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내가 해야 했던 일
사회자가 흥분된 목소리로 나의 소개를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중앙에 있는 연단을 향해 걸어 나갔다. 수천 개의 눈동자가 그런 나의 표정을 따라 움직인다.
나는 나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나의 시선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마이크에다 대고 입을 열었다.
「오늘날 조국이 처한 현실을 바라보며 나는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젊은 양심을 숨길 곳이 없어 지금의 정치현상을 알면서도 속고 있는 사람들의 억울함을 깨우치기 위해 나와 나의 가족의 행복을 바치며 생명까지도 걸어야 할 비정한 현장에 신을 믿고 여러분을 믿으며 뛰어 들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정의의 소재를 찾지 못해 외로움을 느끼며 자신의 운명에 도전한 고집스런 저의 행동에 이 순간 뜨거운 박수를 보내준 내외 귀빈 여러분, 그리고 당원 동지 여러분에게 먼저 감사하다는 인사부터 드립니다.
지금까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기민당을 이 사람이 선택하여 이곳에서 창당을 하게 된 것은 이 나라의 기존 정당이 시대와 그 시대의 국민들 앞에 사명감 같은 걸 내어놓지 않고 당리 당책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치중하는가 하면 또 자신들에 의해서 생긴 모순에 억울한 사람이 생겨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괴상한 버릇을 보고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나는 오늘 양심 있는 사람들 편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저의 주위에는 교회의 목사님과 신부님이 있습니다. 또 자기를 속일 수 없는 양심인 들이 기민당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권을 탐내지도 않고 권력을 탐내지도 않으며 부귀영달을 탐하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며 밝은 사회를 원하며 동포들의 앞에 희망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수치심을 잊은 채 계속 남을 속이는 자나 기대 가치가 없는데도 그것을 지키려는 역사에 반역하는 악인과 싸우기 위해 목적을 가졌고 또 진리에 따르는 정치를 소생시키기 위해 민족의 양심을 직결시키겠다고 그 뜻을 밝혔습니다.
존경하는 애국 시민 여러분!
어떤 사회이든 양심이 지켜질 수 없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입니다. 우리가 행복한 사회에 살고 있느냐 불행한 사회에 살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여러분 개인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 책임은 마땅히 이 나라 안에 존재한 정권과 그 주변이 책임을 져주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들이 그런 것을 몰라라 한다면 그 행동은 양심이 없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밖에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상식이 떠난 사회는 위험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이 참에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구해야 되겠다고 떠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릴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의 가족은 걱정이 생겼고 저는 다리를 펴고 잠을 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위험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조국에 바치려는 나의 애정입니다.
더 많은 젊은 양심들을 형무소로 보내느니 보다 내 생명을 바쳐서라도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나의 용기가 양심을 포기하라는 선언에 맡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장래는 여러분의 심판에 의해서 앞으로 결정될 것입니다.
아직도 이 나라에는 상식을 살리고 양심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말뿐입니다. 자신이 박해 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안일을 생각하는 쪽으로만 기운다면 그것은 두려운 세상에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사는 행위이며 이런 짓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짓으로써 자신에 대한 자기 책임마저도 부인하는 행위일 뿐입니다.
또 장차는 스스로 멍에를 멘 노예생활의 시작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자손들의 앞날에도 삶의 수단이나 행복이 될까요? 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나는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이 땅의 모든 사람들한테 외치고자 합니다. 비겁한 자신과 싸워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그 길이 이웃을 진실로 사랑하는 길이며 조국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방관적인 나약함은 이 땅에 양심과 정의를 침몰시키는 길이며, 정의와 양심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영원히 어둠 속에 잠긴 그런 세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세월이 좀 더 흘러 살기가 어려워지고 억울한 일이 생기고 나서 후회하고 반성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의 현상은 전적으로 국민 전체가 책임질 것이 많습니다. 주인노릇을 안 하려고 하니깐 당연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
좀 더 정신 차리고 살자며 호소하는 사람을 보고 손가락질이나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또 거짓말 잘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그런 말이 불신을 낳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딱한 사정을 저마다 지닌 채 가슴을 치고 후회할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남의 출세나 부러워하고 자기 자신을 포기하던 나약한 시대적 배반 행위에서 탈출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스스로가 자기의 희망과 자유를 얻기 위해 침묵을 버릴 때가 온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조국을 위하여 지킬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용기와 노력과 자신에 대한 투자만이 위대한 결과에 기다림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가치관을 지니는 것만이 이 땅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할 상식이며 조국에 대한 의무라고 나는 판단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상이나 꿈을 찾기 위해서는 자기에 대한 도전이 꼭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 하나의 예를 보십시오.
