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感性)은 이성(理性)과 더불어 인간의 대표적인 인식능력 중 하나이다. 최근에는 감성을 지능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감성지수(EQ)’, 경영학적 마인드를 바탕으로 감성을 판촉과 연결하는 ‘감성 마케팅’ 등, ‘감성’에 관한 연구가 줄을 잇고 있다. 그만큼 감성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하고 대표적인 키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감성’에도 보편성 혹은 사회적 합의가 존재하는 것일까?
2)연구의 목표
위의 개인적 물음으로부터 출발한 본 연구는, 연구자의 ‘비 오는 날’에 대한 감성이 각종 매체에 의해 ‘학습된’ 감성임을 밝히고, 그 체화의 경로를 추적하고자 한다. 즉, 감성 역시 ‘사회화’의 산물이 될 수 있으며, 그 결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편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감성이 존재하게 됨을 보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갖고 있는 맹점을 비판하고, ‘감성의 발달·진작을 위한 교육적 제언’을 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3)연구의 소재와 연구 방법
‘감성’도 일종의 인지라고 본다면, 그 인지의 경로를 탐구한 성과물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의 ‘감성’은 ‘감상에 의해 생성된 감정의 총체’로 잠정적으로 규정1)한 뒤, ‘시·소설 등의 문학 작품과 음악·회화 등의 예술 작품을 감상한 뒤 느끼는 나름의 감정’을 주된 연구 소재로 삼을 것이다. 대체로 연구 대상이 주관의 영역이기 때문에 연구자의 생애를 방법적으로 활용하되, 연구자 개인의 기억에 치중하기보다는 부모님, 친구들과의 면담, 어렸을 적 일기, 글짓기, 연구자가 남겨 놓은 웹 상의 글 등을 활용할 것이다.
II.본론
1) 사회화(Socialization)와 감성
(1)사회화
‘사회화’를 학문적 개념으로 처음 정립한 뒤르켐(Emile Durkheim, 1956)에 따르면, 사회화란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인 존재인 개인이 집단의식 내면화함으로써 사회적 존재가 되도록 하는 과정”이다. 그 밖에 “개인이 사회의 기대에 적응하고 동조하는 과정”이라고 한 지글러와 자이츠(Zigler & Seitz, 1978)의 정의, “개인이 특정 세계 또는 그 일부 세계의 구성원이 되고자 할 때 경험하거나 경험을 구조화하는 활동” 이라는 웬트월스(Wentworth, 1980)의 정의 등이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사회화의 개념을 규정하는 방식은 다변화되었고, 그 용어의 사용범위도 방대해졌다. 무스그레이브(Musgrave, 1988)는 사회화 현상을 설명하는 기존 이론들을 사회기능이론, 사회갈등이론, 대인기능이론, 대인갈등이론의 네 가지로 나눈 바 있는데, 본 연구에서는 사회기능이론으로서의 뒤르켐 식의 사회화를 그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시키고자 한다.
인간은 이러한 사회화과정을 통해 타자(他者)와 그가 속한 집단에 동조·이해할 수 있는 공통문화를 학습하는 것과 동시에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타자와는 상이한 독특한 자아(self)를 형성하게 된다.2) 이렇게 타자와 집단의 가치를 학습하는 사회화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일시(identification)현상이다. 학습은 이 동일시현상이 있을 때 비로소 내면화(internalization)되고 사회화가 가장 효율적으로 일어난다.
(2)감성
연구자는 사회화에 관한 뒤르켐의 정의에서, ‘집단의식’ 이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예를 들어, 만약 ‘비 오는 날’ 에 대해 ①이기적·비사회적 존재였을 시절 느꼈던 감정과 사회적 존재가 된 뒤 느끼는 감정이 변화되었고, ②이 변화는 스스로의 판단에 근거하여 생성된 것이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반된 현상이며, ③사회 구성원들 대부분의 감정(집단의식)과 일치한다면 그것은 ‘사회화’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집단의 가치에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고, 이렇게 변화된 가치를 내면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화의 결과로 생성 혹은 변화된 감성을 ‘학습된 감성’으로 부르기로 한다3).
