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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시간은 물과 같이 흐르고 나이는 먹어가고 정신과 몸은 젊은 날과 달라 점점 약하여 가고 있어 여행을 3-4일 하거나 산을 5-6시간 이상 오르면 피로가 온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이가 들어감을 느끼면서 지내며 좀 더 느리게 천천히 지내려고 하지만 마음은 아직도 늙지 않아서 새로운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하지만 하루에 걷기 운동을 2시간 쯤 하고 책을 한 두 시간 읽거나 글을 쓰고, 서예를 1시간 정도 쓰면서 시간을 떼우고 있어요. 젊은 자네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나 직업에 좀 미치게 일해야 할 나이들이지만 선생님은 삶을 즐기면서 아직도 2가지의 꿈을 갖고 삽니다. 그것은 이루어질지 못 이룰지 모르지만 삶을 즐긴다는 생각으로 시조 공부와 서예공부를 즐기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다시 시간이 나면 해보고 싶은 일은 난타나 시조창을 한번 배워보고 싶습니다.
젊은 제자들에게
첫째, 직장에서 자기 일을 하면서 시간과 여유가 있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취미)을 매일 1시간 정도 하면서 지낸다면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기도 하고 또 좋아하는 것(취미나 일)을 한다는 즐거움에서 삶이 좀 더 풍요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직업이나 취미 등에서고 50대 이후가 되면 새로운 도전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기 주어진 여건에서 주위사람이나 가족이나 선후배에게
베푸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사랑과 정을 주고 받으며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가 너무 빨리 변하기 때문에 거기에 적응하다 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나와 경제적 문제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좌절한 삶이 많이 나타난 것 같아요 우리 선조들은 지금보다 더 어려웠어도 서로가 이런 사랑과 정으로 끈끈하게 이어진 삶이어서 곤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잘 이겨 온 것이 우리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이며 이런 과거의 역사에서 새로운 교훈을 얻는 것이 역사를 교훈 삶은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에서 이러한 교훈을 아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 하나라도 삶의 철학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 지혜이고, 삶에서 이런 습관을 바꿀 때 새로운 내가 이루어지고 가족이나 이웃 그리고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모두가 자기의 삶의 습관을 바꾸는 것은 참으로 큰 충격을 받지 않고는 어려운 것 같아요
셋째 많은 위인들이 말한 것처럼 오늘 만나는 사람, 일, 시간에 즐거움을 찾으란 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내 마음 속에 그런 마음을 품은 것이 주요하다고 생각해요 법정 스님은 부처를 찾으러 절에 가지 말고 내 마음에 품으라고 했으며 어떤 목사님은 예수를 찾으러 교회만 오지 말고 예수의 마음을 내 마음에 품으라고 했어요. 혜민 스님이 쓴 ‘멈추면 비로소 보이 것들’ 이란 책에서 행복의 지름길은 ①나와 남을 비교하는 일을 멈추십시오.②밖에서 찾으러 하지 말고 내 마음 속에서 찾으십시오. ③지금 이 순간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 느끼십시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권력이나 돈을 쫓아가고 있어서 행복하지 않는데
선생님 친구들이 100억, 천억 2천억 부자가 있는데 자식을 잘 두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아요. 그런데 제일 부자가 자식 잘 두어 행복 했는데 요새 건강이 안 좋아서 전화도 안 되어요. 마치 한국의 제일 부자(삼성) 가 식물인간이어서 노인들이 건강한 사람이 그 분보다 행복하다고 하고 부자다고 하는데 그 마음을 갖는 자 만이 행복하다는 것이어요. 제자들도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찾아서 마음에 행복을 품으면 행복해 집니다.
며칠 전 읽은 책의 내용을 옮겨 적어 봅니다.
인생은 선택이다. 행함도 감사함도 객관적인 여건이 주어질 때까지 기다면 영원히 오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 당장, 매 순간 행복과 감사를 선택해야 한다.
인터넷 어디에서 본 “신과 인터뷰” 라는 시에서 신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이렇게 얘기한다.
“ 돈을 벌기 위해 건강을 잃고 건강을 찾기 위해서 그 돈을 다 잃고 불확실한 미래를 염려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그래서 결국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살지 못하고 결국 죽지 않을 것처럼 살다가 결국은 살아본 적 없듯 무의미하게 죽어 가는 것”
행복은 선택이다. 가까운 곳에 현재에 있다. 행복은 쟁취해서 얻는 먼 훗날의 결과물이 아니다. 더 자주 웃고 더 많이 사랑하고 남과 비교하지 않는 것. 우리 존재에 감사 하는 것 이것이 행복이다. 길지 않은 인생, 이왕이면 행복하게 살기를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독일의 시인 실러는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미래는 주저주저 하면서 다가온다고 했다. 우리 나라 소설가 최인호는 과거는 감이 없고 현재는 멈춤이 없고 미래는 옴이 없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년은 추억에 살고 젊은이 너무 현재에만 산다. 과거를 교훈 삼아서 현재를 살되 좀 멈추어 생각하면서 여유롭고 되돌아 보고 즐기면서 미래도 생각하면서 억매이지 말고 세상을 마무리 할 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성실하게 멋있고 맛있게 주위에다 베풀면서 살았구나.’ 하면서 떠날 때 눈을 감은 것이고,
주위의 아는 모든 분이
눈물을 흘리면서 아쉬워하며 ‘좋은 사람이 더 좋은 일하고 가지 아쉽게 갔네. 하고 말을 들으면서 하늘나라 가는 사람이 진정한 인생의 성공자 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앞으로의 삶에 항상 건강과 알찬 성장과 화목한 가정 국가 사회에
훌륭한 족적을 남기기를 기원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길 기원 합니다.
-내가 쓴 수필 중 참고가 될만 한것만--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을 다녀와서-
조 규 록
여행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기쁘게 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진부함에서 떠나 새로운 체험을 위한 탈출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괴테는 ‘사람이 여행을 떠나는 것은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정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하였다. 나그네 길에 불편함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마음은 거칠 것이 없고 자유로우며 관조의 기쁨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처음 떠난 해외 여행길이 그 흔한 비행기도 아닌 여객선이다. 11월 25일 오후 4시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악천후 속에서 부산항을 떠나는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고 선내의 스피커에서 올드랭사인이 구슬프게 울려나오고 우리가 탄 신 사쿠라 호는 기관소리를 크게 울리며 육중한 몸을 파도에 출렁이며 움직이기 시작 하였다.
선상 대학 강좌을 듣고
우리가 탄 배는 J 신문사가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 이라고 하여 전국의 초 ․중 교사 400 여명과 일반인 200 여명을 이끈 대단위 문화 탐방단이여서 선상에서 문화 강좌가 이루어졌다. 그 내용은 우리가 지금까지 학교 교육에서 배운 백제가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를 전해주고 왕인 박사가 천자문을 전해주고, 고구려의 담징이 법융사의 벽화를 그려주고 채료와 먹, 종이 등을 전해주어 일본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고, 조선시대 통신사의 내왕 정도로 알고 있는 내 상식에서 벗어나, 우리 선조들이 일본의 상고 시대의 문화에 대한 훌륭한 선생님이었고, 개척정신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여러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사라진 문화의 흔적들이 일본 속에 살아남아 있는 현실을 직접 확인 할 있는 좋은 기회였다.
우리 조상들은 가야 백제를 필두로 고구려 신라인들은 개척 정신을 가지고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의 모든 문화의 시작을 일깨우고 가르치며 직접 관리가 되어 다스리고 하여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 민족은 우리와는 계통이 다른 서남아시아 민족과 같은 남방계여서 왜구라고 부르게 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문화가 대륙의 영향으로
왕관에 나타난 곡옥이 있고 , 중앙아시아의 문화적 유물로는 쌍어 무늬 유리 그릇 등이 가야 고분에서 발견 되었고, 제주도의 돌하루방과 남부지방의 천하 남․여 장군의 장승 문화가 남쪽의 해양의 미작 문화와 함께 전래 된 것을
언어학적인면과 고고학적인 면을 깃들인 강좌는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하였고,
일본의 국보1호인 ‘미륵보살 반가유상’ 이 우리나라 적송으로 만들어진 것이 일본 수학여행 고등학생의 훼손으로 판명되었다니, 아마 그 재료가 우리나라 인 것을 알았다면 국보 1호는 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백제인 이 제작한 ,금동 미륵보살 반가유상과 똑 같은 것으로 보아 백제인의 솜씨로 만들어 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본의 선산고분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동제 신발을 일본 고유의 것으로 자랑하다가 백제의 무령왕능에서 똑 같은 것이 출토되어서 일본의 역사 왜곡에 부끄러움을 주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문화의 영향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명치유신과 서양의 문물을 빨리 받아 드림으로써 오늘날 경제 선진국이 되어 있어서 일본 속의 우리 문화를 탐방 한다면서 일본 초호화 여객선을 타고 가면서 우리 문화가 너희보다 더 우월하다는 강의를 들으면서 약간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몰락한 주인이 지금은 잘사는 머슴의 자가용을 타고 가는 것 같은 심정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일본 문화의 원류는 한국 문화
일본의 하카다(博.多)항에 도착하니 선상의 계단에 줄줄이 늘어서서 감사함을 표현하는 일본인의 친절과 관광버스 주변의 물을 쓸어내고 있는 청결함을 보았고, 관광버스운전사와 안내양의 계속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하고 있었다. 저들의 저 선량함의 어느 구석에 그토록 악독함이 숨어 있어 총 칼로 남의 나라를 빼앗고, 한국인에게 온갖 악독한 짓들을 하였단 말인가? 그러고도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엉뚱한 망언만을 일삼은 일본인의 이중성을 생각하니 이들의 친절이 징그럽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비에 젖은 산야는 우리와 비슷하고 순수하기만 하는데......
