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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강설 19 대방광불화엄경 제19권 제4회 설법 사품(四品) 十九,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 二十,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 二十一, 십행품(十行品) 1 서 문 그때에 세존께서 일체 보리수나무 아래와 수미산 산정을 떠나지 않으시고 저 야마천궁의 보배로 장엄한 궁전을 향하시었습니다. 그때에 야마천왕이 멀리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즉시 신통한 힘으로써 그 궁전 안에 보련화장(寶蓮華藏) 사자좌를 변화하여 만들었는데, 백만 층으로 장엄하고, 백만의 황금그물이 서로 얽히었고, 백만의 꽃 휘장, 백만의 꽃다발 휘장, 백만의 향 휘장, 백만의 보배휘장이 그 위에 덮이었습니다. 명칭(名稱) 여래의 소문 시방에 떨치니 모든 길상(吉祥)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이 일찍이 이 마니궁전에 드셨으니 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보왕(寶王) 여래는 세간의 등불이시니 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도 일찍이 이 청정궁전에 드셨으니 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부처님이 큰 광명 놓아 시방을 두루 비추시니 천상과 인간의 높은 어른 뵈옵기 환히 트이어 걸림 없도다. 부처님 야마천궁에 앉아서 시방세계에 두루 하시니 이런 일은 매우 기특하여 세간에서 희유하도다. 수야마천왕이 열 분의 부처님을 게송으로 찬탄하니 이 모임에서 보는 것처럼 일체 처에서도 모두 그러하도다. 찬탄합시다. 찬탄합시다. 이 세상에 사람 부처님이 오심을 찬탄합시다. 중생 부처님이 오심을 찬탄합시다. 내 부처님이 오시고, 당신 부처님이 오심을 찬탄합시다. 서로 서로 부처님임을 깨달아 목청껏 소리 높여 찬탄합시다. 2014년 11월 10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목차 十九,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 1. 법회가 모든 시방 세계에 두루하다 2.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않고 야마천궁으로 향하다 3. 각각 백만 가지로 궁전을 장엄하다 4. 5. 二十,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 1. 2. 3. 二十一, 십행품(十行品) 1 1. 2. 3. 十九,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 강설 : 화엄경 총 9회(會)의 설법 가운데 제3회의 설법이 끝나고 제4회의 설법이다. 제4회의 설법에는 다시 4품이 설해졌다. 제4회의 설법은 야마천궁에 올라가서 설법하였기 때문에 먼저 부처님이 야마천궁에 올라가시고 야마천왕이 영접하며 게송으로 궁전을 찬탄하는 내용부터 시작한다. 그 제4회의 4품은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과 야마궁중게찬품(夜摩宮中偈讚品)과 십행품(十行品)과 십무진장품(十無盡藏品)이다. 야마천이란 불교의 우주관에서 설정한 욕계(欲界)의 6천(天) 가운데 제3천이다.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忉利天) 위의 공간상에 위치하며, 수야마천(須夜摩天) 또는 염마천(焰摩天)이라고도 한다. 이 하늘의 주인공은 염마천왕이며 이곳에 사는 신들은 음욕이 경미하여 포옹을 하는 정도로 족하다고 한다. 처음 태어난 때의 모습이 인간의 7세 아이와 같고 얼굴이 원만하며 의복은 저절로 마련된다. 이곳의 하루 밤낮은 인간 세상의 200년에 해당하고, 이곳에 사는 신들의 수명은 2,000세로 인간계의 나이로 환산하면 14억400만년이 된다. 야마천의 왕은 불교에 수용된 뒤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독특한 신앙 형태를 낳았다. 원래 이곳의 왕이었던 염마왕은 불교의 지옥관과 함께 지옥의 왕이 되었으며, 그 사상이 중국에 들어와 도교에서 내세운 명부의 법관들, 특히 태산부군(泰山府君)과 동일시됨으로써 민중에서 널리 신봉되었다. 이와 같은 야마천에서 십행품(十行品)을 중심으로 4품이 설해졌다. 十九,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 1. 법회가 모든 시방 세계에 두루하다 爾時에 如來威神力故로十方一切世界一一四天下의南閻浮提와及須彌頂上에皆見如來가 處於衆會어시든彼諸菩薩이悉以佛神力故로而演說法하야莫不自謂恒對於佛이러라 그때에 여래의 위신력으로 시방 일체 세계 낱낱 사천하의 남섬부주와 수미산 정상에서 모두 살펴보니, 여래께서 대중들이 모인 가운데 계시는데 그곳의 모든 보살들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법을 연설하면서 제각기 항상 부처님을 대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강설 ; 경을 결집하고 편찬하는 경가(經家)의 설명이다. 모두가 여래의 위신력으로 시방 일체 세계의 일일 사천하의 염부제와 수미정상을 두루 다 보게 되었다. 그 모든 곳에는 여래가 보살 대중들의 회중에 계셨다. 그 회중의 모든 보살들도 또한 여래의 위신력으로 법을 연설하면서 모두 다 자신이 항상 부처님을 대면하고 있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기이하고 신비로운 현상은 여래의 위신력이었다. 여래의 위신력이란 곧 여래의 안목이며, 여래의 지혜며, 여래의 견해다. 그러므로 만약 어디서든 여래의 안목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경계를 수용할 것이다. 2. 보리수 밑을 떠나지 않고 야마천궁으로 향하다 爾時에 世尊이 不離一切菩提樹下와 及須彌山頂하시고 而向於彼夜摩天宮寶莊嚴殿하시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일체 보리수나무 아래와 수미산 산정을 떠나지 않으시고 저 야마천궁의 보배로 장엄한 궁전을 향하시었습니다. 강설 ; 세존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깨달은 정각의 경계에 머문 채 모든 시방 세계 곳곳에 법을 설하시기 위하여, 또는 보살들이 법을 설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유자재로 다니신다. 처음 정각을 이루신 보리도량에서 보리수나무를떠나지 않고 보광명전에 가서 제2회 6품의 경을 설하셨고, 다음으로 또 보리도량 보리수나무를 떠나지 않고 수미산에 올라 제3회 6품 경을 설하셨다. 다시 보리수나무와 보광명전과 수미산을 떠나지 않고 야마천에 올라 보배궁전을 향하시었다. 이 모든 이치가 여래는 언제나 깨달음을 떠나지 않고 일체 법을 펼친다는 뜻이다. 3. 각각 백만 가지로 궁전을 장엄하다 時에 夜摩天王이 遙見佛來하고卽以神力으로於其殿內에化作寶蓮華藏獅子之座호대百萬層級으로 以爲莊嚴하고百萬金網으로以爲交絡하고百萬華帳과百萬鬘帳과百萬香帳과百萬寶帳으로彌覆其上하고 그때에 야마천왕이 멀리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즉시 신통한 힘으로써 그 궁전 안에 보련화장(寶蓮華藏) 사자좌를 변화하여 만들었는데, 백만 층으로 장엄하고, 백만의 황금그물이 서로 얽히었고, 백만의 꽃 휘장, 백만의 꽃다발 휘장, 백만의 향 휘장, 백만의 보배휘장이 그 위에 덮이었습니다. 강설 ; 야마천왕이 멀리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보고 부처님이 앉으실 사자좌를 만드는데 그 사자좌의 높이가 1백 만 층이었다.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이 두바이에 있는 ‘브리즈 할리파’라는 호텔인데 820미터에 160층 이라한다. 사자좌는 법상이니까 한 층을 대강 10미터라고 계산 한다면 그 높이가 1천만 미터, 즉 1만키로 미터가 된다. 또 백만이나 되는 황금그물과 백만 꽃 휘장, 백만 화만(華鬘)휘장, 백만 향 휘장, 백만 보배휘장이 그 위에 덮이었다. 상상하여보라. 놀라운 광경이 아닌가. 이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반드시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華蓋鬘蓋와香蓋寶蓋가各亦百萬으로周廻布列하고百萬光明이而爲照耀하고 百萬夜摩天王이恭敬頂禮하고百萬梵王이踴躍歡喜하고百萬菩薩이 稱揚讚歎하고 꽃 일산(日傘), 화만일산, 향 일산, 보배일산도 각각 백만이 두루 벌였는데, 백만 광명이 찬란하게 비치고, 백만 야마천왕은 공경하여 정례하고, 백만 범천왕(梵天王)은 환희하여 뛰놀고, 백만 보살들은 소리 높여 찬탄하였습니다. 강설 ; 비단 사자좌의 장엄만 모든 것을 백만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광명도 백만이며, 야마천왕도 백만이며, 범천왕도 백만이며, 보살도 백만이었다.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제4회 설법은 십행(十行)법문이 그 중심이다. 그렇다면 십행법문의 놀라운 내용과 위대한 설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百萬天樂이各奏百萬種法音하야相續不斷하고百萬種華雲과百萬種鬘雲과 百萬種莊嚴具雲과百萬種衣雲이周帀彌覆하고百萬種摩尼雲이光明照耀하니 백만 가지 하늘풍류가 각각 백만 가지 법의 음악을 연주하여 계속하여 끊이지 아니하며, 백만 가지 꽃구름, 백만 화만구름, 백만 장엄거리구름, 백만 가지 옷 구름이 두루두루 덮이었고, 백만 가지 마니(摩尼)구름에서 광명이 찬란하였습니다. 강설 ; 눈으로 보는 현상들만 백만으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음악소리도 백만이었다. 부처님이 오시는데 어찌 풍악이 없겠는가. 백만 가지 악기와 백만 명의 연주자들이 연주한다. 수 백 명이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나 궁중음악의 1만 배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상상해보자. 그와 같은 풍악에 맞춰서 공중에서는 온갖 아름다운 구름이 일어 주위를 뒤덮는다. 그 구름도또한 백만 꽃구름, 백만 화만구름, 백만 장엄거리구름, 백만 가지 옷 구름이 두루두루 덮이었고, 또 백만 가지 마니구름에서 광명이 찬란하였다. 從百萬種善根所生이며百萬諸佛之所護持며百萬種福德之所增長이며百萬種深心과百萬種誓願之所嚴淨이며 百萬種行之所生起며百萬種法之所建立이며百萬種神通之所變現이라恒出百萬種言音하야顯示諸法이러라 백만 가지 선근으로 생긴 것이며, 백만 부처님의 보호하심이며, 백만 가지 복덕으로 증장한 것이며, 백만 가지 깊은 마음과 백만 가지 서원(誓願)으로 깨끗이 장엄함이며, 백만 가지 행(行)으로 일어난 것이며, 백만 가지 법으로 건립한 것이며, 백만 가지 신통으로 변화하여 나타난 것이므로, 항상 백만 가지 음성을 내어 모든 법을 나타내보이었습니다. 강설 ; 위에서 말한 백만 층의 사자좌와 백만 종류의 장엄과 백만 종류의 풍악 등으로 이 법회가 이뤄진 것은 모두가 백만 가지의 선근으로 생긴 것이라는 점을 밝혔다. 그래서 백만 부처님의 보호를 받고 또 백만의 복덕이 증장하며, 백만의 깊은 마음과 서원으로 청정하게 장엄되었다. 또 백만 가지의 수행으로 일어난 바다. 또 백만 가지의 법으로 건립한 바다. 그러므로 백만 가지 신통을 변화하여 나타내고 백만 가지 말로 모든 법을 나타내 보인다. 이 얼마나 풍성하고 넉넉한가. 모든 존재의 진여생명은 본래로 이와 같건만 다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할 뿐이다. 육조 혜능스님은 진여생명의 구족성을 깨닫고 스승 오조(五祖) 홍인스님에게 말하였다 . “내 자성은 본래 청정하거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자성은 본래부터 생멸이 없거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자성은 본래부터 모든 것을 갖추고 있거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자성은 본래 아무런 동요가 없거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자성은 능히 일체만법을 만들어 내거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4. 부처님을 청하여 궁전에 들게 하다 時에 彼天王이敷置座已에向佛世尊하야曲躬合掌하며恭敬尊重하고而白佛言하사대 善來世尊이시여善來善逝시여善來如來應正等覺이시여唯願哀愍하사處此宮殿하소서 그때에 저 야마천왕이 사자좌를 차려 놓고는 부처님 세존을 향하여 허리를 굽히고 합장하며, 공경하고 존중하여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잘 오셨습니다, 선서(善逝)시여. 잘 오셨습니다, 여래 응정등각(應正等覺)이시여. 오직 바라옵건대 저희를 애민하게 여기사 이 궁전에 계시옵소서.” 강설 ; 야마천왕이 부처님을 영접하는 장면이다. 부처님을 맞아드리면서 부르는 칭호가 세존, 선서, 여래, 응정등각(應正等覺)이라 하였다. 응은 응공이며 정등각은 바르고 완전하여 평등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라는 뜻이다. 