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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생존을 위하여 왕성한 종족 번식과 더불어 보다 힘이 세고 난폭한 동물들과 맞서서 싸우고 이기기 위한 방법으로 주변의 동물의 뼈, 나무, 돌, 덩굴 등 여러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다른 동물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다른 힘 센 동물들을 이용하고 가축으로 기르는 능력까지 갖추게 되면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양육강생의 최 상위 포식자로 매김하게 된다.
동물들과의 경쟁이 평정되자 인간 간의 경쟁으로 끊임없는 전쟁과 약탈이 반복되면서 기중기, 선박, 쟁기 등을 개발하여 종족간의 치열한 생존 경쟁이 이어지면서 MILITARY ENGINEERING과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 건축학이 더불어 발달되어 왔으며, 1800년 경이 되어서야 기계공학이라는 분야가 등장한다.
기계공학은 주로 사용하는 동력의 종류에 따라 구분한다.
1. 원시동력시대(기원전 60만년대∼기원전 600년대)
인력을 유일한 동력원으로 사용하여 주변의 동물뼈나 돌 등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도구와 기구를 고안해서 사용하였으며, 금속의 기계적 성질을 어느 정도 파악하여 가공할 수 있었다. 석기시대에 들어와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는 지렛대와 같은 기본적인 역학적 기구 (그 당시에는 경험적으로 알았 을 테지만)외에도, 청동기 시대에는 단조(鍛造)와 주조(鑄造)에 관한 기술을 어느 정도 사용하고 있었다. 이때 이미 청동을 높은 온도 속에 일정시간 동아 놓아두어 성질을 변화시키는 어닐링(annealing)의 기술이 존재했다.
2. 자연동력 시대 : BC 620 ~ AD 1690
수력,풍력을 이용하여 곡식을 가공하였다. 물의 낙차와 바람의 힘을 이용한 수차나 풍차의 출현은 기술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인간을 노동을 현저히 덜어주었으며 생산효율이 급격한 상승을 초래하였다. 실제의 기계적 장치의 수준은 이 정도에 머물렀고,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지만 수많은 놀랄만한 기계적 고안이 있어왔다. 스크류(1430)와 프로펠러(1488, 레오나르도 다빈치)등과 함께, 1420년 이탈리아에서 화약로켓을 실어 노즐에서 분사하는 가스의 힘으로 움직이는 실험적인 지상용 기계적 수송수단이 출현하기도 하였으며, 1350년 알베르트 폰 작센은 불이나 에테르를 넣은 관을 날게 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1) 선구적인 기계장치의 고안자 아르키메데스와 헤론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A. 아르키메데스의 양수기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시실리 섬의 시라쿠사 왕이 가진 왕관이 순금인지를 가려냈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약 기원전 287-212)는 기계적 고안자이다. 그는 지레의 원리를 세워 작은 힘으로 거대한 배를 움직이기도 하고, 원형모양의 통에 고정된 나사를 돌려 물이 나사를 따라 높은 곳에 이동하는 SCREW식 양수장치를 고안해 내기도 했다. 로마가 공격해 왔을 때 투석기(投石機)를 만들어 로마군을 괴롭히기도 하였으나, 결국 시라쿠사는 로마군에게 함락되고 아르키메데스는 로마병사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다.
헤론(Heron)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산 그리스의 수학자, 과학자, 발명가이며, 기원전3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 사이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기계장치』, 『자동장치에 대하여』, 『측량술』등 많은 기계장치의 고안이 포함된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이 중에는 증기터빈의 선구인 헤론의 기력구와 불을 붙였다 껐다 함으로써 작동하는 자동문 장치도 포함되어 있다.