하는 생각을 하는 중 버스가 다자이후(大宰府)에 도착 하였다. 이곳은 나라(
奈良)는 1,300 여 년 전 헤이안(平安)시대의 수도였으며 우리나라 삼국시대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여 최초의 국가를 세웠던 곳이다. 일본 서부지역의 방위를 위해 백제 유민의 선진 기술을 빌어 산성과 수성을 만들어 신라의 침공에 대비한 곳이 이곳 다자이후(大宰府)라고 한다.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군에게 대항하여 싸우다가 패망한 이후 유민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여 구원을 요청하자 일본의 이곳 다자이후(大宰府)에서 170 여 척의 선단에 2만 7천 여 명의 구원 군을 백제로 파견 하였으나 나당 연합군과의 금강 하구에서 접전 하였으나 참패하고 만다.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그들은 연안에 방어요새를 백제인의 기술로 구축한 곳이 다자이후(大宰府)의 대야(大野)산성과 수성(水城)이라고 한다. 그 때의 백제인의 기술로 세워진 다자이후(大宰府)에는 주춧돌만 그 때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신라는 당나라를 끌어들여 통일을 이룩하려 하고 백제 유민은 일본의 힘을 빌러 동쪽끼리 대리전쟁을 할 뻔한 곳이고 백제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말해주는 곳이어서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규수(九州)의 후다야마(船上)고분에서 우리 조상 백제인의 숨결을 느끼고 법융사, 동대사, 광융사, 신사(神社) 등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의 선조들의 손길을 엿 볼 수 있었으며 후지노키, 비조 석무대(飛鳥 石舞臺), 고송총(古松塚)의 고분과 벽화 등 유물에서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국인에 의해 이루어 졌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일본이 불교 국가이고 신사(神社)나라여서 경도(京都), 나라(奈良)등에 있는 수천의 절에 있어 일본을 상징하고 있는 웅장한 목탑(木塔)의 원뿌리는 우리나라 백제의 절인 익산 미륵사의 삼탑삼금당(三搭三金堂)형의 목탑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더욱 발전하여 석탑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고, 일본은 목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곳 절의 목탑은 일본의 건축 기술이 우리나라의 것에 미치지 못하여 마치 일본 전통가옥처럼 직선 지붕의 엉성한 모습으로 우리나라 속리산의 팔상전의 한옥 곡선으로 멋들어진 모습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본은 여행하는 동안 큰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들이 우리 땅에 지은 일본식 목조건물로써 우리의 전통가옥이 곡선인데 그들의 목조가옥은 직선으로 된 가옥들이 전국 곳곳에 그대로 남아 있어 한국의 마을이 변형된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경제 대국 일본인의 주택이 1세기기 전 한국에서 짓고 살았던 전통양식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모습에서 일본인의 전통을 중시하고 가업을 이은 문화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경제 개발과 새마을 운동이라는 이름아래 한국미의 상징인 한옥의 좋은 점인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온돌방의 따뜻함과 건강에도 좋으며, 통풍에도 좋아 500 여 년 동안이나 가구를 보관 할 수 있어서 외국인도 경탄하는 전통 한옥이나 초가집이 민속촌이나 민속 마을에서나 볼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뱃부(別府)의 지옥혈과 온천
뱃부(別府)는 온천으로 유명하여 우리나라 관광객이 많이 찾은 곳이다. 지옥혈의 펄펄 끊은 듯한 온천물에 달걀이 익은 모습을 보여주고 호텔 주변에는 노천탕에서 나오는 김이 도시 주변을 감싸고 있어서 역시 화산과 지진 온천의 나라의 모습을 실감나게 하였다. 그리고 아소산에 화산의 모습을 보려고 올라갔지만 구름이 많이 쌓여서 볼 수 없고, 멀리서 화산 연기만 보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 김영삼 대통령과 일본 천황도 묶어다는 스키노이 호텔에 방에서 뜻하지 않은 일과 마주치게 되었다. 바로 이 호텔에 투숙한 사람이면 국적에 불문하고 객실에 비치된 ‘유카다, 을 입고 조리(일본식 스리퍼)을 신어야 한다는 것이자. 그들이 평상복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는 거부감이 가는 옷이다. 이들이 유카다를 입고 아랫배 밑가지 처지게 맨 허리띠 안으로 오른손을 푹 꽂아놓은 채 도도하게 게다를 끌고 거리를 나도는 몰골이 악령처럼 우리들의 기억에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상식 없이 잠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몰상식한 왜놈이라고 비방하였고 일본인들은 우리를목욕도 안한 더러운 놈비하 하였지만, 이제 생각해 보면 문화의 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본은 아열대성 해양성 기후로 습도가 높고 불쾌지수가 높은 기후이니 하루에 몇 번을 목욕을 해야 할 생활에서 ‘유카다’ 같은 옷이 생활 복이 되었고, 우리나라는 대륙성을 띤 계절풍 기후이기 때문에 땀이 나도 바람 한번 불면 말라 버리기 때문에 목욕을 날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 습관일 뿐이 것이다. 그래서 일본과 우리나라는 가깝고도 먼 이웃 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또한 일본이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이렇게 억지로 유카다를 입히고 있는 것이 아직도 지난날의 패권의식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 아니가? 하는 마음에서 더욱 분노를 느끼고, 그들의 개인이나 기업의 이익보다 국가의 이미지나 위세를 더 우선하는 애국심에 놀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본을 여행하는 구미의 학자가 사회주의 국가는 멸망 하였으나 사회주의가 살아있는 나라가 일본이라고 하였는데 일본을 여행하면서 이런 모습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관광지의 화장실은 거의 전부가 관광 상품 가게나 편의점의 가게를 지나도록 되어있는 구조 등 그들의 장사 속과 국가주의적 경향은 어디서나 엿 볼 수 있었다. 그 많은 절의 신사(神社), 는 물론 타카사티야마(高崎山) 자연 공원에도 원숭이는 집단으로 훈련시켜 구경 시키고 신사를 지어 그들이 받드는 천황과 신을 받들고 있는 국가주의적 경향에 우리는 21세기에 목격하면서 놀라고, 또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모두 다짐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일본의 근대화된 오늘의 모습에서
1984년 전두환 대통령 방일시 일황 유인(裕仁 )이 ‘고대 일본 국가 형성에 귀국이 크게 도와 준 것에 감사한다.’ 는 말처럼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있는 표현이라고 할 때 오늘의 경제 대국 일본의 모습은 오끼나와의 거미줄처럼 얽힌 도로와 고가도로의 소통과 도심의 지하철과 전철역이 사통 팔통의 출입구로 연결되어 도심의 교통을 분담시키고, 세토내해의 아카시대교 등에서 엿볼 수 있었고 우리가 타고 간 2만 톤급 ‘신 사쿠라호’ 에 설치된 각 종 현대 장비와 7층의 선실에서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일본의 어디를 가도 휴지나 쓰레기가 없는 깨끗한 거리와 비가 200mm 이상이나 왔지만 하천과 바다에 오물이 하나도 떠 있지 않은 모습에서 그리고 경적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차선을 지키는 교통, 그리고 택시 운전수와 백화점과 선상과 관광버스 등의 서비스업체 종사자들이 친절과 서비스는 참으로 몸에 밴 모습이여서 이것이 경제 대국을 만든 원동력이다. 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선진적인 일본인의 의식 구조는 공민관(우리나라 군 구민회관)을 통한 150여 년 동안의 국민 정신교육에서 이루어 졌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 생각에는 우리나라에서 60년대의 새마을 정신 교육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 중단 되었지만 이런 국민 정신교육이 꾸준히 계속 되었으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의식이 더욱 선진화되어 세계화된 의식구조와 생활 및 질서의식을 가졌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의 자연과 문화의 아름다움을 되새기며
일본 속의 한국사 탐방을 통하여 일본의 자연은 제주도 한라산 같은 산으로 우리의 금강산 설악산 등이 더 아름다운 자연이다. 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이 자연을 오밀조밀하게 잘 가꾸어 놓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산과 지진으로 어려움을 겪으며, 습도가 높아 불쾌지수가 높은 자연에 사는 일본보다 우리나라가 더 좋은 금수강산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자연과 문화에 대한 재인식과 사랑으로 우리 자연을 아끼고 가꾸며 문화를 빛내고 한국인의 긍지를 높이기 위한 선진 의식을 실천하고 가르쳐 조상들에게 떳떳한 국민이 되고, 선진된 나라를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브라이만 이여행은 적어도 세 가지 유익 한 것을 가져다 줄 것이다. 첫째, 타향에 대한 지식, 둘째, 고향에 대한 애착, 셋째, 단신 자신에 대한 발견, 이라는 말처럼 일본의 이해와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재인식, 그리고 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유익하고 뜻 깊은 일주일간 이었다.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을 찾아서
- 다산 정약용의 집념의 발길을 더듬으며 -
조 규 록
여행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기쁘게 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진부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체험을 위한 기대 때문인지 모른다. 이번 여행은 귀염둥이 막내딸이 결혼하여 사위와 아내 그리고 나 네 사람의 가족여행인 편이다. 우리가 가고자 한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을 유흥준 씨가 그의 유명한 책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 이라고 부르는 데서 시작된다. 그 이유는 이 곳이 역사의 주인공 노릇을 한곳이 아니어서 대단한 유물이나 유적이 있는 곳이 아닌 조용한 시골, 은둔자의 낙향지이거나 유배자의 귀양지여서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삶이 배어있는 아픔과 그 속에서 나온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의 우리의 정서가 서려있는 역사의 체취가 살아 있으며,학자인 그가 우리나라 학자 중 최고로 보는 다산 정약용의 올 곧은 삶의 흔적이 있어 ‘남도 일 번지’ 라고 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우리의 답사도 다산 정약용의 정신을 찾는데 중점을 두고 발길을 살피자고 다짐하면서 출발하였다.