상대를 모처럼 만났을 때 그동안 그가 쌓은 공덕과 알려진 명성들을 모두 열거하여 찬탄하는 것이 바른 예의범절이다. 부처님의 공덕과 위대성은 10호로써 표현하지만 생략하고 간략히 말하였다. 5. 부처님이 궁전에 오르다 時에 佛이 受請하사卽昇寶殿하시니一切十方도悉亦如是하니라 그때에 부처님이 청을 받으시고 보배궁전에 오르시니, 일체 시방에서도 모두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강설 ; 지금 이 순간 부처님께서 야마천왕의 청을 받으시고 보배궁전에 오르실 때 일체 시방의 야마천의 보배궁전에서도 꼭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마음에 일어난 환희심은 곧 360조의 세포 인간에서도 꼭 같은 환희심이 일어난 것이며,한 인간이 예배하고 찬탄하는 것은 360조의 세포 인간세계에서도 다 함께 예배하고 찬탄하는 것이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인 화엄에서 줄기차게 밝히는 이치다. 6. 천왕이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다 爾時에 天王이卽自憶念過去佛所의所種善根하사承佛威神하고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천왕은 곧 스스로 지난 세상에 부처님이 계신 데서 선근(善根) 심은 것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강설 ; 시방 세계의 모든 야마천왕이 과거의 인연을 기억하고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게송을 설하는 내용이다. 청량스님은 “진경(晉經), 즉 60화엄에서는 ‘음악소리가 그치자[樂音止息]’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그 내용이 생략되었다. 그것은 번역하는 사람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천왕이 10절이나 되는 노래로 궁전을 찬탄하고 부처님을 청하는데 당연히 그동안 울리던 음악소리는 그치고 노래 소리만 낭랑하게 들리는 것이 노래의 가사를 마음에 새기기가 좋을 것이다. 名稱如來聞十方하사 諸吉祥中最無上이시니 彼曾入此摩尼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로다 명칭(名稱) 여래의 소문 시방에 퍼지니모든 길상(吉祥)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이 일찍이 이 마니궁전에 드셨으니그러므로 이 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야마천궁의 보장엄전은 예로부터 길상한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아주 유명하신 명칭(名稱) 여래께서 일찍이 이 마니보석궁전을 다녀가셨다. 그러므로 이곳은 가장 길상하고 복된 곳이다. 寶王如來世間燈이라諸吉祥中最無上이시니 彼曾入此淸淨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로다 보왕(寶王) 여래는 세간의 등불이시니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도 일찍이 이 청정궁전에 드셨으니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세간의 등불이신 과거의 보왕(寶王) 여래께서는 여러 가지 길상 중에 가장 높으신 분이다. 부처님을 표현하는 말 중에 ‘세간의 등불[世間燈]이라는 말처럼 좋은 말이 있을까. 우리도 얼른 세간의 등불이 되어야 할 텐데, 그 부처님도 일찍이 이곳을 다녀가셨다. 그러므로 이곳은 길상하고 복된 곳이다. 비록 조그마한 구멍가게라 하더라도 귀하고 높으신 분이 그곳을 다녀가셨다면 그곳은 그것으로 아주 유명한 가게로 소문이 날 것이다. 하물며 야마천궁의 보장엄전이야 말해 무엇 하랴. 喜目如來見無礙하사 諸吉祥中最無上이시니 彼曾入此莊嚴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로다 희목(喜目) 여래 보는 것이 걸림이 없어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도 일찍이 이 보장엄전에 드셨으니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희목(喜目) 여래 보는 것이 걸림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기쁜 눈’이다. 미소를 지어서 기쁜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보아도 있음과 없음에 걸림이 없고, 청정하거나 더러움에 걸림이 없고, 가고 옴에 걸림이 없다. 안목이 그와 같으므로 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다. 燃燈如來照世間하사 諸吉祥中最無上이시니 彼曾入此殊勝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로다 연등(燃燈) 여래 세상을 밝게 비추시니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도 일찍이 이 수승한 궁전에 드시니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과거에 석가모니부처님의 스승으로 연등(燃燈) 여래가 계셨다. 연등이라는 말도 어리석고 미혹한 세상을 밝게 비춘다는 뜻이다. 어리석고 미혹한 세상을 밝게 비춘다면 참으로 길상 중에 가장 길상하리라. 궁전도 수승한 궁전이라 하였다. 饒益如來利世間하사 諸吉祥中最無上이시니 彼曾入此無垢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로다 요익(饒益) 여래는 세간에 이익을 베푸시니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도 일찍이 이 때 없는 궁전에 드셨으니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요익(饒益) 여래는 그 이름과 같이 세간에 큰 이익을 베푸시는 분으로 표현하였다. 그렇다. 불교는 세간에 이익을 베풀려고 존재한다. 그러므로 항상 세간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 이익 중에도 부처님과 같이 진리의 가르침으로 이익을 준다면 더욱 훌륭하다. 善覺如來無有師하사 諸吉祥中最無上이시니 彼曾入此寶香殿이실새 是故此處最吉祥이로다 선각(善覺) 여래는 스승을 섬긴 일 없어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도 일찍이 보향전(寶香殿)에 드셨으니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선각 여래는 수행을 하는데 일정한 스승이 없이 스스로 정각을 이루신 분이다. 화엄경에는 무사지(無師智)라고 하여 스승에게서 얻은 지혜가 아니고 본래로 자신이 갖춘 지혜를 가장 훌륭한 지혜라고 한다. 스승 없이 스스로 정각을 이룬 그 일도 또한 길상하고 복된 일이라 길상 중에 가장 높다고 하였다. 궁전은 보배롭고 향기로운 궁전[寶香殿]이라 하였다. 勝天如來世中燈이라 諸吉祥中最無上이시니 彼曾入此妙香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로다 승천(勝天) 여래는 온 세상의 등불이시라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도 일찍이 묘향전(妙香殿)에 드셨으니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승천 여래는 태양과 같이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진리의 등불이시다. 부처님이 오신 날에 방방곡곡 사찰마다 등불을 밝히는 것도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의 등불을 상징하는 것이다. 보배궁전을 여기에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풍기는 묘향전이라고 하였다. 부처님을 여러 가지 이름으로 그 덕을 찬탄하듯이 야마천궁의 보장엄전을 또한 여러 가지 이름으로찬탄한 것이다. 無去如來論中雄이라 諸吉祥中最無上이시니 彼曾入此普眼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로다 무거(無去) 여래는 논리(論理) 중의 영웅이시라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도 일찍이 이 보안전(普眼殿)에 드셨으니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무거(無去)란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의 약칭이다. 감도 없고 옴도 없고 또한 머무름도 없는 경지의 부처님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떤 이론이 그를 당하겠는가. 그래서 논리 중의 영웅이시다. 궁전은 널리 본다는 뜻의 보안전이라고 찬탄하였다. 無勝如來具衆德하사 諸吉祥中最無上이시니 彼曾入此善嚴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로다 무승(無勝) 여래는 여러 가지 덕을 구족하시니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도 일찍이 이 선엄전(善嚴殿)에 드셨으니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위대한 성인 무승(無勝) 여래다. 궁전의 이름은 매우 아름답게 장엄이 잘 되었다는 뜻의 선엄전(善嚴殿)이다. 苦行如來利世間하사 諸吉祥中最無上이시니 彼曾入此普嚴殿이실새是故此處最吉祥이로다 고행(苦行) 여래는 세상을 이롭게 하시니모든 길상 중에 가장 높으며 그 부처님도 일찍이 이 보엄전(普嚴殿)에 드셨으니그러므로 이곳이 가장 길상합니다. 강설 ; 끝으로는 고행(苦行) 여래다. 어느 부처님인들 고행을 하시지 않은 분이 있었겠는가. 세간을 이롭게 하려면 숱한 난행과 고행을 통해서 능력을 쌓고 그 능력에 따라 세간을 이롭게 하는 책임과 의무를 수행한다. 그것이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가는 길이다. 궁전은 널리 두루두루 장엄하였다는 보엄전(普嚴殿)이다. 이렇게 하여 야마천왕은 부처님을 궁전에 모셔드리는 노래를 열곡이나 불렀다. 2013년 틱 낫한(釋一行)스님이 범어사에서 법회를 열었을 때 그를 따르는 30여명의 법사단들이 법문 전과 후에 20여분 동안 명상음악으로 분위기를 돋우었었다. 그것으로 설법을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7. 시방세계의 야마천왕들도 함께 찬탄하다 如此世界中夜摩天王이承佛神力하사憶念往昔諸佛功德하고稱揚讚歎하야十方世界夜摩天王도悉亦如是하야歎佛功德하시니라 이 세계중의 야마천왕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옛날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고 찬탄하는 것처럼, 시방세계의 야마천왕들도 또한 모두 그와 같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였습니다. 강설 ; 하나를 들면 일체가 함께 들리는 일거(一擧)에 일체거(一切擧)하는 이치다. 이 세계에서의 야마천왕이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고 게송으로 찬탄하는 것과 같이 시방의 모든 세계 야마천왕들도 똑 같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였다. 한 사람이 부처님을 찬탄하면 360조의 모든 세포들도 다 같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온 우주가 함께 흔들리는 소식이다. 8. 세존이 궁전에 드시니 궁전이 넓어지다 爾時에 世尊이 入摩尼莊嚴殿하사 於寶蓮華藏獅子座上에 結跏趺坐하신대 此殿이 忽然廣博寬容하야 如其天衆의 諸所住處하니 十方世界도 悉亦如是하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마니보배 장엄전에 드시어 보련화장(寶蓮華藏) 사자좌에서 결가부좌를 하고 앉으시니, 그 전각이 홀연히 넓어져서 하늘 대중들이 머무는 처소와 같았으며, 시방세계들도 모두 그와 같았습니다. 강설 ; 세존께서 마니보배 장엄전에 드시어 사자좌에 앉으시니 그 궁전이 홀연히 넓어져서 하늘 대중들이 머무는 곳과 같이 되었다. 하늘이란 곧 야마천이다. 하늘 대중들은 모두 야마천에 머무는데 궁전이 곧 야마천이며 야마천이 곧 궁전이 된 것이다. 야마천과 궁전은 둘이 아니고 일체이다. 그래서 하늘 대중들과 세존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야마천궁의 법회를 펼치게 된다. 이와 같이 제4회 4품의 경을 설하는 서막이 열린 것이다. 제19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 끝 대방광불화엄경 제19권 계속 二十,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 강설 ; 부처님이 야마천궁에 오르시어 사자좌에 좌정하시고, 야마천왕이 게송으로 궁전을 찬탄하였다. 다시 시방 세계에서 법회에 동참하기 위해 모여온 무수한 보살들이 있었다. 그들의 대표 보살들은 공덕림(功德林)보살과 혜림(慧林)보살과 승림(勝林)보살 등이었다. 이 대표 보살들의 각각 자신이 데리고 온 보살들을 대신하여 부처님을 찬탄한다. 한 보살이 열곡의 게송으로 노래 부른다. 