2)‘비 오는 날’에 대한 연구자의 ‘학습된 감성’-생애사적 연구
(1)10대 이전
연구자는 비 오는 날을 참 좋아했다. 그 애정의 기원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아주 어렸을 적부터 별다른 이유 없이(이유에 대한 ‘지각’이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비를 맞으며 폴짝 폴짝 뛰어다니는 것을 즐겼고, 발을 내딛을 때마다 탁! 하고 튀기는 물소리를 좋아했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우산 끝에서 톡톡톡 떨어지는 물방울들, 노란색 장화와 노란색 비옷, 무지개 색 우산. 물을 튀기며 뛰어다니거나 우산을 돌리며 놀다가 손이 꽁꽁 얼어서 집에 돌아온 뒤 온기가 철철 넘치는 욕실에서 하는 목욕, 보송보송하고 따뜻한 수건이 몸에 닿아 부드럽게 물기를 닦는 것, 후두둑 소리를 내는 창문과 비의 마찰음, 이 모든 것은 어린 연구자에게 그저 마냥 즐거운 대상이었다4).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들은 크리스마스 혹은 연구자의 생일에 몇 종류 씩이나 되는 우산, 비옷 등을 선물하였는데5), 이런 것들이 연구자의 비 오는 날에 대한 애정을 더욱 증가시키는 요인이 된 것 같다. 또, 비 오는 날은 흔한 날이 아니라 가끔 있는 날이기 때문에 연구자에게는 일종의 ‘이벤트’인 셈이기도 했다6).
당시 연구자는 대중가요는 거의 듣지 않았고, 책도 동화책밖에는 읽지 않았기에 오로지 연구자의 내면에만 충실한 사고를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부모님의 양육방침은 ‘웬만해서는 아이를 내버려두자.’는 식의 일종의 자유방임주의였다. 그래서 기초적인 예의범절 혹은 행동규범 외에, 연구자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의 감정·감성에 관해서는 일체의 간섭이 없었다7). 즉, 이 단계는 ‘이기적이고 비사회적인’ 연구자 단계였던 것이다.
(2)10대 초·중반
학교에 들어가고,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현격히 증가하면서부터 연구자의 비 오는 날에 대한 감정은 서서히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은 초등학교 4학년 때와 중학교 1학년 때에 일어났다.
연구자가 11살,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94년, 그 전까지는 좋아하지 않았던 ‘대중가요’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 계기는 당시 친했던 친구를 따라 가수 ‘신승훈’에 열광하면서부터였다. 그의 노래 “그 후로 오랫동안”8)은 당시 최고의 히트 가요였고 그의 수려한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에 푹 빠져 기꺼이 ‘오빠부대’에 가담했던 연구자였다.
