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사량도의 섬 풍경은 아름다웠다.
한려수도 삼 백리 물길이 열리는 길목의 수려한 풍광은 여덟 해가 지나도록 내게 환상적으로 남아 있었다. 초여름이었던 그때 한없이 깊은 푸른 바다는 무한한 생명의 빛을 피워냈고, 하얀 포말은 하얀 환각처럼 밀려왔으며, 그 깊고 푸른 물빛과 수억 년의 풍상을 진 우뚝 솟은 바위들이 빚어내는 눈부신 풍광을 잊지 못한 나는 날 잡은 오늘 사량도蛇梁島를 향하여 어스름한 박명의 시간을 내달린다.
집을 나선지 3시간 50분 만에 통영 가오치(加吾峙)항에 도착한다.
그 시각 사량도행 배는 이미 뱃고동을 뿌리며 저만치 미끄러져 간다. 다음 배는 10시. 이곳 가오치란 다섯 개의 언덕이란 뜻을 가진 마을 이름이다. 아침 식사를 위해 여객터미널 옆 식당으로 걸음 하였으나 출입문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그 옆 가계는 다음 배에 승선할 사람들로 북적댔다. “식사 될 만한 게 있소” 아주머니께 물으니, “강된장에 백반 데워 비벼 무면 됩니더, 다들 마이 묵 심더” 한다. 그렇게라도 빈속을 채우고 배를 타라는 듯 바닷가 사투리의 어감과 어투는 내륙보단 거칠고 무거웠다. 강된장에 백반을 비벼 몇 수저 들다 말았다. “와 묵다 마는 교~.”한다. 참 투박한 말본새이나 묵은 된장 맛처럼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묻어 있다. “많이 먹었소.” 커피 한 잔 뽑아 들고 선착장으로 향한다.
푸른 파도가 내어주는 길을 따라 섬으로 향한다.
가오치 항에서 사량도 까지는 뱃길로 40분. 사량도로 가는 배편은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출발한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선실과 갑판 위에는 북적대는 등산객들로 이야기꽃이 한창이다. 그들 중 걸망을 맨 한 여행자가 수심 가득 찬 행색으로 갑판에 서 있다. 누군들 생의 낙원을 꿈꾸며 그 삶에 지치고 자신이 꿈꾼 시간에 절망하지 않았으랴. 세상의 풍경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그 시간이 쌓이고 쌓여 풍경이 되는 길. 행려를 실은 배는 윗섬(상도)과 아랫섬(하도) 잇는 연도교를 지나 항구가 있는 위섬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선다. 이곳 사량도는 3개의 유인도와 8개의 무인도가 있다. 거주인구는 약 2천명에 이른다.
사량도 윗섬인 금평항에 서서히 뱃머리가 닿는다.
부두에 발을 딛자 청청한 해수면을 핥아 온 바람이 행려의 객에게 와락 안겨든다. 해수의 바람과 풍경은 8년을 잊지 않고 다시 찾은 나를 기억하며 살가움을 전한다. 부두엔 걸음걸음 정갈한 갈햇살이 쏟아지고 비취빛 바다를 스쳐오는 바람이 갓 건져 올린 미역줄기처럼 싱싱하다. 부두에서 산행들머리인 돈지마을 수우대 전망대까지 순환버스를 이용하려 했으나 운행 시간이 맞지 않아 택시를 이용한다. 오늘 산행은 수우대 전망대를 들머리로 시작하여 지리산을 거쳐 달바위 가마봉 옥녀봉 끝봉에서 금평항까지 약 10km. 사량도 종주 코스다.
풍성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들머리에 든다.
바람은 싱싱한 백합 향기를 몰고 온다. 이곳은 남녘땅. 가을이 더디게 찾아오는가. 숨 가쁜 바위산이 기다리고 있는 지리산은 가을 깊은 수채화로 물들어 있다. 오름길에서 거친 숨 한바탕 뽑으니 단단한 바위가 속살을 드러내며 사방엔 푸른 생명들이 망망히 펼쳐진다. 영혼마저 순수해지는 투명한 풍광 앞에 서니 마음에 맺힌 어혈이 풀어지는 듯하다. 그렇게 한바탕 격한 숨을 뽑으니 몸은 한증탕에 든 듯 땀으로 축축하다. 상의 다운과 긴팔셔츠를 벗어버리니 오감이 상쾌하다.