광주를 출발한 차는 송정리를 거쳐 노안을 지나면 율정 이란 곳이 있는데 이 곳이 다산 정약용이 형 약전과 유배 올 때 강진과 흑산도로 기약 없는 이별을 한곳으로 다산의 쓰린 마음을 새겨야 하는 곳이다. 조금 지나면 나주와 영산포를 잇는 영산강 다리를 지나는데 옛날 포구임을 나타낸 홍어마을이 강가에 늘어선 모습을 볼 수 있다. 차는 어느새 달리면 백제의 영산강 유역진출을 말해주고 있는 금동관(국보295호)과 옹관이 출토된 반남 고분군 표시가 보인다. 남도를 상징하는 향토가 언덕을 이루는 신북을 지나면 육중한 바위산이 우리를 맞는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월출산은 마냥 신기하다. 완만한 산등성이에 끊기듯 이어지는 너른 벌판에 어떻게 골산(骨山)이 첩첩이 여러 모형의 조형적 형상을 이루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나라 국립공원 중 바위산으로는 제일이어서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칭한다. 막내딸은 고등학교 때 나와 같이 등반한 것을 자랑하며 추억하기도 한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땅으로 유배 가던 길에 여길 지나며 쓴 시를 살펴보면
누리령 산봉우리 바위가 우뚝 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하고 읊은 것은 서울의 도봉산 줄기와 같다는 인상을 받아 아픈 마음을 노래한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도착한 곳은 영암에서 월출산을 끼고 동편을 돌아 경포대 입구에 있는 월남사지다.이곳에 이르면 월출산 천왕봉을 배경으로 준수하게 생긴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있다. 백제 정림사 터 5층 석탑을 이어받는 것인데 월남사는 월출산과 어울린 명당 터로 고려시대 전성기를 말해주는 월남사 창건 인물인 진각국사 혜심을 기리는 석비가 있는데 오래되어 눈으로 읽을 수없으나 고려시대 명문장가 이규보가 비문을 짓고, 118명의 이름이 있는데 고려 무신 정권 실력자 최항의 이름이 있고 이 절에서 말을 타고 문을 여닫고 월출산의 백 여 개의 절의 총본산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려 때는 경주 불국사 다음으로 큰 절이었다고 한다. 조금 올라가면 태평양그룹의 장원산업에서 현대적으로 만든 10만 여 평의 설록 다원이 월출산과 어울려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시절에 교류했던 혜장 스님에서 차를 접하고 배워 초의스님에게 차를 전하여 ‘차신전(茶神傳)을 쓴 것을 떠 올리며 다산의 차에 대한 관심과 초당 주변에 차밭이 있는 다산(茶山)의 이름을 따라 호로 정한 점을 생각하게 되고, 현대적 풍경을 보며 쉬어가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무위사에 이른다. 월출산 동남쪽으로 기운차게 뻗어 내린 산줄기의 아름다운 계곡에 무위사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조선 초기에 지어진 국보 제13호인 극락보전 앞에 서면 맞배지붕 형식의 목조 건물 한 채가 어찌 이렇게 군더더기 없이 소박하고 단정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지 감탄스럽다. 크고 웅장하게 솟아 허세를 부리는 것도 없이 눈을 어지럽히는 치장도 없이 절 마당에 단아하게 서있는 모습이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준다. 그래서 무위(無爲)인가? ‘뛰고 앞질러 가야 산다.’ 는 요즘 이처럼 담담한 것이 전해주는 감동이 더 깊은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극락보전 안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모셔져 있고 그 바로 뒤에 아미타상삼존도 부드러운 붉은색과 녹색계통의 주조로 한 채색과 하려하고 섬세한 묘사 등이 고려 불화를 많이 닮아서 유명한 불화가 있는데 이는 모조품이고 진짜는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벽화 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보물 314호 지정 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선의 아름다움과 색깔이 자연스러움에 옛 조상의 슬기를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로 도착한 곳은 강진읍 터미널 북쪽 뒷산자락에 있는 영랑생가로 군청 바로 뒤 동산 중턱 양지 바른쪽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터에 널찍이 자리 잡고 있다. 입구에는 ‘영랑생가, 라는 표찰이 있고 그 옆에는 시비가 서있다. 그 안으로 안채가 있고 뒤에는 빽빽이 들어선 대밭과 해묵은 고목이 된 동백나무 몇 그루가 남도의 정취를 보여주고 있다. 옆에는 사랑채가 있는데 이곳이 영랑의 시의 산실이며 앞에는 큰 은행나무가 옛날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 집은 지방문화제 89호로 지정해 초가로 복원해 놓았는데 이 영랑 생가 초가 사랑채 앞마루에 앉아 중학교 국어시간에 외운 영랑의 시 한편을 읊조려 보았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른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얕게 흐르는
실 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우에’ 와 같은 영랑의 시를 생각하면 1930년대 식민지 시대의 아픔을 느끼게 된다. 1910년 한일 합방이 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지만 개화․신문화운동이 일어났지만 순수예술이란 이름으로
민족적 현실적 가치라는 것이 고작 향토색이란 이름으로 민족적 자존심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영랑을 비롯한 분들의 측은한 인간적 상실과 좌절에 비애가 느껴지고 동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오늘의 시인인 이성부 씨도 5.18의 참담한 현실로 광주를 노래 할 수 없어 시를 접고 지리산을 10년 이상 등산하게 되었다는 수필집을 읽어 알았는데, 요사이 ‘친일 인명사전’으로 많이 입에 오르는 일제시대 작가들에게 돌만 던지지 말고 그들의 굴절된 삶을 통해 우리 모두가 ‘역사 앞에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 는 다짐을 해야 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북도에 소월이 남도에 영랑’ 이라는 말도 있듯이 영랑은 우리나라 순수시 서정시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꼽힌다. 그가 매끄러운 운율과 시어로써 개척한 시세계가 독보적인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찾아간 곳은 다산 정약용이 1801년 11월 강진에 처음 유배 와서 묵은 곳인 사의제이다. 이곳을 가려면 군청과 경찰서를 지나서 큰 고목을 지나서 동쪽으로 가면 왼편에 돌담장과 ‘동문밖 주막, 사의제’ 표시가 고목모양의 가로등과 함께 서 있다. 초가집 한 칸의 동문박 주막과 뒤에 방 두 칸의 초가가 있고 옆에 아주 조그만 정자가 있으며 그 앞에 작은 연못이 있고 그 옆으로 우물터가 있다. 이 우물터를 찾아 강진군청에서 사의제를 복원하였다고 한다. 다산이 복잡한 주막집 옆에서 어떻게 보냈는지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장소이다.
사의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40세인 1801년부터 4년 정도 머문 곳이다. 다산은 유배생활이 장장 18년이나 이르리라고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서울에서 줄 곳 유배 길에 동행한 형 약전을 나주의 율동에서 눈물로 헤어지고 강진 현감에게 도착신고를 마치고 여장을 푼 곳이 강진읍성의 동문밖에 있던 주막집이었다. 잘 곳을 정해주지 않았던 형벌이 조선시대 유배 제도였다. ‘정부의 강력한 탄압을 받던 정약용을 선뜻 받아 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주요시국사범인데 가까이 했다가는 관청에 끌려가 어떤 곤욕을 치를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그때 강진현청에 말단 아전을 둔 주모가 오갈 데 없는 정약용에 방 한 칸을 내주었다고 한다.
한양에서 정조(1752년-1800)의 총애를 받아 ‘그대 밖에 없다 문장에도 그대 능가 할 자 없고 100년 만에 재상 재목 그대 밖에 없다.’ 라는 평을 받으며 지나던 그가 정조가 승하하자 정적들의 미움과 모함으로 황사영백사 사건(신유사옥)으로 형(약종)과 형수 매형(이승훈) 조카 조카사위가 몰살을 당하고 형(약전)과 함께 기약 없는 귀양살이로 강진에 떠밀려오자 조선권신사회의 잔혹함과 견딜 수 없는 기구한 절망감으로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술과 실망에 빠져 있을 때 이 모습을 본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많이 배우신 분이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에 자신을 추스르고, 생각은 맑게 용모는 단정하게 말은 적게 행동은 무겁게 한다는 4의제(四宜齊)를 내걸고 황상이란 제자를 시작으로 다산의 실학을 위한 이른바 조선의 최고의 서당과 다산학 연구실이 차려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강진읍 6제자를 가르치면서 경제유표와 애절앙 등의 책을 집필하면서 ‘내가 강진에 귀양 오기를 참 잘했다 강진이 내 고향 아니란 말 나는 믿지 않으리?’ 라고 스스로 토로할 만큼 따뜻했던 강진 지역의 인심에 마음과 몸을 열어 지역 헌신에 참여하면서 현실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병리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체험하는 시기였다. 그러다가 1805년 가을 보은산 고성사(고성암) 보은 산방(寶恩山房)에 머물면서 6제자 교육을 하는 한편 주옥같은 52편의 시를 남기고 주역사전, 상례사전 등에 몰두하며 백년사의 괴짜 중 혜장 스님과 만나 유학과 학문을 논하고 차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주막의 시끄럽고 초라한 방에 머무는 모습을 가슴 아파하며 혜장 스님이 만든 거처가 고성사(강진여중서 승용차로 5분 거리)절의 어느 방이 보은산방이며 이곳에 9개월 정도 머물며,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염원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큰 아들 학연의 교육과 제자 스님 등과 학문을 논하다가 아들 학연이 서울로 돌라가고 목리에 살던 제자 이학래의 간청으로 그 집에서 2년 여 머물게 된다. 강진군에서는 보은산방과 이학래 집을 복원할 계획이다. 고 한다. 우리는 버스터미널 뒷골목의 한정식으로 유명한 명동식당(061-434-2147)에서 식사를 하였다 신선한 생선과 정성스런 반찬이 30여 가지 나온 푸짐한 상이다. 이 식당 앞의 해태식당(061-434-2468)과 함께
강진에서 한정식이 제일 유명한 식당이다. 고 한다.
이제 가야 할 곳은 다산 초당이다. 다산 초당은 강진 읍에서 서남쪽으로 보면 삼각형의 산이 보인다. 이산이 다산 초당과 백년사가 있는 만덕산이다. 강진 읍에서 해남 완도 쪽으로 가다가 왼쪽의 바닷가를 보면서 가면 군부대 표시가 보이고 조금 가면 임천배수장이 보이는데 이곳은 철새도래지여서 사람들이 찾는 곳이며 이 바다가 강진만의 구강포로 탐진강의 맑은 물이 유입하여 바지락 양식으로 유명하며 동편에는 옹기로 유명한 칠량과 청자로 유명한 대구를 지나면 청자를 실어 날랐던 마량 항이 있다. 조금 가면 백년사 입구 표시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다산 초당과 다산수련원, 다산 유물전시관 표시판을 볼 수 있다. 다산 초당이 있는 귤동(橘洞)마을 입구에 이르면 앞에 갈대밭이 있고 한국적인 마을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현대적 한옥이 들어선 사이로 ‘다산 초당’의 안내 표시를 따라가면 빽빽이 들어선 대밭과 아름드리 소나무가 늘어선 좀 어둡고 나무뿌리가 드러난 자연 상태의 옛길과 막바지의 돌계단을 오르기 전에 길가 오른편에 무덤이 하나 보인다. 이는 다산이 이곳으로 옮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윤단(1744-1821 그의 소유 산정에 다산을 모시고 후손들 지도를 부탁하여 유배가 풀릴 때 까지 극진히 모신 분-다산 모 윤씨는 고산 윤선도가 5대조로- 다산의 외가 친척)의 손자로 다산의 제자인 윤종진의 무덤이다. 동그란 눈과 손가락이 앙증스런 동자석 두기가 무덤 앞을 지킨다. 그 곳을 지나 가파른 돌계단 비탈길을 오르면 다산 초당이다. 다산은 이 곳에서 10여 년을 머문다. 이곳에 전부터 있던 윤단의 초당 좌우에 동암과 서암을 짓고 주로 동암에 천 여 권의 책을 쌓아놓고 책을 읽고 쓰며 제자를 가르쳤다. 서암은 윤단의 아들․손자․등 제자들의 거처로 초당은 학당으로 썼다고 한다. 지금 다산 초당은 터에 비해 너무 크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 기와집 초당이 있고, 그 양옆으로 역시 기와를 이은 동암과 서암 그리고 좀 떨어진 산마루에 천일각이 있다. 초당이라고 했는데 어째서 번듯한 기와집이 있을까? 하고 의아한 생각을 하게 되지만 지금 집은 폐허가 되었던 옛터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다산은 귀양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간 후 강진의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초당과 동암 서재의 지붕은 새로 얹었느냐’ 라고 묻고 있다. 그런데 1957년 다산 유적보존회에서 ‘초당’을 복원했고 1974년 동암과 서암을 복원하면서 관리상 기와로 지었으며, 다산이 흑산도를 바라보며 약전 형을 생각했던 장소에 천일각을 세웠다. 이곳 옆이 백년사 가는 길이나 요사이 백년사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 초당 아래 옛길을 크게 내어 많은 사람이 탐방하게 한 것 같았습니다.