B. 화살발사대, 기중기
C. 성공격기기(칼라스)와 성공격 망루탑(헤라폴)
그리스의 알렉산드리아기에는 아르키메데스에 의한 평형의 법칙, 지레의 원리 및 무게 측정법 등이 발견되었고, 투석기, 나선양수펌프, 기중기, 활차나 복활차를 이용한 권양기, 기어를 이용한 여러 가지 기계도 만들어졌으며, 공기의 압력이나 수압을 이용한 기계도 만들었다. 도량형의 단위가 정해졌고, 해시계 및 물시계도 발명되었으며, 화폐제도도 처음 실시했을 정도로 그리스는 앞서 있는 기술력을 자랑했다.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92∼1519)는 이탈리아 피렌체 근방에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음악, 미술, 수학 등에 비상한 재능을 보였으며, 청년 때에는 회화, 조각의 분야에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의 전해지는 저술은 약 5,300매에 달하며 그 외에도 다수 분실되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지 250년 후인 1796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 침입하였을 때 프랑스인에 의하여 발견되어 파리에 이송된 다음, 이듬해 처음으로 출판된 그의 저술은 그 당시 전체의 1/3이 분실되었다고 한다. 그는 많은 관개용 양수펌프의 고안, 아르키메데스식 나선 양수기의 개량, 개폐식 수문장치 등을 고안 했다.그는 또 변속장치, 권양기, 기중기, 시계, 활차, 비행기, 인쇄기, 화폐제조기, 배분기, 직기, 선반 등 공작기계에 많은발명이 있었다. 더불어 장갑전차의 선구가 되는 전차의 발명, 대포, 화염방사기 등 놀라운 천재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D. 수력·풍력의 자연동력이 노예의 노동력을 대신하여 등장 (1556) - 200년간 광부들의 바이블로 여겨졌던 저서.
중세의 수차 (위에서 떨어지는 물의 힘으로 해머나 풀무를 작동시거나 아래로 흐르는 물의 힘으로 큰 맷돌을 돌렸다)
이 시기의 가장 주목할만한 기계공학적, 동시에 기술사적 사건은 수차와 풍차의 출현이다. 수차와 기원전 수세기 전에 중국, 인도에서 출현했다. 536년에 로마에서 수차의 회전이 톱니바퀴에 의해 맷돌로 전달되는 물에 뜬 수차가 발명되었다. 그러나 6∼10세기에 서유럽에 출현했던 최초의 수차는 극히 수가 적었다. 수차가 널리 이용된 것은 기술이 전반적으로 발달하고 봉건사회의 생산력이 일정한 발전수준에 도달한 때였다. 14세기 중엽부터 수차는 금속가공공장에 보급되기 시작하여, 1351년 독일에서 철선을 제조하기 위해 최초의 수력을 이용 한 인발기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철선, 철침 제조공장에 수력을 이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수차를 철사제조에 도입함 으로써 기술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고 인간은 중노동에서 해방되었으며 또한 생산효율이 급격히 상승하게 되었다. 수차는 기술의 발전에 강력한 혁명적 영향을 미쳤으며, 그 응용 또한 다양했다. 수차는 제분업뿐만 아니라 11세기말부터 양수장치 와 시추장치의 동력으로도 사용되고, 직물공장에서 모직물 압축용 및 벨트압축용 동력으로도 사용되었으며, 제지공장, 화학공장에서의 원료의 분쇄에도 수차동력이 사용되는 등 많은 산업에서 강력한 동력원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드롭해머와분쇄장치, 드릴링 머신, 볼링기계 등 가공기계에도 사용되었다.
풍차는 10세기말부터 11세기 초두에 프랑스,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에 출현하였다. 네덜란드의 풍차가 이 나라의 풍물의 하나가 된 것은 이때부터이다. 예로부터 수해를 막아내고 얼마 되지 않는 토지를 간척하기 위해 물을 길어 올려야 했던 네덜란드에 풍차가 출현했다는 것은 배수장치의 동력으로 풍차를 이용했음을 보여준다.