가난했던 스위스 사람들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는 곳에서 진리 하나만을 지킨 용기에 의해서 세계에서 제일 소득이 높은 국민이 되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서구의 영국은 의지 하나만으로 간단한 법률로 이루어진 헌법만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흔들리지 않고 세계 제일의 민주주의를 지켜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런 주위의 사정과 내력을 배우면서도 현실을 해결하지 못한 것은 인재를 멀리하고 있으며 국민의 주인의식 포기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속이는 자가 있고 속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무 일도 지켜질 수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양심보다는 욕망이 지켜지는 사회는 스스로 그 고통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분명히 희망을 제시하였습니다.
정치가 잘 되는 나라나 경제부국으로 발전을 이룩한 나라들은 대부분 먼저 그 나라 국민 속에 믿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며 개인의 창의력이나 용기가 숭상된 데서 생긴 것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람들보다도 못한 것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봐도 별로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자 국민이 되고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은 간단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못하는 사람들의 억지가 무섭기만 합니다.
나는 이런 자리에서 누구를 욕하려 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 마디하고 싶은 말은 오늘의 고통스러운 조국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제 가족들한테 못난 남편, 못난 아비가 되었습니다.
지금 저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오직 부족한 것을 찾으려 도전했습니다.
주위에 계신 동지 선배 여러분!
험난한 앞길에 격려와 충고를 보내주어 이 사람이 다른 길로 가지 못하게 지켜주고 오직 젊은 양심을 조국에 바칠 수 있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부탁의 말씀을 올리며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저의 인사에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
극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흥분했다. 박수와 환호가 폭발했다. 싸늘한 날씨였는데도 실내가 열기로 가득 찼다.
행사에 참석했던 중앙당 연사들의 축사가 있었고 친구의 자격으로 구좌석 형이 축사를 했다.
「젊은 사람이 험난한 세상에서 생명을 바치려고 하여도 바칠 곳이 없으니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열들을 두고 죽어도 얼굴을 들지 못할 수치를 느끼면서 그래서 자신을 위로하고자 오늘 이삼한 동지의 양심적 선택에 조금이라도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제 집에서는 내려가지 말라고 붙잡는데도 고집부리며 이 곳에 찾아왔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부산 시민여러분, 여러분이 아직도 양심과 정의를 구하고자 하는 이곳의 열기를 보고 나 또한 나라를 위해 시비를 가려보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시집살이 석 3년이란 말이 있습니다.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봉사 3년을 시집살이에서 겪으라는 말로 전해 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정치하시는 높은 분들은 우리 국민을 보고 시집살이를 시킬 모양입니다. 엊그저께 신문을 보니깐 무고죄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담화가 발표되었는가 하면 국민들이 중상모략을 심하게 한다고 해놓았습니다.
험난한 세상에 살다 보면 그런 일도 더러는 있을 것입니다마는 왜 그런 말씀을 그분들이 자주 신문에서 대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침묵이 강요되고 있는 사회에서 울고 있는 동포가 얼마나 되는지 그런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국민의 위에서 권력을 휘두르던 자가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는, 10억에서 수백억까지 재산을 모았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거짓인가 밝혀보겠다는 의사는 한 번도 밝혀 본 바가 없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입에다 재갈을 물리며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엄포를 주면 국민은 누굴 믿고 살며 사람의 양심을 두었다가 어디에 쓰라고 배고픈 사람한테 시집살이만 시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이런 상태가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지 살기가 죽기보다 더 지루합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짊어지고 있는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양심과 용기가 있는 사람을 정치현장에 내몰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찾아왔습니다.
부산에서 살고 계시는 여러분이 저보다 더 잘 아시는 일입니다만 이삼한 동지야 말로 이 땅에서 자기와 싸울 수 있는 가장 뛰어난 인물이며 그분의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도 이 땅에 살고 있는 동포의 사명자로서 손색이 없다고 본인이 생각하였기에 고민이 많은 정권이나 고달픈 민족이나 영광이 없었던 조국을 위해 이런 분께 십자가를 지워야 한다는 사실이 저의 심중에 확신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거듭 말씀을 올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이삼한 동지가 불의와 싸워 좌절하지 않도록 격려와 또 스스로 채찍이 되어주실 것을 당부 드리오며 상식이 숨어버린 사회에서 상식을 되찾고 축복이 멀어진 곳에 축복을 구하며 역사 앞에서 진실을 되찾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축사에 대신합니다.」
청중이 가득 찬 장내는 요란스러운 박수소리가 넘쳤고 사회자가 다음 연사를 소개할 때까지 흥분과 감동이 사람들의 얼굴에 넘쳤다. 시간은 정오를 넘겼다.
그 장소에 파견되어 있던 기관원들의 당부는 긴급조치로 복역한 사람은 축사를 시키지 말라고 부탁을 했지만 서울에서 일부러 나를 보러 온 이경식 동지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사실들을 설명하고 너무 정권에 대한 성토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경식 동지는 당시 민주통일당의 당직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자는 이경식 동지를 청중들한테 소개했다.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주시한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깨끗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민주통일당의 당적을 가진 이경식입니다.