다산초당에 걸린 다산 초당의 글씨는 다산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것이고 동암에 걸린 보정산방(寶丁山房 정약용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것을 새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명필다운 능숙한 솜씨를 나타내고 있으며, 다산 동암의 다산의 글씨는 단아하고 강직한 학자다운 모습을 나타내고 있어 최고의 학자와 최고의 명필의 글씨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한다. 24세가 연하였던 김정희는 다산을 몹시 존경하고 학문을 나누며 다산의 아들이나 제자들과도 교류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산의 손이 닿았던 흔적으로 초당 옆의 연못과 앞마당의 넓적한 바위에 새겨진 정석(丁石)을 꼽을 수 있다. 집 뒤의 샘은 그가 마시던 샘이며 앞마당에는 솔방
울을 태워 차를 달여 차를 마신 다조(茶竈)가 있다. 손수 새긴 정석 글자에서는 단아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다. 다산이 새긴 이 정석이란 글자와 서찰 등으로 이 초당을 복원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산은 유배지 이 산속에 대체 무엇을 남기려고 이런 글을 새겼을까? 자신의 상징의 두 글자를 새우며 자신의 존재는 아무리 정적들이 짓눌러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는 다짐을 하였을까? 하루 빨리 이 곳을 벗어나고 싶어 미리 흔적을 남겨놓은 것일까? 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분은 뒤의 역사까지 내다보고 우리가 그분의 흔적과 마음을 살피라고 이렇게 남겨두었는가 하는 마음이 든다. 강진군은 다산 초당을 초가집 원형으로 복원 할 계획이다. 고 한다.
다산이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510여 권의 책을 쓰고 실학을 집대성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인 업적을 나타낸 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하고 살펴보니, 다산이 남긴 말 가운데 ‘차를 즐겨 마시는 국민은 흥한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라.’ ‘기록하기를 좋아하라’를 가르치고 있다. 근래 다산에 관심을 가진 한양대 교수 정민 씨의 수필집 ‘스승의 옥편 ’는 다산은 과골삼천(蜾骨三穿)하며 글을 읽고 썼다고 나오는데 그 내용은
‘황상(黃裳- 사의제에서 다산이 15세때 처음 가르친 제자)의 ,임술기, 란 책을 75세에 낼 때 그의 글속에 나오는 말이다.70이 넘어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메모해가며 책을 읽는 황상을 보고 주위 사람들이 그 나이에 어디다 쓰려고 그리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고 비웃었다. 그가 대답했다.’
“우리 선생님(다산)은 귀양지에서 20여년을 계시면서 날마다 저술에만 힘 써 과골, 즉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다. 선생님께서 부지런히 공부하 라 친히 가르쳐주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런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황상이 “나쁜 머리로 어떻게 공부 합니까?” 하고 처음공부 시작 할 때 물으니 다산이 “부지런히, 부지런히, 부지런히 마음을 꽉 잡아서 하라.”고 삼근계(三勤戒)로 써주신 가르침을 평생 지켜 60년 만에 쓴 문집의 서문에 쓴 글이다.
책상다리를 앉아 20년 세월이 가는 동안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것이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는 말은 들었고, 추사가 먹을 갈아 벼루 여러 개를 밑창을 냈다는 말도 들었지만,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다산은 40대 초반 한창 뜻을 펼칠 나이에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져 강진으로 유배 왔다. 그 절망의 20년 세월 동안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나중에는 뼈가 시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벽에 시렁을 메어놓고 서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떠올리며 오늘날 공부하고 학문 한다는 삶은 초라하여 민망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중국의 사마천이 궁형(宮刑)이란 극단적인 형벌 속에서 사기란 유명한 책을 쓴 것처럼 다산의 고난을 이긴 집념과 학문에 대한 열정은 많은 저서와 실학을 집대성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산의 그 초인적인 노력과 다산의 강진읍 6제자와 다산 초당의 18제자가 20여년을 같이한 학문을 위한 ‘최초의 다산학연구소’ 의 산물이다. 같이 숙식을 하여 공부하고 연구하여 뜻이 통했으며 지행(知行)의 선생님을 보고 그 생각에 맞게 돕고 편집하고 찾는 합심체가 되어 실학을 집대성하고 그 많은 저서를 낼 수 있었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위당 정인보 선생이 “다산선생 한사람에 대한 연구는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대사상의 연구이다. 라고 설파했고 월맹의 호지명이 부정과 비리 척결을 위해 목민심서 필독서라고 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다산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황상에게 써준 삼근계를 떠올리며 부지런히 그리고 마음을 꽉 잡는 것이다.
오늘날 김연아 ․ 박지성 ․ 박세리 등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것도 좋은 스승을 만나 배우고 자기가 3배 이상 부지런히 노력한 결과인데 요사이 자녀 교육은 학교나 학원에게 배우기만 하고 스스로 하는 노력이나 깨우침이 없으니 진정한 학문의 길을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였다.
다산 초당에서 조금 올라가면 강진만 바다가 훤하게 보이는 정자가 있는데 여기가 다산이 형 약전을 그렸다는 곳인데 천일각이란 정자를 세워 놓았으며 그 옆에 백년사 가는 길이란 표시가 있는데 이 길이 원래의 길이고 조금 내려오면 많은 탐방객을 위한 더 넓은 길이 있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800m 쯤 녹차가 우거진 길을 있다. 이 길은 다산과 혜장․초의스님이 학문은 논하러 오가던 길로 끝에 아람드리 동백나무 숲이 나타나는데 백년사 동백숲으로 천연기념물(15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7천 여 그루의 동백나무와 후박나무와 비자나무가 섞여있고 그 밑에는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능선이 완만하고 강진만의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옛길로 차밭과 동백이 어울리는 정감이 있는 길이어서, 연인들이 빨간 동백꽃으로 만들어놓은 하트모형이 있어, 옛것과 현대의 조화를 이룬 것 같았다. 막내와 사위에게 너희들도 해보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백년사는 1200여 년 전에 창건되고 고려시대 국사 8명을 배출한 유명한 절로 백련결사운동으로 유명하다. 고려 왕조가 불교였던 만큼 부패한 정계를 개혁하자는 운동이 이곳에서 시작되어 전국을 전파되어 크게 기록되고 있다. 백년사의 대웅전과 만경루를 살펴보고 다원에서 차 한잔을 들면서 강진만을 바라보니 그 동안 여독이 풀리는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다산 유물 전시관에서는 다산의 저서와 기중기 모형 등 흔적을, 다산 수련원 앞에는 다산의 시와 저명인사들 명언을 만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강진만의 동편을 따라서 가면 칠량 옹기 고장이 있고
대구 청자 가마터에는 청자 박물관과 고려시대 유명한 청자 가마터에 대한 여사와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면 마량항에 이른다. 이곳은 옛날 청자를 실어 나른 항구이고, 지금은 예쁘게 꾸며놓았으며 바닷가의 가로등을 청자로 꾸미고 강진출신 시비를 세워 시인과 청자골 다운 모습이다. 멀리 보이는 고금대교와 어울려 아름다운 모습을 이룬다. 이 주변은 바다 낚시터로 유명한 곳이어서 낚시꾼이 줄줄이 늘어선 모습을 보고 바다낚시를 좋아한 막내사위는 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시간이 없어 북쪽에 있는 호남지방 육군의 총지휘부가가 있던 병영을 차로 들려가면서 큰 비자나무와 홍교, 성터 그리고 담장과 하멜 기념관을 볼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을 통하여 브라이만 이 말한 것처럼 여행은 적어도 세 가지 유익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첫째 타향에 대한 지식, 둘째 고향에 대한 애착, 셋째, 자기 자신에 대한 발견이라는 말처럼 강진의 문화유적과 자연에 대한 제인식과 다산 정약용에 대한 재발견, 그리고 나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어머니의 마음
조 규 록
결혼해서 삽 십 여 년을 같이했던 아내가 교회에서 성지순례 해외여행을 가게 되어서 혼자서 십여 일을 보내고 있다. 항상 섬세하고 빈틈없는 아내가 이모저모로 여러 가지 반찬을 준비해 두고 갔고, 같이 있는 막내딸이 가끔 반찬 솜씨를 발휘하기도 하고, 사년여의 직장관계로 멀리 근무 하면서 익힌 자취 할 때의 음식솜씨로 된장국이나 생선찌개, 밥은 할 수 있는 관계로 식생활은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다.
막내딸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어서 취업준비 등으로 항상 바빠 아침 일찍 나가면 밤늦게 돌아오고 하여 별로 말을 하지 않아서, 외로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막내딸의 생각에는 어머니가 안 계신 아버지의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준다고 친구들과 같이 드린 예배를 아빠 옆에서 드리고 사라지고, 아침․저녁 시간이나 출 퇴근 시간에 몇 마디 의례적인 말을 주고받고 하지만, 이주일 정도나 별로 말을 하지 않으므로 노후의 외로움을 실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직장이 학교여서 방학 중이라서 집에서 지내며 등산도 동료들과 같이 가고, 산보나 운동도 하고, T. V도 보고하지만 대화 상대가 없기 때문에 느끼는 외로움을 아내가 여행 중 없는 쓸쓸함을 통하여 노후의 외로움을 미리 실습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팔년 전 아버님을 먼저 하늘나라에 보내시고 혼자서 지내시는 어머니가 외로움에 가끔은 아버지 산소에 찾아가 넋두리를 하고 오시고, 명절 때 형제자매들이 모였다가 썰물처럼 가버리면 외로움에
명절이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말씀을 하시자 옆에 있던 여동생이
어머니는 너무도 편하고 호강스러우셔서 그러셔, 혼자서 먹고 싶으 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얼마나 좋으셔요?.
하고 핀잔을 준 것을 다시 떠올리며, 혼자서 지내신 어머니가 얼마나 외로움에 불면의 밤을 지세시고, 가끔 찾아가 뵈면 더 있다 가라고 붙잡으시며, 기력이 부치시는데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시는 것은 이런 외로움에 말을 하고 싶은 신 것도 모르고, 바쁘다고 조금 있다가 일어나 버린 불효한 자식이 나인 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월의 부모란 시의 내가 부모 되어 알아보리라, 하는데 이를 고쳐 내가 늙어 혼자되어 알아보리라.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 같았다. 어머니가 가끔 외로움 때문에
너의 아버지가 복인이야, 먼저 간 것이 복이야
하고 말씀하신 넋두리 속에는 얼마나 외로운 밤을 불면으로 보내셨는지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녀들이나 나는 용돈이나 생활비를 드린 것으로 효도를 다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불효자인 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나 나는 자기 의 처자식과 외롭지 않게 지내니 어찌 혼자 계신 부모가 불면의 밤을 혼자서 지내는 외로움을 안단 말입니까? 저도 이제 아내가 십여 일간 해외여행을 떠나 어머니의 외로움을 알게 되었으니,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고 이야기도 나누어야겠다고 다짐하여 보지만, 어머니 댁에 가면 또 바쁘다고 빨리 와 버리는 무정한 아들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 진다. 그러더라도 어머니의 외로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위로 해 드려야지 하고 다짐하고 다짐해 봅니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
조규록
몇 년 전 완도의 학교의 근무할 때의 일이다. 관사의 이웃 방에 살던 젊은 H선생님의 근처의 학교 분교에 젊은 친구 선생님한테 놀러 갔다가 그 친구 젊은 선생님 방에서 자고 오다가 그 곳 분교장의 나이 지극한 선생님을 만나서 그때야 인사를 하고 왔는데 그 이후 그 분교장 선생님이 본교에 와서 다른 선생님에게
“ H선생님은 찬물 위아래도 모르는 모양이다.”