E. 최초의 자동 기계장치 - 시계/최초의 시계의 구조(알람장치도 가지고 있다-5번)
중세의 가장 흥미 깊은 발명의 하나는 시계이다. 시계가 출현하기까지 시각의 측정은 대충 어림잡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시각의 측정이 특히 필요했던 곳은 정해진 시간에 예배를 보아야만 하는 교회였다. 러시아에서는 1404년 크레믈린에 처음으로 탑시계가 등장하고 15∼17세기 동안에 러시아 여러 도시에 보급되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기계시계에 이르면 현대의 기계시계와 거의 동일한 부품이 사용된다. 마르크스는 기계의 역사에서 제분기의 역할을 고찰하면서 특히 시계에 주의를 기울였다. 시계는 기계학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작업기에 필요한 전달기구 및 그 밖의 더욱 복잡한 기구의 창출을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F. 시대를 너무 앞서 불운을 부른 기계장치
16∼17세기에는 기술상의 선구적인 고안이 많이 쏟아졌지만, 당시의 생산상황에서는 실현될 수 없었다. 1624년 영국에서, 1653년 프랑스에서 실험되긴 했으나 결국 실용화되지는 못했던 잠수함 설계가 그 한 예이다. 1629년 이탈리아의 건축기사 G. 블랑카가 갖가지 기계와 기구를 기록한 대작 『기계』를 출판했다. 그가 제안했던 증기차의 구조에는 19세기말에야 비로소 실용화되는 충돌터빈(impulse turbine)에 대한 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책에는 유치한 내용도 있긴 했지만 가스터빈을 연상시키는, 이른바 '불수레'에 대해서도 적고 있다.
시대를 앞서는 선구자적 기계장치의 고안은 좀 더 비싼 대가를 치르기도 하였다. 1589년 영국에서 윌리엄 리가 수백 개의 코바늘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편물기를 발명했다. 이들 코바늘에 실이 끼워지고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번에 100개의 코를 짰다. 그 이전에는 가장 숙련된 편물공이 우수한 기계를 사용해서도 하루에 344개의 코를 짜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 기계의 발명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지지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편물공들로부터 갖은 박해를 받고서 프랑스로 도망쳐서 빈곤 속에서 죽음을 맞았고, 그의 기계는 파괴되었다. 이것은 상당히 근대적인 베틀을 만들어낸 18세기 중반의 자쿠드나 팔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며, 사회에 받아들여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G. 팔콘의 베틀(18세기 중반)
이상과 같이 16∼18세기 전반에 걸쳐서 학자, 발명가, 직공들이 많은 기술적 수단을 개발하고 기술상의 대담한 고안을 발표했지만, 그것들은 당시의 동종직종의 조합적 생산 및 매뉴팩처 생산에는 널리 보급될 수 없었고, 작업기의 요소들을 갖춘 약간의 기계만이 이따금 이용되는 데 불과했다. 이러한 기계의 사용은 직공과 봉건사회 지배계급의 저항에 부딪혔다.
그러나 이들 기구와 기계는 18세기말부터 영국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탄생한 공장제, 기계제 생산의 새로운 기술적 수단을 개발하는 시초가 되었다.
3. 증기동력시대 (1690년대∼1790년대)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공장과 광산 등에 다양하게 사용된 수차는 기계가 점차 대형화함에 따라 요구되는 수력에 제한되고, 물을 끌어 들여야 하는 위치 상의 제한이 커다란 결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의 성립기에는 기계를 움직이기 위한 강력한 원동기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것은 증기기관의 출연이었다. 본격적인 기계와 기계공학의 발달은 증기기관의 발명을 시작으로 태동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700년경부터 이용이 가능해진 증기기관의 엄청난 산업에의 파급효과는 1780년대에 이르러 산업혁명을 주도하게 된다.