긴급조치인가 무엇인가 하는 것 때문에 감옥에 갔다가 최근에 석방되어 오늘 부산 영도에서 이삼한 동지가 기민당을 창당하고 양심과 용기를 조국의 장래에 바치겠다는 장한 결의를 불초 이 사람이 격려나 좀 해주고자 이곳에 찾아왔습니다.
가까이에 계신 주민 여러분!
나라를 위해서나 여러분을 위해서 이삼한 동지 같은 젊은 양심이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게 힘이 되고 보호자가 되어 같이 행동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특히 요즈음에 와서 어떤 문제든지 사실을 알고 행동해 달라고 거듭 부탁을 드립니다. 지나고 나서 속았다고 한탄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슬픈 일을 당하기 전에 예방할 수 있다면 예방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엊그제 감옥 구경을 갔더니 별의 별 사람을 다 만났습니다. 세상인심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들은 사실 다 털어 놓으면 이곳에 오신 분들 마음 소란해질 것이고 이곳에 나와 있는 경찰관들 입장이 곤란할 것 같아 꼭 해야 할 말만 골라 하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조국이 바라는 지도자, 여러분이 바라는 지도자는 여러분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경식 동지의 축사는 사람들의 폐부를 찌른다. 그는 다시 목청을 높인다.
나의 마음이 자꾸만 불안해진다. 간단하게 마무리 지으라고 전달을 했다.
창당대회는 예상외로 성대하게 끝마쳤다. 앞으로 자신의 운명이 궁금하기만 했다. 세월은 시간을 쫓는다.
11월이 되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생각해야 한단 말인가. 무언가 한 가지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도 온갖 걱정과 괴로움이 나를 괴롭힌다. 나 자신의 뒤를 돌아보면 자꾸만 꺼림칙한 생각들이 따라다녔다.
아내 역시 걱정되어 보이는 얼굴을 드러내며 눈치껏 살자고 애원을 한다. 사무실에 나오면 나를 돕겠다는 사람들이 나의 마음에다 채찍질을 했다. 누군 어떻고 누군 어떻단다. 집에 들어가면 망설여지고 밖에 나오면 해야 되겠다는 사명감에 빠진다.
그런 어느 날 아침이다. 우리 집에 웬 낯선 사람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의 저쪽에서는 나를 찾았다. 이야길 하다 보니 전화를 건 사람은 부산 제3지구당 창당준비 위원장이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전화인데도 동지의 입장에서 반가움을 느꼈다.
전화의 내용은 오늘 오후 1시에 주례의 모 예식장에서 창당대회를 여니 꼭 참석해 달라는 전화였다.
서울에서는 구두서 목사(전 침례교회 총회장)가 참석한다고 했다. 나도 그 시간에 참석하겠다고 말을 전해주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몸에는 심한 피로가 일어났다. 술 때문인지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인지 머리가 무겁고 골이 쑤시는 것 같은 피로를 느꼈다.
나는 오전 중 나의 사무실에 나가 대강 나의 할 일에 대해 그곳에 나온 사람들한테 지시를 하고 정오가 되어서는 부산 제3지구당 창당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나의 사무실에서 출발을 하였다.
내가 탄 자동차는 길가에 있었던 건물인 대회장을 힘들이지 않고 찾아냈다. 창당 대회장인 조그마한 예식장에는 벌써부터 사복 경찰관들이 여럿 보였다.
나는 그곳 대회장을 위해 일하는 사람 같은 안내자를 붙잡고 나의 명함을 내어 놓았더니 금방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의 신사가 와서 인사를 했다.
그 사람은 오늘 대회를 주관한 준비 위원장이 본인이라고 자기소개를 먼저 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사람과 악수를 나누었다. 서울에서 내려온 구 목사도 나와는 초면이었지만 나를 만나보고 매우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창당준비 위원장은 나와 구 목사를 중앙에 설치된 좌석으로 안내를 했다. 나의 옆 자리에는 구 목사가 앉았다. 나는 양심을 위해 교회를 나온 원로목사에게 시국에 대한 문제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걱정을 했다.
호걸풍인 구목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나를 격려해 준다. 그때 시간이 다 되었는지 사회자가 장내를 정리한다.
창당준비 위원장이 나한테 와서 부탁을 했다. 축사를 좀 해달란다. 준비해간 말이 없어서 당황하기도 했지만 대답은 그러마고 했다. 나는 머리속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조금 후에 있을 축사의 내용을 찾기 시작했다.
사회자는 식순에 따라 대회를 진행시켜 갔다. 요식절차를 치르니 손용규 선생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오랫동안 교단에서 일해 왔다는 그분의 용모를 볼 때 경력보다는 험난한 오늘의 세대를 생각해 보면 걱정이 생긴다. 금방금방 식순이 진행되었다.
