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ㅡ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 <비가 2 (붉은 달)> 부분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ㅡ개인적인 것ㅡ역사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 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그의 시학은 현실적인 것과 시적인 것의 대립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꿈을 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이라도 꿈을 꾸는 자에겐 희망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는 망가진 꿈도 꿈꾸지 않는다.
망가진 꿈은 그리움의 상태로, 그런 것도 있었지라는 쓰디쓴 회상의 형태로 존재할 따름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현실적인 것을 변형시키고 초월시키는 아름다움, 추함과 대립되는 의미의 아름다움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모습에 대한 앎ㅡ아름다움이란, 아는 대상다웁다라는 뜻이다ㅡ으로서의 아름다움을 목표한다.
그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소외된 개별자, 썩어가는 육체, 절망 없는 미래[보라, 시인은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어느 푸른 저녁>)라고 말한다]. 헛것인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아름ㅡ아는 대상답다. 그에게 있어, 시적인 것은 따로 없다. 그가 익숙하게 아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며, 시적인 것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부정적인 것들인지.
기형도의 시학에 대한 비판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피상적인 것은, 그의 현실에 역사가 없으며, 더 정확히 말해 역사적 전망이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퇴폐적이라는 비판일 것이다. 그 비판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비판은 비판을 위한 비판에 가깝다. 그 비판은 기형도 시가 연 시의 새 지평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으며, 그의 시와는 다른 차원에서 그의 시를 비판하고 있는 비판이다. 그 비판은 몸이 약해 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먹는 사람들에게 채식을 하지 않느다고 비판하는 것과 비슷한 비판이다.
그의 시의 약점을 지적하려면, 우선 그의 시의 차원 안에 있어야 한다. 나는 기형도의 시가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의 표현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이다. 그의 시가 보여주는 부정성을 그 이전에 보여준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아무리 비극적인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더라도, 대부분의 시인들은 낙관적인 미래 전망의 흔적을 보여준다. 이성복이 그렇고, 황지우가 그렇다. 그런데 기형도의 시에는 그런 낙관적인 미래 전망이 거의 없다.
그 도저한 부정성은 벤이나 첼란에게서나 볼 수 있는 부정성이다(한국 시에서 그런 부정성을 보여준 시인이 누구일까? 이상? 이상에게는 그러나 치열성이 부족하다 ). 기형도의 부정성은, 내가 보기에는, 적어도 두 개의 출구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그 부정성를 더욱 밀고 나가, 유한한 육체의 추함을 더 과격하게 보여주는 길이며, 또 하나는 그 부정성을 긍정적 부정성으로 환치시켜, 혹은 발전시켜 해학·풍자·골계(/익살) 쪽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첫번째 길은 개별자의 갇혀 있음을 더욱 명료하게 보여줄 것이며, 두번째의 길은 미래 전망의 결여를 운명적인 것으로 인식시킨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웃음으로써, 그것이 인위적인 것이며, 문화적인 것이라는 것을 뒤집어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첫번째 길은 비용이나 보들레르 등이 걸어간 길이며, 두번째 길은 라블레나 김지하가 걸어간 길이다. 기형도는 그 두 길의 어는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는 그 갈림길에서 갑자기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그 갈림길은 이제 다시 없어졌다. 이미 그가 노래한 것처럼.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 <어느 푸른 저녁> 부분
나는 누가 기형도를 따라 다시 그 길을 갈까 봐 겁난다. 그 길은 너무 괴로운 길이다. 그 길은 생각만 해도 내 "얼굴이 이그러진다"(<오후 4시의 희망>). 나는 불행하다, 나는 삶을 증오한다 라는 끔찍한 소리를 다시는 누구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뤄질 수 없는 꿈이라 해도.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김현 문학평론가
김현 문학평론가의 삶
김현은 우리에게 무엇으로 남아있는가. 그는 세계의 문학이며 예향 진도인이기도 하다.
