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행위에 의해 드러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저 사람은 지혜롭고 현명하다. 혹은 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슬기롭지 못하고 둔함을 뜻한다). 줏대가 없는 사람이다(자기의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우유부단(優柔不斷)한 사람이다(어물어물 망설이기만 하고 결단성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는 등의 말을 하며 상대를 비방하기도 하면서 평가하곤 한다. “본래 현명한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저런 사람이다.”라고 정해진 규칙은 없다. 다만, 독자들이 참고하면 좋을 것으로 생각한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안다. 올바른 사람은 정의 편에 서며 자신의 신념을 굳게 지킨다. 지혜로운 사람은 때로는 침묵을 지키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다. 현명한 자는 군중의 맹목적이고 파렴치함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남들이 보지 못하는 독특한 혜안을 가지 고 미래 상황을 내다보며 개척해 나간다. 나아갈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행동한다. 올바르지 못한 것이면 거절할 줄 알며, 더 나아가 상대가 그릇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조언을 할 줄 안다. 조언을 했는데도 듣지 않고 삿된 길로 가는 것은 조언자의 책임이 아니다. 삿된 일을 권유 받았을 때 거부하지 않으면 그 일에 동조하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누가 지적을 하면 불쾌하게 받아들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도 상식에 어긋나고, 법규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 남에게 그런 일을 강요하고 시킨다. 결국 시킨 사람과 따르는 사람 모두 동타지옥(同墮地獄 : 같이 지옥에 떨어짐)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삿된 일을 하도록 권유받았을 때 단호히 거절하며, 상대에게 하지 말 것을 조언한다. 그 이유는 죄업을 짓는 행위가 되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확고부동한 소신이 없기 때문에 남에게 휘둘리기 쉽고, 심지어 맹목적으로 남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 자신을 상실한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졌기 때문에 남들에게는 허울 좋은 “그저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나마 지혜를 증장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남이 욕을 하거나 비난하면, 같이 욕하고 비난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이 욕 하거나 비난을 하면 자신을 省察(성찰)하는 기회로 삼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으면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 또한 지혜로운 이는 혜안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이 참된 것이고, 거짓인지를 헤아릴 줄 안다. 반대로 어리석은 자는 누가 시키면 그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하고 본다. 그래서 죄업만 늘어난다.
옳은 일은 옳다고 하고, 그른 일은 그르다고 할 줄 알아야 현명한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떳떳하지 못한 일을 만들어 음모를 꾸미길 좋아한다. 그래서 현명한 자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을 도모한다. 그들은 마음이 올바르지 못하기때문에 늘 근심⋅걱정과 불안⋅고민에 쌓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죄업을 짓는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날마다 죄업이 늘어난다. 마치 봄 들판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날마다 자라는 것과 같다. 마음에 두려움이나 불안함에서 벗어나는 길은 청정한 마음가짐과 정직함, 그리고 자신을 늘 省察(성찰)하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은 화합과 일치를 구분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제(齊)나라 경공(京公)이 사냥을 나가자, 양구거(梁邱拒)는 그 주위를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양구거의 충성스러운 모습을 본 경공이 기뻐하며 안자에게 나와 화합하는 사람은 양구거뿐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안자는 경공의 말을 받아, 양구거는 군주와 일치할 뿐이고, 화합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설명했다. 아래 내용은 화합과 일치는 다름을 설명한 안자의 내용을 참고하여, 필자가 부가적으로 덧붙여 설명한 것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자는 “화합하면서 일치하지 않는다.”
일치라는 것은 예를 들면, A 회사 리더가 직원들과 회의하고 있다. 회의하면서, 리더가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고 하는데 부하직원들이 틀리다라고 반대하거나, 리더가 “그것은 틀리다.”라고 하는데 부하직원들이 “맞다.”라고 반대 의견을 제시하면, 리더와 부하직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참조해 조율하는 것이 바로 화합하는 것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자는 상관의 지시가 잘못된 것이고,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잘못된 부분을 솔직히 직언한다. 물론 이런 경우에 리더의 의견에 동의 하면, 일시적으로는 리더의 뜻을 따르는 것이 되어 마음이 편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봤을 때 부당한 지시가 회사와 나라에 큰 부담이 되고 향후 큰 이슈로 작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사안이라면 결국 회사의 안위 여부와 직결될 수도 있다. 무조건 추종하는 직원은 언제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소신 있는 인재는 구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소신이 있는 이런 인재는 회사에도 필요하고, 나라에도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리더가 어리석음으로 인해 훌륭한 인재를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리더는 충언과 직언을 기탄없이 잘하는 부하직원을 늘 곁에 두고 조언을 받아들이면서 직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그 부서, 회사, 국가는 성공할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일치할 수는 있어도, 결코 화합하지 못한다.”
