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체육교류는 對敵사업의 의뢰물
일본 도쿄 올림픽은 열리나? 아직 모른다. 원래 개최일보다 한 해 늦춰 2021년 7월 23일(금)부터 8월 8일(일)까지로 날을 다시 잡았지만, 코로나19 변수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림픽 취소설, 무(無)관중 강행설에 이어 최근에는 ‘취소 후 2032년 개최권 부여설’까지 나왔다.
경기장과 사회간접자본에 투자한 천문학적 금액을 생각하면, 취소와 무관중 대회는 일본 정부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을 터이다. 그래서 나온 설이 2032년 개최설이다. 2024년 올림픽은 파리, 2028년 대회는 LA로 이미 개최지가 정해졌으니 그렇다면 그다음 2032년 대회를 개최해 이번 사태로 발생한 피해를 줄이도록 해달라는 뜻이다.
2032년 대회는 인도·독일·이집트·인도네시아가 유치전 참가를 공식화했고, 한국도 관심을 보인 바 있다. 2018년 8월 문재인 대통령은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에게 2032년 하계올림픽을 서울과 평양에서 공동으로 개최하면 좋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혔고, 바흐 위원장은 긍정적으로 화답했다. 서울-평양 공동올림픽은 문재인 대통령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2018년 9월 18일부터 9월 20일까지 진행한 남북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뒤이은 9·19평양선언에도 ‘2032년 올림픽 공동 유치에 노력하자’는 문구가 들어갔다.
갑자기 올림픽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KBS 때문이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실이 입수한 KBS의 〈2021년 1월 텔레비전 방송 수신료 조정(案)〉 자료를 보자. KBS는 수신료 인상안을 이사회에 상정하면서 2021년부터 2025년까지 ‘공적 책무’를 수행할 중·장기 계획안을 내놓았다. 그중 하나가 2032년 하계올림픽 남북 공동 유치를 위해 ‘남북 청소년 스포츠 교류대회’를 개최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평양과 서울에서 매년 번갈아가며 대회를 개최해 향후 각종 대회에서 공동으로 진출, 남북 단일팀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설명도 함께였다.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녹이는 데는 뭐니 뭐니 해도 스포츠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올림픽 단일팀, 공동 입장 등의 실현 가능성, 그리고 이전에 남북 합의로 치러진 각종 스포츠 이벤트의 성과를 한번쯤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터이다.
▲ 2018년 2월 9일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남북선수단은 한반도기를 흔들며 공동 입장했다. / 사진=조선DB
남북 단일팀 가능한가?
그렇다면 이번 도쿄 올림픽에 남북이 단일팀으로 참가할 가능성은 있나?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올림픽은 원활한 진행을 위해 참가 선수단의 전체 규모를 2만명 이내로 제한한다. 대회 기간 택일은 주최국 권한이지만 경기 일정은 TV 방송 흥행 등을 감안해, 대회 기간을 15일 정도로 끊는다. 토요일이 3회 들어가도록 날짜를 잡는 것이 포인트다. 선수단 수가 2만명을 넘어가면 이 기간 안에 경기를 마칠 수 없다. 매 경기 사이 48시간 휴식을 보장해야 하는 축구가 개회식 전에 예선 첫 경기를 미리 치르는 이유다. 그래서 올림픽은 선수단 파견 의사가 있다고 원하는 만큼의 선수들을 다 보낼 수 없고 종목별로 지역 예선을 거쳐 본선 참가권을 획득해야 한다.
남북 단일팀 구성은 그래서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IOC 승인 이외에 각 경기 단체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이해 관련국과의 조정도 거쳐야 한다. 무엇보다 남북이 각각 별도로 지역 예선에 나왔다가 본선에서 한 팀으로 출전하는 것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 탈락한 팀이 구제받는 경우도 문제고, 남북이 모두 본선 참가권을 얻었더라도 라이벌 팀 입장에선 ‘다른 참가국의 전력(戰力)이 갑자기 보강’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남북 공동 입장은 가능하다. 동·하계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스포츠대회에서 남북이 공동으로 입장한 최초의 사례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다. 이후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아오모리 동계아시안게임, 대구 하계유니버시아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5년 마카오 동아시안게임·인천 아시아육상경기선수권대회,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과 도하 아시안게임, 2007년 창춘 동계아시안게임 그리고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까지 남북 공동 입장이 이뤄졌다. 문제는 남북의 접근 방식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은 상호 선린에 기초한 스포츠 이벤트라는 차원에서 논의를 시작하지만, 북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 이벤트로 스포츠를 활용한다.