A. 헤론의 기력구에서 와트의 증기기관까지
1) 뉴커멘의 양수기 증기엔진/ 뉴커멘의 증기기관이 사용되는 현장
증기가 기계적 일을 한다는 것은 증기기관이 발명되기 2000여년전인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의 터빈(기력구)으로부터 인식되었다. 증기력을 동력기관으로 처음 이용한 것은 1695년 양수장치에 이용한 프랑스의 드니 파팽(Denis Papin, 1647∼1712)의 피스톤 증기기관이다. 이듬해인 1696년에 영국의 공병 대위인 토마스 세이버리(Thomas Savery, 1650∼1720) 는 처음으로 사용할 수 있는 증기양수장치를 발명하였다. 세이버리의 증기기관보다 실용가치가 크게 인정된 증기기관은 1705년 영국 뉴커멘(Thomas Newcomen, 1663∼1724)에 의해 만들어진 대기압 증기기관이다. 1712년에 최초의 뉴커멘 증기기관은 광산 배수용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때 출력은 8마력으로 80mm 깊이의 물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1720년대 뉴커멘의 양수용 증기기관은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사용되었다.
2) 와트의 양수기 증기엔진
그러나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은 방적기(紡績機)에 영국의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가 증기기관을 결부시켜 이용한 때(1766)부터라 할 수 있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 관련업무에 종사하게 된 것은 1763년 글래스고우대학에 있던 뉴커멘의 증기기관 모형이 고장 수리를 맡고부터이다. 이를 시작으로 와트의 새로운 형태의 증기기관 모형이 1765년에 만들어졌고 그것이 완전히 작동하게 된 것은 1769년의 일이다. 증기기관의 발전은 꾸준히 이어져 19세기에 농업에 쓰이는 증기쟁기까지 출현하게 되었다.
B. 증기쟁기(1850년대)
1) 수송기관으로서의 증기기관/ 큐노의 증기차(1763)
수송기관에 증기를 이용하려고 하는 생각은 이미 17세기부터 있었다. 최초로 시도되었던 것은 증기기관을 보통의 차나 짐마차에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다 1763년 프랑스의 기사 큐뇨는 포탄운반용 증기차를 만들었다. 이 증기차는 간신히 12분 내지 15분 정도 움직이면 그 뒤는 달린 시간만큼 멈춰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1769년 큐뇨는 보다 개량된 증기차를 만들어 파리의 대로에서 달려보게 하였지만,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어 결국엔 벽에 충돌하여 부서져 버렸다. 그 결과 그 이후 이 차를 개량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1784년 와트의 제자이자 조수이기도 했던 윌리엄 머독이 증기차의 설계를 완성하고 2년 후에 실험에 착수했으나 실용적인 운반차 제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여전히 증기자동차를 만드는 실험은 18세기말까지 계속되었고, 게다가 이미 1830년대에 영국에서는 거니나 핸코크 등이 설계한 증기 승합마차가 100대 이상 이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도로 상태가 나빴기 때문에 트레비딕은 1800년대 초 증기자동차를 이용해서 철도운송을 하는 것이 뛰어나다는 것을 깨닫고 기관차로 설계의 방향을 바꾼 최초의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증기기관을 이용한 운송에 커다란 공헌자는 영국의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8)이었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던 그는 보일러공의 조수로 일하면서 독학으로 지식을 습득했다. 1814년 스티븐슨은 자신의 첫 기관차를 만들었다. 이 기관차는 30톤의 짐을 시속 약 6km의 속도로 달렸다. 1825년까지 스티븐슨은 16대의 기관차를 제작했고, 철도 건설을 맡아 지휘하기도 하였다.
2) 트레비딕의 최초의 증기기관차(1803)
지상에서도 수송수단 개발에 고전을 하고 있는 시기였지만 인간의 하늘을 날고자 하는 노력도 지속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새의 비행에 관하여(1505)』는 항공기 역사에서의 최초의 과학적 설명이었다. 1783년 몽골피에(Montgolfier)형제의 무인기구를 띄우는 실험의 성공하였으며, 같은 시기 프랑스의 자크 샤를(J. Charles)의 수소기구 비행이 성공하였다.