마치 큰 스님이 법문을 하기 전에 법사단이나 합창단들이 찬불가를 부르고 명상음악을 연주하며 법을 청하는 청법가를 부르는 격이다. 승야마천궁품과 야마천궁게찬품 이 두 품은 십행법문(十行法門)을 설하기 위한 서론이다. 二十, 야마천궁게찬품(夜摩天宮偈讚品) 1. 대중들이 운집하다 (1) 큰 보살들이 미진수 보살들과 함께 오다 1. 대중들이 운집하다 (1) 큰 보살들이 미진수 보살들과 함께 오다 爾時에 佛神力故로 十方各有一大菩薩이 一一各與佛刹微塵數菩薩로 俱하사 從十萬佛刹微塵數國土外諸世界中하야 而來集會하시니라 그때에 부처님의 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는데, 낱낱 보살이 제각기 부처님 세계의 미진수 수처럼 많은 보살들과 함께 십만 세계의 미진수 국토 밖에 있는 세계로부터 와서 모였습니다. 강설 ; 동서남북과 사유상하에 각각 한분씩 열 명의 큰 보살이 있었다. 그들은 또 각각 한 세계를 작은 먼지로 만들었을 때 그 먼지 숫자와 같이 많은 보살들을 거느리고 이 법회에 함께 도착하였다. 그 보살들의 수효가 무수 억조쯤이라고 하면 비슷할까.그런데 이들은 멀고 먼 세계 밖에서 모여왔다. 얼마나 먼 거리인가하면 10만불찰 미진수 국토 밖에 있는 여러 세계에서 왔다. 10만불찰 미진수는 10만개의 지구를 작은 먼지로 만들었을 때 그 수효와 같이 많은 세계 밖이다. 요즘의 표현으로 100억 광년 거리 밖이라면 비슷할까. 화엄경의 법회는 이와 같이 광대무변하고 무량무수하다. 청량스님은 “10만이란 온 곳의 분량이다. 그러나 숫자를 나타내는 것은 수행계위를 따라 더하여진다. 10신은 십(十),십주는 백(百),십회향은 만(萬)인데 이것은 합당히 천(千)이라고 해야 하나 10만이라고 하였다. 혹 번역하는 사람의 오역이리라. 혹은 십백(十百)이라고 하였으니 전하여 쓰는 사람의 오류이리라.”라고 하였다. (2) 보살들의 이름 其名曰功德林菩薩과慧林菩薩과勝林菩薩과無畏林菩薩과 慚愧林菩薩과精進林菩薩과力林菩薩과行林菩薩과覺林菩薩과智林菩薩이요 그들의 이름은 공덕림(功德林)보살과 혜림(慧林)보살과 승림(勝林)보살과 무외림(無畏林)보살과 참괴림(懺愧林) 보살과 정진림(精進林)보살과 역림(力林)보살과 행림(行林)보살과 각림(覺林)보살과 지림(智林)보살 들이었습니다. 강설 ; 열 명의 대표 보살들의 이름이다. 통현(通玄)장자는 “이름이 모두 숲이라는 임(林)자인 것은 넓고 많다는 뜻이며, 덮어서 그늘을 드리운다는 뜻이며, 장엄의 뜻이다. 몸통과 줄기와 큰 가지와 잔가지와 꽃과 잎과 열매가 서로 돕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3) 떠나온 세계 此諸菩薩의所從來國은所謂親慧世界와幢慧世界와寶慧世界와勝慧世界와 燈慧世界와金剛慧世界와安樂慧世界와日慧世界와淨慧世界와梵慧世界니라 이 모든 보살들이 떠나온 세계는 친혜(親慧)세계와 당혜(幢慧)세계와 보혜(寶慧)세계와 승혜(勝慧)세계와 등혜(燈慧)세계와 금강혜(金剛慧)세계와 안락혜(安樂慧)세계와 일혜(日慧)세계와 정혜(淨慧)세계와 범혜(梵慧)세계 들이었습니다. 강설 ; 보살들이 떠나온 세계의 이름들이다. 모두 지혜를 뜻하는 혜(慧)자로 되었다. 10행(行)의 법을 펼치려면 혜(慧)가 그 근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4) 수행한 곳의 부처님들 此諸菩薩이各於佛所에淨修梵行하시니所謂常住眼佛과無勝眼佛과 無住眼佛과不動眼佛과天眼佛과解脫眼佛과審諦眼佛과明相眼佛과最上眼佛과紺靑眼佛이라 이 모든 보살들이 각각 부처님 계신 데서 범행을 청정하게 닦았으니, 이른바 상주안불(常住眼佛)과 무승안불(無勝眼佛)과 무주안불(無住眼佛)과 부동안불(不動眼佛)과 천안불(天眼佛)과 해탈안불(解脫眼佛)과 심체안불(審諦眼佛)과 명상안불(明相眼佛)과 최상안불(最上眼佛)과 감청안불(柑靑眼佛)이었습니다. 강설 ; 화엄경에는 언제나 보살들이 중심이 되어 광대한 법회를 연 것이다. 그래서 먼저 법회에 참석한 보살의 이름을 열거하고, 다음은 보살들이 온 세계를 밝혔고, 다음에는 보살들이 섬기고 수행한 부처님을 밝혔다. 하나하나 배속하면 공덕림보살은 친혜 세계에서 상주안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였으며, 혜림보살은 당혜 세계에서 무승안 부처님을 보시고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각각 열 명의 보살이 자신이 살던 세계와 모시던 부처님을 하나하나 밝혔다. (5) 사자좌에 앉다 是諸菩薩이至佛所已에頂禮佛足하고隨所來方하야各化作摩尼藏獅子之座하사於其座上에結跏趺坐하시니라 이 모든 보살이 부처님 계신 데 이르러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떠나온 방위를 따라 제각기 마니장 사자좌를 변화하여 만들고 그 사자좌 위에서 가부좌하고 앉았습니다. 강설 ; 모든 보살들이 각각 자신이 온 방위를 따라서 질서정연하게 사자좌를 만들어서 가부좌를 하고 앉은 모습을 그렸다. 올림픽이 열릴 때 각국의 선수들이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음악과 함께 입장하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아마 그 규모의 10억 배는 넘는 대중들이리라. 그리고 한 방향 한 곳에서 차례대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시방에서 동시에 그 많은 대중들이 오는 모습을 그려보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6) 시방세계에서도 모두 한결 같았다 如此世界中夜摩天上에菩薩來集하야一切世界도悉亦如是하니其諸菩薩世界如來의所有名號가悉等無別하니라 이 세계의 아마천상에 보살들이 모인 것처럼, 일체 세계에서도 모두 또한 이와 같았으니, 그 보살들과 세계와 여래의 이름도 모두 같았습니다. 강설 ; 시방에서 각각 큰 보살들이 부처님 세계의 미진수 수처럼 많은 보살들과 함께 십만 세계의 미진수 국토 밖에 있는 세계로부터 모여오는 이와 같은 일은 이 세계에서만 열리고 있는 광경이 아니라 일체 세계에서 다 같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하나가 곧 일체인 화엄의 눈으로 본 광경을 그렸다. 이러한 법회가 한정된 시간에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화엄경은 상설(常說) 변설(徧說)이기 때문에 모든 시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설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작은 우주나 큰 우주나산하대지 산천초목 삼라만상에서 춘하추동 밤낮으로 화엄경을 설하고 있는 모습이다. 어디서나 언제든지 이 모습 그대로가 화엄경을 설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2. 세존이 두 발등으로 광명을 놓다 爾時에 世尊이從兩足上하야放百千億妙色光明하사普照十方一切世界夜摩宮中佛及大衆하사靡不皆現하시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두 발등으로 백 천억 미묘한 빛 광명을 놓아 시방으로 일체 세계의 야마천궁의 부처님과 대중들을 널리 비추니, 모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강설 ; 10주(住) 법문을 설할 때는 머문다는 의미에서 발가락에서 광명을 놓았고, 10행(行) 법문을 설할 때는 걸어간다는 뜻으로 발등에서 광명을 놓았다. 백 천억 미묘한 색깔 광명이라고 하였으니 그 빛이 얼마나 찬란하며 눈부실까. 그 광명으로 시방의 일체 세계 야마천궁의 부처님과 대중들을 황하게 나타내었다. 세상에는 빛이 없으면 사물을 볼 수 없고 진리의 세계에는 지혜가 없으면 부처님도 보이지 않고 보살도 보이지 않고 중생들도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마음의 이치와 연기의 이치와 공의 이치와 하나가 곧 일체인 이치가 눈에 보이겠는가. 그래서 불교에서 광명이란 언제나 깨달음의 지혜를 뜻한다. 3. 보살들이 각각 부처님을 찬탄하다 (1) 공덕림(功德林)보살의 찬탄 <1> 수승한 덕 爾時에 功德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공덕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佛放大光明하사普照於十方하시니 悉見天人尊이通達無障礙로다 부처님 큰 광명 놓아시방을 두루 비추시니 천상과 인간의 높은 어른 뵈옵기환히 트이어 걸림 없도다. 강설 ; 처음 공덕림보살은 동방 세계에서 온 보살이고, 마지막 보살은 상방 세계에서 온 보살이다. 동방에서 시작하여 상방에서 마친다. 언제나 보살들이 게송을 설할 때는 반드시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설한다. 그 부처님이란 내 안의 부처님이기도 하고 밖의 부처님이기도 하다. 안팎이 둘이 아니면서 또한 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태양빛이나 달빛이나 등불이라도 없다면 사물을 볼 수 없고, 출세간에는 지혜광명이 없다면 부처님을 볼 수 없다. 천상과 인간의 높은 어른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다면 부처님의 뱃속에 있은들 어찌 부처님을 볼 수 있겠는가. 공덕림보살은 이와 같이 부처님의 공덕을 열곡으로 노래 불러 찬탄하였다. 佛坐夜摩宮하사 普徧十方界하시니 此事甚奇特하야世間所希有로다 부처님 야마천궁에 앉아서시방세계에 두루 하시니 이런 일은 매우 기특하여세간에서 희유하도다. 강설 ; 부처님이 놓으신 그 광명의 힘으로 부처님이 야마천궁전에 앉아있으면서 시방 세계에 두루 한 사실을 다 본다. 참으로 신기하고 희유한 이치이다. 제3의 눈을 떠야 이러한 이치를 알 것이다. 須夜摩天王이 偈讚十如來하니 如此會所見하야一切處咸爾로다 수야마천왕이열 부처님을 게송으로 찬탄하니 이 모임에서 보는 것처럼일체 처에서도 모두 그러하도다. 강설 ; 세존께서 보리수나무 밑을 떠나지 않으신 채 수미산을 거쳐 야마천 보배궁전에 오셨을 때, 야마천왕이 자신의 보배궁전에 과거 열 부처님이 다녀가셨다는 게송찬탄을 다시 공덕림보살이 게송으로 재차 말씀한 것이다. 彼諸菩薩衆이 皆同我等名하야 十方一切處에演說無上法이로다 저 모든 보살대중들모두 우리 이름과 같으며 시방 일체 처에서가장 높은 법을 연설하도다. 강설 ; 저 모든 보살대중들이 모두 우리들의 이름과 같다고 하였다. 그것은 무슨 뜻일까. 이곳뿐만 아니라 시방 일체 세계의 야마천궁에 모여온 모든 보살과 이곳 우리들이 뵙는 보살들과 이름이 같다는 뜻이다.달리 해석하면 우리들의 이름이 곧 보살들의 이름이며, 보살들의 이름이 곧 우리들의 이름이므로 우리가 그대로 보살이며 보살이 그대로 우리들이다. 우리들을 두고 달리 무슨 보살들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치가 또한 가장 높은 법이다. 所從諸世界의 名號亦無別하니 各於其佛所에淨修於梵行이로다 떠나온 모든 세계들그 이름도 또한 다르지 않고 제각기 그 부처님 계신 데서범행(梵行)을 청정하게 닦았도다. 강설 ; 앞에서 보살들의 이름이 우리들의 이름과 같다고 했다. 여기서는 세계의 이름들도 또한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그야말로 모든 존재가 동명동호(同名同號)다. 그 모든 세계에서 청정한 범행을 닦았다. 彼諸如來等의名號悉亦同이라 國土皆豊樂이요神力悉自在로다 저 모든 부처님들의명호도 모두 다 같고 국토가 다 풍요롭고 즐거워신력이 모두 자재하도다. 강설 ; 여기서는 모든 여래의 명호가 또한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보살의 명호와 세계의 이름과 부처님의 명호가 모두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이 세계에서처럼 시방 일체 세계 야마천궁에서도 여기와 같이 보살들이 모여오고, 그들도 떠나온 세계가 있고, 모시던 부처님이 있었다. 그 이름들이 모두 이곳과 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우주에 무비(無比)라는 이름이 있는데 또 다른 우주에도 역시 무비가 있고, 또 다른 미진수 같이 많고 많은 우주에서도 역시 무비라는 이름이 있다. 중국 항주의 영암사라는 절 오백나한전에 무비라는 아라한이 있는 것을 보았다. 十方一切處에 皆謂佛在此라하나 或見在人間하며或見住天宮이로다 시방 일체 모든 곳마다모두들 부처님이 여기 계신다지만 혹은 인간에 계시고혹은 천궁에 계심을 보도다. 강설 ; 여래현상품에 “부처님의 몸은 온 법계에 충만해 계시면서 일체 중생들의 앞에 널리 나타나셨네. 인연을 따라 감응하여 두루 하지 않는 곳이 없으나 그러나 항상 이 보리수나무 밑의 금강보좌에 계시도다.”라는 게송처럼 부처님은 온 우주 법계에 다 계시지만 인간들은 인간에 있다하고 천상에서는 천상에 계신다 한다. 如來普安住 一切諸國土어시든 我等今見佛이處此天宮殿이로다 여래는 일체 모든 국토에두루 편안히 계시지만 우리는 부처님이 지금이 야마천궁에 계심을 보도다. 강설 ; 여래는 일체 모든 국토에 편안히 계시지만 우리들은 이곳 야마천궁전에 계시는 것을 본다. 뿐만 아니라 방방곡곡 절마다, 집집마다, 사람 사람의 가슴마다, 마음마다, 다 그렇게 계시지만 인연을 따라 안목을 따라 다 달리 본다. <2> 덕이 이뤄진 인연 昔發菩提願하사普及十方界실새 是故佛威力이充徧難思議로다 옛적 보리심을 발할 때의 서원이시방세계에 두루 하였을 새 그리하여 부처님의 위신력이가득 차서 헤아릴 수 없도다. 강설 ; 부처님의 위신력이 이와 같이 2천 6백여 년이 지나도록 더욱 빛을 발하고 세월이 지날수록 무수한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옛적에 처음 보리심을 발할 때에 세운 서원이 온 법계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근고지영(根固枝榮)이라 하였다. 