이윽고 지리산(397.8m) 정상이다.
사방으로 탁 트인 너른 품을 내어주는 바다와 하늘은 한없이 깊고 푸르다. 세상은 캄캄한데 하늘과 바다는 한없이 깊고 푸르렀다. 나는 만세를 불렀다. 그곳에 우뚝 서니 삶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 듯 자유로움을 만끽한다. 사량도蛇梁島 지리산은 한국 최고의 명산으로 꼽히는 지리산을 바라볼 수 있는 산이라 해서 망望자를 덧붙여 지리망산智異望山으로 불린다. 사량蛇梁은 윗섬과 아랫섬 사이를 흐르는 해협의 형세가 뱀처럼 닮은 데서 그 지명이 유래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윗섬과 아랫섬을 상박도, 하박도로 기록하고 있으며, 원래 조선 초기엔 박도撲島로 불렸다. 박도란 파도가 매우 세게 부딪히는 섬이란 의미다.
해발 303메터 달바위의 경사면은 까마득한 바위 벼랑이다.
달바위를 이마에 두고 산길은 급격하게 경사를 높인다. 그곳에서 산더미 같은 비박 장비를 짊어진 8,9명의 청춘남녀들과 조우한다. 부산의 어느 단체에서 왔다 했는데, 다들 미간이 맑은 미끈미끈한 그들은 야생마처럼 힘이 넘쳤다. 자연 속에서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하얀 웃음 뿌리는 청춘들의 꿈과 낭만 그리고 그들의 뜨거운 사랑과 설레임을 보는 일이란 참으로 기꺼운 일이다.
달바위를 지나 가마봉에 서니 사량도는 깊은 속내를 드러내며 최대의 비경이 펼쳐진다.
비좁은 일상에서 옹색해진 마음과 탁한 마음을 저 풍경이 걷어간다. 어차피 서두를 필요가 없는 섬 산행 길, 배낭과 카메라를 내리고 돌팍에 앉아 수려한 풍경에 녹아든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풍광은 내 마음을 위로라도 하는 듯 “근심 걱정일랑 다 내려놓고 가라.”한다. 고뇌어린 이순의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누가 이처럼 포근한 위로의 말로 나를 감싸며 달래어 주었던가. 이래서 말 없는 자연이 인간의 스승이라 했던가. 해발 303메타의 이곳 가마봉 경사면은 까마득한 바위 벼랑이다. 사량도 종주 코스 중 가마봉에서 옥녀봉으로 가는 길이 가장 위험한 구간이다. 마음과 몸이 한결 가벼워진 행려의 객은 꿈틀거리는 용의 몸을 닮은 섬 산의 날 등을 타고 간다,
이윽고 두 개의 출렁다리를 지나 옥녀봉에 이른다.
이 옥녀봉玉女峰에는 전설이 서려 있다. 근친상간의 타락한 본능을 엄중히 경고한 전설로서 딸인 옥녀玉女가 까마득한 옥녀봉 벼랑에 몸을 날려 자신을 지킨 슬프고 안타까운 전설이 내려온다. 이곳에 사량도 지리산이 한국 100대 명산이란 글귀가 눈에 든다.
가을햇살이 비스듬히 기운다.
많은 등산객들이 산을 내려가고 있다. 옥녀봉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산길이 산행 들머리의 백합 향기처럼 달콤하다. 해수를 쉼 없이 핥아오는 싱싱한 바람과 깊고 푸른 바다와 살갑게 동행한 환상적인 섬 산행, 오래오래 기억될 가을날의 아름다운 추억을 안고 사량도와 작별한다.
통영 지리산 섬 산행에서. 2020. 11월 어느날 석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