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 입대
다음날 아침 5시 기상나팔소리에 우리들은 기상하였다.
인민 군복으로 갈아입고 내무반을 정돈한 후 모이라는 내무반 조교의 목소리에 운동장으로 뛰어나가서 부대별로 줄을 섰다.
병력은 300명 정도였다.
당시에는 훈련받을 사람들은 모두 인천형무소에서 함께 지냈던 제주, 순천, 여수에서 온 사상범 동료들이었다.
인민군 훈련대장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데 양 어깨에는 별3개를 단 인민군 군관이었다.
큰 목소리로
“여러 동무들은 들으시오. 남조선괴뢰도당을 물리치고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 우리 다 같이 만세삼창을 부릅시다.”하면서 “제가 선창을 할 터이니 동무들은 따라하시오!”
“인민공화국 만세! 김일성 장군 만세! 스탈린 대원수 만세!”
하고 삼창을 부른 다음
“동무들은 지금부터 조선인민군내무서원 훈련을 받고 남한으로 내려가서 치안을 확보하고 자본주의를 타파하여 인민공화국 건립에 충성을 다하여야하며 김일성 장군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까?”
라고 하자 모두 “예!”하고 대답하면서 박수를 치는데 그 소리가 운동장이 떠나갈듯이 우렁찼다.
간단한 연설 후 아침식사를 하고 운동장으로 집합하라는 훈련조교의 말이 있었다.
식사는 이전의 인천형무소식사와는 다르게 나왔다.
밥은 현미쌀밥이며 약간 노란색이고 국은 버터 국이고 부식은 김치 등으로 배고프지 않을 정도였고 숙소에는 1인용 간이침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부대편성이 있었는데 나는 1중대 2소대 3분대로 배속 받았다.
처음의 훈련은 제식훈련이었는데 남한군대의 훈련과 달라서 처음에는 힘이 들었다.
제식훈련을 2시간 정도하고 다음에는 총검술 훈련을 하는데 조교가 시범을 보인다음 실제 하도록 총을 주었다.
그러나 총 숫자가 적어 훈련병 각자에게 주지 않고 서로 돌려가며 훈련을 하였다.
사격술예비훈련(PRI : Preliminary Rifle Instruction)도 시켰다.
교육장은 우리가 주둔한 곳에서 야외 소나무 밭으로 이동을 하면서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엄폐, 은폐된 곳을 찾아 그 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소(牛)들이 소나무에 묶여있는 것을 볼수 있었는데 피난가면서 소 주인이 급히 버리고 간 소 들이라 하는데 인민군장교들이 부식으로 잡아먹는다고들 하였다.
야외교육은 1개 소대별로 앉아서 받는데 책상도 준비되어 있었다.
교육내용은 내무사원에 필요한 교양이 되는 내용으로 별을 단 군관이 교관이었다.
교육내용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진행했던 일들을 집중 강의하였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어떤 회의인가?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 소, 영 3개국에서 조선 문제가 집중 결의되었는데,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을 요약하면 개략 다음과 같다.
첫째, 민주세력이 참여하는 임시조선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할 것.
둘째, 임시정부와의 협의하에 최고 5년간의 4개국 (미, 소, 중, 영)에 의한 신탁통치 실시 여부를 결정할 것.
셋째, 전적으로 조선인이 임시정부를 통해 스스로 통치 할 수 있게 할 것.
넷째, 조선 문제해결을 위한 미, 소공동위원회를 설립 하고 조속히 논의할 것 등이다.
그 외에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당위성, 김일성 장군 어버이 수령님께 충성을 바치도록 하는 사상교육과 정치교육 등이 있었다.
1946년 1월 2일에는 북한측은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우리 민족은 김구와 이승만을 중심으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반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까지 반탁운동에 참가하여 민족단합의 계기가 마련되는 듯하였으나, 우리나라를 넘보는 소련의 지시를 받은 그들은 곧 찬탁으로 돌아서서 국민의 빈축과 실망을 사게 되었다.
신탁통치 안에 대한우리민족의 격렬한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신탁통치 문제와 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 소 공동위원회가 46년 3월과 47년에 각각 개최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신탁통치 기간 중에 실제적으로 통치를 담당할 임시정부 구성을 위해 미국은 모든 정치단체의 참여를 주장하였고, 소련은 신탁통치를 찬성한 단체들로만 임시정부를 구성할 것을 고집하였다.
이러한 임시정부 구성을 둘러싼 대립으로 2차례의 미, 소공동위원회는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신탁통치 안은 우리의 역사와 민족의 역량을 무시한 것이었고, 또 우리민족이 염원하는 독립을 지연시키는 것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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