고 시대의 변화를 한탄하면서 말을 했는데 그 말이 H선생님이 듣게 되었는데 어느 날 H선생님이
“ 찬물 위아래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어요.”
하고 나에게 묻기에
“ 냉수를 떠 왔으면 어른이 계시면 먼저 여쭈어 보고 먹는다. 는 뜻 으로 H선생님이 분교장에 갔으면 먼저 어른이신 분교장 선생님께 인 사를 하고 놀고, 친구 집에 가면 먼저 친구 부모님께 인사를 하고 노 는 것이 찬물 위아래를 지킨 것이야.”
하고 내가 설명해 주니까? 그때서야 그 의미를 알고 자기의 잘 못을 깨닫는 것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부모님들이 핵가족화 된 가족 문화와 적은 수의 자녀로 인하여 과보호(過保護), 익애(溺愛)로 자녀를 애지중지(愛之重之)기르고 공부나 학원 등에 억매이다 보니 기본예절이나 위 어른을 섬기는 것을 가르치지 않고 제멋대로 키우다 보니,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 이후 교무실에서 아침에 출근하여 일을 보고 있는데 젊은 선생님들이 출근하는데 나이 드신 교감 선생님이 십 일간 연수를 갔다가 처음으로 출근하셨는데, 젊은 교사들이 교무실 출입문에 들어서서 고개만 까닥하면서
“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나서려 하자 교감 선생님이 자리에 일어나셔서
“ H선생님. O선생님 수업 하느라고 고생하였지요.”
하면서 악수를 먼저 청하고 인사를 깍듯이 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신세대 교사들의 모습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케리 여사가 말한 현대인의 맹점으로 지적한
‘알면서도 가르치지 않고, 모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 할 수 있으면서 도 하지 않는다.’
는 지적에 신세대의 행동에 무관심한 나도 똑 같은 사람이었다. 는 자각과 신세대 교사들이 그냥 부모나 학교에서 예절을 잘 배우지 않고 제 멋대로 지내도 행동해도 내 버려두면 똑 같은 현대인의 무기력에 동조한 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며칠 후 젊은 교사들을 휴게실에 모이게 하여서
“ 젊은 교사들이 신세대여서 컴퓨터나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고 하는 줄 잘 알고 있는데, 선배인 교감 선생님이 강습을 갔다 오셨으면 잘 다녀오셨느냐? 고 가까이 와서 정중하게 인사를 해야지 안녕하세요? 하고 출입구에서 마네킹 같은 인사를 해서 되겠느냐? 여러분의 부모 님이 어디 갔다 와도 그렇게 무관심하면 되겠느냐? 하면서, 학교의 일을 할 때도 선배나 교감 선생님께 문의하고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메너 있고 찬물 위아래를 지켜서 생활하게 되어서 귀염 받고, 칭찬 받는 직장 생활이 될 것이며, 오늘 날 신세대들이 다 유능한데 인사 와 찬물 위아래만 알면 A학점 이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라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이후 교장 교감 선생님이 조부장님
“ 요사이 신세대 교사들이 어째 인사가 달라졌어요.
하고 말해서 저도 흐뭇했습니다.
친구 부인이 약국을 하는데 신세대들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요사이 젊은이 들이 왜 저렇게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하는지 모 르겠다.”
고 한탄을 하기에
“그 것을 탓하지 말고 젊은이들이 15도로 고개를 숙이면 어른이 30 도로 고개를 숙이고 30도로 고개를 숙이면 45도로 숙이는 모범을 보이면 미안해서 고개 숙여지게 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보모들이 어 렸을 때 자기 자식만 생각하고 인사도 안 가르치고 그냥 두어서요. 잘 못된 버릇이니 비방 하지 말고 모범을 보여 가르쳐야지요.”
하고 말하니
“ 그 방법이 참 좋은 방법이군요.”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옛 날부터 우리나라는 ‘예절의 나라’ 즉 동방예의지국 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말을 지금부터 약 2300여 년 전 공자의 7대손 공빈(孔斌)이라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나온 말입니다.
그 내용 중에 ‘형제가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더니 부모가 돌아가시니까 3년을 슬퍼했는데 이들은 한민족의 아들(東夷之子)이었다. 그 나라는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 군대는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을 것을 미루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서 섞이지 않으니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바른 군자의 나라(東方禮儀君子之國)가 아니겠는가?’ 라고 되어있다.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예의 바른 생활을 해서 존경 받았음을 되새기고, 미국인이나 일본인들의 친절과 미소, 반가운 인사와 감사와 미안함을 표현하며 상대를 배려하는 선진 예절을 지켜 선진국이 된 것을 거울삼아, 우리 모두가 새로운 시대에 맞은 예절을 지켜 모범을 보이며 가르쳐야만, 21세기의 세계인들과 어깨를 같이하는 선진 한국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청학동 아가씨
조 규 록
6년 전 교직에 근무할 때 어린이들의 교통안전 지도와 인사지도를 위하여 교문에서 지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이백 여명의 학생들이 등교하면서 인사를 하는데 마지못해서 고개만 숙이는 마네킹 인사, 걸어오면서 한들한들 고개만 숙이는 건달인사를 하거나 마지못해서 엉거주춤하고 인사를 하고 있어서 교사로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평소에 학급에서 어린이들에게
“ 공부는 점점 잘하여서 마지막에 잘해야 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사는 백번 잘하다 한번만 잘 못하면 인사도 잘 못한다고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라고 강조하면서 또 평소에 인사지도와 예절지도를 철저하게 지도하였지만, 오늘 보니 제가 가르쳤던 어린이들도 바르게 인사를 하는 어린이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삼년 전 가르쳤던 Y 라는 여학생만이 저(선생님)를 멀리서부터 바라보고 미소 띤 얼굴로 걸어와 2-3미터 앞에서 저(선생님)의 눈을 바라보면서 공수한 손으로 공손히 인사를 하였습니다.
마음속으로 흐뭇하기도 하고 이 어린이은 왜 이렇게 공손하게 인사를 할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가정에서 평소에 부모가 계속적으로 인사에 관심을 갖고 지도하여 습관화되고 체질화되었기 때문이다.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 Y란 어린이의 어머니는 다도를 하고 계신 분으로 평소에 인사와 예절 지도를 가정에서 꾸준히 하고 계셨는데 삼 년 전 스승의 날 일일교사를 의뢰 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스승의 날 일일교사 할 때 다기와 차까지 준비해서 어린이들에게 다도와 인사를 지도할 정도로 예절이 바르시고 또 자녀들에게 가르치셔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지역의 만두집에서 사장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Y어린이의 이야기를 하니 그 만두집 사장님이
“ Y는 청학동 아가씨여요. 저희 집에서 저희 딸 생일잔치를 하는데 십 여 명의 어린이가 음식을 제가 내놓은데 다 먹기에만 바쁜데 Y라는 학생만이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라고 인사를 하 는데 우리 마을에서는 다 소문이 나서 청학동 아가씨라고 해요.
라고 칭찬 하였다. 그래서 제가
“사장님도 청학동 아저씨라고 우리 학교에서 말해요.”
아저씨가 겸연쩍어 하셨다.
이 사장님은 만두 배달을 하면서도 저나 다른 선생님을 길가에서 만나면 꼭 멈춰서 차에서 나와 인사를 하고 계셔서 학교 선생님들에게서 청학동 사장님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Y 란 어린이처럼 가정에서 예절교육을 충실하게 계속해서 시키니까 이렇게 몸에 베여서 인사를 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요사이는 자녀가 적다보니 귀여워만 하고 외국어공부나 컴퓨터 등 공부에는 올인을 하지만 인사나 예절지도는 소홀히 하여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만난 대학교수 친구가,
“ 젊은 대학생이 찬물 위아래만 알고 인사만 잘하면 인성에는 B학점 이상 이다.”
는 말이 맞다 는 생각을 하면서 친구 부인이 약국을 하는데 신세대가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고
“요사이 젊은이 들이 왜 저렇게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하는지 모르겠 다.”
고 한탄을 하기에
“ 그것을 탓하지 말고 젊은이들이 15도로 고개를 숙이면 어른이 30도롤 고개를 숙이고 30도로 고개를 숙이면 45도로 고개를 숙이는 모범을 보이 면 미안해서 고개가 숙여지게 되겠지요. 부모들이 어렸을 때 자식만 생각 하고 인사도 제대로 안 가르치고 그냥 두어서요. 잘 못된 버릇이 우리 모 두의 책임이니 비방하지 말고 모범을 보여 가르쳐야지요.”
하고 말하니
“ 그 방법이 좋은 방법이군요.”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는 ‘예절의 나라’ 즉 동방예의지국 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지금부터 약 2,300여 년 전 공자의 7대손 공빈(孔斌)이라는 분이 우리나라 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서 쓴 동이열전(東夷列傳)에 나온 말입니다.
그 내용 중에 ‘형제가 부모에게 극진히 효도하더니 부모가 돌아가시니 3년을 슬퍼했는데 이들은 한민족의 아들(東夷之子)이었다 그 나라는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 군대는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후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들이 먹을 것을 미루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서 섞이지 않으니 이 나라야말로 동쪽에 있는 예의 바른 군자의 나라(東方禮義之國)가 아니겠는가?’ 라고 되어있다.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예의 바른 생활을 해서 존경 받았음을 되새기고, 미국인이나 일본인들이 친절과 미소 반가운 인사와 감사와 미안함을 표현하며 상대를 배려하는 선진 예절을 지켜 선진국이 된 것을 거울삼아 또 이스라엘 민족이 어렸을 때부터 성경을 가르쳐서 지혜를 깨워 세계의 노벨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 것처럼 우리 모두가 새로운 시대에 맞은 예절을 지켜 모범을 보이며 가르치는데 크리스찬들이 앞장서서 실천함으로써 21세기의 세계인과 어깨를 같이하는 선진한국과 선교 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참고가 된 글 모음-
안철수의 좌우명
강물이 얼마나 세계 흐르는지 알려면 강둑에 앉아 바라만 보아선 안 된다. 양말 벗고 신발 벗고 들어가 봐야한다. 물살의 세기를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 방법이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 경험은 반드시 나중에 도움이 된다.