뿌리가 견고하면 그 가지가 무성하다. 식물이 그렇고, 사업이 그렇고, 공부도 수행도 모두 그와 같은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遠離世所貪하사 具足無邊德이실새 故獲神通力하시니衆生靡不見이로다 세상의 탐욕 멀리 떠나고그지없는 공덕을 구족하시니 신통한 힘 얻으신 일중생들 못 보는 이 없도다. 강설 ; 불법을 깨닫겠다고 하여 출가수행하면서 한편으로 세속적 탐욕을 버리지 못한다면 수행의 공덕이 쌓이겠는가. 진정으로 속된 탐욕을 멀리 떠나 수행에 몰두한다면 저절로 무량한 공덕을 구족할 것이다. 또한 신통한 힘을 얻을 것이며 일체 중생들이 다 알아주리라. 遊行十方界하사대 如空無所礙하시니 一身無量身이여其相不可得이로다 시방 세계에 다니시기허공처럼 장애 없으니 한 몸인가 한량없는 몸인가그 모양 찾을 길 없도다. 강설 ; 부처님이 시방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는데마치 허공처럼 아무런 장애가 없다.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인연이 있거나 인연이 없거나 중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나타나야 한다. 중생을 위한 교화의 현신이 한 몸인가? 한량없는 몸인가? 한 몸이 한량없는 몸이며, 한량없는 몸이 한 몸이다. 佛功德無邊하시니 云何可測知아 無住亦無去하사대普入於法界로다 그지없는 부처님 공덕어떻게 헤아릴 수 있으랴 머물지 않고 가지도 않지만온 법계에 두루 드시네. 강설 ; 부처님의 공덕 한량이 없어서 측량할 수 없다. 부처님의 몸은 가는 것도 없으며, 오는 것도 없으며, 머무는 것도 또한 없다. 그래서 온 법계에 두루 한다. 오늘 날의 사람들도 사회적 능력이 많고 따라서 활동도 많은 이들은 수십 종의 직책을 가지고 수십 곳에 그 몸을 나타낸다. (2) 혜림(慧林)보살의 찬탄 <1> 부처님을 만나기 어렵다 爾時에 慧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혜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世間大導師離垢無上尊이여 不可思議劫에難可得値遇로다 세간에서 가장 위대하신 도사(導師)시며, 때 없고 가장 높으신 어른 불가사의한 겁을 지나도 만나 뵙기 어려워라. 강설 ; 두 번째 혜림보살이 부처님의 공덕을 또 열곡으로 찬탄한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신 인생의 안내자. 온갖 번뇌 다 떠나서 가장 높으신 어른이시다. 이와 같은 세존을 언제 만나랴.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 뵙기 어렵도다. 그러나 이제 화엄경을 통해서 진정한 부처님을 뵙게 되었으니 부디 참다운 정법의 가르침을 깨달아 지이다. 佛放大光明하시니 世間靡不見이라 爲衆廣開演하사饒益諸群生이로다 부처님이 큰 광명 놓으시니세간에서 못 보는 이 없고 대중에게 널리 연설하시어모든 중생을 이익케 하도다. 강설 ; 부처님의 큰 광명이란 우리가 공부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이다. 또 대방광불화엄경은 우주 삼라만상과 천지만물들이다. 이것이 곧 큰 광명이며, 큰 광명이라는 사실을 경전을 통해서 깨닫게 한다. 이와 같은 사실보다 더 큰 이익은 없으리라. 如來出世間하사爲世除癡冥하시니 如是世間燈이여希有難可見이로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심은세상을 위하여 어리석음을 제거하시니 이와 같은 세상의 등불은희유(稀有)하여 보기 어렵도다. 강설 ; 여래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시다. 세상 사람들의 어리석음의 어둠을 다 제거하시는 진리의 가르침으로 사람사람의 마음을 환하게 밝게 하신다.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에 등불을 밝혀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已修施戒忍과 精進及禪定과 般若波羅蜜하사以此照世間이로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과정진(精進)과 그리고 선정(禪定)과 반야(般若)바라밀을 이미 다 닦아이것으로 세간을 비추는 도다. 강설 ;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는데 가장 기본이며 대승보살의 최상의 덕목을 밝혔다. 실로 이 6바라밀만 잘 실천하면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밝은 등불이 된다. 세상은 이처럼 불타고 있는데 호흡이나 헤아리며 앉아 있을 시간이 있는가? 어린 생명이 저렇게 고해에 빠져 있거늘 통곡하지 아니하고 무얼 하는가? 그것이 과연 여래의 진실한 뜻인가? 如來無與等하시니 求比不可得이라 不了法眞實이면無有能得見이로다 여래는 더불어 같을 이도 없고비교할 이를 구해도 얻을 수 없나니 진실한 법을 알지 못하고는아무도 보지 못하느니라. 강설 ; 부처님을 여래니, 세존이니, 도사니, 지혜의 등불이니 하면서 온갖 찬탄을 하지만 실로 부처님이 우리들에게 마음 깊이 들려주고자 하는 진실한 법을 알지 못하면 그 누구도 부처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리라. 佛身及神通이 自在難思議라 無去亦無來하사대說法度衆生이로다 부처님의 몸과 신통이자재하심을 헤아릴 수 없어 가는 일 없고, 또한 오는 일 없지만법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하도다. 강설 ; 부처님의 몸을 천백억화신을 천변만화하며 신통을 시방 세계에 마음대로 나타내어 헤아릴 수 없지만, 어디로 가는 일도 없고 어디서 오는 일도 없으면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법을 설하신다. 若有得見聞 淸淨天人師 永出諸惡趣하야捨離一切苦로다 청정한 인천(人天)의 스승을만약 누가 보고 들으면 모든 악취(惡趣)에서 영원히 벗어나일체 고통을 여의게 되리. 강설 ; 천신들에게나 인간들에게나 뛰어난 스승, 부처님을 만약 어떤 이가 한번 보거나 한번 듣기만 해도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과 같은 온갖 나쁜 갈레에서 영원히 벗어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부처님을 보고 듣는 일인가.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이란 곧 법이며 진리다. 법을 보고 진리를 본 사람이 어찌 악도에 떨어지겠는가. <2> 수승함을 헤아려서 나타내다 無量無數劫에修習菩提行이라도 不能知此義면不可得成佛이로다 한량없고 수없는 겁 동안보리의 행을 닦았더라도 능히 이 이치를 알지 못하면부처를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강설 ; 무량 무수겁에 보리행을 닦더라도 이 이치를 알지 못하면 부처를 이룰 수 없다는 이 이치란 무엇일까? 여래를 보거나 들으면 악취를 영원히 벗어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여래를 보고 듣는 일인가? 不可思議劫에供養無量佛이라도 若能知此義면功德超於彼로다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했어도 만약 이런 뜻을 알게 된다면공덕이 저보다 뛰어나리라. 강설 ; 불가사의 겁 동안 부처님을 공양하더라도 이 이치를 알면 그 공양의 공덕을 뛰어넘는다. 이 이치란 무엇일까?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본다.”는 이치이다. 법을 깨닫지 못하면 설사 눈으로 부처님을 보더라도 마치 얼굴을 담벼락에 갖다 댄 것과 같다. 無量刹珍寶를滿中施於佛이라도 不能知此義면終不成菩提로다 한량없는 세계에 가득한 보배로부처님께 공양했을지라도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끝까지 보리를 이룰 수 없네. 강설 ; 진정으로 여래를 친견한다는 것은 법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한량없는 세계에 보배를 가득 채워 부처님께 공양한다하더라도 불법의 진정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면 무슨 공덕이 되겠는가. 불공을 좋아하고 기도를 좋아하는 우리 불자들은 어떤 것이 진정한 불공이며 기도인가를 생각해볼 일이다. (3) 승림(勝林)보살의 찬탄 <1> 부처님의 덕은 넓다 爾時에 勝林菩薩이承佛威力하사普觀十方하고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승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譬如孟夏月에 空淨無雲曀하면 赫日揚光輝하야十方靡不充이로다 비유컨대 첫 여름날구름 없는 깨끗한 하늘 밝은 태양 광명이 찬란해시방에 가득 충만하도다. 其光無限量하니無有能測知라 有目斯尙然이어든何况盲冥者아 그 빛이 한량이 없어헤아려 알 수 없나니 눈뜬 사람도 오히려 그렇거든하물며 소경들이랴. 諸佛亦如是하사功德無邊際하시니 不可思議劫에莫能分別知로다 모든 부처님도 그와 같아서 끝 간 데 없는 크나큰 공덕 불가사의한 겁을 지나면서도 분별하여 알 수 없도다. 강설 ; 모든 부처님의 끝 간 데 없는 크나큰 공덕을 태양의 밝은 광명과 비교하였다. 태양광명이 아무리 밝게 빛난다하더라도그늘도 있고 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면 밤이 되어 캄캄해진다. 그러나 부처님의 한량없는 법의 공덕은 그늘도 없고 태양처럼 서산으로 넘어가는 일도 없으니 어찌 비교하겠는가. <2> 법이 깊고 깊음을 나타내다 諸法無來處며亦無能作者며 無有所從生일새不可得分別이로다 모든 법은 온 곳도 없고 또한 누가 지은 이도 없으며 어디로부터 난데도 없나니 어떻다고 분별할 수 없네. 강설 ; 모든 법은 본래로 온 곳도 없으며, 만든 사람도 없다. 또한 어디서 생긴 것도 아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으며 분별하여 알 수도 없다. 一切法無來일새是故無有生이니 以生無有故로滅亦不可得이로다 일체 법이 온 데가 없으니 그러므로 난 것이 아니요 이미 난 것이 아닌지라 멸한다고도 할 수 없네. 강설 ; 법이란 본래로 존재하는 이치일 뿐이다. 형상이 있는 실체가 아니기에 온 데가 없다. 온 데가 없다는 것은 생긴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긴 것이 아니라면 소멸도 있을 수 없다. 一切法無生이며亦復無有滅이니 若能如是解하면斯人見如來로다 일체 법이 난 일도 없고 또한 멸함도 없나니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여래를 보게 되리라. 강설 ; 화엄경의 명구 중의 하나다. 불생불멸의 이치가 불교다. 반야심경에도 “불생불멸”이라고 하였으며, 법화경에도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 세간의 모양이 항상 머문다.”는 불생불멸을 이야기 하였다. 모든 존재의 불생불멸의 이치를 깨달으면 곧 여래를 본다. 諸法無生故로自性無所有니 如是分別知하면此人達深義로다 모든 법이 난 일이 없으므로 자성도 있는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분별하여 알면 이 사람 깊은 이치 통달하리라. 강설 ; 모든 법은 생긴 것이 아니므로 고정 불변하는 자성도 있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이치를 아는 사람은 곧 여래를 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깊은 이치를 통달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以法無性故로無有能了知니 如是解於法하면究竟無所解로다 법이 자성이 없으므로 능히 알 수가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을 이해하면 철저히 아는 바가 없으리라. 강설 ; 모든 것은 실체라고 할 것이 있어야 그것을 알 수가 있다. 실체가 없으면 안다는 것이 없다. 법을 이와 같이 이해한다면 철저히 아는 바가 없다. 所說有生者는以現諸國土니 能知國土性하면其心不迷惑이로다 말한 바의 생긴 것이 있다는 것은 나타난 모든 국토로써 하는 것이다. 국토의 성품을 능히 알면 그 마음 미혹하지 않으리라. 강설 ; 크게 보면 사람도 국토위에 존재하는 것이며 일체 사물이 모두 국토위에 존재한다. 그래서 생긴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눈앞에 펼쳐진 일체 국토를 보고 하는 소리다. 그런데 국토의 진실한 성품을 알면 그 국토라는 사실에 결코 미혹하지 않을 것이다. 世間國土性이觀察悉如實하니 若能於此知하면善說一切義로다 세간과 국토의 성품을 관찰하면 실상과 같나니 만일 여기에서 알면 일체 이치를 잘 말하리라. 강설 ; 세간과 국토의 성품이 실상과 같다는 것은 현상이 곧 공한 것이고 공한 것이 곧 현상이라는 뜻이다. 만약 이와 같은 사실을 능히 잘 알면 일체의 이치를 능히 잘 설명할 수 있으리라. (4) 무외림(無畏林)보살의 찬탄 <1> 믿을 바의 경계를 말하다 爾時에 無畏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무외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如來廣大身이 究竟於法界실새 不離於此座하고而徧一切處로다 여래의 넓고 크신 몸 끝없는 법계에 가득하건만 이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모든 곳에 두루 하도다. 