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생들 집요한 배척으로 폐사된 도성 내 사찰들
한양 4대문 안 랜드마크 역할이던 흥천사·흥덕사·원각사
연산군 9~10년 연이어 불타…전사 의하면 방화로 짐작돼
예능인 양성소로 강제한 원각사도 복구 없이 자취 사라져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위치한 현재의 흥천사. 신덕왕후의 정릉과 그 능침사찰인 흥천사는 태조 5년 당초 서소문 안쪽의 정동에 세워졌지만, 정릉은 태종 때 4대문 밖인 성북구로 이전되어 방치됐고 정동의 흥천사는 중종 5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정조 18년(1794) 성북구의 정릉을 지키고자 새로 지어진 신흥사(神興寺)가 흥천사로 이름을 바꾸며 오늘에 이른다.
연산군 재위 초 한양 4대문 안의 사찰로 흥천사, 흥덕사, 원각사 등이 존재했었다고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다. 정확히 하자면 여기에 비구니 도량인 정업원과 궁궐 내 왕실 전용 사찰인 내불당이 포함된다. 진관사, 장의사, 대자암, 지천사 등 왕실의례 또는 국가행정과 깊은 관련을 맺으며 국초부터 ‘실록’에 빈번히 언급되는 다른 사찰들은 사실 한양 도성 바깥에 위치한 절들이었다.(‘태종실록’ 35권, 18년 4월 4일 ; ‘세종실록’ 61권, 15년 7월 21일 ;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도 한성부’ ; 같은 책 ‘경기 양주도호부’)
흥천사는 태조 5년(1396) 후처인 신덕왕후 강씨가 사망하자 경복궁에서 내다보이는 정동에 무덤을 마련한 뒤 그 곁에 능침사(陵寢寺)로 조성한 사찰이다.(‘태조실록’ 11권, 6년 2월 19일.) 흥덕사는 태조가 왕위에 오른 뒤 그전까지 자신이 살던 저택을 희사하여 만든 절이다.(‘태종실록’ 13권, 7년 1월 24일 ; ‘세종실록’ 3권, 1년 3월 2일.) 흥천사와 흥덕사가 각각 선종과 교종의 수사찰로서 승과시험을 주관하는 양종의 도회소였음은 앞서도 몇 차례 이야기한 바 있었다.
원각사는 세조 10년(1464) 회암사에서 불사리(佛舍利) 분신(分身)의 이적이 발생한 것을 기념하여 왕명으로 도성 한가운데에 창건되었다. 원각사가 들어선 현재의 탑골공원 자리에는 고려시대부터 흥복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세종 11년(1429) 이후 폐사되어 있던 곳에 다시 원각사를 지은 것이었다.(‘세조실록’ 33권, 10년 5월 2일.)
정업원은 이전 글에서 소개했듯이 창덕궁 뒤쪽의 산등성이에 위치하여(‘세종실록’ 92권, 23년 5월 19일) 사족 출신의 비구니들이 수도하던 도량인 만큼 4부 대중 전체에게 개방된 곳은 아니었다. 내불당 또한 경복궁 내에 위치한 왕실 전용 기도처였으므로 당연히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었다.(‘세종실록’ 121권, 30년 7월 17일.)
그렇다면 연산군 당시 수도 한양 내에 자리 잡은 대규모 도심 사찰로는 명실상부 흥천사와 흥덕사, 그리고 원각사를 꼽을 수 있겠다. 종로통 한가운데에 크게 자리 잡은 원각사를 중심으로 도성 서남부 끝자락에 흥천사가 그리고 동북부 끝자락에는 흥덕사가 포진하여, 왕성(王城)의 위용을 드높이며 사부대중 일반으로부터 기도와 공양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원각사의 10층짜리 대리석탑과 흥천사의 5층짜리 목조 사리전각은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바라볼 수 있는 랜드마크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세종실록’ 20권, 5년 4월 18일 ; ‘세종실록’ 80권, 20년 3월 16일 ; ‘세조실록’ 41권, 13년 3월 6일.) 세조 10년부터 연산군 9년(1503)까지, 적어도 15세기 후반의 수십 년 간 한양의 모습은 그랬다.
연산군 9년 흥덕사에 불이 났다. 그리고 이듬해 흥천사도 불탔다.(‘연산군일기’ 56권, 10년 12월 9일.) 연이어 일어났던 두 화재의 이유는 자세하지 않다. 다만 이것이 실화(失火)가 아니라 방화(放火)일 가능성을 짐작케 하는 전사(前史)가 일찍이 성종 20년(1489)에 있었다.
