장생약이라며 먹다가 죽었다.
도참설이 삼국시대 때부터 흥하기 시작하여 고려로 이어지며 고려말 몽골 침략기에
말세기적 현상으로 번져, 샤머니즘, 토테미즘, 도교니즘, 기복신앙 불교, 미륵사상 등이 난무하고
미친듯한 광기에 빠져 전 국민이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사이비 종교에서 민중을 구하기 위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성리학이었다.
도교[道敎]에서 풍수지리설, 음양 5행 사상 [주리철학의 무극론과함께 정이학으로 발전], 신불[神佛],
역운[曆運/주역의 한 분야로 운세를 보는일], 주역/역술, 예언, 예언서, 사술[사주, 관상], 도술[도참설],
주술, 저주의식, 정주학의 태극설 등이 나온다.
[주역 안에는 점, 복, 작명, 운명, 성명, 12간지, 시각, 역법/달력 등 다양한 분야로 운세를 점치고,
음양오행 사상은 화(불), 목(나무), 금(쇠), 수(물), 토(흙) 등을 이용하여 신성을 부여하고 성명학 등
길흉화복을 점침.
오방낭(음양오행),정령(서낭당,무당,장승,솟대,오리목,당간지주,정령나무 등에 신성을 부여하고 점침),
또 거기에다가 주술 등을 이용하여 신성을 부여하고 길흉화복을 점치기도 함.
기원전 왕조시대 왕관의 나뭇잎이 정령족에 의해 정령나무에 신성을 부여하고 처음으로 나온 것이며,
아다파와 이브가 나체로 있다가 정체성을 깨닫고 무화과 나무로 성기 부분을 가렸다는 나뭇잎 이야기가
정령족으로 이어져, 정령나무 잎에서 나왔다고 해서 거기에 신성을 부여하고
왕관의 장식품을 정령 나뭇잎 모양으로 만든 것임.
신성이 깃든 정령 나뭇가지 잎으로 왕관을 만들어 쓰면 왕의 머리에 신성한 기운이 깃들어
성군의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여겨서 왕관의 머리장식을 정령 나뭇가지 잎모양으로
장식한것이 틀림이 없음.
실크로드 교통로인 알타이 파지릭 고분군이 많은 지방에서 처음으로 탄생했으며
정령족의 무당 행위로 발전하여 제사장을 독식하면서 발전한 것임.
신정 제정 일치 사회 때 제사장이 왕과 무당을 겸하면서 손에 든 정령 나뭇가지 잎으로
길흉화복을 점침].
후삼국, 고려초기의 도참설은 천문을 이용한 길흉화복을 쳐서 미래를 예언하는 학설이 등장하여
이것이 알려지면서 유행하였다.
천문, 풍수지리를 이용한 도참설을 지은 학문이 도선국사가 지은 도선비기이다.
천문은 보통 혜성이 지나가는시기, 별똥별이 떨어지거나 지나가는 시기를 이용하는 예언을 한다.
일반적으로 혜성이 지나가면 대격변이나 대전쟁이 일어나는 시기이고,
별똥별이 떨어지면 제왕이나 군왕이 죽는다는 예언을 한다.
별똥별이 어느 집에 떨어지면 그곳에서 나라를 세울 인물이 태어나지만 악행을 일삼다가
얼마 못가서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예언이다.
개기일식, 개기월식이 일어나면 불운이 닥쳐온다는 예언을 하고
붉은 대보름(슈퍼 문)달이 뜨면 미래에 피를 불러오고 불운이 온다는 예언을 한다.
또 상서로운 별빛이나 불빛, 큰별이 어느집에 내려 앉으면 나라를 세울 큰 인물이 태어나서
나라를 오래 보전한다는 예언 등을 한다.
전남 영암 출신인 최지몽은 천문을 이용한 도참설로 왕건의 책사로 활동하며
비서실장격을 지내며 혜종, 정종, 광종대까지 살아남아 고려정권의 장수를 위해
길흉화복을 점친 인물이었고 왕건은 최지몽을 아주 신뢰하였다.
후백제, 신라와의 전쟁 때 최지몽의 점괘를 보고 전쟁을 치루거나 멈추고
승전할 수 있는 날을 택하여 전쟁을 치뤘을정도였다.