위원장의 인사말이 끝나고 구 목사의 축사가 끝나자 사회자는 나를 청중들 앞에 소개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의 연단으로 걸어 나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붙든다.
나는 마이크에다 입을 대고 침착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험난한 세상에서 자신을 돌볼 기회도 어려울 때 조국을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오늘 이 자리를 만들고 또 이곳에 나와 준 손용규 위원장의 애국적인 자기 양심에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지의 한 사람으로서 고마운 마음으로 나의 뜻을 전해드리며 오늘 이러한 출발을 위해 도와주신 당원동지 여러분의 열성에 뜨거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간다고 느껴지는 현장에서, 누군가가 이 자리에 뛰어들어 사실을 확인하고 희망을 심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순박한 양심에 자기희생을 동의했습니다마는 험난한 세상의 인심이 정의를 찾으려는 노력에 두려움과 외로움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뜻은 있어도 말은 못하고 알고는 있어도 행동을 하지 못합니다. 바로 우리들 주위에 긴급조치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가족을 생각할 때 이 땅에 태어난 자신을 슬퍼해야 했습니다. 자신이 두려운 사람들은 남을 편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고통은 또 고통으로 이어져가고 있는데 그것을 치료해 주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절망적인 문제에 대해 해결을 해보겠다고 병드는 사회를 고쳐보겠다고 정치해 보겠다고 손용규 위원장이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이곳에 자리를 같이 해주신 당원동지 여러분 또 내빈 여러분!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손 위원장이 도맡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오늘 널리 알려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셔서 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힘이 되어주시길 간구하는 바입니다.
제가 오늘 손 위원장을 처음 이 자리에서 보았습니다만 관상을 보니깐 완전히 진짜였습니다.
세상에는 가짜가 많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시면 많이 기억해 내실 것입니다. 이씨 세상에는 이씨 것이요, 윤씨 세상에는 윤씨 것이요, 박씨 세상에는 박씨 것이요, 또 다음 세상에는 다음 사람의 것이 될 줏대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웃을 속이고 사회를 속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속이고 줄을 잡는 사람들, 그들이 오늘날 우리의 세대를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일꾼이라고 골라놓으면 일은 안하고 감독한테 잘 보이기 위해 아양만 떠는 이런 게 일꾼입니까. 기생이지.」
박수와 웃음이 장내를 소란스럽게 한다. 나는 다음말로 또 청중을 침묵시켰다.
「농사를 망치면 핑계는 하늘에다 둡니다. 속은 사람은 말도 못합니다. 이런 세상에는 그래서 인지 이유가 많습니다.
쉬운 말로 제가 여러분에게 하나 물어 보겠습니다. 대한민국 법률 제1조에 보면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조문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지요. 바로 여러분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여러분이 주인 대접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잘못 보였다가는 천덕꾸러기 대접도 못 받습니다. 왜 세상이 요지경으로 변했습니까.
줏대 없는 작자들 때문이요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직무를 유기하는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애국심만 믿고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패가망신은 그냥 두고 생명까지도 걸어야 하는 이런 자리로 뛰어 나왔습니다. 바로 잡아야 한다. 바로 잡아야 한다. 그 마음으로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제 집에는 한숨소리뿐입니다. 제 행동이 안타까워 제 여편네가 죽을 지경이랍니다.
동포가 무엇이며 조국이 무엇이냐고 나를 타이르는 여자의 마음, 남들처럼 살아가자고 절규하는 자식을 키우는 여자의 변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목석이 아닌 사람의 심중으로는 애간장이 녹을 때도 있습니다. 자식의 애처로운 눈물을 볼 때마다 못난 애비의 변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양심을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로 고집을 부리며 버티고 있습니다. 저희는 양심을 이 땅에 바칠 것입니다. 어떤 어려운 점이 있어도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당원동지 여러분 그리고 내빈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손 위원장의 처지와 심정을 깊이 아시고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이 땅에서 양심을 가진 분이라는 것을 유의하시고 이끌어 주시고 채찍질해 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속담에 아기가 크면 어른이 된다 는 진리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희망을 키우면서 현명하게 살아 갈 국민이 될 것을 같이 다짐해 보면서 오늘 이 식전에 나와 축사에 갈음합니다. 감사합니다.」
장내의 박수소리가 나의 띵하던 머리속을 씻어 버린다.
앞에서 어떤 사람이 선생님께서 연설할 때 기관원 같은 사람들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더라는 귀띔을 해주었다. 나는 구 목사와 함께 식장을 빠져 나왔다.
손용규 위원장이 우리 두 사람의 옆으로 뛰어왔다. 나는 그냥 떠나려고 하는데 손 위원장은 식사라도 같이하고 가라고 권한다. 부산 제3지구당 간부들과 타 지구당 조직책 희망자들이 10여명이나 있었다.