강설 ; 여래의 몸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법계로 몸을 삼는다. 법계가 곧 여래요 여래가 곧 법계다. 그러나 깨달음의 장소인 보리좌를 떠나지 않고 모든 곳에 두루 하다. 여래를 이와 같이 아는 것은 바른 관찰이요, 이와 가르게 관찰하는 것은 삿된 관찰이다. <2> 들어서 믿는 이익을 말하다 若聞如是法하고恭敬信樂者는 永離三惡道의一切諸苦難이로다 만일 이와 같은 법을 듣고 공경하여 믿고 좋아하는 이는 삼악도(三惡道)의 일체 고통을 영원히 떠나리라. 강설 ; 만약 어떤 사람이 진리의 가르침인 이 화엄경을 듣고 공경하여 믿고 좋아한다면 그 사람은 결정코 삼악도의 온갖 고통을 영원히 벗어나리라. 삼악도의 고통이란 바른 이치와 진리의 즐거움을 모르게 때문이다. 設往諸世界의無量不可數라도 專心欲聽聞如來自在力하나니 설사 한량도 없고 셀 수도 없는 모든 세계에 두루 다니더라도 오로지 여래의 자재하신 힘만을 듣고 또 들으려 하라. 강설 ; 사람은 살아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누구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어디든지 돌아다니려고 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의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온갖 견문을 넓힌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오로지 여래의 자재하신 힘만을 들으려하라. 그것이 가장 유익한 일이다. 예컨대 여래의 열 가지 힘[十力]이라든가 그 외의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이나 네 가지 섭수하는 법[四攝法] 등을 듣고 행하려 하라. 如是諸佛法이是無上菩提일새 假使欲暫聞이라도無有能得者로다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 법들은 참으로 가장 높은 보리니 설사 잠깐만 듣고자 하여도 능히 얻어 들을 이 없느니라. 강설 ; 모든 부처님의 법이란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보리법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부처님의 법을 잠깐 동안만 듣고자하든지, 한 마디 말만 듣고자 해도 얻어 들을 수 없다. 그래서 열반경에서 설산(雪山)동자는 반게송(半偈頌)을 얻어 들으려고 이 목숨을 던졌다지 않는가. 若有於過去에信如是佛法이면 已成兩足尊하야而作世間燈이로다 만약 어떤 이가 지난 세상에 이와 같은 부처님 법을 믿었다면 이미 양족존(兩足尊)을 이루어 세간의 등불이 되었느니라. 강설 ; 부처님의 법은 가장 높은 보리법이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법을 지난 세상에서 진실로 믿었다면 지혜와 복덕, 이 두 가지 만족한 부처를 이루어 세상의 등불이 되어 중생들의 어리석은 미혹의 어둠을 다 소멸하리라. 若有當得聞如來自在力하고 聞已能生信이면彼亦當成佛이로다 만일 어떤 이가 오는 세상에 여래의 자재한 힘을 듣고 듣고 나서 능히 신심을 내었다면 그도 또한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라. 강설 ; 과거세에나 미래세에나 언제든지 여래의 법과 자재한 능력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었다면 그도 또한 마땅히 성불하리라. 若有於現在에能信此佛法이면 亦當成正覺하야說法無所畏로다 만일 지금 세상에서도 능히 이 부처님 법을 믿으면 또한 마땅히 정각을 이루고 법을 설하기에 두려움이 없으리라. 강설 ; 만약 현재에라도 불법을 믿는다면 또한 마땅히 정각을 이루어 법을 설함에 두려움이 없으리라. 부처님의 법에 무슨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있겠는가. 언제라도 믿기만 하면 마땅히 성불할 것은 의심이 없다. 無量無數劫에此法甚難値니 若有得聞者는當知本願力이로다 한량없고 수없는 겁 동안에 이 법은 만나기 매우 어려운 것이니 만일 들은 이 있다면 마땅히 본래의 원력인 줄 알지니라. 강설 ; 실로 부처님의 정법을 만나기란 어려운 일이다. 비록 불교라는 범위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정법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진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정법을 만나기란 심히 어렵다. 만약 정법을 듣고 믿음을 낸다면 그는 분명히 과거 세상에서 세운 본래의 서원일 것이다. 무상심심 미묘법을 백천만겁에도 만나기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若有能受持 如是諸佛法하고 持已廣宣說이면此人當成佛이어든 만약 이와 같은 부처님의 법을 능히 받아 지니고 받아 지닌 뒤에 널리 설하면 이 사람은 마땅히 부처를 이루리라. 강설 ; 불법을 잘 배워서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잘 받아 지녀 또 다른 사람을 위하여 널리 연설한다면 그것만으로 마땅히 성불할 것이다. 부처님도 스스로 깨닫고 나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의 내용을 널리 전파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던가. 전법게(傳法偈)에도, “가령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수 만년을 지내거나 이 몸이 드넓은 평상이 되어 부처님을 모시더라도 만약 법을 전하여 사람들을 제도하지 아니하면 끝내 부처님의 은혜를 갚을 수 없으리라.” 라고 하여 전법에 큰 의미를 두었다. 만약 전법을 하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법이 그것으로 단절되기 때문이다. 况復勤精進하야堅固心不捨아 當知如是人은決定成菩提로다 하물며 다시 부지런히 정진하여 견고한 마음 버리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러한 사람은 결정코 보리를 성취할 것이니라. 강설 ; 모든 부처님의 법을 잘 수지하여 다른 사람을 위하여 널리 설하면서, 한편 더욱 부지런히 정진하여 불법에 대한 마음이 견고하다면, 이와 같은 사람은 반드시 정각을 성취할 것이다. (5) 참괴림(慙愧林)보살의 찬탄 <1> 설법의 어려움을 밝히다 爾時에 慚愧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참괴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若人得聞是 希有自在法이면 能生歡喜心하야疾除疑惑網이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희유하고 자재한 법을 듣고 능히 기쁜 마음을 내면 의혹의 그물을 빨리 제거할 것이다. 강설 ; 불법의 위신력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한 것이다. 사람 존재의 실상을 환하게 꿰뚫어 아는 사람이 무엇에 매이겠는가. 이것이 불법의 매력이다. 불법은 대해탈 대자유의 법이다. 一切知見人이 自說如是言하사대 如來無不知실새是故難思議로다 일체를 알고 보는 사람 스스로 이렇게 말하되 ‘여래는 모르는 것이 없나니 그러므로 불가사의하니라.’라고 강설 ; 정법을 깨달아 아는 사람은 여래가 무엇을 아는지에 대해서 역시 다 안다. 여래는 모른 것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 래서 여래는 불가사의한 분이라는 것을 안다. 無有從無智하야而生於智慧니 世間常暗冥일새是故無能生이로다 지혜 없는 데서는 지혜가 날 수 없으니 세간은 항상 어둔 곳이라 지혜를 낼 수 없느니라. 강설 ; 콩 심은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과 같이 지혜에서 지혜가 나고 미혹에서 미혹이 난다. 지혜가 없는 데서는 지혜가 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본래로 가지고 타고난 지혜가 있다. 그것을 스스로 터득하면 된다. 본래 없다면 어디서 가지고 오겠는가. 만약 어디서 가지고 온다면 금을 캐는 광산과도 같아서 지혜를 캐서 가지고 올 수 있지 않겠는가. <2> 법과 비유를 해석하다 如色及非色이此二不爲一인달하야 智無智亦然하야其體各殊異로다 물질과 물질 아닌 것 이 둘이 하나 될 수 없나니 지혜와 무지(無智)도 그러하여 그 자체 각각 다르도다. 강설 ; 색(色)과 공(空)이 둘이면서 둘이 아니다. 그래서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한다. 이와 같은 본질을 기본으로 하여 다시 또 현상으로 눈을 돌리면 색은 색이고 공은 공이다. 그 자체가 각각 다르다. 너와 내가 본질에서는 하나이지만 현상에서는 우리는 또한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如相與無相과生死及涅槃이 分別各不同인달하야智無智如是로다 모양 있는 것 모양 없는 것 생사와 열반도 차별하여 각각 다르니 지혜와 무지도 그러하니라. 강설 ; 형상과 형상 없음이 하나에서 시작했지만 엄연히 다르고 생사와 연반이 공화(共和)이지만 각각 다르듯이 지혜와 무지(無智)도 또한 그와 같음을 밝혔다. 世界始成立에 無有敗壞相하니 智無智亦然하야二相非一時로다 세계가 처음 생길 적에는 파괴되는 모양 없나니 지혜와 무지도 또한 그러하여 두 모양이 한 때가 아니로다. 강설 ; 지혜와 무지가 서로 다름을 또 비유를 들어 밝혔다. 세계도 우리들 육신과 같이 처음 생길 때에야 누가 죽음을 알겠는 가. 생기는 것만 있고 탄생만 있다. 지혜와 무지도 궁극에는 하나이지만 엄연히 달라서 두 가지 모양이 한 때가 아니다. 如菩薩初心이不與後心俱인달하야 智無智亦然하야二心不同時로다 보살의 처음 마음은 나중 마음과 함께하지 않나니 지혜와 무지도 또한 그러하여 두 마음이 동시(同時)가 아니로다. 강설 ; 사실은 처음 마음이 끝 마음이고 끝 마음이 처음 마음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처음 마음과 나중 마음은 다른 것이다. 세상에야 그런 마음을 얼마나 많이 보는가. 헤어지고 만남이 모두 처음 마음과 나중 마음이 다른데서 오는 것이다. 지혜와 무지도 그와 같은 것이다. 譬如諸識身이 各各無和合인달하야 智無智如是하야究竟無和合이로다 비유하자면 모든 식(識)과 몸이 각각 화합하지 않은 것과 같이 지혜와 무지도 그러하여 구경에는 화합이 없느니라. 강설 ; 또 비유를 들었다. 본질에서 보면 실은 몸과 식이 화합하여 사람으로서의 활동과 작용을 한다. 그래서 몸이 식이고 식이 몸이지만 현상의 차별에서 보면 각각 다른 것이어서 화합이 아니다. 지혜와 무지도 그와 같다. 如阿伽陀藥이能滅一切毒인달하야 有智亦如是하야能滅於無智로다 마치 '아가타'약이 일체 독을 소멸함과 같이 지혜도 또한 그와 같아서 무지를 능히 소멸하느니라. 강설 ; 엣 인도에 있었던 전설의 약품으로 지혜에다 비유하였다. 아가타라는 약은 모든 독을 소멸하듯이 지혜도 그와 같아서 일체 무지를 능히 다 소멸한다. 그렇다. 깨달음의 지혜로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 그래서 불교는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3> 부처님의 덕을 맺어 말하다 如來無有上이시며亦無與等者라 一切無能比일새是故難値遇로다 여래에게는 보다 높은 이가 없고 또한 같을 이도 없으며 일체 것과 비교할 수 없나니 그래서 만나기 어려우니라. 강설 ;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불게송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있다 . “천상과 천하에 부처님 같을 이 없고 시방 세계에서도 비교할 이 없도다. 세간에 있는 것 내 모두 보았으나 일체에 부처님 같은 이 없더라.” 실로 부처님의 덕은 아무리 찬탄하고 또 찬탄하여도 다할 수가 없다. (6) 정진림(精進林)보살의 찬탄 <1> 부처님만이 안다 爾時에 精進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정진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諸法無差別을 無有能知者요 唯佛與佛知시니智慧究竟故로다 모든 법은 차별이 없고 능히 알 사람도 없으나 오직 부처님과 부처님만 아시나니 지혜가 끝까지 이른 까닭이니라. 강설 ; 제법실상의 이치는 지혜가 궁극에 이른 부처님과 부처님만이 안다. 그 외에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이와 같은 말씀을 한 보살은 정진림보살이다.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정진이 그의 삶이다. <2> 비유로써 법을 해석하다 如金與金色이其性無差別인달하야 法非法亦然하야體性無有異로다 마치 금과 금빛이 그 성품 차별 없는 것과 같이 법과 법 아닌 것도 또한 그러해 자체의 성품이 다르지 않네. 강설 ; 불교의 가르침에는 비유가 많다. 눈에 보이는 어떤 사물의 작용이나 변화를 일러주는 것이 아니고 대개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내면과 그 이치들을 깨우치는 것이기 때문에 비유가 아니면 설명하기가 어렵다. 