강물에서 무사히 나온 것은 전략과 계획을 세우고 안 되면 두 번째 계획과 전략을 세워서 그리고 또 다른 계획과 전략을 세워서 실천해야 한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남보다 시간을 두 세 곱절 투자 할 각오를 한다. 그야말로 평범한 두뇌를 지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학문의 즐거움(일본인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 지음) 이란 책을 읽고 이 내용을 안철수가 좌우명으로 삼아 실천하였기에 인생의 1모작 의사 2모작 컴퓨터 프로그램 개발자 3모작 기업경영 컨설팅 전문가 가 되고,
4모작으로 정치에 뛰어든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인생에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3모작을 하고 4모작을 거두려고 하는데 나도 1모작이라도 하려면 새로운 각오로 시간을 투자하는 집중과 노력이 필요 한 것이 아닐까요?
안철수는 V3을 개발 할 때 10여년을 의사생활 하면서 3시간쯤 자고 개발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업 경영학 박사 과정을 밟을 때는 회사운영과 공부에 매달리느라고 하루는 자고 하루는 안자고 2 년 여를 지냈다고 하니 그의 건강과 집념이 오늘의 안철수를 만든 것 같습니다. 그는 초 중등학교 성적표에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머리보다 성실, 노력 끈기가 성공의 길이다. 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골삼천(踝骨三穿)
과골삼천(踝骨三穿)이란 말을 한 동안 화두로 들고 지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강진 유배 시절에 제자인 황상(黃裳)의 글속에 나오는 말이다.
70이 넘어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메모해가며 책을 읽는 황상을 보고 사람들이 그 나이에 어디다 쓰려고 그리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고 비웃었다. 그가 대답했다.
“우리 선생님은 귀양지에서 20여년을 계시면서 날마다 저술에만 힘써 과 골, 즉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다. 선생님께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친 히 가르쳐주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런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처음 이 글을 읽고 어안이 벙벙했다. 책상다리를 앉아 20년 세월이 가는 동안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것이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는 말은 들었고, 추사가 먹을 갈아 벼루 여러 개를 밑창을 냈다는 말도 들었지만,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다산은 40대 초반 한창 뜻을 펼칠 나이에 급전직하의 나락으로 떨어져 강진으로 유배 왔다. 그 절망의 20년 세월 동안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나중에는 뼈가 시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벽에 시렁을 메어놓고 서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떠올리며‘다산문선’을 수십 번 통독하다 보니 도대체 우리 공부란 것이 그 앞에 서면 초라하여 민망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산의 그 초인적인 노력도 대단하지만 10대에 들었던 스승의 가르침을 70이 넘은 나이에 마음에 되새겨 잊지 않은 제자의 도타운 마음이 참 고맙다. 그래서 지난번 강진 답사 때는 일부러 황상이 살던 천개산 아래 일속산방(一粟山房) 터를 물어물어 찾아 갔었다. 25년 전 저수지가 생겨 집터가 있던 자리 바로 아래턱까지 물이 차 있어 건너갈 수 없었지만 건너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했다.
열다섯 살 난 소년은 아전의 자식이었다. 다산이 유배 초기 강진 읍내 주막집 한 한 켠에 열렸던 서당에 쭈볏쭈볏 나아가
“저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 할 수 있나요?”
하고 물었다. 스승은
“오로지 부지런히 노력하면 안될 것이 없다.”
며 저 유명한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글로 써서 소년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소년은 스승의 격려에 크게 고무되었다 말씀에 따라 평생을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스승이 귀양이 풀려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그는 세상에 눈길을 주지 않고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그렇게 다시 몇 십 년이 지났다.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추사가 우연히 그의 시를 보았다 추사는 그 시의 높은 경지를 보고 깜작 놀랐다. 귀양이 풀려 뭍으로 오르자마자 추사는 황상의 집부터 찾았다 스승 다산은 이미 세상을 뜬 뒤의 일이다.
이후 시골 아전의 자식은 평생 농투성이 농사꾼으로만 살다가 일약 세상이 알아주는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 형제와 추사 형제 등이 다투어 그의 시를 칭송하고, 그의 시집에 서문을 써주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우쭐대지 않았다. 추사 형제와 정학연 형제가 차례로 세상을 뜨자 그는 또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 세상에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황상이 75세 나던 해에 쓴 임술기(壬戌記)는 스승에게 첫 가르침을 받은 지 60년이 되던 해에 쓴 글이다. 이글에서 그는 스승이 15세 대 자신에게 준 글을 옮겨 적고 나서 평생 이룬 것은 보잘것없지만 생각해보면 스승이 남기신 가르침을 지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삶의 끝자리에서 그가 남긴 이 말을 나는 오래 잊지 못한다.
다산이 강진에 내려와서 거둔 것이 단지 문학의 성취뿐이었다면 우리의 외경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는 역경의 세월을 자신과 싸워 이겼을 뿐 아니라 자신감 없던 시골 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학문의 위대함은 인간의 위대함에서 나온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은 얄팍한 세상에서 이 아름다운 사제간의 만남은 늘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스승의 옥편( 정민이 쓰고 마음산책에서 펴냄)
--- 근래 10여 년에 읽은 책 중에서 너무도 감동적이고 나의 마음에 찔림을 주는 글이어서 옮겨 적어 보냅니다.---- 조규록 (jgl427@naver.com)
삼근계(三勤戒)
다산(茶山)선생이 황상(黃裳)에게 문사(文史)를 공부하라고 권했다. (詞曰 余勤山石治文史)
그는 쭈뼛쭈뼛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말했다. (山石浚巡愧色而辭曰)
선생님 저에게는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我有病三)
첫째는 너무 느리고 둔하고(一曰鈍)
둘째 앞뒤가 꽉 막혀 융통성이 없으며(二曰滯)
셋째 답답한 것입니다.(三曰戞)
다산(茶山)선생이 말했다.(詞曰)
배우는 사람에게는 큰 병통 세 가지 있다. 그런데 너에게는 그 문제가 없다.
(學者有大病三 汝無是也)
첫째 외우는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하고 부신한 것이 문제다.
(一敏於記誦 其弊也忽)
둘째, 글 짓는데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것이 병통이지 (二銳於述作 其弊也浮)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칠고 조악한 것이 폐단이다. (三倢於悟解 其弊也荒)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夫鈍而鑿之者 其孔也濶)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 진다.(滯而疏之者 其流也沛)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거린다.(戞而磨之者 其光也澤)
천착하는 것, 뚫은 것,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해야 한다.(曰若之何勤也)
제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해야 할까요?
마음을 확고하게 다 잡아야 한다. (曰 秉心確)
卮園遺稿의 壬戌記에서 黃裳지음
주 戞(어근버근할 알) 鑿(뚫은 착) 滯(막힐 체)
허리를 망치는 11가지 자세
1. 허리를 좌우로 비틀며 두두룩 소리를 내며 시원해 하는 것
2. 푹신한 침대에서 높은 베개를 베고 자는 것
3. 가방을 한쪽으로만 드는 것
4. 엉덩이를 뺀 자세에서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
5. 엉덩이를 등받이를 붙이지 않고 앉는 것
6. 경사진 곳에서 오래 서 있는 것
7. 두꺼운 지갑을 뒷주머니에 넣고 오래 앉아 있는 것
8. 딱딱하고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은 것
9.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내릴 때 발 받침대를 사용하는 대신 발뒤꿈지를 들고 팔을 쭉 펴서 물건을 내리는 것
10. 베개나 쿠션을 등 뒷부분이나 목에 대고 T.V 나 책을 보는 것
11. 마늘이나 고추 등을 다듬을 때 허리를 구부리고 앉아서 다듬거나 빨래를 엎드려서 방안 청소를 엎드려서 하거나 논 밭의 김을 매거나 허리를 어거주춤 하고 먼곳의 물을 주는 일, 화투칠 때 구부린 자세(식탁이나 상을 놓고 하거나 의자에 앉아서 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허리 강화 운동
● 배를 땅에 대고 손집ㅍ고 고개를 천천히 드는 자세 (배꼽까지만 들리게)
● 철봉에 손을 잡고 다리가 땅에 닿을까 말까 하게 쭉 몸통과 다리를 펴는 자세
● 거꾸로 매달리기 등 스트레칭을 계속하면 허리강화에 도움이 됩니다.
학력에 연연하지 마세요.
나는 4전 3패 1승으로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마지막 1승도 참 절묘했습니다. 그 때는 합격자 발표를 대학 건물 벽에 붙였습니다. 전 ․ 후기 전형이 있던 당시, 재수한데다 전기 대학을 낙방했으니 후기 대학마저 떨어지면 삼수생 노릇을 할 판이었습니다.
합격자 발표 날, 마음을 졸이며 벽을 보았습니다. 맙소사, 합격생 명단에 내 이름이 없었습니다. 나는 살아서 뭐하나 싶어 유서를 썼습니다. 그런데 글쓰기가 쉽게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다 쓰고 죽기 싫었는지 계속 뭔가를 끈적거렸습니다.
한데 며칠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배원이 우리 집을 찾아와 합격 통지서와 등록금 고지서를 준 것입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이었습니다. 우체국이 청사를 지어 이사하는 와중에 발견된 통지문 봉투에 수취인 이름은 지워지고 대학 주소만 남았다고 했습니다. 열어 보니 합격 통지서에 내 이름이 있어 읍내 두 곳의 고등학교에 연락해 황급히 찾아온 것입니다. 어머니는 급히 돈을 마련했고, 나는 새벽 기차를 타고 달려가 학교 경리과에 등록금을 냈습니다.
입학한 뒤 들어 보니 동기 모두 등록금을 은행에 냈다고 했습니다. 왜 나만 경리과에 냈을까 의아하던 때, 기숙사 입소 서류를 만들다 기막힌 사연을 들었습니다. 나는 20명 뽑은 국문과에 21등으로 낙방했고, 두 명이 등록하지 않아 추가 합격된 것입니다. 남들은 일류 대학에 못 가 속상했지만 나는 2차 대학 그것도 당시 인기 없던 국문과 학생이 된 걸 기뻐했습니다. 그러했기에 글쓰기에 집중해 소설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시작부터 평탄하지 않는 삶이 나를 단련시켜 오늘날에 이른 것입니다.
(그게 뭐 어쨌다고 김홍신 펴냄)
-좋은 생각 2012년 2월호 33쪽에서 뽑아낸 글-
경비원에서 최고의 작가로
얼릴 적부터 글 잘 쓴다는 말을 듣고 자란 남자가 있었다. 그는 아무리 피곤하고 아파도 매일같이 2,000자 분량의 글을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 잡지에 글도 몇 번 실었지만 무명작가의 원고료는 생계를 잇기에 턱없이 적었다. 그래서 그는 세탁소에서 침대보를 빨고, 건물 경비를 하며 틈틈이 글을 썼다. 그의 아내도 밤낮으로 일했지만 살림은 늘 빠듯했다. 갓난아이가 중이염에 걸렸을 때 약 살 돈이 없어서 전화를 끊어야 했고, 자동차의 변속 기어가 고장 수리비가 없어서 조심조심 몰고 다녔다.
그는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고 남은 돈은 원고를 부치는 우편 요금으로 썼다.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지만 모두 되돌아왔다. 묵묵히 네 번째 소설을 쓰던 날이었다.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족을 보고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며, 여태 쓴 원고를 몽땅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런데 이튿날, 아내가 원고 뭉치를 들고 와 말했다.
