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03. 21
6개월간 열렸던 V리그가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젠 정규리그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트시즌이 기다리고 있다. 봄 배구에 진출한 남녀 선두권 팀은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리기 위해 마른 걸레를 짜는 심정으로 모든 집중력을 끌어모아야 하는 시간이 왔다. 한 번의 실수가 팀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 이제는 단기전이다.
/ 한국배구연맹 사진제공
올 시즌 V리그 남자부는 대한항공의 독주가 예상됐었지만 리그 후반부 4연패에 빠지며 위기가 있었다. 그러면서 대한항공은 현대캐피탈에게 하루 동안 1위 자리를 내주었다. 하지만 다시금 비상하며 굳건히 1위로 정규리그를 마감했다. 우리카드와 한국전력은 6라운드 마지막까지 3위권 경쟁을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준 플레이오프가 성사됐다.
여자부는 현대건설의 독주가 예상됐지만, 야스민과 주전 선수들의 부상이 뼈아팠다. 시즌 중반 힘든 과정을 거친 흥국생명은 김연경과 옐레나가 힘을 내며 정규리그 1위에 올랐다. 여기에 도로공사와 KGC 인삼 공사의 준플레이오프 성사 여부가 시즌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남녀부가 1위까지 가는 길은 조금 달랐지만, 구성원들이 끝까지 집중력을 발휘한 팀이 결국 해낸다는 공식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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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를 준비하는 자세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각 팀마다 시즌을 대비하는 마음가짐과 자세가 다를 것이다.
먼저 준플레이오프를 준비하는 우리카드와 한국전력은 두 단계 위인 결승전 보다 단판 승부에 100% 전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입장이다.
그다음은 플레이오프를 기다리는 정규리그 2위 팀인 현대캐피탈과 현대건설이다. 현대캐피탈, 현대건설은 시즌 마지막까지 정규리그 1위 경쟁을 했지만, 아쉽게 2위에 머무르면서 심리적인 피로도는 더 높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체력 회복과 함께 준플레이오프 승리를 위해 여러 가지 전략 구상을 함께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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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올 시즌 36경기에서 탄탄함을 과시하면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한 대한항공과 흥국생명이다. 이 팀들은 정규리그 1위라는 영광과 함께 체력 회복을 위해 많은 시간을 번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정규리그를 치르면서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을 선수들에게 회복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고,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쳐 올라온 팀들보다는 체력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게 큰 장점이다. 여기에 경기를 지켜보면서 상대의 전술, 전략들을 보며 대응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것도 강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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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단기전이다. 한 게임에 팀의 운명이 뒤바뀌는 포스트시즌에 선두 자리를 쫓는 추격자와 선두를 지키는자 모두 챔피언 트로피를 향한 열망은 강하겠지만, 팀이 처한 상황과 전술엔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정규리그 1위 대한항공, 흥국생명을 제외한 한국전력과 우리카드, 현대캐피탈, 도로공사, 현대건설은 추격자의 입장에서 고민이 많을 것이다.
내 27년 배구 인생을 돌아보면 지키는 자보다는 추격자였던 경험이 더 많았다.
현대캐피탈, 한국전력, 우리카드 시절에서 말이다. 세 팀에서 모두 봄 배구 경험을 했지만 선두 팀을 쫓아가는 입장에서는 그리 좋은 추억은 없었다. 현대캐피탈 시절에는 삼성화재라는 큰 산 앞에 여러 번 무릎을 꿇었고, 한국전력, 우리 카드 시절에서도 상대적으로 좋은 분위기로 플레이오프를 준비했지만 두 번다 현대캐피탈에게 덜미를 잡히며 결승전에 도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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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순위에서 준비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플레이오프 첫 경기를 상대 홈에서 치러야 하기 때문에 심적인 부담감은 상위 팀보다 더 많았다. 여기에 시즌 동안의 상대전에서 열세이기 때문에 어떤 묘수가 나와야 했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뒤돌아보면 그때 내가 소속된 팀에 정말 필요했던 게 무엇이었고, 부족했던 게 뭐였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승자의 조건은?