또 비유가 아니면 이해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설법에는 비유가 많다. 법과 비법도 그 체성은 다르면서 다른 것이 아닌 것이 마치 금과 금빛의 관계와 같다. 분명히 금에서 금빛이 나지만 금과 금빛은 다른 것이다. 衆生非衆生이二俱無眞實하니 如是諸法性이實義俱非有로라 중생과 중생 아닌 것이 둘이 다 진실함이 없으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의 성품이 진실한 뜻이 모두 있지 않네. 강설 ; “중생이다. 중생이 아니다.”라는 것은 다만 언어로 표현했을 뿐이다. 실재에는 그런 것이 없다. 법의 성품도 “이것이다.”라고 할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법성게에서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라고 하였다. 譬如未來世에 無有過去相인달하야 諸法亦如是하야無有一切相이로다 마치 오는 세상에는 지나간 세상의 모양이 없듯이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온갖 모양이 있지를 않네. 강설 ; 미래도 없고 과거도 없다. 없는 미래에 무슨 과거가 있겠는가.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일체 상이 없다. 실재하는 것이란 어디에도 없다. 譬如生滅相이種種皆非實인달하야 諸法亦復然하야自性無所有로다 마치 나고 소멸하는 모양이 가지가지가 진실치 않듯이 모든 법도 또한 그와 같아서 그 자성이 있지 않도다. 강설 ; 모든 현상은 끝없이 나고 소멸한다. 그래서 왕복서에서 “가고 오는 것이 끝이 없다[往復無際].”고 하였다.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 아니다. 법이 그렇고 법의 자성이 그렇고 인생이 그렇다. 그동안 살아온 삶의 경험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涅槃不可取나 說時有二種하니 諸法亦復然하야分別有殊異로다 열반을 취할 수 없지만 말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듯이 모든 법도 또한 그와 같아서 분별하느라 다른 것이 있도다. 강설 ; 열반에는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유여든 무여든 오직 열반일 뿐이다. 즉 흔적도 없이 사라질 뿐이다. 모든 법도 이런 저런 설명을 붙이지만 그 근본은 텅 비어 공할 뿐이다. 마치 사람의 일생과 같고 하루의 시간과 같다. <3> 비유로써 법을 아는 사람 如依所數物하야而有於能數라 彼性無所有니如是了知法이로다 마치 셀 바 물건이 있으므로 능히 셈하는 것 있거니와 그 성품 모두 없는 것이니 이와 같이 법을 알아야 하네. 강설 ; 예컨대 물건이 있어서 그 물건을 헤아리지만 실은 물건도 공하고 헤아림도 본래 없다. 일체법의 본질을 아는 것도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일체법의 본질이 텅 비어 공하다는 이치를 절묘하게 비유하였다. 譬如算數法이 增一至無量이라 數法無體性이로대智慧故差別이로다 저 산수의 법이 하나씩 더하여 한량없음에 이르나니 산수의 법이 체성이 없거늘 지혜로 차별을 내느니라. 강설 ; 수학의 발달은 무궁무진하다. 하나에서 더하여 한량없음에 이르고, 다시 하나에서 빼거나 나누거나 그 또한 한량없음에 이른다. 그러나 공정된 어떤 자체의 성품이 없다. 고정된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지혜로써 그와 같이 무한한 변화가 가능하다. 譬如諸世間이 劫燒有終盡이나 虛空無損敗인달하야佛智亦如是로다 비유하자면 모든 세간들이 겁의 불이 탈 때는 끝나거니와 허공은 무너지지 않는 것과 같이 부처님 지혜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의 세계가 하나하나 중생들이 사는 세상이다. 그 별들은 처음 생길 때도 불로 인하여 생기고 소멸할 때도 또한 불로 인하여 소멸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겁의 불, 즉 겁화(劫火)라 한다. 무상게(無常偈)에 “겁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를 때에 삼천대천세계도 다 함께 무너지고 수미산과 거대한 바다까지 소멸하여 남아 남지 않거든 어찌 하물며 이 몸의 생로병사와 근심과 슬픔과 온갖 고뇌들이 능히 남아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수한 은하계와 무수한 우주들이 다 타서 없어지더라도 허공은 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다. 그와 같이 인간의 온갖 번뇌 망상들을 다 소멸하더라도 부처님의 지혜인 사람 사람들의 근본 지혜는 없어지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如十方衆生이各取虛空相인달하야 諸佛亦如是하야世間妄分別이로다 마치 시방의 중생들이 제각기 허공의 모양을 말하듯이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와 같아서 세상에서 허망하게 분별하도다. 강설 ; 중생들이 허공을 이해하고 허공을 활용하는 것이 각양각색이다. 세상 사람들이 부처님을 이해하고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와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도 모두가 자신의 그릇대로 이해한다. 부처님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허망한 분별이다. (7) 역림(力林)보살의 찬탄 <1> 세간을 두루 밝히다 爾時에 力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역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一切衆生界가 皆在三世中하고 三世諸衆生이悉住五蘊中이로다 일체 중생 세계는 다 삼세(三世) 가운데 있고 삼세의 모든 중생들은 모두 오온(五蘊) 중에 있도다. 강설 ; 중생들이 사는 세계는 공간이다. 공간은 시간이라는 과거 현재 미래를 의지하여 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씨줄과 날줄과 같이 짜여있다. 그 시간과 공간을 의지한 중생들은 다시 오온이라는 색, 수, 상, 행, 식(色受想行識)으로 되어 있다. 시간과 공간과 중생,그리고 중생의 오온이 그물처럼 서로 의지하고 엮여있다. 諸蘊業爲本이요 諸業心爲本이라 心法猶如幻하니世間亦如是로다 모든 온(蘊)은 업(業)이 근본이요 모든 업은 마음이 근본이니 마음이란 법은 요술과 같으니 세간도 또한 그러하니라. 강설 ; 그런데 시간과 공간과 중생, 그리고 중생의 오온이 그물처럼 서로 의지하고 엮여있는 것을 분석해보면 실체가 없는 오온은 실체가 없는 업이 그 근본이다. 또 업은 실체가 없는 마음이 근본이다. 가장 근본이 된다는 마음은 마치 요술과도 같아서 그 이름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의지하는 세상을 분석해보면 그 또한 실체가 없는 것이 그와 똑 같다. 世間非自作이며 亦復非他作이로대 而其得有成이며亦復得有壞로다 세간은 스스로 지음도 아니요 다른 이가 지음도 아니지만 이루어짐이 있으매 역시 파괴함도 있는 것이다. 강설 ; 사람의 몸과 기타 일체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분자들은 끓임 없이 생멸변화를 계속하고 있다. 나아가서 사람의 육신과 그 외의 일체 사물들도 생성과 소멸을 계속하며, 우리가 사는 이 지구와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들도 이뤄짐과 파괴를 거듭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작용은 어떤 절대자가 하는 일이 아니다. 모든 존재의 존재원리로서 인연으로 생기하고 소멸하는 법칙이다. 世間雖有成이며世間雖有壞나 了達世間者는此二不應說이로다 세간이 이뤄지기도 하고 세간이 파괴되기도 하거니와 세간을 분명히 통달한 이는 이 두 가지를 말하지 않느니라. 강설 ;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45억 년 전에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수 억 년이 지나면 충돌과 같은 겁화(劫火)가 일어나서 파괴될 것이라고 한다. 또 다른 수많은 별들도 역시 같은 과정을 밟고 있다. 그러나 세상사를 분명하게 통달한 지혜로운 사람은 너무 오랜 일이거나 멀리 있는 것을 크게 문제 삼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들에게 당장 문제가 되는 것만 문제시(問題視)한다. 예컨대 화살에 맞은 사람을 바삐 치료하는 데 힘쓰지, 그 화살을 누가 만들었으며, 무엇으로 만들었으며, 어디서 날아왔는지는 크게 문제 삼지 않는 다는 뜻이다. 우리들 인생은 그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2> 모든 법을 널리 가리다 云何爲世間이며云何非世間고 世間非世間이但是名差別이로다 어떤 것을 세간이라 하고 어떤 것을 세간이 아니라 하는가. 세간과 세간 아닌 것이 이름만이 다를 뿐이로다. 강설 ; 불교에서는 흔히 세간과 출세간을 나누어서 이야기한다. 하지만 분명히 무엇을 세간이라 하고 무엇을 출세간이라 할 것인지 근본에서 분석해보면 뚜렷한 실체는 없다. 다만 이름뿐이다. 三世五蘊法은說名爲世間이요 彼滅非世間이니如是但假名이로다 삼세(三世)와 오온법(五蘊法)을 말하여 세간이라 하고 저가 멸한 것을 세간 아니라 하니 이와 같이 이름만 빌렸을 뿐이로다. 강설 ; 과거 현재 미래와 색, 수, 상, 행, 식을 세간법이라 하고, 그것이 소멸한 것을 세간법이 아니라 한다. 삼세와 오온법이 가상으로는 있는 듯 하지 만 그 본질은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다. 마치 물에서 물결이 일어난 것과 같다. 云何說諸蘊이며諸蘊有何性고 蘊性不可滅일새是故說無生이로다 무엇을 여러 가지 온(蘊)이라 하며 모든 온(蘊)은 무슨 성품이 있는가. 온의 본 성품 멸할 수 없으며 그래서 남이 없다[無生] 하느니라. 강설 ; 반야심경에 “오온이 모두 공한 것으로 비춰보면 일체 고액을 제도한다 하였고, 또 공한 것에는 색이 없으며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안, 이, 비, 설, 신, 의도 없으며, 색, 성, 향, 미, 촉, 법도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온의 본성은 본래로 불생불멸이다. 分別此諸蘊인댄 其性本空寂이라 空故不可滅이니此是無生義로다 이 온(蘊)을 분별하여 보면 그 성품 본래부터 공적하여 공적하므로 멸할 수 없어 이것이 남이 없다는 이치니라. 강설 ; 하필 오온뿐이겠는가. 일체 존재는 그 본성이 모두가 불생불멸이다. 존재의 본성을 불교에서는 불생불멸로 파악하였다. 세속의 학문에서 말하는 물질이 화학 반응에 의해 다른 물질로 변화하여도 반응 이전 물질의 모든 질량과 반응 이후 물질의 모든 질량은 변하지 않고 항상 일정하다는 법칙인 질량 불변의 법칙 그대로다.예컨대 얼음이 물로 변하든 수증기로 변하든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 그 질량은 변함없는 불생불멸이라는 것이다. 衆生旣如是인댄 諸佛亦復然이니 佛及諸佛法이自性無所有로다 중생이 이미 이러하면 부처님도 역시 그러함이니 부처님과 모든 부처님의 법이 그 자성 있는 것 아니로다. 강설 ; 오온으로 구성된 중생이 실체가 없어서 오온중생이 다 공적하다면 모든 부처님도 또한 공적하다. 부처님이 공적하므로 부처님의 법도 또한 공적하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은 참되고 바른 견해며, 이와 같지 못한 견해는 삿된 견해다. <3> 이익을 말하다 能知此諸法이如實不顚倒하면 一切知見人이常現在其前이로다 능히 이 모든 법이 진실하여 뒤바뀌지 않는 줄 알면 일체를 알고 보는 이가 항상 그의 앞에 항상 나타나리라. 강설 ; “일체를 알고 보는 이”란 곧 여래를 뜻한다. 화엄경에서 “일체법이 생기지 아니하며 일체 법이 소멸하지 않나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이해하면 모든 부처님이 항상 앞에 나타나리라.”라고 하였다. 역림(力林)보살의 게송은 일체 존재의 실상이 공적을 바탕으로 한 불생불멸의 이치를 위주로 밝혔다. (8) 행림(行林)보살의 찬탄 <1> 땅의 종성[요소]으로 부처님의 몸을 밝히다 爾時에 行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행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譬如十方界에 一切諸地種이 自性無所有로대無處不周徧인달하야 비유하면 시방 세계가 일체 지대(地大)의 종성[요소]으로서 자성이 있는 것 아니지만 두루 하지 않은 곳 없음과 같네. 佛身亦如是하야 普徧諸世界하사대 種種諸色相이無住無來處로다 부처님 몸도 또한 그와 같아서 모든 세계에 두루 했으나 가지가지 빛과 모양이 머문 곳도 온 곳도 없도다. 강설 ; 화엄경은 부처님의 몸에 대해서 밝힌 내용들이 대단히 많다. 행림(行林)보살이 땅의 종성(種性)으로 부처님의 몸을 밝힌 내용이다. 종성이란 요소다. 즉 땅의 종성이라면 땅을 이루는 요소다. 우리들의 몸이 사대(四大)로 이루어 졌다면 네 가지 종성, 즉 네 가지 요소로 이뤄졌다는 뜻이다. 땅의 요소들이 땅을 이루고 있어서 세계에 두루 하지만 실재하는 자성은 없다. 