“여보 중간에 포기해서는 안 돼요. 특히 성공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는 더욱 그렇지요.”
그 한마디에 힘입어 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
그는 무명작가 생활 15년 만에 마침내 빛을 보았다. 한 출판사에서 그의 소설을 읽고 재미있다는 답변을 보내온 것이다. 그렇게 나온 소설책은 500만 부나 팔렸다. 공포 소설의 고전이라 불리는 스티븐 킹의 ‘캐리’였다 1976년에는 영화로 제작돼 그해 최고의 영화로 손꼽혔다. 이후 그가 펴낸 ‘쇼생크 탈출, ’미저리’ ‘돌로레스 클레이븐’ 등도 영화로 만들어져 큰 성공을 거두었다.
(좋은 생각 편집부)
-좋은 생각 2012년 2월호 97쪽에서-
정글만리(조정래) 요약 (책을 읽고 요약한 것)
중국의 3대 금기 사항
① 마오쩌둥(모택동)에 대한 비판
② 중국 공산당에 대한 비판
③ 대만에 대한 칭찬이나 대만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말
이런 말을 하다 비밀경찰에 들키면 감옥을 가거나 추방당한다.
중국은 공산당이 다스리는 나라이고 공산당은 13억 인민을 먹게 살게 해서 고마운 존재지만 무서운 존재이다. 중국인은 제한된 자유에 대하여 감사하며 살고 있다 예날 인민공사의 학정에서 벗어나서
① 사유 재산 소유의 자유 ②직업 선택의 자유 ③ 주거 이전의 자유(베이징. 상해 홍콩 등 대도시 제외) ④결혼의 자유 ⑤취미생활의 자유 ⑥ 여행의 자유(국내,해외) 등으로 만족하며 산다.
중국 속담에 머리 내미는 새가 총맞는다 - 뭐든 내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공산당의 적이 되는 일은 하지 마라 는 사고이고 생각으로 활동한다. 대약진 운동 문화 대혁명 천안문 사태 파루궁 검거와 금지 상태 – 등에서 공산당에 대해 고맙고 두려운 존재이다 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산다.
중국이 최초인 것 네가지 – 차 도자기 옥고예, 비단
중국기의 상징 큰별 (중국 공산당) 작은 별(노동자 계급, 농민 계급, 소자산 계급, 민족 자산 계급)
중국의 과거는 서안 현재는 베이징 미래는 상해와 꽝저우
모택동 의 심원춘(沁園春) 이란 시
얼음은 천리를 뒤덮고/ 눈은 만리에 걸쳐 내리는
이 곳이 바로 북국의 풍광이로다/ 장성 안팎을 바라보니
아득히 멀고 먼 은세계로세/도도히 흘러가던 홍하도
갑자기 그 기세 간곳없어라/산줄기는 은빛 뱀이 춤추는 듯하고
평원은 흰 코끼리 내 닫는 듯/ 감히 하늘과 높이를 겨누려 하네
날이 개어 바라보니/ 붉은 단장 소복 차림이
유난히도 아름다워라/ 강산이 이다지도 아름답기에
무수한 영웅들 다투어 허리 굽혔어라
안타깝도다 진시황과 한무제는 /문재(文才)가 모자랐고
당태종과 송태조는/시재(詩才)가 무디었구나
일대의 영웅 칭키스칸도/독수리 떨어뜨리는 활 재주 밖에 없었나니
모두 지나간 일들일뿐/ 진정한 영웅 호걸 찾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
이 시에서 모택동은 은근히 자기 중국 역사에서 최고이다 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 모택동은 중국 역사상 가장 힘이 강한 독재자임에 틀림없다.
중국의 陳惏 1900년 전
그대 장성 아래 보지 못했는가? 죽은 사람들의 해골이 서로 지탱하고 있는 것은(君獨不見長城下 死人骸骨相태撐拄) 이라고 읊은 것을 이세상의 모든 문화재는 선조들의 피와 땀 그리고 죽음에 의하여 이루어 진 것을 후손들이 보고 즐거워하며 돈을 벌어먹고 살고 있다. 할 수 있다.
중국의 4대 독재자
①진시황 (300만 동원해 만리장성 쌓고 70만 동원해 자기 무덥을 만들고 15년만에 망함 그때 인구 2,000만명) 진시황 천하 통일, 문자 통일, 도량형 통일 진ㅅ기왕 무덥 1/10 발굴 동서230m 남북 62m r물을 철골로 엮어서 만듬-6,000명 병사 400여마리의 말, 100여개의 전차 실물크기 –8대 불가사의
②수양제 – 대운하 수백만 동원해 만들고 망함
③ 당태종 – 양귀비에에 빠져 망함
④ 진정한 가장 강한 독재자는 모택동
마치 우리나라의 단군 이래 최고의 독재자는 박정희 다음이 전두환 인 것 같이 –정보와 통치권의 미침이 전체 국가에 미침
북한 사람이 놀라는 것- 남한의 화장실의 화장지 안 가져 간 것(소비재가 적어서)
중국 사람들- 깨끗한 한국의 수세식 화장실, 광장의 비들기 – 중국에 비해서 너무 깨끗하고 안 잡아 먹은 것이 없어 중국인은 무엇이나 잡아먹기 때문이다
동양 3국의 외국(서양) 물건에 대한 맹신
프랑스 명품 자크 가방을
일본 손님은 10명중 2명이 물건을 사고
한국 손님은 10명중 5명이 물건을 사고
중국 손님은 10명중 9명이 물건을 산다
아니 중국인은 10명중 15개 20개까지 싹쓰리 한다.
중국인이 보는 독종 민족 - 한국, 베트남(자기 나라 지배를 안 받았다고), 이스라엘
중국인의 한국인에 대한 생각
①개개인이 똑똑하고 부지런하다 ②성실하고 친절하다
③민족적 자부심과 애국심이 투철하다 ⑲]단결력이 강하다
단점
①성질이 너무 급하다(먹는 것 까지) ②너무 철저해 융통성이 부족하다 ③잘 난 척 하는게 좀 심하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 이유
⓵각양 각색의 아기자기한 스토리가 재미있어 안보고는 못배긴다. ⓶미남 미녀의 연기를 잘한다. ⓷어색한 장면이 없고 눈물 흘리는 연기를 특히 잘한다 ⓸잘 사는 모습 등 여러 가지 모든 것
중국 순커우유(順口溜) 시에 의하면
일류 미녀는 바다 건너가고
이류 미녀는 외국 기업가의 얼간이가 되고
삼류 미녀는 직접 사업을 한다
사류 미녀는 선전 주하이로 간다
오류 미녀는 가라오케 호스티스가 되고
육류 미녀는 광저우와 상하이로 간다
중국의 3대형상 형상 (용) 색깔 (빨강-악귀 몰아내고 액운을 막아준다 고 생각) 꽃 (모란꽃)
한국 중국 일본의 3국 견원지간(犬猿之間) 이지만 서양에 대해서 3쌍둥이 일본의 불가사의 (예수교 전도 안된 것 커피 안 먹는 것 코카콜라 안 먹는 것 이였는데 지금 커피 공화국 – 미국의 장기적인 작전으로 인스턴트 식품을 좋아하도록 이유식을 3-40년 집어 넣고 피자 햄버거 핫도그 등의 침투로 동양 3국이 커피 공화국
되어서 중국 일본 한국의 차(녹차) 산업이 사양길로 달려 가고 있다 -종속이론(경제적인 장기적인 침투)
녹차 산업이 사양 산업화 되어가고 커피가 전성 시데 되었다.
산업화 과정 영국 300년 미국 100년 일본 60년 한국 30년 중국20년 에 이루어 지고 있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숫자 8(빠) -돈(파차이) -돈을 벌다와 비슷
행운 중국 올림픽 2008년 8월 8일 8시에 성화가 타오르다
축의금 888엔 낸자 최고 하객이다
아파트 8층 8호 –웃돈
자동차 번호 8888 1억엔 거래
천대 받는 숫자4(쓰) 가 죽을 死(쓰) ㅇ와 발음이 같아서
중국인 이 많이 쓰는 말 런타이 둬(人太多) 사람이 너무 많다.
중국인의 자부심 고속철 프랑스TGV 320K 한국 KTX 300
중국 허세호 350K
2 차 세계대전 희생자 일본 3,500만 아시아 1,000만 일본 210만 희생
중국의 사기
자기보다 10배 부자면 헐뜯고
“ 100배 부자면 두려워 하고
“ 1,000배 부자면 고용당하고
“ 10,000배 부자면 노예가 된다 는 말이 있다
중국은 여권신장이 높아 회식이 밤 10 시 아ㅣ후 끝나면
오전 근무 빼먹고 택시비를 지불해야 한다.
중국에서는 연인끼리 우산을 주지 않은다. - 서호의 법해 선사 백사 전설
중국인의 이화(梨花) 배꽃을 좋아 한다 돈이 붙어 다니다 梨拔 와 같은 발음 – 중국사람 이 이화 여자대학교서 사진을 잘 찍는다.
중국의 농촌 인구- 6억 5천 호적 안 된 여자 3,000만 많으면 1억이다 고함 남아 선호사상이 깊어서(근래는 부자나 고위 공직자는 돈(벌금)만 내고 아들을 호적에 올리고 있다.
중국인 해보지 못하는 세가지
⓵ 땅이 넓어서 중국의 곳곳을 다 여행 할 수 없다
⓶ 중국의 음식이 많아서 중국의 여러 음식을 다 맛볼 수 없다.
⓷ 중국은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 각 고을의 사람을 평생 다 만나 볼 수 없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혜민스님) 중요 내용 요약
(책 읽고 요약한 것)
☻ 무조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모든일이 자기 원하는 대로 쉽게 되면 게으러지고, 교만해지며, 노력하지 않게 되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모르게 됩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겪은 어려움은 내 삶의 큰 가르침일지 모릅니다.
☻ 서 있는 말에는 채찍질을 하지 앟습니다 달리는 말에만 채찍질을 합니다. 성공한 사람은 이미 성공한 사람에게 칭찬의 말을 하고 실패한 사람은 성공한 사람에 대해 비난의 말을 한다.
- 나폴레온 힐-
☻ 누가 당신에게 당신 인생 앞길은 잘 설계해 놓았으니 이 길로 가면 성공한다고 그 길로 가라고 강요한다면 그런데 그 길이 당신이 원하는 길이 아니라면 그냥 도망치십시오. 당신 삶을 사세요. 당신이 진짜 원하는 삶을......
☻ 경오 스님 말씀
우리 사는 것이 전부 남의 다리 긁은 것과 같은 것이나 마음을 뜻대로 하려면 나를 먼저 찾으십시오.
☻ 나는 어떻게 살아야 행복해 지는가?
① 내가 상상하는 것만큼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②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줄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 입니다.
⓷ 남을 위한다고 하면서 하는 거의 모든 행동들은 사실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란 깨달음이다.