그 해 5월 유생 6명이 ‘흥덕사에 놀러가니[遊于興德寺]’ 이를 전해들은 대비가 내관을 보내어 그들의 신원을 파악하였고, 성종은 유생이 절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법령을 근거로 이들을 국문하였다. 그리고 흥덕사 뒤에 있는 길을 막도록 명하였다.(‘성종실록’ 228권, 20년 5월 11일.)
현재 서울 혜화동 서울과학고등학교의 담장 밖에는 흥덕사 터를 알리는 지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성균관대학교 명륜당으로부터 불과 1km 남짓 떨어진 지점이다. 명륜당을 나선 유생들이 호젓한 골목길을 꺾어들며 걷기에 딱 좋은 코스였던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놀러갔다[遊]’는 ‘실록’의 표현에 담겨 있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공부하는 곳 바로 곁에 있는 흥덕사를 가벼운 유희의 대상으로만 여겼을지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불교에 대하여 배척과 폄훼의 마음까지 가졌을지 모른다. 실제로 이 날 기사에 사관이 덧붙인 말에 따르면, 당일 물의를 일으킨 6명의 유생 중 한 명이 일전에 대비가 정업원에 만들어 보낸 불상을 불태웠던 인물이기에 대비전에서 이 사건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흥덕사 뒷길을 막으라는 임금의 명은 도리어 유신들의 반발을 샀으며, 흥덕사 스님들이 대비에게 몰래 고자질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근거로 스님들에 대한 처벌의 주장까지 나오게 되었다.(‘성종실록’ 228권, 20년 5월 13일 ; ‘성종실록’ 228권, 20년 5월 15일.)
이를 보면 도성 내 주요 사찰의 스님들이 내관이나 상궁을 매개로 대비전과 긴밀히 소통하였음이 넉넉히 추정되지만, 그와 별개로 스님을 처벌하자는 유신들의 주장은 명분과 근거를 모두 잃은 과도한 것이었다. 결국 성종 때의 이 일은 더 크게 비화되지 않았고, 연산군 9년과 10년에 연달아 일어난 흥덕사와 흥천사 화재사건도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채 넘어갔지만, 유생들의 불교에 대한 공격이 노골화되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종 5년(1510) 흥천사 사리전각에 또다시 불이 났다.(‘중종실록’ 10권, 5년 3월 28일.) 전임자인 연산군과 달리 중종은 이 일을 좌시하지 않았다. 이때도 대비전에서 먼저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요전에 유생과 한잡인(閑雜人)들이 여러 날 정릉사(흥천사)에 출입하며 오래 전해 오는 보물과 경문을 훔쳐낸다는 말을 듣고 내관을 보내서 가서 알아보게 하였는데, 유생들이 태연히 훔쳐내면서 도리어 돌덩이로 내관과 그 하인을 때리고 성을 내면서 욕설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밤에 그 절에 불이 나서 탔습니다…”라는 대비전의 전교에 대해, 임금이 의금부에 추문을 명한 결과 실로 유생의 소행임이 드러났다. 선처를 바라는 유신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임금은 범행을 저지른 유생들을 엄히 처벌하였다.(‘중종실록’ 10권, 5년 3월 30일 ; ‘중종실록’ 11권, 5년 4월 6일 ; ‘중종실록’ 12권, 5년 12월 19일.)
하지만 거듭된 화재로 무너진 흥천사와 흥덕사는 별다른 개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폐사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흥덕사는 화재 이후 빈터로 방치되고 있음을 알리는 기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등장하지 않고(‘중종실록’ 10권, 5년 1월 25일), 흥천사 역시 중종 5년의 화재사건 이후 다시는 ‘실록’에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다.
화재를 겪지 않은 원각사도 화재 이상의 수모를 겪으며 쇠락하였다. 연산군 재위 11년(1505) 국립 예능원에 해당하는 장악원(掌樂院)을 원각사로 이전하고 예능인 양성 장소로 그 용도를 변경하고서는(‘연산군일기’ 57권, 11년 2월 21일), 새 임금이 들어선 뒤에도 이전의 모습으로 다시 복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중종실록’ 1권, 1년 10월 15일 ; ‘중종실록’ 1권, 1년 10월 16일.)
이렇듯 연산군 말년부터 쇠락하기 시작한 한양의 대형 도심사찰들은 중종이 집권하고 나자 영영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제 이곳에 살던 스님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민순의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nirvana101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