현재의 천문학을 이용하였다면 과학적이지만 별의 움직임과 달의 기운, 개기일식, 개기월식,
달의 밝기 등의 변화, 별똥별, 별빛의 움직임, 별의 밝기 및 점멸, 소멸 현상,
어느 별좌표의 움직임과 변화,혜성의 움직임만을 보고 점괘를 쳐서,
미래의 운명을 예언하거나 예측하였기 때문에 비과학적인 학문이라는 이야기이다.
최지몽은 도선국사의 도선비기를 읽고 깨우친 것으로 판단되며, 가장 뛰어난 도참설의 일인자가 되었다.
정작 광종말기에 축출되는 자신의 운명은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훈요십조 제8조는
나주 오다련의 딸 장화황후 [제 2황후]의 아들인 혜종가문을 충주유씨 청주 가문의
신명 순성황후[제3황후]가 혜종을 밀어내고 정종, 광종을 왕으로 올리는 것을 사전 차단시키기 위해
왕건이 충남 당진군 [면천군]출신의 박술희에게 유지를 남긴 것이었다.
박술희는 전남 광주/광산으로 옮겨 호남 호족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신명 순성황후는 충주 유긍달의 딸이다.
유긍달은 왕건의 부장으로있으며 궁예의 명령으로 왕건이 청길(청주), 신훤세력을 평정할 때
따라가서 청주를 점령하고, 신훤 [괴산]세력을 평정하고 나서 궁예에게 바치자,
궁예는 유긍달에게 청주 호족세력으로 자리잡게 한다.
결국 훈요 10조 제8조 대로
홍성, 공주 10주군현의 반란, 홍규의 난과 청주 호족 임춘길 ,배총규, 매곡인, 경종의 반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또 청주호족 진선, 선장의 반란, 공주 환선길의 반란, 공주의 마선대장군 이흔암 등이
왕건을 암살하기 위한 왕궁 침입과 홍성 성주 긍준 등이 후백제 투항후 고려에 대항한 일 등과 더불어,
청주가문의 유긍달의 딸 신명 순성황후의 아들인 정종, 광종이 나주의 장화황후의 아들 혜종 가문을
정치공작으로 밀어내고 왕권을 차지하게 되는 것을 사전 차단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일을 경계하기 위해 훈요 10조 제8조를 남긴 것이다.
훈요 10조 내용은 조작도 아니고 해석 오류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해석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자들이 과거에 나오는 도참설책이나 풍수지리, 예언서 등에 의존하여
자기가 속한 지역의 입장에서 풍수지리를 적용하여 엉뚱한 배역수로 오류 사고를 일으키고
자기 생각을 덧붙여 편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 엉덩이 모양을 하고 수도 송악(송도>개경>개성)을 돌아 앉아있는 공주강(금강) 배역수 모습].
안산에서 수도 개성이나 한양을 보고 있으면 공주강이 등을 지고 서해쪽으로 흐르므로 배역수로 보이고,
금강이 전북 장수, 진안에서 무주, 충남 금산, 충북 영동, 옥천으로 북상하면서 여자 엉덩이 모양을 하고
한양 쪽을 돌아 앉아 있는 형세로 보이며 서해쪽으로 내달려 빠져 나가기 때문에
금강 물이 영남 반대방향으로 흘러나가므로 배역수로 보이기 쉽상이다.
이런 것이 바로 도참설이나 풍수지리설의 가장 흔한 일반적인 오류이다.
즉, 차령이남에서 공주강 위인데 차령이남은 빼고 금강이남이라고 단정해서
말하는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이나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풍수지리설은
그 창시자가 전남 영암의 도선국사이고 최고의 대가가 영암의 최지몽이며
왕건에게 고려 왕조 창업의 비밀을 알려준 도선국사와 도참설의 대가 최지몽 등 전남 나주 오다련,
승주의 박영규, 곡성의 신숭겸 후예 세력에게 가장 총애하는 자들을 배척하라는 유지를 남기는 것은
애초에 맞지도 않는 말이다.
이들이 왕권을 받쳐주지 않으면 다음 왕권이 극도로 약화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최지몽은 왕건의 비서실장격이라 왕건이 국사를 결정할 때 도움을 주는 역활을 하며
최 측근에서만 모시는 역활을 하였기 때문에 자본과 권력의 전횡을 누리는 직책에는 있지 않았으므로
왕건이 이들을 견제했을 리가 없었다.