우리는 엄궁동에 있는 모 음식점에서 점심을 시켰고 식사가 끝난 후 일행들은 헤어졌다.
손 위원장은 그의 부인과 함께 영도다리 입구인 나의 사무실까지 구두서 목사를 배웅하기 위해 따라왔다. 나는 차 한 잔씩을 시켜서 대접을 하고 보냈다.
시간에 쫓기는 바쁜 일정들을 보면서 또 오늘 하루가 지나가는구나 생각해 본다. 마음속에서는 부담감이 더욱 커진다.
솔직히 말해 나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안정이라는 유혹이 자꾸만 내 마음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따로 정해진 운명이 있었다.
이 운명은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룻밤을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지샌다. 언제나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머리가 아팠다. 전화의 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이른 새벽에 누가 전화를 걸었을까. 생각하면서도 수화기를 들었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친다. 나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어제 창당대회를 한 부산 제3지구당 위원장인 손용규 선생의 부인이었다.
당장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쉰 소리는 예사롭지 않을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어저께 저녁 한밤중에 웬 낯선 사람들이 집에 와서 사람을 데리고 나갔는데 소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자꾸 내 마음에 걸렸다. 어찌 되었던 당장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알아보겠다는 대답 하나로 전화의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아침을 먹은 후에 나는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10시경이나 되어서 경찰국 정치담당한테 전화를 걸어 물어보았다.
손용규 씨가 실종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당신들 소관이요 하고 물었다.
그런데 그 쪽에서 전하는 이야기는 북부경찰서에 연행되어 있다며 어제 내가 한 연설은 무사하게 넘어가게 되었다고 다른 말까지 했다.
나의 마음은 어처구니가 없고 허탈상태에 빠진다. 나는 나의 바쁜 일정은 뒤로 밀쳐두고 사정이나 알아보아야 되겠다고 북부경찰서로 달려갔다.
정보과장을 찾아가 나의 신분을 밝히면서 어떻게 된 내용이냐고 물었더니 이번 일은 자기네들 소관이 아니라고 상부의 지시만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때 어떤 형사가 손 위원장을 데리고 들어왔다.
손 위원장은 나를 보자 계면쩍은 웃음을 띠우면서도 어떤 기대감을 갖는 모양인지 천진하게 행동한다. 나는 그의 마음을 실망시킬 수가 없었다.
곧 풀려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말로 잠시나마 안심을 시키고 형사들을 보고는 잘 부탁한다는 필요 없는 말을 하고 나와 버렸다.
경찰서밖에는 진작부터 와 있었던 손 위원장의 부인과 그 측근 한 사람이 정문 앞에 힘없이 서 있었다.
나는 사실대로 일이 잘못된 것 같으나 아직 문제가 확정된 것이 아니고 어느 곳의 지시를 기다린다 하니 이만쯤의 일이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말을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데 나의 머리에는 오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른다.
어제만 해도 밝은 표정이었던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어두운 얼굴을 하고 경찰서 앞에서 발을 굴리며 서 있는 측은한 부인의 모습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나도 일을 당하면 나의 아내가 저런 모습으로 서성대겠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왜 남들처럼 살지 못하느냐는 아내의 괜한 투정 같은 말들에 대해 여자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내 자신의 뒤를 돌아본다.
태어나면서부터 천대를 받고 이웃에서 멸시를 당하던 일, 형제로부터 학대까지 받으면서 동물처럼 생명의 삶을 지켜왔던 성장기를 생각할 때 이제 또 정권으로부터 박해받기를 자초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자신의 운명을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신은 나한테서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가 양심과 정의감 때문에 받는 고통을, 또 그 고통을 아무에게 이야기조차 하지 못하는 큰 고통을 간직하면서 나는 부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서울에 있는 당에다가 전화로 알려주었다.
이것이 내 주위의 일들을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였다.
나는 한심함을 느낀다. 이래가지고 무슨 일을 할 것인가. 남들처럼 자신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위험에 부딪치려는지 도무지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었다.
부딪쳐야 하느냐 물러나느냐 하는 망설임에 지구당을 창당해 두고도 10여일이나 손을 쓰지 않은 채 등록절차를 방치하고 있었다.
11월 10일이 넘어 가니깐 서울에서 뻔질나게 독촉전화가 왔다. 지구당 등록 서류를 만들어 보내 달라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그때야 결심을 하게 되었다. 20여명이나 되었던 나를 돕는 당원들한테 입당원서 및 인감 증명을 떼어오게 하였다. 그런데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이틀이 지났는데도 30여장 정도의 입당원서와 인감증명서만 들어왔다.
정의를 부르짖고 나온 기민당이란 정당이 양심 세력의 집단이란 소문이 퍼지니까 하도 시달려온 세상 사람들은 혹시 무슨 일이나 생기지 않을까 아예 외면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임박한 날짜가 마음에 걸렸다. 이제 내가 스스로 나설 차례였다.