그 후로 오랫동안 (작사:신승훈 작곡:신승훈 편곡:김형석)
우연인지 몰라도 네가 눈물 흘릴 때마다 하늘에선 비가 내렸어 익숙해져
버린 난 그냥 너의 슬픈 눈을 보면서 차가운 한마디 울지마 하지만 이제
나도 그때처럼 비가 내리면 눈물을 흘리고 있어 내게 너무나도 소중한
네가 내곁에 없다는 이유로 난 비와 함께 울고 있었던거야 그 후로 오랫
동안 비가 왔어 내리는 비만큼 나도 울었어 하지만 더 견딜 수가 없는
건 어디선가 너도 나처럼 울고 있다는 생각에 하늘이여 나를 도와줘 그
렇게 울고 있지만 말고 내 님이 있는 곳 너는 쉽게 알 수 있잖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한번만이라도 그대를 우연일지라도 너를 믿을께 너의
눈물 맞으며
어느날 문득 가사에 집중해보니,‘비와 함께 울고 있었던 거야’ ‘내리는 비만큼 나도 울었어’ 라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이 때 일대 충격을 받았던 것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비 오는 날 울고 있는 누군가가 잘 상상이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친구들한테 비 오는 날 우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고 말을 꺼냈었고, 그 때 처음으로 사람들은 비 오는 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깨달았던 것이다. 친구들은 “그냥...”이라는 말로 얼버무렸던 것 같지만,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의아한 상태로 몇 년을 지내다가, 1997년, 즉 중학교 1학년 때 국어시간에 교과서에 수록된 ‘달’에 관한 예찬을 읽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소재로 글을 써보는 과제를 하던 중이었다. 그 때 연구자는 ‘나는 비를 좋아해.’라고 ‘인식’을 명확히 하게 되었고, 그것이 ‘비를 좋아하는 내 감정’에 대한 정체감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자신 있게 연구자는 다가오는 국어 시간에 발표를 하였다. 그 결과는 선생님의 냉소였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다니, 너 참 어리구나.” 라는 식으로 “너 버스 안 타고 학교 다니지? 비 오는 날 버스에서 안 넘어져 본 사람은 그 기분 모를걸. 그리고 옷이 다 젖으면 얼마나 불쾌하니, 냄새도 나고.” 등의 말을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동의하는 듯 한 아이들의 와하하~ 하는 웃음. 연구자에게는 너무나 큰 충격이고 상처였다. 그리고 수업 시간이 끝난 뒤 친한 친구들에게 연구자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냐고 물었고, 아이들은 ‘축축하고 불쾌한 느낌’ 에서부터 비 오는 날 특유의 비린내, 우산을 들고 다니는 귀찮음, 또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아쉬움 등을 이야기하며 “일반적으로 비 오는 날은 사람들이 싫어해.” 라는 말을 해 주었다9). 그 날 이후로 연구자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다시는 비 오는 날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스스로를 이상하게 여기게 되었다.
게다가, 사춘기 소녀의 감수성에 불을 지피는 매체인 ‘라디오’ (당시 TV는 시간이 없어서 보지 못했다.)에서, 흘러간 옛 대중가요들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었는데, 특히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이라는 노래는 비 오는 날과 실연을 접목시킨 본격적인 노래였다.
비처럼 음악처럼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이 떠나시던 그 밤에 이렇게 비가 왔어요
난 오늘도 이 비를 맞으며 하루를 그냥 보내요
오 아름다운 음악 같은 우리의 사랑의 이야기들은
흐르는 비처럼 너무 아프기 때문이죠
그렇게 아픈 비가 왔어요
‘그렇게 아픈 비’ 라는 가사와, 김현식의 처량한 목소리와 어우러져 그야말로 한껏 ‘슬픈’ 감정을 전달하고 있는 이 노래 때문에, 연구자는 더더욱 스스로의 감성에 대해 이상함을 느꼈고, 왜 비 오는 날이 내게는 슬프지 않은지가 의아했다.(그 외에도 슬픔의 감정을 표출한 대중가요로는 이승훈의 ‘비 오는 거리’, 조용필 ‘내 가슴에 내리는 비’, 유리상자의 ‘비 오는 날엔’ 등이 있다. ) 이에 대해 어머니께서는 ‘네가 사랑을 해 보지 못해서 그런게 아닐까’ 라는 아리송한 대답을 해 주셨지만, 연구자는 동의할 수 없었고 오히려 ‘사랑을 하고 이별을 겪게 되면 비의 참맛을 알게 된다.’ 라는 식의 유치한 아포리즘만이 가슴속에 새겨졌을 뿐이다.
