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5월이었다. 그녀는 곱게 화장을 하고 나를 기다렸다. 나는 입이 귀에 걸려 헤벌쭉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는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떠났다. 첫날밤을 맞는 나는 그녀를 안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모은것을 맡겨두었지만 머리핀이 너무 많았다. "왜 이렇게 머리핀이 많은거야, 머리핀 뽑다 사간이 다 지나가겠네" 내가 기억하는 첫날밤은 머리에 그녀 머릿핀이 너무 많아 나의 조급함이 점점 심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결혼할 때 십원 한 푼도 모아 놓은것이 없었다. 월급이 나오는대로 먹고 쓰는데 매진한 결과 저축이 아니라 오히려 마이너스 인생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뜰하여 적금통장 서너개를 가지고 있었다. 다행으로 은행에서는 직원들에게 전세를 얻을 수 있는 혜택을 주고 있었다. 그 전세금대출이 없었다면 결혼은 엄두도 내지 못했을것이다. 나는 우리 신혼집을 방2개에 거실이 있는 단독주택 2층으로 얻었다. 그 전까지 나는 어머니와 단칸방에 계속해서 살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생활을 어떻개 하고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는지 나는 아무 대책이 없었다. 월급이 나오면 월급이 나오는대로 보너스가 나오면 보너스가 나오는대로 흥청망청 살고 있었다. 60이 넘은 지금도 이 얘기가 나오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말도 하지 못한다. 결혼은 꿈같은 나날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나는 결혼하기 전 어머니와 둘이 살았고 결혼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다. 어머니가 둘째며느리를 달가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첫째며느리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나는 어머님이 뭐라해도 형처럼 어머니의 의견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녀의 신혼생활은 어땠을까? 행복했을까, 즐거웠을까? 단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녀도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엄마, 언니와 단촐한 가족이 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언니는 10년전에 결혼을 해서 그녀도 엄마와 둘이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다. 그녀의 아버지, 나의 장인어른은 북쪽이 고향이었다. 황해도가 고향이었던 장인은 전쟁통에 혼자 남쪽으로 피난을 오셨기에 남쪽에는 친지가 없었다. 파주 교촌인가에 먼 친척 한분만이 있었다. 장모님은 경상도분이셨는데 서울에는 친지들이 없으셨다. 그녀도 나만큼이나 가족이 없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는가, 아마도 자기와 처지가 비슷했던 나에게 연민을 느꼈을 수도 있다. 결혼을 해서 어머니와 같은 집에서 사는것이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장모님은 오랜시간 같이 살던 딸을 시집보내고 홀로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셨다. 물론 우리 신혼집이 장모님 집과 멀지 않았기에 자주 오갈수 있었지만, 아마도 장모님도 딸을 시집보내고 많이 외뤄웠을것이다. 나는 매주말 마다 장모님을 찾아뵙고 하루밤을 묵고 왔다. 말은 안하셨지만 어머니는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것이다. 큰아들에 실망하고 작은아들이라고 등을 기대고 살았지만 결혼하자마자 어머니는 나몰라 하고 마누라와 장모만을 챙긴다고 생각했을것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것도 결혼생활의 일부인것을, 나는 어머니와 장모님을 같이 모실까 생각했다. 그러나 두분다 오래전 남편을 여의고 홀로 살아온 세월이 있어선지 서로 쉽게 다가서진 못했다. 어찌보면 이것도 내 착각이었다. 오랜세월 혼자 살아온 사람들을 일년전만 해도 전혀 모르고 지냈던 두사람을 화학적으로 묶으려고 했으니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취지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결혼 후 얼마 안돼 우리는 싸우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머니와 같이 사는것을 무척 힘들어했다. 그러나 나는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갔고 싸우고 나선 화해한답시고 그녀의 몸만을 원했다. 나는 참 나쁜놈이다. 그러다 아기가 생겼다. 나는 외뤄웠기에 대가족을 이루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꿈이었다. 그녀는 아기가 들어섰다는 말을 하고 바로 자리에 누웠다. 입덧을 무척 심하게 했다. 아무 음식도 먹지 못했다. 심지어는 물도 먹지 못하고 그냥 끙끙 알았다. 어머니는 입덧으로 죽는 여자 못봤다며 조금 지켜보면 괜찮아 질것이라 했다. 그녀도 조금 둔한 편이라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 하며 그냥 버티고 있었다. 임신 1달쯤 지나 더이상은 지켜볼 수 없어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아니, 사람을 이 지경으로 나두면 어떻합니까?" 의사가 나를 질책했다. 나도 그녀도 임신을 처음 경험했고 주변인들이 심하게 입덧을 하지 않아 처리 방법을 알지 못했다. 두주쯤 입원하자 그나마 입덧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호리호리 한편이었는데 아가를 가지고 약 10킬로 몸무개가 빠져 35킬로 정도가 되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녀가 심하게 입덧을 하는데도 게의치 않고 야근을 핑계로 수시로 술을 먹고 늦은시간에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지않아도 입덧이 심했던 그녀는 남편이라고 자기를 돌보지는 않고 술만 퍼먹고 술냄새를 펑펑 풍기며 자는 나를 못 마땅해했지만 심하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이런 사람이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양처였다. 어째든 시간은 흘러 몸도 조금씩 회복되고 아가를 낳을 시간이 다가왔다. 동네 병원에 있다. 쇼크가 있다고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해서 구로동에 있던 고대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병원의사가 말하길 "30분마다 진통이 오면 병원으로 오세요" 라고 했단다. 퇴근시간이 임박했을 쯤 집에서 전화가 왔다. 30분 마다 진통이 시작되었고 점점 더 힘들고 아프다고, 나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무척 힘들어 했다. 우리는 택시를 집어타고 고대병원으로 향했다. 신정동에 택시를 타고 구로동으로 가고 있는데 퇴근시간이라서인지 20분 정도 걸리던 길이 40분이 지나도 도착하질 못햇다. 그녀는 택시안에서 끙끙 알았다. 나는 운전수에게 재촉했다. "조금 빨리 가주세요" 병원에 도착하자 그녀의 진통은 점점 심해졌다. "이제는 5분마다 진통이 있는것 같아" 나는 애가 달아 의사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 지금 병실이 없으니 다른 병원을 수배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병실이 없습니다. 다른 병원을 알아보셔야 될것 같아요, 아니면 복도에서 출산을 하시든지요" 허, 정말 깝깝했다. "이놈의 병원 복도에서 애를 낳으라고" 그때 나는 신정동 지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마침 산부인과가 은행옆에 있었다. 우리는 부리나케 택시를 잡아타고 다시 신정동으로 향했다. 그녀의 산고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택시안에서 애를 낳아야 할 듯 싶었다. "조금만 더 참아, 이제 거의 도착했어, 나는 힘들어 점점 가라앉는 그녀의 머리를 무릎에 대고 택시기사에게 소리 질렀다. "제발, 빨리 좀 갑시다. 이러다 사람 잡겠어요" 그날은 구정 전날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간호사만 한 명 있고 의사도 환자도 아무도 없었다. 간호사가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애가 나오것 같아요" 그녀는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 병실에 들어갔다. 간호사가 나에게 말했다. "손을 꼭 잡아 주세요" "산모님 호흡을 길게 길게 하세요, 의사선생님 바로 오실겁니다." 5분정도 지나자 의사가 왔고 채 10분도 안돼 아가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내 첫 딸이 태어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