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록산 난, 그리고 두보
진한 이래로,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지배 세력은 문벌 귀족이었다. 중국의 사회 구성은 귀족이 중심이 된 사회 구조였다. 두보도 유가(儒家)로서, 정치에 나아가려 했다. 장안으로 나와서 정치계로 나아가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여 빈털터리 되어서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당 왕실은 대항 세력인 귀족 세력을 억압하려는 목적으로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사대부를 관리로 뽑으려 했다. 과거에 응시하는 세력은 중소지주계급이 중심인 사대부들이었다. 사대부는 귀족사회, 문벌사회에 반대하여 왕의 편에 섰다. 과거에서 사대부를 뽑기 위해 과거 시험에 詩作 문제를 출제했다. 당나라 시가 발달하는 원인의 하나이다.
두보는 안록산 난을 겪으면서 귀족 계급의 지나친 사치와 민중들의 고생을 몸으로 체험했다. 귀족에게 착취당하는 민중 계층의 대부분을 이루는 농민은 계속하여 반란을 일어켰다. 안록산의 난이 8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처럼 불합리한 사회구조가 한 몫을 했다.
왕실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 세력을 억압해야 했고, 기득권 세력인 귀족에 대항하는 사대부들은 왕권과 손을 잡았다.
(*당태종이 당나라의 명문귀족의 가문에 순위를 매기도록 했다. 낭야 최씨니, 낭야 왕씨니 하는 문벌이 앞자리이고 황실인 이씨는 6번인가,7번의 순위였다. 당태종이 대노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귀족을 황위의 권위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고 ------)
이처럼 혼란한 시기에 이백과 두보가 살았다. 이들의 삶이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삶에는 이런 시대를 살아가야 했던 시인의 고민이 들어있다.
안록산의 난을 중국사에서 고대-->중세로 전환의 기점으로 말하는 이유도, 고대 귀족 사회에서-->중세의 사대부 중심 사회로의 바뀐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보의 시를 더 보자.
春望(춘망): 봄의 희망
두보
國破山河在(국파산하재): 나라는 깨져도 강산은 남고,
城春草木深(성춘초목심): 봄이 온 성(城)에는 초목이 무성쿠나.
感時花濺淚(감시화천루): 저 꽃은 시대를 슬퍼하며 눈물 흘리고
恨別鳥驚心(한별조경심): 저 새는 이별을 아파하며 마음 조리네.
烽火連三月(봉화연삼월): 춘삼월에도 봉화 연기는 그치지 않고
家書抵萬金(가서저만금): 억만금 보다 더 소중한 가족의 소식.
白頭搔更短(백두소경단): 흰 머리 긁고 긁어 더욱 듬성등성하니
渾欲不勝簪(혼욕불승잠): 이제는 비녀조차 꽃기 힘드는구나.
안록산의 春望은 거의 그의 대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