지구당 사무국장인 김 동지한테 등록서류를 뒷날 정오까지 만들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 신선2동 사무실 앞에는 9시가 되자 4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민원을 맡아보는 아가씨가 땀을 흘린다. 40여장의 입당원서와 인감증명을 받아내는데 별 어려움이 없이 처리한 것이다.
나의 동지들과 지구당 사무국장은 경이에 찬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13일 오후 등록서류를 선거관리 위원회에 들고 갔던 사무원이 등록증을 그 날 늦게 받아왔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고 말았다.
15일은 중앙당에서 창당대회를 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나는 다음날로 다가오는 행사를 위해 분주하게 서둘렀다.
14일 오전, 두 사람의 동지들과 함께 나의 승용차로 서울을 향해 달렸다. 자동차는 오후 4시경에야 서울 시내의 낙원아케이드 앞에 닿을 수가 있었다.
내가 처음 찾아오는 창당준비 위원회의 사무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의 지구당 창당대회에 참석한 바 있던 어떤 동지가 나의 얼굴을 알아보고 무척이나 반기면서 여러 사람들 앞에 나를 소개한다. 주위의 눈들이 나를 살핀다. 금방 악수하기가 바빠진다.
나는 대강 주위가 잠잠해지는 순간을 기다려 나의 서류 봉투에서 지구당 등록서류의 사본이 든 봉투를 조직 위원회에 넘겨주었다.
그러고서야 나의 개인 사정 때문에 행사의 일정만 듣고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숙소를 정하면 연락을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두 사람의 동지가 기다리는 나의 자동차 쪽으로 향했다.
나는 잠시 후 창당준비 위원회의 사무실과 가까운 곳인 청계천에 있는 센추리호텔에다 방을 구하여 놓고 나를 따라 온 두 사람의 동지한테는 서울에서 볼일이 있으면 보고 내일 아침 8시까지 오라고 했다.
나는 두 사람의 동지가 방을 나가자 금방 온몸에 피로를 느꼈다. 창당준비 위원회 사무실에다 호텔 객실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오래간만에 서울에 올라온 김에 옛 동지를 생각하면서 전화기를 들었다. 어떤 사람은 전화가 되지 않았고 어떤 쪽에서는 반갑다고 금방 달려왔다.
소주병과 오징어다리를 들고 온 사람들이 구김살 없이 옛날처럼 대하는 얼굴들을 보면서 술잔을 주고받는다. 밤은 깊어갔다. 술기운은 얼굴에까지 올라온다. 한 사람 두 사람 마지막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호텔을 나간다.
나는 옛 동지들이 떠나면서 남긴 위로의 말을 되씹으면서 잠자리를 잡았다. 눈을 감으니 금방 피로가 밀려왔다.
그때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신호는 끊기지 않고 계속 왔다. 나의 마음은 당장 술기운 때문에 짜증스러워 질려고 한다. 억지로 수화기를 들었다.
상대 쪽에서 먼저 나를 찾는다. 나는 대답을 했다. 전화기의 저쪽에서 금방 반가운 음성으로 변한다. 전화를 건 사람은 신학 대학을 나온 사람으로 천주교회의 예비신부였다.
내일 창당대회에서 나를 정치위원에 뽑을 것이니 승인해 달라는 전화였다. 나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리며 수화기를 놓았다.
내가 잠에서 깨었을 때는 아침이었고 두 동지가 호텔로 돌아온 뒤였다. 대강 나의 몸가짐을 갖춘 뒤에 우리는 인근인 낙원동을 향해 출발을 했다.
창당준비 위원회의 사무실은 복잡했다. 나는 아직도 창당대회의 장소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궁금증이 발동을 한다. 창당준비 위원회의 조직책임자를 붙잡고 도대체 오늘 어느 곳에서 대회를 하느냐고 계면쩍은 얼굴로 물었다.
한참이나 망설이던 그는 지금까지 장소결정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돈을 주어도 구할 길이 없다는 딱한 변이었다.
한참이나 지난 뒤에야 사람들이 분주하게 설쳤다. 서울의 변두리에 있었던 터밭골이란 곳에 있는 장로교회에다가 장소를 정했단다.
자동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앞차를 따라 서울의 지리에 서툰 내 차의 운전수가 기를 써가며 따른다. 나는 이 순간에도 현실의 저쪽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만한 일에 이렇게 한다면 다음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한 가지 두 가지가 아닌 부딪칠 다음 일들을 생각하면 나의 훗날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차는 변두리까지 나왔는데도 또 산동네를 넘어간다. 그런 후에 교회가 있는 곳에 멈추었다. 또 그곳에서도 일을 벌리기 전에 말썽이 생긴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소속된 교회의 상부 층에서 내려온 연락은 교회 안에서는 정치집회를 열 게 해서는 안 된다는 압력이었다. 이젠 그곳 교회 목사의 결정만이 남은 것이다.