B. 산업혁명과 정약용의 거중기
근대화가 조선말에나 시작된 우리나라의 경우 기계의 발달은 저조한 편으로, 서양에서 산업혁명이 한창일 때 아직 자연력에 의존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뜻있는 학자들의 노력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 한 예로 정약용의 거중기를 들 수 있다. 거중기(擧重機)는 오늘날 기중기의 일종으로 조선 정조 때 정약용이 청(淸)나라의 유취본(類聚本)중 가장 방대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에 포함된 서양기계기술에 관한 책인 『기기도설(器機圖說)』등을 참고하여 발명한 것이다. 거중기는 1789년 한강에 배다리를 만들 때와 1792년 수원성을 쌓을 때 공사를 돕고, 건축비 4만량을 절약한 것으로 알려진다.
1) 정약용의 거중기
기계공학 이론적 체계에 있어서의 발전
기계공학이라는 독립적인 체계를 위한 이론이기보다는 과학기술의 여러 분야에 속했던 기계공학의 근본을 이루는 학문들이, 급속한 산업발달과 기계장치의 개발과 개선의 사회적 요구라는 분위기 속에서 많은 업적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응용역학의 원리에 대한 연구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스위스 출신의 페테르부르그 아카데미의 정회원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t Euler, 1707∼1783)이다. 그가 쓴 이 분야의 저술은 약 100권에 이른다. 1736년 오일러의대표작 『역학, 일명 해석적으로 설명된 운동의 과학』이 페테르부르그에서 출판되었다. 13년 후인 1739년 같은 곳에서 오일러의 역학에 관한 가장 중요한 『최소작용의 원리에 관한 학위논문』이 출판되었다. 1739∼1742년에 아카데미의 보고에 대한 주석』에 오일러의 '여러가지 기계에 대한 간략한 기술'이 연재되었다.
고전역학을 완성한 사람은 그 유명한 뉴튼이다. 뉴튼은 역학의 기본적인 개념인 질량(mass), 운동량(momentum), 힘(force), 공간 및 시간의 문제를 분석했다. 그는 3개의 기본적인 운동법칙인 관성의 법칙(제1법칙), 운동의 법칙(제2법칙, 힘과 가속도의 비례관계),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제3법칙)을 정형화하였다.
재료역학의 창시는 『신과학대화(1638)』속에서 갈릴레이가 서술한 명제가 발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갈릴레이는 강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그는 물체의 극한 상태, 즉 파괴되는 순간의 물체의 강도를 연구했다. 강도 문제에 대해서 17∼18세기의 많은 연구자가 이러한 연구방법을 취했다.
18세기초 유체역학 분야에서 중요한 성과가 나타났다. 17세기말과 18세기초에 유체역학을 진보시키는 데 가장 큰 자극이 되었던 것은 수차를 움직이기 위해 급류, 하천, 운하를 이용한다고 하는 과제였다. 18세기 중반 무렵에는 이 과제로부터 그것에 관한 이론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유체역학의 발달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를 거둔 사람은 다니엘 베리누이(Daniel Bernoulli, 1700∼1782)이다. 그는 운하와 파이프 수력원동기 속의 액체 흐름을 연구하는 데 이용할 유체역학의 주요 정리(正理)를 끌어냈다. 그는 작업, 작업률, 원동력, 효율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또한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근거하여 오늘날 '베르누이의 정리'로 알려진 정리를 끌어냈다. 오일러(Leonhardt Euler, 1707∼1783)도 18세기 중반에 유체역학에 관한 논문집을 저술한다. 그는 압력개념을 도입하고 유체역학의 일반방정식과 연속방정식을 구하였다. 오일러는 일정량의 액체를 일정 높이에서 낙하시킬 때의 수력터빈의 효율을 계산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오일러의 세 개의 논문 액체의 평형상태에 관한 일반 원리』, 『액체의 운동에 관한 일반원리』, 내부액체의 운동론에 관한 연구』는 베를린 아카데미의 보고서에 실렸는데(1755∼1757) 이 논문들은 과학으로서의 유체역학의 이론적 기초를 쌓은 것들이다.
