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 두모포진성
기장 죽성과 울산 서생포는 여러 가지 닮은 점이 많다.
죽성엔 죽성천이 흐르는가 하면 서생포에는 회야강이 굽이 흐른다. 둘 다 수영(水營)이 있었던 곳으로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곳이었으며 지형도 비슷하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아픈 역사도 함께 지니고 있다. 그중 하나가 왜군이 성을 쌓은 곳이며 또 왜성을 쌓기 위해 조선의 성을 허물어 지금은 폐허가 된 점이다. 서생의 만호진성과 더불어 죽성의 두모포진성도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막연히 성이 존재한 사실만으로 접근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인데 무심한 세월탓도 있지만 문화재에 대한 국가적인 무관심도 원망의 대상이 된다.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여러 주민들에게 물었지만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다 홍성률 기장 실버타운 이사장을 만나 두모포진성과 인근 유적지에 대해서도 많은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홍 이사장의 지적은 믿기 힘들었지만 마을 부근 죽성천 바로 옆의 논과 어물건조장 사이의 축대처럼 보이는 돌담이 바로 성벽이라는 것이었다. 바로 기장 실버타운 아래쪽이다. 그러나 어디에도 성벽임을 말해주는 안내표지는 커녕 그냥 논의 축대로만 보인다.
길이 30m, 높이 2m쯤 돼 보이는 성벽은 기단석과 그 위로 성벽인 대형판석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자료에는 잔존 성벽의 높이가 2.5m, 하부는 2.0×1.5m 크기의 대형 판석이고 그 위는 50~70×40~50cm 크기의 돌로 성벽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두모포진성은 축조된 지 워낙 오래되긴 했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들이 인근에 왜성을 쌓느라 성벽의 돌을 헐어서 가져 간 탓에 이처럼 본래의 형태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두모포진성의 최초 축조연대에 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경상도속찬지리지』(1469)‘기장현 관방조’에 “두모포는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유군 병선 8척과 군병 700명이 있고, 무군 병선 5척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조 태조 6년(1397), 각 도에 2~4개의 진을 설치하고 첨절제사를 두었던 점으로 미루어 두모포진은 그 당시에 설치됐음을 알 수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기장현 관방조’는 “두모포영은 현의 동쪽 7리에 있는데, 수군 만호 1인이 있다. 정덕 경오(중종 5년, 1510)에 처음으로 석축을 쌓았다. 둘레 1,250척, 높이 10척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중종 5년에 기존의 성에 새롭게 석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두모포진성에는 종4품의 수군 만호아래 병선 16척과 군사 845명을 두었다. 동래의 부산포에 병선 33척, 군사 1,779명, 서생포에 병선 20척, 군사 429명, 해운포에 병선 7척, 군사 589명 다대포에 병선9척, 군사 723명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기장해안이 우리나라 동남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였고, 그런 만큼 두모포진성이 매우 중요한 국방시설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두모포진은 임진왜란 이후 기장현이 없어지고 인조 7년(1629)에 동래현 부산포(현 부산시 수정동)로 진을 옮기면서 명칭은 그대로 ‘두모포영’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본래의 기장현 두모포는 진영이 옮겨가면서 마을이름까지 없어지고 이후에는 두모포 앞바다를 말할 때 쓰던 두호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두모포진성을 둘러보고 또 왜성의 상태를 이야기하다 홍 이사장과 의견의 일치를 본 게 있다. 아픈 역사를 간직한 왜성을 ‘관광자원화’하자는 것이다. 우리민족의 아픈 역사는 이미 지나갔다. 그 아픔을 감출 것만이 아니라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왜성주위를 잘 복원하여 일본인들을 상대로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면 그냥 묻어두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는 조심스러운 제안이다. 또한 허물어진 두모포진성 역시 복원하면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