목사는 오히려 우리 쪽에 대해 미안해하면서 하층인 지하실 쪽을 쓰라고 했다.
일개 정당의 중앙당의 창당대회가 비닐 장판이 깔린 지하실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야박한 인심과 공포가 곁들인 위협 속에서 양심과 정의감에 불타는 결의가 진행되는 순간이었다. 식순이 진행될 때마다 당 지도부가 구성되고 12명의 정치위원이 선출되었다.
대회장은 쌀쌀한 날씨였는데도 열기를 품으며 순조롭게 폐회식까지 끌고 갔다. 대회를 치루는 모두의 얼굴은 어떤 결의 때문인가 숙연했다. 두려워 말라 두려워 말라 우렁찬 성가가 공간을 향해 퍼져 나간다. 대회는 순조롭게 끝을 낸 셈이다.
대표 최고위원과 12명의 정무위원은 오늘 남긴 문제들을 협의하기 위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귀가하지 말고 낙원동 당사까지 가서 기다려 달라고 집행부에서 통지를 한다.
나는 나의 일행과 함께 나의 자동차 쪽으로 걸었다. 자동차 안에는 웬 낯선 사람이 조수석에 벌써 타고 있었다.
어떻게 문을 따고 앉아 있었을까 하는 의심보다 나의 앞길이 점점 불안해진다. 내 차를 태워 달라던 사람한테는 양해를 구하고 시내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운전석 옆에 앉은 뱃심 좋은 사나이는 자기소개도 하지 않은 채 단 한 마디도 입을 떼지 않는다. 나의 차가 결국은 목적지인 낙원동에 도착을 하여 멈추었는데도 사나이는 차에서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당사를 향해 들어갔다. 나는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중앙당 사무실에서는 곧 정치위원회를 열겠다고 하더니 우리를 안내해간 곳은 인근에 있던 어느 호텔의 넓은 한식 방이었다. 방 중앙에는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고 열세 개의 방석이 우리들을 맞이했다.
12명의 정치위원 중 나는 나이가 제일 연소했지만 정치적인 경험만은 제일 많은 편인 것 같기도 했다. 회의의 속개 중 나에게는 어떤 이야기도 이곳에서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회의는 나의 발언에 의하여 진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회의를 간단하게 끝내는 방법을 선택하였고 모든 안건은 총선 후까지 보류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여 통과시켰다. 당을 꾸밀 수 있는 실무진 몇 사람만 인준을 하고 더 유능한 인재를 영입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의견 충돌 없이 회의를 끝내게 하였다.
그 날 저녁 창당대회에서 아무 요직도 맡지 못한 도봉 지구당위원장인(청년 실업가였던) 임창진 위원장이 정치위원들과 함께 저녁식사나 하자는 초청에 내가 제의를 해서 응하게 되었다.
오후 6시쯤 되어 각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내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 낯선 사나이는 조수석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부산에서 같이 올라온 동지들을 보고 이제 볼 일이 끝났으니 부산으로 출발한다고 말을 하니 그때까지 자동차의 조수석에 목석처럼 앉아 있던 사나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며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시라고 또 손을 내밀며 악수까지 청한다. 나는 얼마쯤 차를 운전기사한테 몰게 했다.
그리고는 인근에 차고가 딸린 여관을 잡았다. 두 동지한테는 저녁식사를 시켜 주고 나는 회식장으로 달려갔다.
초대된 좌석에는 당 정치위원 말고도 지방으로 떠난 줄 알았던 지구당 위원장급 인사들도 배석하고 있어서 방 안에는 20여명이나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는 이번 일로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 서먹서먹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어떤 사람들인지 그 인물 자체에 궁금증을 느꼈다.
처음에는 분위기가 서먹서먹했으나 술이 들어오고 술잔을 돌리면서 약간의 취기가 몸에 오르자 사람들은 긴장을 풀려고 애를 쓴다.
누군가가 이런 제의를 했다. 돌아가면서 자기 내력에 대한 소개를 하자는 것이다. 모두 다 동의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자기소개를 멋있게 해댄다. 내가 듣기에는 모두가 훌륭한 인물들이라 여겨졌다. 소개가 끝나면 경이에 찬 눈초리와 박수가 나왔다.
나는 자랑스럽지 못한 나의 지난날을 이야기해야 하는 분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끝에서 두 번째인 나의 차례가 오게 되었다.
나는 주는 대로 받아 마신 술에 정신이 흔들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주시했다.
연소한 나이보다 당당한 태도,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두고 더 궁금했는지 모른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나의 아버지는 석수장이로 화전을 일구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기억에 담을 수 없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혼자된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나를 사랑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달픈 여인의 힘에 부담을 준 짐이 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분도 아홉 살 적에 돌아 가셨습니다.