사랑하는이여 우리 둘 사이에는 이름 모를 신이 존재합니다.
-칼닐 즈브랄-
☻ 죽기 전에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을 경험해 보고,, 보고 싶은 곳을 가서 보고, 만나고 싶은 분을 적어보세요. 그리고 그냥 그것들을 꾸준히 하세요. 하나씩 하나씩 다른 사람의 눈치 보지 말고 이것저것 그만 하지 말고 우리 이렇게 살아요.
☻ 행복의 지름 길
① 나와 남을 비교하는 일 멈추십시오.
②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내 마음 안에서 찾으십시오.
⓷ 지금 이순 간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아 느끼십시오.
● 행복을 결정하는 두 가지 질문
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의미를 가져다 주는가?
② 나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은가?
☻ 다른 종교와 어떻게 관계를 가져야 하는가?
우선 겸손한 태도를 갖고 많이 배워야 한다. 다른 종교들의나 신앙을 배운다고 자신의 신앙이 없어진다면 그 정도의 싱앙은 차라리 없는 게 났다. (강원용 목사)
☻혜민 스님이 좋아하는 성경 구절
●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12)
●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 7:21)
●내가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자 한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 이니라. (마태 25:40)
☻ 나 자신의 온전함과 존귀함을 알게 하시길....
너무 바빠서 항상 쫓기는 것 같을 때
고민 때문에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아 힘들 때
미래가 캄캄하고 불안하기만 할 때
우리 잠시 멈추어요.
단 1분 만이라도 잠시 멈추어요.
삶을 현재에 정지시켜 놓고
잠시 깊게 숨을 내쉬어요.
지금 무슨 소리가 들리나요.
지금 몸은 어떤 느낌인가요.
지금 하늘은 어떤 모습인가요.
멈추면 비로소 보여요.
멈추면서 그것들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나오기 때문에
그것들에 휩쓸려 살아야 했던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잘 보여요.
그리고 멈추면 내주변이 또 비로소 보여요.
나를 항상 도와주는 가족과 동료들의 얼굴들
매일 지나치지만 불 수 없었던 거리의 풍경들
들어도 잘 들리지 않았던 상대방의 이야기들
내가 지금 하는 것을 잠시 쉬면
내 안팎의 전체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내요
삶속의 지혜가 이처럼 내가 뭔가를 해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고
멈춘 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들을
그냥 조용히 알아채기만 하면 되는 것같아요
그렇게 드러나는 것들은 계속해서 알아 챙기다보면
어느 순간에 알게 돼요.
마음 안에는 항상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한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관조자가 또 있다는 사실을요.
태초의 고요한 마음안을 그저 바라보는 분이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를 보며 즉시 아는 그분이 곧 지혜자란 것을요.
그 관조자와 친해지세요.
그 분이 내 마음속 어디에 계시고 또 어떻게 생기셨는지
평소에 알던 것을 가지고 상상하려 하지 말고
침묵 속에서 모든 생각이나 상(相)을 다 내려놓고
기도와 명상과 참선을 똥해 관조하는 그 분을 보려고 하세요.
태초의 고요 속에서
얼굴 없는 그분의 얼굴을 봤을 때
이미 온전한 본래 나를 만난 것입니다.
☻ 인간관계는 난로와 같다 너무 가까우면 데이고 너무 멀면 차가와 진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나도 편하고 상대편도 편하다.
☻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미래는 주저주저하면서 다가온다. -실러-(독일의 시인)
☻ 과거는 감이 없고 현재는 멈춤이 없고 미래는 옴이 없다.
인생(최인호의 수필집)에서
☻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다른 것끼리 평화롭게 어울리는 것이며, 궁극에는 서로가 같아지거나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더욱이 인생의 시작과 끝자락에서 똑같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세상은 거대한 조화로움의 세계가 아닐까 싶었다. 사랑과 미움, 슬픔과 기쁨, 빠른 것과 느린 것,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만남과 헤어짐, 넘침과 모자람, 절망과 희망, 생과 사, 둥근 것과 모남 것, 하늘과 땅, 고 저, 장단, 명암, 흑백, 선악, 강약, 행불, 미추 등의 극단적인 대립이 아니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적당하게 밀어내고 끌어당김을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문순태의 소설 ‘은행나무아래서’에서 뽑는 글)
☻ 세상을 평화롭게만드는 힘은 낯설고 이질적인 것과의 어울림에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낯선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갈등과 증오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 60쪽에서)
-정민 선생의 수필을 옮겨 적은 글 이글을 읽고 감동 받아서 다산 초당 답사기를 썼음-
과골삼천(踝骨三穿)
과골삼천(踝骨三穿)이란 말을 한 동안 화두로 들고 지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강진 유배 시절에 제자인 황상(黃裳)의 글속에 나오는 말이다.
70이 넘어서도 쉬지 않고 부지런히 메모해가며 책을 읽는 황상을 보고 사람들이 그 나이에 어디다 쓰려고 그리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고 비웃었다. 그가 대답했다.
“우리 선생님은 귀양지에서 20여년을 계시면서 날마다 저술에만 힘써 과 골, 즉 복사뼈가 세 번이나 구멍 났다. 선생님께서 부지런히 공부하라 친 히 가르쳐주신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관 뚜껑을 덮기 전에야 어찌 그 지성스런 가르침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처음 이 글을 읽고 어안이 벙벙했다. 책상다리를 앉아 20년 세월이 가는 동안 바닥에 닿은 복사뼈 자리에 구멍이 세 번 뚫렸다는 것이다.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는 말은 들었고, 추사가 먹을 갈아 벼루 여러 개를 밑창을 냈다는 말도 들었지만, 복사뼈에 세 번이나 구멍이 뚫렸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다산은 40대 초반 한창 뜻을 펼칠 나이에 급전직하의 나락으로 떨어져 강진으로 유배 왔다. 그 절망의 20년 세월 동안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했다. 나중에는 뼈가 시어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벽에 시렁을 메어놓고 서서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 광경을 떠올리며‘다산문선’을 수십 번 통독하다 보니 도대체 우리 공부란 것이 그 앞에 서면 초라하여 민망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다산의 그 초인적인 노력도 대단하지만 10대에 들었던 스승의 가르침을 70이 넘은 나이에 마음에 되새겨 잊지 않은 제자의 도타운 마음이 참 고맙다. 그래서 지난번 강진 답사 때는 일부러 황상이 살던 천개산 아래 일속산방(一粟山房) 터를 물어물어 찾아 갔었다. 25년 전 저수지가 생겨 집터가 있던 자리 바로 아래턱까지 물이 차 있어 건너갈 수 없었지만 건너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했다.
열다섯 살 난 소년은 아전의 자식이었다. 다산이 유배 초기 강진 읍내 주막집 한 한 켠에 열렸던 서당에 쭈볏쭈볏 나아가
“저같이 머리 나쁜 아이도 공부 할 수 있나요?”
하고 물었다. 스승은
“오로지 부지런히 노력하면 안될 것이 없다.”
며 저 유명한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글로 써서 소년의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소년은 스승의 격려에 크게 고무되었다 말씀에 따라 평생을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스승이 귀양이 풀려 서울로 올라간 뒤에도, 그는 세상에 눈길을 주지 않고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책을 읽었다 그렇게 다시 몇 십 년이 지났다. 제주도에 귀양 가 있던 추사가 우연히 그의 시를 보았다 추사는 그 시의 높은 경지를 보고 깜작 놀랐다. 귀양이 풀려 뭍으로 오르자마자 추사는 황상의 집부터 찾았다 스승 다산은 이미 세상을 뜬 뒤의 일이다.
이후 시골 아전의 자식은 평생 농투성이 농사꾼으로만 살다가 일약 세상이 알아주는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다산의 아들 정학연 형제와 추사 형제 등이 다투어 그의 시를 칭송하고, 그의 시집에 서문을 써주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우쭐대지 않았다. 추사 형제와 정학연 형제가 차례로 세상을 뜨자 그는 또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 세상에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황상이 75세 나던 해에 쓴 임술기(壬戌記)는 스승에게 첫 가르침을 받은 지 60년이 되던 해에 쓴 글이다. 이글에서 그는 스승이 15세 대 자신에게 준 글을 옮겨 적고 나서 평생 이룬 것은 보잘것없지만 생각해보면 스승이 남기신 가르침을 지켜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삶의 끝자리에서 그가 남긴 이 말을 나는 오래 잊지 못한다.
다산이 강진에 내려와서 거둔 것이 단지 문학의 성취뿐이었다면 우리의 외경은 훨씬 덜했을 것이다. 그는 역경의 세월을 자신과 싸워 이겼을 뿐 아니라 자신감 없던 시골 소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학문의 위대함은 인간의 위대함에서 나온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은 얄팍한 세상에서 이 아름다운 사제간의 만남은 늘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스승의 옥편( 정민이 쓰고 마음산책에서 펴냄)
--- 근래 10여 년에 읽은 책 중에서 너무도 감동적이고 나의 마음에 찔림을 주는 글이어서 옮겨 적어 보냅니다.---- 조규록 (jgl427@naver.com)
삼근계(三勤戒)
다산(茶山)선생이 황상(黃裳)에게 문사(文史)를 공부하라고 권했다. (詞曰 余勤山石治文史)
그는 쭈뼛쭈뼛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말했다. (山石浚巡愧色而辭曰)
선생님 저에게는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我有病三)
첫째는 너무 느리고 둔하고(一曰鈍)
둘째 앞뒤가 꽉 막혀 융통성이 없으며(二曰滯)
셋째 답답한 것입니다.(三曰戞)
다산(茶山)선생이 말했다.(詞曰)
배우는 사람에게는 큰 병통 세 가지 있다. 그런데 너에게는 그 문제가 없다.
(學者有大病三 汝無是也)
첫째 외우는데 민첩한 사람은 소홀하고 부신한 것이 문제다.
(一敏於記誦 其弊也忽)
둘째, 글 짓는데 날래면 글이 들떠 날리는 것이 병통이지 (二銳於述作 其弊也浮)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거칠고 조악한 것이 폐단이다. (三倢於悟解 其弊也荒)
대저 둔한데도 계속 천착하는 사람은 구멍이 넓게 되고 (夫鈍而鑿之者 其孔也濶)
막혔다가 뚫리면 그 흐름이 성대해 진다.(滯而疏之者 其流也沛)
답답한데도 꾸준히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거린다.(戞而磨之者 其光也澤)
천착하는 것, 뚫은 것,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해야 한다.(曰若之何勤也)
제가 어떤 자세로 부지런해야 할까요?
마음을 확고하게 다 잡아야 한다. (曰 秉心確)
卮園遺稿의 壬戌記에서 黃裳지음
주 戞(어근버근할 알) 鑿(뚫은 착) 滯(막힐 체)
첫댓글 이메일에서 열리지 않아 일거 보지 못 했는데 여기에 올려 줘서 덕분에 잘 봤습니다.
우리 은사님 정말 멋지신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