[도선국사는 불교를 관장하는 국사. 고려 초기 역사는 나주 이남의 관점에서 쓰여짐]
[원래 독재시대에는 거짓된 역사를 주입하고 통제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반발로 진실을 알기 위해
더욱 깊이 파헤치는 게 학문적 주요 특징임.
전두환 신군부 수하들이 무당을 찾아가서 대통령에 오를 수 있느냐고 점을 쳤던 일화는 유명함.
학문적으로 그나마 일부 역사로 인정을 받는 도참설이 아닌 샤머니즘 성격이 강한
무당 집을 찾아가서 점친 것이므로, 현대 물질문명을 살면서도 정신문명은 의식이 오히려
조선후기부터 점점 퇴보해왔음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임].^^
1973년 유신시대부터 1980년대 신군부시대까지 제대로 역사 교육을 받았던 호남인들은
대부분이 훈요 10조 제8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군부 독재시대였기 때문에 국회의원 선거 때 군부 독재정권의 공화당과 공화당을 잇는
민주 정의당의 표를 억제시키고 민주 세력의 표를 한곳에 모으기 위해서 침묵해야만 하였다.
군부 독재당이 훈요10조로 호남을 유린할 때도 울며 겨자먹기로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실을 밝히면 충청, 강원표가 공화당>민정당으로 넘어갈 것으로 판단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민주세력이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진실을 말할 수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김영삼의 문민정부로 교체되고나서도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유리하게 작동시키려고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으며,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때도 언급을 회피해야만 하였다.
그 사이에 "차현이남 공주강외[車峴以南 公州江外]"는 호남지방으로 인식되어 버리기에 이르렀다.
차현이남[車峴以南] 공주강외[公州江外]에서 외[外]는 바깥이라는 뜻이고,
앞 문장에 차현이남[車峴以南]이라는 전제가 있으므로, 뒷 문장의 바깥(외곽)은 위[上/윗상]를
뜻한다는 것은 한자[漢字]해석의 기본 상식과 같다.
차현이남 공주강외[車峴以南 公州江外]는 차령정맥의 차현에서 공주강 위라는 뜻이며,
공주가 금강[공주강]이남에 있으므로 피하주군인[彼下州郡人-그 아래 사는 주군인들]을 포함한다고
말했던 것이다.[from~to/から~まで ~에서 ~까지. 차현에서 공주까지].
호남에서 너무 수동적인 대응을 하여 역효과를 본 것이었다.
수동적인 대응은 약자들이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어 대다수는 승자에 붙으려고 하므로 항상 필패한다.
능동적인 대응으로 전환하여 강[强]에는 강[强]으로 훈요십조 제8조의 진실을 널리 확산할 것처럼
상대를 적극적으로 압박하여 역으로 숨통을 쥐고 민주표로 스스로 오도록 역 압박책을 펴서
대응했어야만 하였다. 아니면 도가론으로 그대로 우회 전략으로 역공을 펴던가...
[조선시대 기호학파와 주기학파는 추구하는 사상철학이 달랐지만, 같은 서인으로 범서인학파였고
서로 권력투쟁을 하지 않아 유대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에 여기에 영향을 받아
훅~해서 소극적 대응을 한 것임].
역사를 제대로 배운 대다수의 호남인들이 이미 1970년대부터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고,
1980년 컬러 TV방송이 시작되면서 널리 확산되어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전교조가 태동하는 시기에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전교조에 의해서 진실만을 교육시키자는 열기가 확산된 것은 인정해야 한다.
대북문제에 대해 국제적인 문제 [힘의원리]를 국내문제로 적용하는 정의론, 명분론, 도덕론, 윤리론으로
교사적인 대응을 했다가 낭패를 보긴 했지만 말이다.
분명한 것은 전교조는 역사에 남는다는 사실이다.
或銜統合之怨, 犯蹕生亂(혹 함 통합지원, 범필생란)
(혹은 통합당한 원한을 품고 임금의 행차시에 난을 일으킬 것이다).
或을 쓴것은 주어 다음에 동사(銜)가 와야하기 때문에 주어 대신으로 或을 써서 미래를 뜻하고
銜(재갈함=재갈, 입에 재갈을 채움)은 명사이고 동사로 전환하려면 앞에 주어가 있어야 하므로
或을 주어로 대신하고 銜(재갈함)을 동사로 전환하면 "마음에 품다. 원망함을 품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或銜 統合之怨은 "혹은 통합당한 원망을 마음에 품다" 라고 해석한다.
