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능 스님 ‘먼 산’
영화 <라쇼몽>은 살인과 욕정, 배반이 얽힌 스토리다.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의 주장이 모두 제각각이다. 죽은 사무라이의 아내도, 붙잡혀온 산적도, 사무라이의 혼령도, 목격자인 나무꾼도 모두 다른 말을 한다. 인간은 자기 관점에 따라 사태를 바라보고 왜곡하는 이 환망幻妄의 오염을 피할 수 없다. 금강경은 말한다. “네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그것들은 객관적 실재가 아니다. 네 개인의 의지와 관심이 투영된 너의 그림자일 뿐.” 인간은 욕구, 주장, 권력의지로 주변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놓고는 그 주관적 환상을 있는 그대로의 객관적 세계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이것을 ‘근본무명’이라 했다. 불행의 씨앗이다.
여기서 벗어나라는 게 불가의 가르침이다. 범능 스님의 노래 ‘먼 산’을 들으며 생각해본다. ‘그대에게/ 나는 지금 먼 산이요/ 꽃 피고 잎 피는/ 그런 산이 아니라/ 산국 피고 단풍 물든 그런 산이 아니라/ 그냥 먼 산이요/ 꽃이 피는지 단풍 드는지/ 당신은 잘 모르는/ 그냥 나는 그대를 향한/ 먼 산이요.’ 그냥 먼 산. 세속적으로 읽으면 어긋난 인연의 안타까움이겠으나, 수도승의 눈으로 보면 속세를 등진 은둔자의 담담한 심사 혹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도망가 버리는 득도의 경지에 대한 사모다.
범능 스님 때문에 크게 놀란 적이 여러 차례다. 그는 사실 ‘정세현’이라는 이름으로 숱한 민중가요를 만든 1980년대의 대표적 민중가수다. ‘광주출전가’는 당시 대학가와 거리시위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로 손꼽힌다. 그밖에 ‘진군가’ ‘꽃아 꽃아’ 같은 숱한 명곡들을 만들었다. 그랬던 그가 1994년 돌연 출가해 수도승이 되었다. “예불도 염불도 다 음악”이요, “노래가 설법보다 효과적”이라면서 꾸준히 노래를 짓고 불렀다. 세파에 지친 많은 이들이 그의 찬불가와 명상음악에서 위로를 받았다. 2013년, 새 음반 작업을 하다 갑자기 쓰러져 입적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속세 나이 불과 53세였다. 생과 사가 날벼락 같았다. 그러나 속세와 탈속 두루 치열했던 삶이었다.
김용택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먼 산’은 2001년 음반에 실린 노래다. 다시 들어보니 저 덤덤한 목소리는 주관과 자아에 갇힌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안간힘이다. 문득, 편견과 습관 혹은 이해관계에 물든 삶을 반성하게 된다. 사태를 전체의 관점에서 읽는 훈련, 그게 ‘객관’, 즉 ‘진정 그러하게 있는 것(眞如)’을 볼 수 있는 길일 것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딩동댕/ 나는 어디로 가는가 딩동댕/ 새여 꽃이여 나무여 딩동댕….’ 그의 또 다른 노래 한 구절이 귓가에 맴돈다. 꾸밈이라곤 하나 없는 저 소탈한 목청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