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사
기독교미술의 발달
경기도 의정부시 경민학원 내에 있는 혜촌미술관에는 100여점의 특이한 그림이 있다.충효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그림인데 혜촌 김학수화백이 그려 경민학원에 기증한 것이다.김화백은 경민학원 설립자인 홍우준씨와 같은 고향으로 자신의 그림을 친구가 설립한 학교에 기증해 두고두고 후학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김화백은 동양화가지만 한국 기독교 초기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을 접하고 성경과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구한말 한국인들이 선교사와 교회를 통해 배우고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것들 중에 미술분야도 빼놓을 수 없다.기독교에 의해 건축 서양화 동양화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것이다.개화기의 서양미술은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 처음 가톨릭신도들에 의해 반입되고 제작됐다.대부분 성화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1783년 정약용의 친척인 이승훈이 동지사 서기관으로 청나라에 갔던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갔다가 성화를 가지고 귀국,이벽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식 기법으로 그린 그림은 이희영의 투견도다.이 작품은 1795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백지에 묵으로 그린 것인데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후 희랍정교회(현 한국정교회)가 다양하고 귀한 성화들을 러시아에서 들여와 비치하면서 일반에 알려지고 서양화법이 널리 소개되기 시작했다.당시 정동에 있던 러시아정교회는 ‘삼위일체’ ‘천사 가브리엘’ ‘성모자’ ‘그리스도의 최후만찬’ ‘예수’ ‘미가엘’ 등을 소장하고 있었다.
개화기의 건축물로는 명동성당이 유명한 기독교건축으로 손꼽힌다.이 건물은 1892년 기공됐다가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된 뒤 1898년 완공됐다.고딕 3연(緣)의 라틴 십자가형으로 지어졌다.1922년 기공한 대한성공회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로마네스크양식의 건축물로 기독교가 자랑하는 아름다운 건축물로 정평이 나 있다.
초기 기독교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에 무슨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는 하나님이 말씀에 따라 회화나 조각 등으로 당시 교회당을 장식하지 않았다.이때문에 가톨릭보다는 다소 서양회화와 건축에서 뒤졌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그러나 선교사들에 의해 회화의 토착화가 시도되면서 교인들 가운데 그림에 소질이 있는 사람들이 화가로 성장한다.
1894년 천로역정을 번역한 게일은 원산 출신의 김준건에게 삽화를 맡겨 한복을 입은 기독교도를 그리게 했다.김화감리교회는 주일학교 우승기에 십자가모양을 넣고 그 안에 변화산 갈보리언덕 등의 그림을 그렸다.또 다니엘 다윗 모세 요셉 사무엘 룻과 같은 인물의 그림을 그렸다.
이런 그림을 보면서 교회에 나가던 한국의 어린이들은 서양미술에 눈을 뜨게 된다.그리고 교회에서 매년 열린 성경학교의 그림그리기대회 등을 통해 서양화법을 배우고,동·서양화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인물들이 배출됐다.그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이당 김은호(1892∼1979) 혜촌 김학수,운보 김기창,홍종명 등이다.
이당은 인천 태생으로 서울 안동교회 출신.그는 곽안련선교사(클라크)로부터 서양미술과 성화 등 고전미술을 배웠다.그림에 탁월한 소질을 보인 그는 1912년 경성서화미술학교에 입학,그해 조선궁실 역대황제 어진5위를 봉사(奉寫)했으며 22세에는 순종의 어진을 그렸다.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0회 입선,5회 특선하는 실력을 보였다.
이당은 3·1운동으로 1년간 옥고를 치른 뒤 미술분야에 정진,24년에 고려미술원을 설립하고 30년에 조선미술원,36년에는 후소회를 설립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그의 수제자가 바로 혜촌 김학수,운보 김기창이다.
이당은 3년간 일본에 수학하러 가 도쿄국제미술원 도쿄연미회 광풍회 등에서 입선하고 중국에 건너가서는 베이징과 펑텐(현재 선양)박물관 벽화를 그렸다.그는 1924년 예수그리스도를 주제로 ‘부활후’를 그렸는데 6·25전쟁때 불에 타 없어졌다.그는 또 오병이어도 등을 그렸으나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 YMCA에 ‘부활후’의 그리스도상이 남아 있다.
이당은 한국화단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으나 매우 불우한 가운데 성장했다.부친를 일찍 잃고 모친과 함께 생계를 위해 모진 고생을 했다.인쇄소 직공 이발소 잡역 제화공 측량기사조수 등을 했으며 안동교회에 다닐 때 중추원 참의인 김교성을 만나 미술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인생의 대변화를 가져왔다.
이당의 수제자 김학수화백은 기독교미술사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평양 출신인 그는 남산현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으며 장대현교회 경창문밖교회 서평양교회 등에 다녔으며 6·25전쟁때 부산으로 피란가 시온교회를 창립했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많았던 그는 평양에서 수암 김유탁에게서도 사사했다.그의 주요 작품은 풍속화로는 시장도 능행도,역사화로는 한양도 경북궁도가 있다.한국적인 성화로는 예수 일대기연작(30점) 기독교한국선교역사화 남대문에 입성하시는 예수님,문드리시는 예수님,예수탄생 등이 있다.
김학수화백은 홀로 월남해 재혼하지 않고 수백명의 고아를 길러냈다.그 가운데 미국장로교회 아시아담당 총무를 역임한 이승만목사 등이 있다.김화백은 북한을 자주 왕래하던 이목사를 통해 최근 북한에 가족이 생존한 것을 확인하고 그림에 새로운 정열을 태우고 있다.
그는 성경이야기를 100점 그려 연세대에 기증하고 충효사상에 관한 이야기를 그려 의정부 경민대학에 기증했으며 지금은 70년대 말부터 제작하고 있는 한강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이 한강도는 발원지인 태백에서부터 하류까지 기독교 선교 초기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운보 김기창은 이당에게 사사하고 신윤복을 연상케 하는 풍속화의 대가.그는 정확한 묘사력과 힘에 넘치는 달필로 많은 기독교화를 그렸다.6·25전쟁때 군산으로 피란가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담은 29폭의 그림을 그렸다.그가 성화를 그리게 된 것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모친의 영향.7살때 열병을 앓아 귀가 들리지 않게 된 그는 “어머니로부터 신앙적 감화를 받으면서 자라난 선택받은 사람”이라며 성화를 그리는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예수의 일대기를 담은 그림은 그가 꿈 속에서 예수의 시신을 붙들고 우는 꿈을 여러차례 꾼 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서양화가 중 성화를 그린 사람은 많지 않으나 홍종명교수는 예수를 주제로 열편의 성화를 그렸다.순교자 십자가,유다의 배신,고기잡는 어부들 생선 등 구원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승한 shlee@kukmin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