김현문학축전추진위원회(대표 황지우)는 목포작가회의(최기종회장) 주관으로 지난해 서거 31주기를 맞는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전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교수)을 기리는 ‘제15회 김현문학축전’을 목포문학관에서 가졌다. ‘김현문학의 시원과 염원, 그 뜨거운 상상의 힘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이뤄질 이번 문학축전은 김현문학이 지닌 의의와 내용은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한 문학적 상상의 힘을 새롭게 인식해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모색했다. 특히 전국 최초로 진행되는 목포문학박람회와 함께 열릴 김현문학축전은 김현문학을 가능하게 했던 시원(始元)에의 탐색을 기반으로 남도문학과의 연관관계를 살펴 주목을 끌었다.
김현은 진도인이다. 진도문화계에서는 내년부터 김현문학상 제정을 추진하는 작업에 들어가 있다. 진도가 낳은 70년대와 90년대를 관통하는 불후의 문학평론비평가로 깊이 각인되었다. 그의 언어적 세례를 받지 않은 문학인들은 안타까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진도인답게 풍속의 문화에 탐색하였다. 우리 안에서 다시래기로 꽃을 피울 때 진도의 민속문화는 세계화를 이루게 된다. 김현문학이 지닌 상상력의 힘을 매개로 특히 지역문학의 진흥에 기여할 목적으로 김현추모식과 함께 문학콘퍼런스를 비롯해 시노래콘서트, 김현문학까페, 김현문학도서 발간, 김현문학방송 등 다채롭게 펼치고 문학 콘퍼런스에서는 바슐라르와 제네바 학파와의 관계 속에서 김현문학의 시원을 찾을 김영욱(서울대)·정과리 교수(연세대)의 발제와 김현과 남도문학의 전통을 모색할 이동순(조선대)·정민구(전남대) 교수의 발제가 이어졌다. 또 전남지역 문학계의 현안인 전남문학관 건립의 타당성 및 방안 모색을 위해 정우영 전 사무국장(국립한국문학관), 이은봉 관장(대전문학관·광주대 명예교수), 채희윤 위원장(광주문학관 콘텐츠·광주여대 명예교수), 김용국 회장(전남문인협회) 등이 토론을 펼쳤다. 이어 김현을 추모하는 시에 창작곡을 붙여서 시 노래 콘서트에서는 전국의 시인을 초대한 시낭송회 및 문학토크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외에 김현 문학까페와 김현 문학골든벨 등 진행될 모든 프로그램은 온라인 영상으로 제작돼 김현 문학TV로 방영될 예정이며, 그동안 이뤄진 김현 문학축전의 자료들을 모은 아카이빙 도서 ‘남도문학에 스민 김현’(도서출판 시와사람)이 간행된다.
매년 진행되는 추모문학제가 쉬운 일은 아니다. 생의 마지막 가는 길까지를 축제로 보는 진도의 문화전통에 따라서 '김현문학축전'이라고 명명해서 진행하는 행사 내용은 여기에 중앙문단에서 전국을 대상으로 활동했던 김현 선생의 문학 행보를 고려해 전국 단위 행사 범주를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매년 같은 행사를 비슷하게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매우 고심해왔다.
목포 소재 김현문학관이라는 지역 공간을 중심으로 남도에서 활동하는 문인들이 최일선에서 진행하는 행사의 취지상 덧붙여있는 남도지역 문학 발흥이라는 목적을 우선해야 한다. 김현을 추모하고 그의 문학을 기리되 목포를 비롯한 남도문학과의 접맥을 통해서 새로운 문학적 진흥을 꾀해야 한다.
지난 2020년 5·18 광주민중항쟁 40주년을 맞아 '김현과 5·18'이라는 주제를 통해 김현이 자신의 문학의 두 갈래 뿌리 중에 하나로 여겼던 5·18의 아픔에 대한 심도 깊은 인식의 근거와 현실적으로 반영되고 있는 흐름 등을 세세히 살펴봤다. 파괴와 억압으로 점철되는 현실에 대응하는 문학의 내면과 실체를 확인함과 '무한 텍스트로서 5·18'을 호명하는 성과를 이뤘다. 어쩌면 남도에 스민 김현문학이 피워낸 한 송이 꽃봉오리가 아니었나 여겨진다.(박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