일련의 열 현상을 깊이 있고 일관되게 해명한 사람은 로모노소프(1711∼1765)였다. 그는 저서 『열과 냉각의 원인에 대한 고찰(1745)』에서 열 현상의 본질을 적절하게 정의하고 있다. 1748년『공기의 압력이론에 대한 실험』에서 로모노소프는 열이론을 발전시켜 기체 분자운동론의 기초를 쌓았다. 열공학이 그 이후에 발전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실험적 연구는 J.블랙(1764), J.와크(1760∼1767), 베탕쿠르(1792) M.프로니(1796)등의 저서에서 볼 수 있다.
4. 전기동력시대 (1790년대∼1890년대)
1799년 전류의 지속적 발생에 성공하면서 인류의 전기사용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 시기의 기계는 증기기관을 넘어선 내연기관이 출현하고, 증기의 낭비를 줄이고 출력을 높일 수 있는 터빈(turbine)이 제작되었다. 공작기계에 있어서도 현대의 선반(lathe)에 가까운 정도의 근대적인 형태로까지의 발전이 있었으며, 근대적 의미의 기계공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연기관의 출현에서 라이트형제의 비행기까지
내연기관은 기존의 증기기관에 비해 소형 고출력의 동력기로서 큰 장점을 가지고 있어, 특히 엔진이 가벼울수록 유리한 수송기관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833년 영국의 라이트(W. L. Wright)는 가스와 공기의 혼합물을 다른 용기에 넣은 다음 실린더에 보내면서 폭발시켜 그 힘으로 크랭크축을 회전시키는 기관인 오늘날 가스 폭발식 내연기관을 발명했다. 1838년 영국의 바네트(W. Barnett)는 가스를 폭발시키기 전에 미리 압축시키고, 점화장치 새로 고안해 내연기관의 획기적인 전기를 만들었다. 1860년 벨기에의 르노아르(J. J. E. Lenoir)는 전기에 의한 점화장치를 이용한 내연기관을 발명함으로써 비로소 활발한 실용화가 진행되었다. 1877년 독일의 오토(N. A. Otto)가 4행정 사이클을 이용한 내연기관을 제작하여 내연기관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당시 오토의 내연기관은 증기기관을 압도하는 원동기로 급속히 세계에 보급되었다.
A. Otto의 내연기관
1880년대 벤즈의 2인승 웨건
1900년대 뉴욕 15번가를 가득 채운 자동차와 몇몇 마차
가스기관은 편리하였으나 가스를 구하기 어렵게 되면서 가스 대신에 석유와 공기를 사용하는 내연기관이 연구되었다. 1873년 미국의 브레이튼(Brayton)은 석유를 침투시킨 흡수재에 공기를 통과시킨 후 실린더에 보내어 연소시키는 기관을 발명했으며, 독일의 디젤(Rudolf Diesel, 1858∼1913)은 석유대신에 중유를 연료로 하는 내연기관을 발명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가솔린의 용도가 적어서 값이 싸고, 석탄가스보다 연소속도가 10배나 빠르기 때문에 고속회전으로 큰 힘을 내게 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가솔린 엔진은 소형화할 수 있다는데 착안하여 1883년 독일의 다임러(G. Daimler, 1834∼1900)가 고속 가솔린기관 제작에 성공하였다. 이 기관은 종래 가스기관의 회전수에 4배에 이르는 800rpm이상의 고속을 나타냈다. 다임러의 4행정 사이클 가솔린기관이 출현한 때, 독일의 벤츠(Benz)가 2행정 사이클을 가진 자동차를 제작하여, 1890년대에는 벤츠 공장에서 연 2000대의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는 이러한 가벼운 엔진을 이용함으로써 가능해 졌다.
B. 라이트 형제의 최초의 동력비행 사진 (1903년 12월 17일)
증기의 효율적 이용 - 터빈
1750년 스위스의 오일러가 발표한 『물의 반동에 의하여 운전되는 기계의 이론』을 바탕으로, 1825년 프랑스의 뷔르당 (C. Burdan, 1790∼1873)이 반동형 수력터빈을 제작하였다. 이것은 몇 개의 도수판을 만들어 그것을 통과한 물이 기기에 부착된 날개에 부딪혀 기기가 회전하는 새로운 수차이다. 뷔르당은 이 수차에 '터빈'이라는 명칭을 처음 붙였다. 종래의 수차에 일대혁신을 가져온 반동형 수력터빈은 뷔르당의 제자인 플네이턴이 1832년 제작하였다.