프로 선수라면 기술적인 면은 거의 완성형이다. 하지만 긴장도에 따라 경기장에서 선수가 본인의 기량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느냐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아무리 실력이 좋은 선수라 긴장은 하기 마련이다. 적정 수준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선수들이 적정 수준의 긴장감을 잘 유지한다면, 극대화된 집중력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고도로 긴장하거나 너무 긴장을 안 한다면 집중력이 떨어져 범실로 이어질 수 있다. 중요 경기에서 범실 하나 때문에 그날 경기의 리듬이 다 깨지거나, 팀원들의 사기를 꺾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30대 후반에도 하나의 범실이 몇 천 배의 부담감으로 다가와 경기 중 멘탈이 흔들릴 때가 있었다. 만약, 지금 다시 선수 시절로 돌아가 추격자의 위치에서 조언을 해준다면 이렇게 애기하고 싶다.
“미니게임을 하는 것처럼 경기에 임하라"라고 말이다.
선수들은 비시즌이나 시즌 중 훈련 전후로 ‘언더 게임’이란 것을 한다.
1대1 혹은 전 선수가 다 들어가서 할 때도 있다. 그 미니게임을 할 때의 집중력은 실제 챔프전 보다 나을 때 많다. 움직임 또한 오로지 공만 보고 판단하고, 상대 움직임의 수를 두수, 세수 앞까지 생각을 하며 게임을 한다. 9mx9m 공간 안에서 지지 않기 위해 최고의 스피드로 게임에 임한다. 그리고 볼 판정이 이뤄지고 난 뒤는 곧바로 다음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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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단기전 승부에 꼭 필요한 것들이다. 볼에 대한 순간 집중력, 판정이 이뤄지고 나면 곧바로 다음을 준비하는 것 말이다. 이번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준비하는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도 이와 같다. 적정 수준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마치 미니게임을 하는 것처럼 경기에 임하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지키는자의 입장에서 승자의 기쁨을 맛봤던 것은 현대캐피탈 시절이다. 정규리그 1위를 한다는 것은 배구라는 종목에서 절대 혼자서 할 수 없다. 좋은 구성원들이 함께 해야 하고, 시즌을 치르면서 생기는 서로에 대한 믿음은 팀에 절대적인 요소다. 정규리그 1위를 하면 대략 10일 전후의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다. 신체적인 휴식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조금의 여유가 생기는 시기이다. 하지만 마지막을 앞두고는 선수들이 긴장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키는 자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자연스러움’이다.
정규리그 1위를 달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과 저력이 있다는 것이다. 챔프전에서 무언가를 더 보여주겠다거나 극적인 것을 만들려고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막상 1차전이 시작되면 몇 배의 중압감이 생긴다. 그래서 얼마나 자연스러움을 유지하면서 정규 시즌 때와 같은 경기력을 펼치느냐가 중요하다. 내가 현대 시절 1위를 하고 챔프전에서 패한 적도 있고, 챔프전 우승을 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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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결과를 바꿨을까?
굳이 차이점을 꼽으라면 정규리그 1위를 하고도 챔프전 우승을 못했던 때는 코트에서 자연스러움을 지키지 못했었다. 상대 팀을 이기기 위해서 나오는 부자연스러움이 코트 내에서 선수들 간 싸인 미스나 동료 탓으로 이어지면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어려웠다. 챔프전 시작과 동시에 1패만 했을 뿐인데, 부정적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팀보다는 개인만 생각한 게 남은 경기에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에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지키는 자들의 훈련 모습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코트 내에 웃음꽃과 말들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플레이를 할지! 어떻게 하면 내가 우리 동료들을 도와줄 수 있을지! 고민하며 선수들끼리 나누는 소통이 코트 내에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승리의 순간을 소망하며 동상이몽이 아닌 모두 하나의 공만 바라보며 하나의 생각에만 집중하고 선수단 전원이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 이것이 극대화될 때 정말 무서운 경기력을 펼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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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V-리그, 이제 정말 중요한 경기만을 남겨두고 있다.
추격자! 그리고 지키는자! 모두 시선은 챔피언 트로피를 향하며 같은 곳을 바라볼 것이다. 부디 부상 없이 팀이 원하는 색깔대로 선수들이 마음껏 기량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
배구에는 2점이 없다. 공 하나의 소중함, 그 1점의 가치를 알고 공 하나를 살리기 위해 집중하며 최선을 다할 때 V-리그 팬들도 선수들을 아낌없이 응원할 것이다.
윤봉우 / 전 프로배구 선수, 현 이츠발리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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