(3)10대 중·후반
열 다섯~열 아홉 무렵은 연구자가 생각하기에 스스로의 감수성이 가장 풍부했던 때였다. 이 때에는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목 공부보다는 연구자의 흥미를 본위로 다양한 문학작품, 음악, 회화 작품 등을 접하면서 마음껏 ‘놀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때 접했던 매체들과 그에 반응했던 연구자의 모습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ⅰ)문학작품
대다수의 사람들이 ‘비 오는 날’ 하면 떠올리는 소설은, 손창섭의 바로 이 제목 “비 오는 날” 일 것이다. 연구자 역시 이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무섭게 빠져들었다. 전후 소설의 대표격으로 평가받는 이 소설은, 전후 상황이 그러하듯 철저하게 절망적이고 무기력하며, 심지어 비인간적이기까지 하다. 전쟁이 가져다 준 물질적, 정신적 상처는 등장 인물들의 기이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소설 전반을 지배하는 음울한 분위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다름아닌 ‘비’이다. 고등학교 문학 선생님은 이 작품에서 ‘비’가 가리키는 상징적인 사항을 서술하라는 수행 평가를 냈었고, 이에 대한 ‘모범답안’을 위해 철저하게 ‘청명한 날이 없는 우울한 날, 비 오는 날은 등장인물들의 불운과 암울한 시대적 분위기를 연출하여 전쟁이 갖는 비인간적인 성격을 대변한다. 고통받은 존재들은 질척거리는 비를 맞고 살면서 고통이 극대화되는 것.’ 이라는 문장을 외웠다. 자연스럽게, 비 오는 날에 대한 ‘감성’ 보다는,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문학작품 속에서 상징하는 바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이 강조되는 현실을 접하였고, 누구도 연구자에게 그 밖의 어떤 비에 관한 감성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밖에도 양귀자의 소설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 와 류시화의 시 “비로 만든 집” 등을 접하면서, 이전에 연구자가 갖고 있었던 감성은 ‘이상한 것’으로 치부하고, ‘일반적인 인식’인 ‘비 오는 날의 우울함’에 감정 이입을 하기 시작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과잉된 상상력으로 연구자의 감성은 또 다른 의미에서는 풍부해 졌다고 볼 수 있지만, 여전히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이 이상한’ 풍토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감정과잉’, ‘치기’, ‘철모르는 어림’ 등의 평가는 더욱 공고해 지는 추세였다10). 이제는 감히 함부로 “저는 비를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마지막 남은 애정마저 버리기는 아쉬운 마음에 모든 PC통신의 ID, 전자메일 주소 등에 ‘rain'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일로만 위안을 삼았다11).
ⅱ)회화 작품
화가 박혜라의 서양화 연작 시리즈 ‘비 오는 날’을 우연히 접했다. 미술가이자 평론가인 ‘한젬마’씨를 좋아했던 터라 회화에 관한 책을 많이 보던 시절이었다. 역시나 박혜라 씨는 비 오는 날을 우울하게 보고 있었다.12) 또, 김용환의 수묵화 ‘비 오는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예술가’에 대한 환상은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예술가도 이렇게 생각할진대 하물며 내가 어찌’ 식의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13).
ⅲ)재즈, 뉴에이지 음악
19살 무렵에는 음악에 급속도로 빠져들었는데, 어렸을 적부터 클래식 음악을 자주 접해왔었기 때문에 오히려 재즈와 뉴에이지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클래식 연주를 하던 피아니스트 ‘박종훈’이 ‘Andante Tenderly'라는 뉴에이지 앨범을 냈다는 소식에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 앨범을 구입해서 들어보게 되었다. 가장 인상깊은 곡은 “rain rain rain" 이었다. 박종훈이 그 곡에 붙여 놓은 짤막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rain rain rain
비오는날카페네가날떠나고빗속을달려
쏟아지는빗방울흐르는눈물날멈추려해도
비에젖은거리날약올리듯춤추는우산들속네뒷모습보이는듯
비오는날이별네가날떠나고젖은내마음
박종훈은 그 전부터 연구자가 리스트 스페셜리스트로서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던 피아니스트였는데, 이런 뉴에이지 앨범을 내고 저런 메시지를 쓰고 그런 곡을 연주했다는 것이 한편 기쁘기도 하고 한편 슬프기도 했다.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비 오는 날에 대한 연구자의 감성을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14) 게다가,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해서 ‘뭔가 특별한 사람’,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이라는 시선으로 연구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에 지쳐 있던 터였다. 저러한 시선이 사실 연구자에게 있어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기도 하다.