수력대신에 증기력을 사용하여 회전동력기를 만든 사람은 영국의 파슨즈(C.A.Parsons, 1854∼1931)이다.
1884년 그는 반동증기터빈의 특허를 받아 7.5kW의 터빈 발전기를 만들어 전람회에 출품했다. 그 이후에도 스웨덴의 드 라발(C.P.G. De Laval, 1845-1913)의 충동형 터빈, 1896년 미국의 커티스(C. G. Curtis, 1860∼?), 동년 프랑스의 라토(A. C. E. Rateau, 1863∼1930)의 충동형 터빈 등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증기터빈이 개량되어졌다. 실제로 1906년에는 영국의 전투함에 모두 증기터빈을 사용하였다. 증기터빈은 증기기관보다 증기의 소비량이 적고 소형으로 출력이 크기 때문에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증기기관을 대신하여 공장, 발전소, 선박 등의 원동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C. 공작기계의 근대화
모즐리의 1/1000인치까치 정확히 이송이 가능한 선반(1800년대)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는 다양한 금속가공기계의 개량이 이루어진 전환기였다. 금속이 기계의 기본적인 구조재료로서 보급되자, 금속가공을 위한 공작기계가 근본적으로 근대화되었다. 이에 수반된 공구이송대의 개발은 마르크스가 공구이송대를 18세기말의 생산혁명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발명의 하나라고 간주할 정도였다. 금속을 절삭하는 공정을 기계화하는 문제는 18세기말에 이르러 해결되었다. 18세기 말 헨리 모즐리(Henry Maudslay)는 이전까지 선반을 개량해서 일반용 선반을 발명했다. 그는 기계제작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었다. 그와 그의 후계자들은 일반용 선반을 기초로 다양한 용도의 사용되는 일련의 공작기계를 발명했다. 모즐리의 선반은 약간만 개량하면 현재의 선반과 같은 모양이 될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여러 종류의 부품규격을 가능한 한 통일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최초로 볼트와 너트의 나사산의 표준화를 시도했다
D. 스미튼의 보링머신(1769)
윌킨슨의 보링머신
윌킨스의 실린더 보링머신
선반의 개발과정에 영향을 준 것은 다른 종류의 공작기계의 제작과 사용경험이었다. 이에 속하는 것에는 드릴링머신(drilling machine)과 보링머신(boring machine)이었다. 당시의 보링기술은 불완전하여 와트가 자신의 최초의 증기기관에 사용하는 실린더를 제작할 때는 단조(鍛造)해야만 했다. 스미튼의 보링 머신(1769)을 거쳐 어떤 치수의 실린더라도 내측 가공할 수 있게 한 것은 영국의 기사 윌킨스였다(1775). 이 보링 머신은 직경 1m 이상의 부품을 보링할 수 있어 대형기관 제작이 가능했다.
5. 복합동력 시대(1890년대∼현대)
Saturn 5호의 발사장면
아이슈타인의 광양자설(1905), 상대성이론(1915), 슈뢰딩게르의 파동역학(1926), 하이젠베르그의 양자역학(1927)등 원자핵 물리학의 기초 확립되면서 20세기초는 동력사적으로는 원자동력시대의 출발이라 볼 수 있다. 기계문명이라고 불리는 20세기의 급속한 공업화로 기계는 산업현장뿐만 아니라 생활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게 되었다. 강력한 기술과학의 힘은 인류를 지구를 벗어나 우주로 쏘아 올리는 수준에 이르렀다.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제 1차 기계혁명은 이렇게 확장과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고, 1980년대 이르러 새로운 기계혁명을 맞이하게 된다.