감격이 없었던 남북통일축구
1990년 무렵, 남북 사이에 깜짝 놀랄 만한 스포츠 이벤트가 성사되었다. 같은 해 10월 11일 평양과 10월 23일 서울을 오가며 열린 남북통일축구다.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때 남북이 만나 극적으로 합의해서 마련된 행사였다. 건국 이후 최초로 벌어진 상호 방문 체육 경기였다. 양측이 국기를 달지 않고 경기를 하기로 했기에 국가 연주 등 FIFA의 A매치 성립 요건을 갖추지 못해 정식 A 매치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15만 관중이 들어찬 능라도경기장에서 벌어진 첫 경기는 전반 25분 김주성의 선제골, 후반 4분 북한 윤정수(현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의 프리킥 동점골에 이어 종료 10초 전 북한 심판의 석연치 않은 PK 판정으로 북의 2대1 승리. 잠실 경기에선 황선홍의 헤드업 골로 한국이 1대 0으로 이겼다. 잠실 경기는 제일은행을 통해 티켓을 사전판매했는데, 실향민들이 제일은행 지점마다 새벽부터 줄을 서고 8만 관중석이 꽉 들어찼을 정도로 열기가 대단했다. 판문점을 통해 남북 선수단이 서울로 이동하고, 평양 경기 직후 ‘남북축구 7천만 겨레 모두 승리자였다’고 언론이 환호할 만큼 감격적인 이벤트였다.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출신으로 제2자연과학원(현 국방과학원) 기자로 일하다 1995년 말 지방으로 추방돼 1997년 8월 탈북, 1999년 1월 한국에 입국한 김길선 기자(현 유튜브 ‘김길선의 평양만사’ 대표)는 평양 경기를 직접 관람했다. 1968년 평양 출생, 쿠웨이트 북한건설노동자 출신으로 1997년 3월에 입국한 림일 작가도 직접 관람자다. 하지만 두 분 모두 민족 화합의 감격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이 경기가 어떤 의미인지, 역사적·문화적 가치 부여와 출전 선수 등 경기에 대한 정보 전달, 그리고 홍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알려주지 않으니 감흥이 없고, 뭐가 뭔지 모르니 민족적 동질감 회복 등 고차원적 감동이 일어날 여지가 아예 없었다는 이야기다. 경기 시작은 오후 3시였지만 새벽부터 직장에 모여 출석을 부르고 경기장으로 단체 이동한 기억은 있다고 한다.
이회택 감독의 父子상봉
▲ 이회택 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 사진=조선DB
당시 신문 기사는 평양의 관중들이 오후 2시에 입장을 마쳤다고 했지만, 집단 동원 관중은 훨씬 전에 착석해서 출석 확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경기 시작까지 시간이 너무 남아서, 직장별로 오락회를 했을 정도라고 회상한다. 붉은 옷을 입은 선수들이 남쪽에서 온 선수들이라는 건 알았지만, 대표팀 간 경기라는 건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응원도구인 나무 딱딱이를 나눠주고 ‘어느 팀이 공을 잡든 박수 치며 응원하라’는 사전 지시는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사람 모두 특별한 순간의 역사 현장에 함께 있다는 감동이 없었고, 감동이 없었으니 특별한 기억도 없다고 한다. 단지 무슨 경기인지도 모르고, 그저 직장에 가지 않고 하루 내내 밖으로 나간다는 것이 좋았고, 경기장에 가 앉아 있던 기억만 남아 있다고 한다. 평양 경기 후 12일이 지나 서울 경기가 열렸다는 사실도 북에 있을 때는 전혀 몰랐다고 한다.
이때 축구경기 이외에 화제를 모은 사건이 있다. 이회택 감독의 부자 상봉이다. 3박4일간 이뤄진 40여 년 만의 대면이었다. 이 감독의 부친과 숙부(이용복)는 김포 출신으로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생사불명이었는데, 당시 황해북도 신계군에서 농장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66년 북한의 월드컵 8강 진출의 영웅 박두익 감독이 다리를 놨고, 이 감독은 평양에서 아버지와 숙부(이용복)를 모두 만났다.