리더가 옳다고 하는데 부하직원들도 옳다고 하고, 리더가 틀렸다고 하면, 부하직원들도 틀린 것이라며 리더의 의견에 일방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서로 일치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물에 물을 더하고, 사물에 사물을 더하는 것일 뿐이다.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것은 맹종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동료나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함께 일할 때 화합을 이루려고 하면서도 자신은 견해와 도의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구차하게 다른 사람과 억지로 일치시키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일치할 뿐 화합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소신 없이 아첨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의 의견이 잘못된 것이라도 올바른 충언이나 직언을 하지 않고 그저 충실하고 무능한 신하가 되어 시키는 데로 맡은바 직분을 성실히 수행할 뿐이다.
어리석지 않기 위해서는 평소에 꾸준한 독서로 事理와 道理에 밝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닦는 공부를 해야 한다. 어쩌면 평생을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리석음 보다는 지혜롭고 현명한 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한 부분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물론 인생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점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해서 영원히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반대로 현명한 사람이라고 해서 영원히 현명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양의 정도에 따라, 혹은 행위에 의해 현명한 사람도 되는 것이고 어리석은 사람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문장속에서 자신이 보완해야 할 점을 알아차리고 향상의 길로 나아간다면 얼마든지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의 인격은 그가 지닌 지위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위는 높은데 인격이 갖추어지지 않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지위는 낮은데 인격이 훌륭한 이도 있다. 세상에 가장 쓸모없는 자는 지위는 높은데 인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자들이다. 이런 자들은 나라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또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항상 옳을 일, 즉 정의로운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삿된 행동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죄업이 늘어나기 때문에 고통에 시달리게 된다. 물건에 흠이 생기면, 불량품으로 취급하여 제값을 받을 수 없다. 결국 정비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폐기 처분해야 한다. 인륜과 성품에 흠이 생기면 불량한 사람이 되어 정비하거나 고쳐쓰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인격은 전인적(全人的)인 수양을 통해 몸에 익혀 증득되는 것이다. 지식 습득은 인격을 쌓는 하나의 수단이 될 수 있으나,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아 학벌이 높고 아는 지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직접 체화되고 마음을 닦아 증득하는 수양을 하지 않는다면 마치 장님이 등불을 들어 남을 밝혀주면서 자신의 앞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또한 廻光返照(회광반조)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바깥 대상에 끌려다니지 말고 안으로 자신의 성품 자리를 비추어 보라는 말이다. 즉 빛을 돌이켜 자신에게 거꾸로 비춘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상대의 잘못한 것을 보면 상대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이런 경우가 있었는가, 앞으로 더욱더 조심해야지”하고 자신을 경계하는 것이며, 또 성경 구절을 보고, 내가 성경 구절대로 행하고 있는지를 되돌아 보고 경책하며 자신도 성경의 말씀처럼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할 수 있다. 항상 성찰(省察:자기의 마음을 반성하고 살핌)하는 습관이 없이는 자신을 향상할 수 없고, 인격을 갖추기는 더욱 어려우며, 혜안을 갖추기는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자신을 향상하는 첫 번째 길은 늘 자기 행동을 돌이켜 省察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거듭거듭 반복해 다져나가야 한다.
인간은 오직 행위에 의해서만 그 사람의 성품이 결정된다. 성품은 가문이나 학벌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성품을 갖추기를 바란다면, 독서를 통해 그 지식을 바탕으로 실천하고 단련하여 경험을 쌓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실천으로 체화되어 증득하기 위한 현명한 길로 들어서는 경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