부처님의 몸도 이와 같아서 모든 세계에 두루 하여 가지가지 빛과 모양을 나타내지만 실로 머문 곳도 없고,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다. <2> 의지함이 없는 업으로 부처님의 몸을 밝히다 但以諸業故로說名爲衆生이나 亦不離衆生하고而有業可得이로다 다만 모든 업으로써 중생이라 말하거니와 역시 중생을 떠나서는 업을 찾아볼 수 없도다. 강설 ; 불교에서는 업이라는 말을 대단히 많이 쓴다. 우리들 중생의 속성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용어다. 또 업에는 중생의 업뿐만 아니라 불업(佛業)과 보살업(菩薩業)까지 있다. 그러나 중생의 업만을 두고 논의한다면 중생과 업은 서로 떠날 레야 떠날 수 없는 관계다. 業性本空寂이나 衆生所依止요 普作衆色相이나亦復無來處로다 업의 성품 본래 공적하나 중생들이 의지한 바며 여러 가지 모양을 두루 짓지만 또한 다시 온 곳은 역시 없어라. 강설 ; 중생에게는 업이라는 점을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하지만 실로 업의 자체 성품은 공적하여 실체가 없다. 그러나 중생은 그 자체의 성품도 없는 업을 의지한다. 즉 업에 따라 온갖 모습을 달리 나타낸다. 모든 사람들이 얼굴이 각각 다르고 또 체형이 각각 다르고 느낌과 생각이 각각 다르고 삶의 형태가 각각 다른 것은 모두가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실로 업은 불가사의하다. 如是諸色相과 業力難思議니 了達其根本이면於中無所見이로다 이와 같은 모든 색상과 업의 힘 헤아릴 수 없어라. 그 근본을 분명히 알면 그 가운데는 볼 것도 없도다. 강설 ; 업과 사람의 관계를 따져볼수록 미묘하고 불가사의하다.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의 모습은 모두가 중생들의 업의 세력 때문이다. 즉 살기 좋은 세상이라거나 살기 나쁜 세상이라는 것은 모두가 사람들이 지은 업 때문이다. 업의 힘은 개개인에서부터 전체에 이른다. 그래서 공업(共業)이 있는가하면 불공업(不共業)이 있다. 열 명의 가족이 있을 때 가족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은 공업이고, 개인 한 사람에게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불공업이다. 또 국민 한 사람 한 사람과 국민 전체와의 관계도 공업과 불공업의 문제다. 佛身亦如是하야 不可得思議니 種種諸色相으로普現十方刹이로다 부처님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헤아릴 수 없거니와 가지가지 모든 색상으로 시방세계에 두루 나타나도다. 강설 ; 앞에서는 업을 들어 부처님의 몸을 비유하였다. 업이 불가사의하며 각양각색이듯이 부처님의 몸도 실로 불가사의하다. 도대체 그 실상을 알 길이 없다. 가지가지 모습으로 시방세계에 나타나지만 그 실체는 없다. 여래현상품에 “부처님의 몸은 법계에 충만하여 일체 중생들 앞에 나타난다. 인연을 따라서 감응하여 두루 하지만 항상 이 깨달음의 장소인 보리좌에 계시도다.”라고 하였다. 身亦非是佛이며 佛亦非是身이니 但以法爲身하면 通達一切法이로다 몸도 또한 부처가 아니고 부처도 또한 몸이 아니지만 다만 법으로 몸을 삼아 일체 법을 통달하도다. 강설 ; 부처님의 형상을 아무리 잘 그리고 조각하여 살아있는 부처님과 똑 같이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형상은 부처가 아니다. 왜냐하면 형상은 부처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살아 있는 몸이라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금강경에 “만약 몸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그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것이다.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다만 육신이 아닌 법으로 몸을 삼는다. 그래서 아함경 바카리경 “부처님께서 라자그라하 죽림정사에 계실 때 바카리라는 비구가 중병에 걸려 임종할 때가 가까웠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뵈옵고 예배드리기를 갈망하였습니다. 소식을 듣고 부처님께서 달려오시자 누워있던 바카리가 일어나 예배를 올리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바카리의 손을 잡아 자리에 누이시고 간곡히 말씀하셨습니다. ‘바카리야, 이 썩어질 몸을 보고 절을 해서 무얼 하겠느냐.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리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법이 곧 부처님이다. <3> 부처님의 몸을 보면 이익을 얻는다 若能見佛身이淸淨如法性하면 此人於佛法에一切無疑惑이로다 만일 부처님의 몸이 청정하여 법의 성품 같음을 보면 이 사람은 불법에 있어서 일체의 의혹이 없으리라. 강설 ; 부처님의 몸은 청정하여 법의 성품 그대로다. 부처님의 몸인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양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몸을 본다는 것은 곧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법의 성품을 보면 불법에 무슨 의혹이 있겠는가. 그것이 부처님의 몸을 보는 이익이다. 若見一切法이本性如涅槃하면 是則見如來가究竟無所住로다 만일 일체 법의 본 성품이 열반과 같음을 보면 이런 이는 곧 여래가 끝까지 머문 데 없음을 보리라. 강설 ; 일체 법의 본 성품이 열반과 같다는 것은 일체법이 적멸하며 텅 비어 공하다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즉 일체법이 공하여 본래로 불생불멸한 것으로 보면 곧 여래가 철저히 머무는 바가 없음을 본다. 열반도 적명하며 여래도 적멸하다. 그래서 열반경에서는 “제법은 본래로 항상 스스로 적멸한 모습이다. 불자가 이 이치를 행하고 나면 오는 세상 부처를 이루리라.”라고 하였다. 若修習正念하야 明了見正覺하면 無相無分別하야是名法王子로다 만일 바른 생각을 닦아 분명하게 정각(正覺)을 보면 모양도 없고 분별도 없어 이름을 법왕자(法王子)라 하리라. 강설 ; 정각(正覺)을 분명하게 본다는 것은 스스로가 정각을 이룬다는 뜻이다. 정각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어찌 정각을 볼 수 있겠는가. 부처님을 보면 이익을 얻는다 는 세 게송을 청량스님은 “첫 게송은 부처님을 보면 법을 안다는 것은 부처님을 보아 본성에 합하여 동체임을 의심하지 않는 까닭이다. 다음은 법을 보면 곧 부처님을 본다는 것은 법을 알면 곧 본성이 청정하여 부처님이 성품이나 현상에 머물지 않는 까닭이다. 마지막 게송은 바른 수행을 밝게 아는 것이니, 상이 없음을깨달아 마음에 분별이 사라져서 고요함과 비춤이 함께 흐르는 까닭에 바른 생각[正念]이라 한다. 부처님의 법으로부터 출생하므로 법왕자이다.”라고 하였다. (9) 각림(覺林)보살의 찬탄 <1> 사상(事相)에 나아가서 법을 나타내다 爾時에 覺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徧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각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譬如工畵師가 分布諸彩色하고 虛妄取異相이나大種無差別이니 비유하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여러 가지 채색을 칠해가면서 허망하게 여러 가지 모양을 그리지마는 대종(大種)은 차별이 없느니라. 강설 ; 각림보살의 게송은 마음이 일체 삼라만상을 다 만들어 낸다는 유심사상(唯心思想)의 근거가 되는 내용을 설하였다. 먼저 그림의 비유를 들었다. 여기서 대종(大種)이란 물감의 요소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물감의 요소로 온갖 차별한 그림을 그리지마는 그 물감의 요소에는 그와 같은 차별한 그림이 없다. 그런데 각가지 모양의 그림을 그려낸다. 大種中無色이며 色中無大種이로대 亦不離大種하고而有色可得이로다 대종(大種) 가운데 빛깔이 없고 빛깔 중에 대종이 없지만 그러나 또한 대종을 떠나서 빛깔을 찾을 수도 없느니라. 강설 ; 물감의 요소에는 처음부터 색깔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 색깔에도 그 물감의 요소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물감의 요소와 색깔은 서로 떠날 레야 떠날 수 없는 관계다. 마치 몸과 몸짓과 같다. 몸이 몸짓은 아니지만 몸짓을 떠나서 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2> 마음에 나아가서 법을 나타내다 心中無彩畵하고彩畵中無心이로대 然不離於心하고有彩畵可得이로다 마음속에 그림이 없고 그림 속에 마음이 없지만 그러나 마음을 떠나서 그림을 찾을 수 없도다. 강설 ; 사람이 마음을 작용하여 그림을 그리지만 마음속에는 그림이 없다. 또 그림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림 속에는 사람의 마음이 없다. 그러나 마음과 그림은 서로 다른 것이면서 또 떠날 레야 떠날 수 없는 관계다. 彼心恒不住하야 無量難思議라 示現一切色호대各各不相知로다 저 마음 항상 머물지 않고 한량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일체 빛깔을 나타내 보이지만 각각 서로 알지 못하도다. 강설 ; 금강경에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낸다.”라는 말이 있다. 실로 마음은 머무는 바 없이 흘러간다. 스스로도 흐르고 경계를 따라 흐르기도 한다. 쉼 없이 흘러가는 것이 마음의 본색이다. 구태여 가두거나 멈추게 하지 말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마음의 본 모습을 모른 채 가두거나 멈추게 하려했던가. 譬如工畵師가 不能知自心호대 而由心故畵인달하야諸法性如是로다 비유하자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기의 마음을 알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나니 모든 법의 성품도 그러하니라. 강설 ;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사람은 스스로의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마음으로 온갖 것을 만들고 온갖 일을 한다. 선과 악을 짓고 천당과 지옥을 짓는다. 행복도 불행도 만들고 기쁨과 즐거움을 만든다. <3> 비유와 법을 합하여 관찰하다 心如工畵師하야 能畵諸世間하나니 五蘊悉從生이라無法而不造로다 마음은 화가와 같아서 모든 세간을 그려내나니 오온이 마음 따라 생기어서 무슨 법이나 못 짓는 것 없도다. 강설 ; 화엄경에서 매우 유명한 게송이다. 화엄경의 유심사상을 이야기 할 때는 반드시 인용되는 게송이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무엇이든 다 그린다. 화가는 백지위에 산천초목이나 사람이나 동물이나 그 무엇이든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린다. 우리들 마음도 그와 같아서 기쁨도 그리고 슬픔도 그린다. 분노도 그리고 환희도 그린다. 행복도 그리고 불행도 그린다. 그 모든 것은 내 마음이 그린 것들이다. 또한 자신의 육신과 자신이 누리는 일체 세상도 모두 자신의 마음이 그린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두고 남을 탓하고 세상을 탓한다. 如心佛亦爾하며 如佛衆生然하니 應知佛與心이體性皆無盡이로다 마음과 같이 부처도 또한 그러하고 부처와 같이 중생도 그러하니 응당히 알라, 부처나 마음이나 그 성품 모두 다함이 없도다. 강설 ; 마음도 부처도 중생도 그 성품은 다함이 없다고 하였다. 화엄경을 이해하는 열쇠로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라는 점이다. 무엇이라고 이름을 붙이든 그 본성은 하나며 같은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또는 편의에 따라서 그 이름을 달리할 뿐이다. 그러므로 무엇을 알든 한 가지만 정확하게 알면 그 셋을 다 아는 것이 된다. 그래서 필자는 불교공부의 총 결론으로서 인불사상(人佛思想)을 주창하는 것이다. 사람이 부처님이다. 또는 당신은 부처님이시다. 사람을 부처님으로 알고 존중하고 찬탄하고 받들어 섬기자.그도 행복하고 나도 또한 행복할 것이다. 若人知心行이 普造諸世間하면 是人則見佛하야了佛眞實性이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의 작용이 모든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이 사람은 부처를 보아 부처의 참 성품 알게 되리라. 강설 ; 금강경에는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사람의 마음 작용이 일체 세간을 다 짓는 줄을 안다면 곧 부처를 보고 부처의 참 성품을 알게 되리라.”고 하였다. 일체를 공으로 보는 관점[空觀]과 일체를 마음으로 보는 관점[性觀] 또는 중도적 관점[中觀]으로 금강경과 화엄경의 견해가 나눠진다. 