상봉 장소는 고려호텔. 10월 11일이 마침 이회택 감독의 생일이어서 아버지 이용진 옹이 아들의 생일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수령님 덕분에 잘살고 있다, 수령님이 내려주신 생일상이다’ 등의 말을 듣고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었다’는 것이 이회택 감독의 후일담이다.
이회택 감독도 박두익 감독의 이산가족 상봉을 도우며 마음의 빚을 갚았다. 각종 언론 보도는 이 감독이 ‘북한과 선이 통한다’는 확실한 증명이었기에 재미교포 한 분이 조심스레 찾아와 박 감독과의 연결을 부탁했다. 다음번 국제경기에서 만난 박두익 감독은 처음엔 ‘그런 사람 모른다’고 했다가 어머니 이름이 나오자 ‘어떻게 알았느냐’며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박두익 감독과 미국에 살던 가족들은 중국 모처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이회택 감독에게 감사인사와 함께 전달된 소식이다.
한국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현장에 있던 북한 취재진도 난리를 친 사건이지만, 북한 주민들은 이 역사적인 ‘부자상봉(父子相逢)’도 알지 못한다. 보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북 축구와 부자상봉을 지켜보며 벅찬 감동에 눈물을 흘린 건 ‘오직 한국 국민뿐’이라는 말인가?
對敵사업의 의뢰물
▲ 1991년 일본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단체결승전에 출전한 현정화 선수(오른쪽)는 북한의 이분희 선수와 복식조를 이뤄 중국팀을 꺾고 우승했다. 사진=조선DB
1991년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1991년 4월 24일~5월 6일)도 마찬가지다. 북한 주민은 남북 단일팀이 대회에 출전하고, 여자팀이 중국을 꺾고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을 알기는 안다. 《로동신문》에 자그마한 기사가 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니 일반의 인식은 ‘나가는가 보다’ 정도였다는 것이다. 여자팀이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을 기리는 기념 주화도 나왔지만, 어차피 수집문화가 부재한 북한 사회에서 그것은 대남 유화 제스처 이상도 이하도 아닐 터이다. 우리 국민은 곧 통일이 올 것처럼 들떠서 감격에 겨워했지만, 북한에서는 비슷한 움직임조차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대대적 선전이 없으니 기대가 없었고, 기대가 없으니 감동도 없었을 것이다.
남북 단일팀이 출전해 아르헨티나를 1대 0으로 이기는 등 8강까지 진군했던, 1991년 6월 포르투갈에서 열린 20세 이하 월드컵도 북한 주민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1989년 제13차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이후 북한 경제가 기울어져서, 1991년이라면 이미 식량배급 체계가 무너지던 시절이다. 식량 사정이 어려워져서 민족적 동질감 등의 정서는 들어설 여지가 없었다고 한다. 이미 1990년부터 평양 중심구역을 제외하고 지방에는 배급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두어 달 후부터 배급을 재개하긴 했지만, 지방에서는 그때부터 벌써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하고 있었다. ‘고난의 행군’ 전조(前兆)인 셈이었다. 그래서 탁구나 축구는 설령 대대적인 선전이 있었다 해도 주민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남북 단일팀은 대한민국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액션이었고, 구체적인 필요에 의해 벌인 정치행사였을 뿐이다. 김길선 기자는 “대적사업(對敵事業)의 의뢰물로 북이 자기네 나름대로 강온전략을 체육 분야에서 쓴 것”이라고 분석한다. “북한은 한국을 적(敵)으로 보기 때문에 적과의 일시적 동침이라는 방침을 세우고 나온 것”이라며 “그래서 주민들에게 알려주지도 않았고 따라서 주민들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것”이라고 증언한다.
그렇다면 우승의 순간 옆 사람과 한데 엉켜 만세를 부르고, 선수들이 로커룸에서 문 걸어놓고 엉엉 우느라 옷도 못 갈아입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시상대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영화로 소비하며 연이어 감동하던 우리 국민은 뭐란 말인가? “적들을 속이는 것은 마땅하고 응당하며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 필요한 전략전술”이기에 “한국 국민들 속이는 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것이 김길선 기자의 확언(確言)이다. 우리는 속았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당할 수는 없다.⊙
장원재 / 장원재TV 대표
월간조선 2021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