또, 재즈 피아니스트 ‘김광민’의 ‘비 오는 날’ 이라는 곡도 있는데, 이 곡은 그야말로 단조에 구슬픈 심사를 자아내려 만들어진 곡이다. 이 곡을 들으며 함께 슬퍼하고 있는 연구자를 발견하는 일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15)
(4)이십대 초반
이제는 스스로의 감성에 대해 객관화하여 생각할 줄 아는 나이가 될 무렵, ‘비 오는 날’에 대한 연구자의 감성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따져 보았다. 그리고 그 일련의 활동에 대한 결과물이 본 연구이다. 연구자는 어렸을 적 비 오는 날을 무척이나 좋아하였고, 이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학습을 경험할수록 ‘비 오는 날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라는 아포리즘을 체화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아무런 타당성도 없이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타인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비 오는 날’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자기 소개를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은 “저는 비를 좋아해요.”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내면을 따져보면, 일면 맞는 말이고 일면 틀린 말이기도 하다. 이미 연구자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던 어렸을 적, 그 감성에 대해 많은 질책을 받았었고, 연구자같이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사연이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것을 경험하였으며, 수많은 매체를 통해 비 오는 날에 대한 안타까운 감정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의 정서에 대한 분명한 사회의 평가·통제였으며, 그렇게 문화적으로 압력을 받아 길들여진 연구자는 일종의 ‘사회화’를 경험하며 비 오는 날에 대한 감성을 ‘학습’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비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학습된 감성’이 되어버려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닌 이상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3)학습된 감성을 위한 교육적 제언
흔히 감성은 좋은 감성과 그렇지 못한 감성을 외형적으로 구별해 낼 수 있는 신뢰할 만한 구체적인 기준, 척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개인의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눈으로 관찰하거나 포착할 수 없다. 그리하여 감성계발을 교육목표로 삼는다거나 그 전개과정을 탐구하려는 노력에 소홀하기 쉽다. 감성은 사회화의 정상성, 몰주체성의 폭력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것이다.
연구자의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각 개인의 ‘감성’은 사회화의 대상이었으며, 그 결과 연구자의 감성 역시 사회 전반에 걸쳐 통용되고 있는 그것에 동화되었다. 감성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정형화된 공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사회화의 과정에서 다양한 매체를 접하며 어느 정도 합의된 사항이 있다는 점은 깨달을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을 사회화의 개념적 속성인 규범성, 정상성, 정체성, 지역성, 몰주체성, 무비판성16)에 그대로 매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이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교육’이다. ‘교육’은 ‘사회화’와는 달리 하나의 사항에 관한 대답이 다양하고 이질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교육 후 인간은 경험 세계를 자신만의 관점으로 재구성 하는 능력이 생기며, 사회 속의 개인에 그치지 않고 능동적인 개체로서의 ‘인간’을 살아갈 수 있다.