열 살 때부터 세상의 인심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냉정한 사회에서 살려고 하다 보니 별 것 다 겪은 사내입니다.
남루한 내 꼴이 이웃으로부터 멸시를 받았지요. 어떤 때는 동리에서 성질이 사나운 아이들의 분풀이 대상도 된 적이 있었습니다. 형제조차도 나를 학대하였습니다. 나는 힘없는 동물처럼 세상을 두려워하며 살아왔습니다.
13살 때에는 신문장사, 아이스케키장사, 중국인 주물공장의 노동자, 좌우지간 궂은일은 무엇이든지 해보았습니다.
지금 저는 너무 복잡한 나를 다 소개는 못합니다. 너무 기니까요. 군대라는 곳엘 갔다가 제대해 보니깐 성인이 되었지요.
빵 문제 때문에 취직을 하려고 하였더니 보증인이 없어서 몇 번이나 직장을 못 구하고 질식할 것 같은 감정을 느끼던 날, 나는 세상에서 어떤 사명을 느끼고 정치를 해 보겠다고 뛰어 다녔습니다. 비로소 내 적성에 맞는다는 걸 느꼈습니다.
조직 속에 들어가니깐 난생처음 사람대접을 받았습니다. 대중당에 입당해서 지구당위원장, 청년국장, 사회단체 회장, 준비위원장 같은 것은 열 번도 더 맡아 보았습니다.
간이 커진 제가 1971년 5월 25일 선거에 출마를 했더니 나를 아는 사람들이 입을 딱 벌립디다. 나는 내 자신의 무지 때문에 언제든지 참모를 필요로 했고 한 번도 '부'자 붙은 자리에는 앉아보지를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당 대표나 한 번 해 볼까 했더니 정치위원밖에 못 됐습니다마는 우리들이 있는 곳이 양심세력이라는 데 매력을 느끼며 나의 양심을 통해 자신의 발전을 기대합니다. 앞으로 잘 이해하고 지내봅시다. 나에게도 소개의 기회를 주어 감사합니다.」
연설조로 내어 풍긴 나의 소개에 좌중은 숙연했다. 이번에도 경이에 찬 눈동자들이 나를 향해 주시된다.
다음 사람이 또 자리에서 자기소개를 했다. 대강 좌중의 인물들에 대해 우리는 서로가 근본을 생각할 수가 있었다.
나는 어지간히 배가 부른 것을 느끼며 제일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양해를 구했다. 구 목사가 같이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회식을 열어준 임창진 씨가 문밖까지 따라 나오며 자기 차를 타고 가라고 권한다. 염치가 좋았던 나는 그러자며 자동차로 먼저 올라타면서 구 목사한테 타기를 권했다. 자동차는 얼마 안 되는 나의 숙소 옆을 지나 구 목사의 다음 행선지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왠지 나의 마음속에서 걱정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우리가 같이 해야 할 일은 예삿일이 아닌 것이다.
정상적인 당의 출발을 첫째 정권이 양해를 할 것인가 궁금하였다.
그들이 우리의 양심을 양해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운명은 행동하기에 앞서 불운을 맞게 될 것이다.
새장에 갇혀 있는 새를 생각했다. 허공을 날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지 못하는 신세가 훤히 눈에 보인다.
정의는 총알을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잘못 되었다가는 하고 생각하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신을 학대해야 하는 무서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잠이 드는가 마는가 하는 속에서 날이 새었다. 두 사람의 동지와 함께 나는 서울을 떠났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는 부산을 향해 속력을 내었고 16일 오후 나는 나의 사무실에 돌아왔다.
서울까지 같이 동행하였던 두 사람의 동지들은 사무실에 모인 다른 동지들을 보고 내가 중앙당의 정치위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통고했다. 이곳 사람들은 다시 나를 신임하기 시작한다. 나는 걱정과 우려가 나의 마음에서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시간이 가면서 이런 마음을 더욱 확인하게 되었다. 중앙당을 정식등록을 시켰느냐는 질의전화를 하면 중앙당의 조직 부서에서는 내일된다 모레된다 시간만 끈다.
정당이 등록되면 200만원의 공탁금 절약과 선거 운동원의 활동에 큰 차이가 있었다. 정당등록으로 등록의 효력이 발생되는 23일이 지나서야 통보가 왔다.
도저히 불가능했다는 서글픈 통보였다. 나는 24일을 얼마나 지루하게 망설이며 보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또 25일의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운명은 시간만이 결정할 수가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서는 격렬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나가느냐 주저앉느냐 빨리 좀 시간이 가주었으면 하는데 이날따라 왜 시간이 이렇게 긴지 모르겠다.
주위에서 여러 사람이 마지막 나의 결정을 주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