현명한 기계의 등장 - 제 2차 기계혁명
산업혁명을 기술면에서 보면 석탄을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하는 동력혁명과 작업기계의 발명이라는 기계혁명이 그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동력혁명과 결합된 기계혁명은 - 제1차 기계혁명-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대동력을 필요로 하는 작업, 인간에게는 바랄 수 없는 효율적인 단순작업의 반복이 필요한 분야를 중심으로 사용되어 왔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전자공학과 융합하여, 산업혁명 이후 2세기에 걸쳐 근대문명을 상징해온 '기계'는 이른바 '메카트로닉스(Mechatronics : 기계공학(Mechanical Engineering)+전자공학(Electronics))'의 등장으로 본격적인 로보틱스(Robotics) 혁명으로 새로운 기계혁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로보틱스 혁명은 공장뿐만 아니라 우주나 심해 등의 극한 상황, 건설현장이나 사무실은 물론 지역사회나 가정에까지 침투하고 있다. 사람에게 온화하고 현명한 신세대 기계는 소프트와 하드가 일체화된 뉴하드라고 할 수 있다. 메카드로닉스의 전형적인 예로 공작기계(기계를 만드는 기계)라는 기계공업의 기본적 제품인 NC(수치제어)공작기계를 들 수 있다. NC공작기계는 기계산업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산업로봇도 어떤 의미에서는 공작기계의 일종이며, 무인화, 야간작업, 산업재해, 위험방지라는 효과와 함께 다품종 생산이라는 면에서도 크게 공헌하였다. 실제로 우주, 해양 등 극한상황에서의 작업은 로봇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이의 필요성은 해양로봇과 원자력로봇, 방재로봇(소방로봇)의 개발을 위해 일본 통상성이 1983년도부터 8년간 연구개발비로 총액 약 200억앤을 들여 대형 프로젝트 <극한작업 로봇의 개발>을 실시하였다는 예에서 알 수 있다.
복합공학 형태의 21세기 기계공학 - 초미세 기계, 의생물, 정보기기, 환경, 항공우주
기계공학은 공학의 기본적인 바탕을 형성하며 여러 과학, 공학분야와의 결합을 시도해 왔다. '쓸만한 물건'을 고안하고 만들어 내기 위해 광범위한 분야를 파고들고 있어 기계공학이 응용되는 분야의 구별은 매우 힘든 상태이다. 그중 21세기에 각광받는 몇 가지 분야를 얘기하자면 초미세 기계의 개발, 의생물, 정보기기 분야로의 응용,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시스템의 개발, 항공우주산업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기계가공의 정밀도는 나노미터(100만분의 1mm)의 수준까지 도달하고 있다. 게다가 전자공학에서 발전된 초미세가공기술이나 분자, 원자조작기술 등의 진전으로 초미세기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구가 활발해진 이 MEMS(Micro Electro-Mechanical System, 초미세기계)분야는, 의료기기, 정보기기, 첨단현미경, 미소광학, 유체제어, 산업기기, 분자조작기기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응용분야를 가지며 급속한 발전이 예상된다. 전자·정보기기의 발달을 뒷받침했던 기기의 집적화(集積化)는 작고 강력한 기능의 전자제품과 정보통신기기를 만들어 냈지만 이에 따른 발생열의 증가는 기계공학에서 해결해야할 당면과제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항공우주기술의 발달은 세계를 일일생활권으로 묶어 놓았지만 인간의 더 빠르게 이동하고자 하는 욕구는 초음속여객기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일본의 하이퍼프로젝트(Hyper Project)를 비롯해서 미국의 GE사에서도 초음속 여객기에 대한 개발이 현실화 단계에 있다. 인간의 문명발달의 딜레마인 환경오염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저공해·무공해 엔진 개발, 공해 제거 등에서 기계공학의 숙제는 산재해 있다. 의생물 분야에서도 최첨단 의료진단 시스템인 유전차 칩의 소형화, 의료장비인 MRI(자기공명 단층촬영) 장비의 초전도·극저온 장치, 인공관절·혈관의 개발, 장기의 저온보관 등 기계공학은 해결해야 할 수많은 흥미로운 과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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