犯蹕生亂(범필생란)에서 蹕(길치울필)은 "임금의 행차"를 말하는데 어가가 행차할때 호위꾼들이
길앞을 트는 일을 뜻하며, 임금의 나들이나 행차를 뜻한다.
犯蹕生亂에서 犯蹕(범필)은 임금의 행차시에 범하다.
生亂(생란)은 난을 일으키다, 난을 일으킬것이다. 라는 미래를 뜻하고, 또 맨 앞의 주어 或이 미래를 뜻하므로
"틀림없이 임금의 행차시 범하여 난을 일으킬것이다" 라고 해석하여 마무리한다.[단정]
-[或銜 統合之怨, 犯蹕生亂(혹함 통합지원, 범필생란)에서 백제라는 명사가 들어올 그 어떤 자리도 없으며
한자해석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기만하고 일부의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끼워넣기를 한것임].
或銜 統合之怨, 犯蹕生亂 문장에서 어느 지역인지 모두 말해주고 있다.
왕건에 통합당한 지역은 충청과 강원도 지역이지 후백제(호남) 지역이 아니다.
후백제는 국가 vs 국가간의 전쟁으로 통일한 합병(병합)지역이고 견훤이 김제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다가
왕건에 귀부하여 우대를 받았지만 마지막까지 광주의 신검과 전쟁으로 합병한 지역이지,
통합당한 지역이 아니다.
(통합이라는 말은 같은 편으로 살다가 틀어져 싸우다 하나가 되었을때 어느 한쪽이 통합당했다고 하는 것임.
제천 마진국은 충청인, 철원 태봉국은 강원도인을 중용했는데 개성의 왕건이 장악하자
경기도인이 장악해서 다툰 것임).
[후백제는 전주(견훤), 광주(신검), 나주(오다련/왕건)세력으로 갈라져
미니 후삼국으로 분열하여 패하는 것임].
-견훤이 수군으로 왕건의 개경 황궁을 점령하여 불태우고 철군하기도함.
[해상왕 장보고가 완도 청해진에서 신라의 이간질로 수하였던 정년(또는 염장)에게 죽자, 청해진을 폐쇄하고
중국, 일본과의 직항로를 최초로 개척하여 활동하던 청해진의 가솔 해상무역세력이 신라에 의해
장보고의 식솔들과 함께 김제로 옮겨짐.
-이로 인해 국제무역이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기로 다시 회귀함.
견훤이 김제에서 장보고(785~846)의 가솔 해상무역세력과 그 후예의 도움으로 수군을 증강시켜
개경 황궁을 점령하는 것임].
-장보고가 일본(왜)에 중국과의 직항로와 선박 수리기술, 돛 이용기술, 조수간만의 차와 바람이용기술,
선박 제조기술과 불교를 전파하여 중국과의 왕래길(왜의 엔닌(원인)대사/입당구법 순례행기/
산동성 등주시 적산 법화원)을 터주었고, 이로인해 남해안과 동해안에 왜구의 해적질이 줄어드는 것임.
[임진왜란 1년전 1591년 2월 주기학파가 호남 고향지방과 남인지역으로 5~7품계 직급 강등당하여
모두 좌천되고, 서인정권에서 동인 주리학파 정권으로 교체되자, 1년후 1592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한양 방어출병과 선조어가 호송 명령이 전라도 관찰사(전라 충청 순안어사,전라 도순찰사)
이광에게 하달되는데 ,순창의 조인, 남원의 형대원은 전주 한옥지구 향교에서 전주성을 방어해야 한다며
한양출병과 선조 어가 호송을 거부하며 반란 객기를 부렸고, 전라 병마절도사 최원에게 웅치 아래에서
1천여명이 진압당했는데, 선조 어가 호송을 가서 호성공신으로 남아 중앙권력을 장악했더라면
정유재란은 겪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도교학파인 대북 조식학파가
1593년 임진왜란 중에 동인 주리학파 정권 속으로 치고 들어가 전란책임을 지우며
중앙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때 완전 권력 독점정권으로 태어나
정신철학이 상고대기로 회귀한다].^^
http://blog.daum.net/ades6669/17146223
훈요10조 제8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