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락(部落)’이라는 용어의 본래 의미
이 창 기 명예교수(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한국의 농촌사회에서 여러 가구가 모여 사는 주거의 집락을 ‘마을’이라 부르고, 한자로 기록할 때는 동(洞)이나 촌(村) 또는 촌락(村落)이라 표기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후에 마을, 동, 촌, 촌락이라는 용어 대신에 ‘부락(部落)’이라는 용어가 스며들어 ‘자연부락’, ‘행정부락’, ‘동족부락’, ‘모범부락’, ‘부락민’, ‘부락제’ 등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부락’이라는 용어는 전통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평범한 농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었다. 한국 사회에서 평범한 농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부락’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의 일이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部落’(부락쿠)라는 용어는, 일반 농민들의 거주지역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 온 특수 신분층의 사람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하는 용어로 널리 사용되었다. 부락에 거주하는 부락민(부락쿠닝)들은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특정한 일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가축을 도축하는 도살업이나 가죽제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피혁가공업에 주로 종사하였지만, 이 외에도 죄수의 처형, 감옥 청소와 옥사자 시체 처리, 범죄자 체포와 화재의 진압 등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부정(不淨)하고 비천한 일로 간주되어 에타(穢多, 오염된 사람), 히닝(非人, 사람 같지 않은 사람) 등으로 불렸으며, 제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극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부락민은 조선시대의 백정과 매우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이 거주하는 부락은 조선시대의 백정촌, 재인촌에 비견할 만하다.
일본에서 부락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제도화된 것은 16세기 말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신분제를 강화하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지만, 신분제가 철폐된 현대 사회에서도 혼인이나 취업을 비롯한 일상생활의 사회관계에서 부락민들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이와 관련된 사건들이 심심찮게 발생하여 여전히 일본 사회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남아있다.
일제강점기에 한국 사회를 조사 연구한 일인 학자들은 식민지 조선의 마을을 격하하여 일본에서 천민 신분층의 거주지역을 일컫는 ‘부락’이라는 차별적 용어를 모든 마을에 적용하여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차별적 용어를 일본인 관변 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학자들도 비판적 의식 없이 그 용례를 그대로 수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전의 한국 사회에서는 평범한 농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부락’이라 부르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부락’이라는 용어는 소위 야인(野人)으로 불리던 북방 이민족들이 사는 마을이나 그 무리들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부락’의 용례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에는 총 400여 건의 ‘부락(部落)’이라는 용어가 수록되어 있는데 거의 대부분이 북방 이민족 지역의 마을이나 그 무리를 지칭하고 있다. 우리 농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지칭할 때는 동(洞), 촌(村), 촌락(村落) 등으로 표기하고, 부락(部落)이라는 용어는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북방 이민족 문제가 중요한 국정 과제로 부각되었던 세종조(62건), 성종조(52건), 중종조(66건), 선조조(수정 선조실록 포함, 91건)에 집중해서 나타나고 있다. 효종 이후에는 10건 이내로 급감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사용된 ‘부락’이라는 용어의 대표적 용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올량합은 부락이 심히 많아서, 혹은 반항하는 자도 있고, 혹은 신복하는 자도 있다(兀良哈部落甚多, 或有梗化者, 或有臣服者)” <세종 4년 12월 21일, 2번째 기사>
“파저강 야인들이 몰래 북변에 들어와서 인민을 살상하고 약탈하므로 할 수 없이 장수를 보내서 토벌하고 부락을 소탕하였다(波猪江野人等潛入北鄙殺掠人民, 勢不得已, 命將致討掃蕩部落)” <세종 15년 5월 11일, 4번째 기사>
“(야인들이) 만포 건너편으로부터 압록강 머리까지 부락을 이루어 줄지어 산다고 하니---군사를 일으켜 쫓아내지 않으면 올해에 한 부락을 이루고 내년에 또 한 부락을 더하여 저놈들 형세가 점점 강해져서 우환이 마침내 심해질 것이다(自滿浦越邊至鴨綠江頭成部落列居---不擧兵驅逐則今年成一部落又明年一部落彼勢漸强患終不淺)” <중종 18년 9월 20일, 2번째기사>
“여연과 무창의 땅은 곧 우리 선세의 땅인데---(근래에 야인들이) 밭을 갈고 가축을 기르며 부락을 모아 떼지어 산다고 하니---마땅히 군사로 쫓아내야 한다(閭延茂昌之原 乃是我國先世之地---耕田畜牧招集部落而群居---便當驅逐以干戈)” <중종 18년 11월 9일, 4번째 기사>
“몽고는--- 성곽도 없고 궁실도 없이 물과 초지를 따라 짐승처럼 모이거나 흩어지는데 근일에는 그들의 부락이 점차 강대해져서 제어하기 어렵다(蒙古---無城郭無宮室 逐水草鳥聚獸散 而近日部落漸强大難制)” <정조 4년 11월 27일, 1번째 기사>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부락(部落)’이라는 용어는 거의 전부가 북방 야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이나 그 무리를 일컫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었다. 아주 드물게 내국인이 거주하는 마을을 ‘부락’이라 기록한 사례가 몇 건 발견되고 있으나 이 경우에도 역모를 꾸미거나 도둑질을 모의하는 불순한 자들이 모여 있는 마을 또는 그 무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조선 초(1454년)에 간행된 『고려사』에 등장하는 40여 건의 ‘부락’ 용례도 전부 북방 야인들의 거주지나 그 무리들을 지칭하고 있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이전에 우리 사회에서 사용된 ‘부락’이라는 용어는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소외된 특수 신분층의 거주지역, 특히 북방 이민족의 마을이나 귀화한 북방 이주민들이 거주하는 마을을 지칭하는 용어로 한정되어 사용되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일제강점기에 한국 사회를 조사 연구한 일인 학자들은 식민지 조선의 모든 마을을 격하하여 ‘부락’이라는 차별적 용어로 표기하였고, 이러한 차별적 용어가 일본인 관변 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학자들도 그 용례를 그대로 수용해서 사용해 왔다. 필자 또한 1990년대 중반까지 비판적 의식 없이 ‘부락’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으나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부락’이라는 용어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마을’ 혹은 ‘촌락’으로 대체하였다.
최근에 와서 일제에 의해 차별적으로 사용되었던 ‘부락’이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의식이 확산되어서 사용 빈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종래 자연촌락을 소개할 때 ‘○○부락’이라 표기하던 것을 최근에는 대개 ‘○○마을’로 표기하고 있고, 학자들도 ‘부락’이라는 용어 대신에 ‘마을’이나 ‘촌락’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예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 이창기 교수님의 글 원문에는 여러 개의 각주가 달려 있으나, 전재과정에서 드러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글이 실릴 <늘 푸른 나무(13호)>에는 원문이 그대로 수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