감성의 사회화는 일방적인 것이다. 그러나 감성의 ‘교육’은 일방적이지 않다. 학제적 사항에 치우친 교육 시스템은 자칫 이러한 감성에 대해 ‘교육’보다는 ‘사회화’를 더 효과적으로 인식하고 그것에 몰두할 염려가 있다. 그러나, 감성은 세상과 삶과 소통하는 길을 열어 주고, 그것을 음미하고 즐기기 위해 꼭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교육에 의해 마땅히 계발되고, 진작되어야 한다. 사회화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는 교육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III.결론
‘문화’를 “지식·신앙·예술·도덕·법·관습 및 사회의 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해 획득된 모든 능력과 습관을 포함하는 복합적 총체”로 정의한 타일러(Edward Burnett Tyler)에 따르면, 본 연구에서 다룬 주된 소재인 ‘감성’ 역시 문화에 포함된다. 사회화와 문화화는 종종 비슷한 개념으로 쓰이는 바, 감성 역시 사회화의 대상이 된다. 본 연구에서는 연구자의 생애사를 바탕으로 감성의 사회화, ‘학습된 감성’에 대해 살펴보면서, 비사회적 존재였을 때의 감성이 사회화를 거치며 어떤 식으로 변화, 체화되었는가를 관찰했다. 그리고 감성은 교육적 영역에 들어와 능동적으로 계발되고 진작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교육과정 상에서 어떤 식으로 감성의 계발과 진작이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탐구는 연구자가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로 남겨 두며 연구를 마치기로 한다.
IV.참고문헌
김아영 외, 교육심리학, 1997,학문사.
손창섭, 비 오는 날, 1959, 일신사.
양귀자, <비 오는 날이면 가리봉동에 가야 한다>,우리시대의 소설·소설가, 1995, 삼성.
1)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감정’ 과 ‘감성’ 이 혼용될 수 있으나, 본질적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기보다는 ‘감성’이 ‘감정’보다 더 큰 범위라는 정도로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2) http://100.naver.com/100.php?id=84722.
3) 이는 심리학 용어인 ‘학습된 무기력’ 혹은 ‘학습된 무력감’(learned helplessness)(Seligman, 1975)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4) 연구자 개인의 기억에 부모님의 증언을 첨가해서 재구성함. 1991년(초등학교 1학년 시절) 글짓기 숙제로 저러한 내용을 써서 상을 받았다는 부모님의 증언이 있었다.
5) 1990년 유치원 담임 선생님이 졸업 선물로 선생님께서 우산과 우비 세트를 선물해 주셔서 너무 기뻤다는 연구자의 일기에서 발췌. 사실 유치원 담임 선생님은 미리 부모님이 마련해 준 선물을 ‘전달’할 뿐이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었다.
6) 연구자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천안’이라는 곳에 사는데 그곳은 ‘하늘 아래 편안한 동네’라는 마을 이름에 걸맞게도 자연 재해가 극히 드문 곳이었다. 비가 와도 홍수가 나는 법이 결코 없으며 그저 별다른 일 없이 맑다. 더구나 눈도 많이 오지 않는데, 눈이 오면 또래의 아이들보다 몇 배나 자주 넘어졌기 때문에 눈 오는 날에는 어김없이 창피를 당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눈보다는 비를 좋아하게 되었던 것 같다.
7) 2004년 10월 30일 어머니와의 대화 중에서 발췌.
8) 신승훈(1994), 그 후로 오랫동안, 1994년 9월 26일 발매, 라인음향.
9) 1997년 9월 21일의 일기 참고.
10) 1999년, PC통신사 ‘나우누리’ 중 ‘Hanson’팬클럽 자유게시판에 올렸던 글을 참고함.
11) 1999년. PC통신사 ‘나우누리’ 가입메시지 작성시 ID선정을 위해 고민했던 당시의 일기를 참고함.
12) 현재적 관점에서 그 그림을 보면 단지 ‘우울함’만을 주제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당시에는 워낙 ‘비 오는 날=부정적’ 공식이 강하게 연구자를 지배하고 있던 터라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13) 2001년. Daum의 ‘피아니스트 백건우 카페’에 올린 글 참고.
14) 후에 프리챌의 피아니스트 박종훈 커뮤니티에 비슷한 글을 남겼고, 박종훈과 만나게 된 자리에서 사실은 박종훈은 비 오는 날을 무척 좋아하며, 그 이유는 슬픈 감정을 나아내기 때문임을 듣고 일대 혼란이 일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