만약 법상종의 견해라면 현상을 현상으로만 보는 상관(相觀)의 견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공(空) 성(性) 상(相) 삼관의 관점이라 한다. 心不住於身하며身亦不住心호대 而能作佛事하니自在未曾有로다 마음이 몸에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지만 모든 불사(佛事)를 능히 지어 자재함이 미증유(未曾有)하니라. 강설 ; 불교에서는 오랜 세월동안 마음의 소재에 대해서 논의해 왔다. 능엄경에는 “마음이 몸 안에 있느냐? 몸 밖에 있느냐? 눈 속에 있느냐? 어두운 곳에 있느냐? 합하는 곳에 있느냐? 중간에 있느냐? 일체 무착(無着)이냐?”라는 등으로 소위 칠처징심(七處徵心)으로 따져가며 질문하였다. 마음은 몸에도 머물지 않고, 몸도 또한 마음에 머물지 않으면서 보고, 듣고, 냄새도 맡고, 말도 하고, 동작도 하고, 과거나 미래도 생각하고, 글도 읽고 쓰고, 마음이 기쁘면 크게 웃고, 마음이 슬프면 눈물도 흘리고, 마음에 맞지않으면 화도 내고, 온갖 일을 다 한다. 참으로 미묘 불가사의하다. 그 소재를 알려고 하는 질문이 잘못된 것인가?참으로 인류의 영원한 화두다.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인댄 應觀法界性하라一切唯心造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삼세의 일체 부처님을 알고자 하면 마땅히 법계의 본 바탕[性]이 일체가 오직 마음으로 된 줄을 관찰하라. 강설 ; 흔히 이 게송을 화엄경의 사구게송이라 한다. 역시 유심사상의 중요한 근가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은 너무도 유명하여 불교를 모르는 사람까지도 불교의 대표적 가르침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는 말이다. 산천초목과 산하대지와 삼라만상과 일월성신과 우주법계가 모두 이 마음이 만든 것이라면 마음이 안에 있느니, 밖에 있느니, 따질 일이 아니다. 불교를 믿고 불교를 공부하여 이 한 말씀만 잘 깨달아서 일상생활에 적용한다면 그는 참으로 복을 받은 사람이며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한 사람이다. 이 하나의 열쇠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무엇이겠는가. (10) 지림(智林)보살의 찬탄 <1> 취할 것에 대하여 말하다 爾時에 智林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그때에 지림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시방을 두루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습니다. 所取不可取며 所見不可見이며 所聞不可聞이니一心不思議로다 취할 것도 취할 수 없고 볼 것도 볼 수 없으며 들을 것도 들을 수 없어서 한 마음이라 불가사의하도다. 강설 ; 우리는 마음을 사용하여 온갖 대상을 다 취하지만 정작 취하는 그 마음은 취하지 못한다. 마치 손으로 물건을 잡으면 물건은 잡히지만 손은 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모두 같은 경우다. 그래서 그 한 마음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존재다. <2> 취할 수 없음을 해석하다 有量及無量을二俱不可取니 若有人欲取인댄畢竟無所得이로다 한량이 있거나 한량이 없거나 둘을 다 취할 수 없으니 만약 어떤 이가 취하려 하여도 끝까지 얻지 못하리라. 강설 ; 마음 작용이 한량이 있거나 한량이 없거나 두 가지를 다 취할 수 없다. 보거나 듣거나 취하는 일이 너무나 명확하여 만약 어떤 사람이 그것을 취하려고 하면 아무리 취해봐야 끝내 취할 수 없다. 마치 손으로 허공을 취하는 일과 같아서 끝까지 허공은 손에 잡히지 않으리라. 不應說而說이 是爲自欺誑이니 己事不成就요 不令衆歡喜로다 말하지 않을 것을 말한다면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 자기 일을 성취하지 못하니 다른 이를 기쁘게 할 수 없도다. 강설 ; 마음은 결코 잡거나 취할 수 없는 것인데 만약 그것을 잡거나 취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자기의 마음의 문제도 아직 성취하지 못하였거니 어떻게 그 문제로 다른 이를 기쁘게 하겠는가. <3> 볼 수 없음을 해석하다 有欲讚如來의無邊妙色身인댄 盡於無數劫이라도無能盡稱述이로다 여래의 그지없이 묘한 색신(色身)을 찬탄하려는 이가 있다면 무수겁이 끝나도록 하여도 모두 다 말할 수 없으리라. 강설 ; 여래의 색신은 일정한 형상이 아니다. 일정한 형상이 아니면서 일체 형상으로 다 나타낸다. 그러므로 무엇을 한 가지로 특별히 정하여 여래의 색신이라고 치우친 견해가 된다. 여래는 치우친 견해로 볼 수 없다. 진정한 색신은 무수겁이 다하도록 설명하여도 다할 수 없다. 譬如隨意珠가 能現一切色호대 無色而現色인달하야諸佛亦如是로다 비유하자면 마치 여의주[隨意珠]가 온갖 빛을 다 나타내되 빛이 없는 데서 빛을 내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도 또한 이와 같도다. 강설 ; 여의주는 일정한 빛이 없다. 일정한 빛이 없으면서 일체 색을 다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또한 여의주다. 모든 부처님의 색신도 여의주와 같아서 색신이 아니면서 일체 색신을 다 나타낸다. 又如淨虛空이非色不可見이라 雖現一切色이나無能見空者인달하야 또 마치 맑은 허공은 빛이 아니어서 볼 수 없으며 비록 일체 빛을 나타내더라도 허공을 볼 이는 없는 것과 같으니라. 강설 ; 세상에서 허공이라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정작 허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허공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 것은 허공을 의지하여 존재하는 구름, 땅, 나무, 건물, 지구, 달, 해, 별 등이다. 그 모든 것은 다 허공이 나타낸 것들이다. 허공은 모두 비유다. 諸佛亦如是하사 普現無量色이나 非心所行處라一切莫能覩로다 모든 부처님도 또한 이와 같아서 한량없는 모습을 나타내지만 마음이 행할 곳이 아니라 일체를 볼 수 없도다. 강설 ; 허공과 같이 부처님의 법신도 또한 그와 같다. 부처님은 한량없는 모습을 다 나타내지만 마음으로 짐작하여 알 경계가 아니다. 마음으로 아무리 사량하고 분별하더라도 그 모든 모습에서는 부처님의 법신을 볼 수 없다. 이 두 게송을 청량스님은 “맑은 허공으로 색상을 나타낸 비유인데 부처님의 법신을 비유하였다. 법신의 체는 색상이 아니나 능히 조잡하고 미묘한 일체의 모든 색상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4> 들을 수 없음을 해석하다 雖聞如來聲이나音聲非如來며 亦不離於聲하고能知正等覺이로다 비록 여래의 음성을 듣지만 음성은 여래가 아니며 또한 음성을 떠나서 정등각(正等覺)을 알 수도 없도다. 강설 ; 여래는 음성이 아니지만 또한 음성을 떠나서 따로 여래를 찾을 수도 없다. 만약 음성에서 여래를 찾으면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음성을 떠나서 여래를 찾으면 단견(斷見)에 떨어져서 모두가 치우친 견해가 된다. 금강경에는 “만약 색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다.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라고 하였다. “음성을 떠나서 따로 여래를 찾을 수도 없다.”는 화엄경과 대비시켜서 생각해보면 불법을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菩提無來去라離一切分別이어니 云何於是中에自言能得見이리오 보리(菩提)는 오고 감이 없어 일체 분별을 떠난 것인데 어떻게 이 가운데서 능히 본다고 스스로 말하겠는가. 강설 ; 보리란 깨달음이다. 깨달음은 옴도 없고 감도 없다. 그래서 일체 분별을 다 떠났다. 일체 분별을 다 떠났으므로 본다느니, 안다느니, 얻는다느니 하는 것이 있을 수 없다. 諸佛無有法이시니佛於何有說가 但隨其自心하야謂說如是法이로다 모든 부처님은 법이 있는 것 아닌데 부처님이 어찌 말씀이 있겠는가. 다만 자기의 마음을 따라서 이런 법을 설한다 하도다. 강설 ; 모든 부처님은 언제나 법을 중심으로 설명이 된다. 만약 부처님에게서 법을 제외하면 부처님도 또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차원에서 관찰해보면 부처님에게는 법이 없다. 법이 없는데 무슨 설법이 있겠는가. 다만 중생들이 각자의 마음을 따라서 자기의 상식대로 이러이러한 법을 설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어떤 경전에서는 “나는 49년 동안 한 글자도 설한바가 없다[一字不說].”라고 하였다. 또 금강경에서는 “법을 얻은 바도 없으며 설한 바도 없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이 야마천에 올라가는 내용과 야마천에서 보살들이 각자의 깨달은바 대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높은 안목으로 한껏 찬탄하여 마쳤다. 이것은 다음에 설해질 제4회 법문의 본론인 십행품(十行品)의 서론이다. 야마궁중게찬품 끝 대방광불화엄경 제19권 중 二十一, 십행품(十行品) 1 강설 ; 십행품은 제4회 법문의 본론이다. 보살의 열 가지 행을 설하였다. 공덕림 보살이 선사유(善思惟) 삼매에 들어서여러 부처님이 가피(加被)하시는 지혜를 받들고, 삼매에서 일어나서 보살의 열 가지 행을 설하였다. ①환희행(歡喜行)은 모든 소유물을 보시하는데 아끼지도 않고 그 과보를 바라지도 않고, 다만 일체 중생을 구호함으로써 그들을 환희케 하는 것이다. ②요익행(饒益行)은 계행을 잘 지니면서 빛깔, 소리, 냄새, 맛, 감촉에 집착하지 않으며, 중생에게 이것을 말하여서 재물을 구하지도 말고, 몸매를 구하지도 말고, 마군의 장애를 받지도 않고, 다른 이를 시끄럽게 하지도 않으며, 내지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③무위역행(無違逆行)은 항상 참고 공경하여 저와 남을 해롭게도 하지 않고, 저와 남을 집착하지도 않으며, 훼방하고 해롭게 함을 참고, 자기가 불법 가운데 있으면서 다른 이로 하여금 법을 얻게 하는 것이다. ④무굴요행(無屈撓行)은 꾸준히 노력하여 모든 번뇌와 버릇을 없애고, 이와 같은 행으로 모든 중생을 무여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⑤무치란행(無癡亂行)은 바른 생각을 성취하여 마음이 산란치 않고 견고하여 동요하지 않으며, 청정하고 미혹하지 않아서, 바른 법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궁극에는 무여열반을 얻게 하려고 염원하는 것이다. ⑥선현행(善現行)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여 얻는 바가 없는 데 머물며, 허망도 없고, 속박도 없으며, 드러내어 보이는 것은 성품도 없고 의지도 없으며, 내지 진실한 법에 들어가고 출세간법에 들어가며, 끝끝내 중생들을 성취하고 조복하는 것이다. ⑦무착행(無着行)은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아승지 세계에 들어가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지음이 없는 법을 끝까지 얻고, 보살의 수기(授記)를 얻고, 중생의 자비와 선근을 증장케 하는 것이다. ⑧난득행(難得行)은 얻기 어렵고 굴복하기 어려운 선근을 성취하고, 광대한 변재를 얻으며, 큰 서원이 쉬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여 부처님의 도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⑨선법행(善法行)은 모든 천신과 인간과 사문과 범천들을 위하여 서늘한 법의 못을 만들고 바른 법을 유지하여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며, 또 열 가지 몸을 성취하여 여러 중생의 의지할 데가 되는 것이다. ⑩진실행(眞實行)은 가장 진실한 말을 성취하고, 말한 대로 행하며, 행하는 것과 같이 말하여, 삼세 부처님들의 진실한 말을 배우고 선근이 동등하여 여래를 따라 배우고 지혜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행을 설할 때 시방의 세계가 여섯 가지로 진동하고, 무수한 보살들이 와서 공덕림 보살을 찬탄하였으며, 공덕림 보살은 다시 게송으로 열 가지 행을 설하였다. 청량스님의 소(疏)에는 “인연을 따르고 이치를 따라 수행하는 것을 이름을 행(行)이라한다. 그 숫자가 작은 먼지수보다 많지만 원만의 뜻에 의지하여 십행(十行)이라 하였다. 인왕경에는 십지(十止)라고 하였는데 삼학(三學)에 나아가서 선정의 마음을 증장하기 때문이다. 범망경에는 장양(長養)이라고 하였는데 도의 뿌리가 자라나기 때문이다. 만약 범본(梵本) 대로라면 응당히 공덕화취보살설십행품(功德華聚菩薩說十行品)이라고 해야 하는데 곧 능히 설법하는 사람을 겸한 것이다. 지금의 글은 생략하였다.”라고 하였다. 1. 공덕림(功德林)보살이 삼매에 들다 爾時에 功德林菩薩이承佛神力하사入菩薩善思惟三昧하시니라 이때에 공덕림(功德林)보살이 부처님의 신력을 받들어 보살의 선사유(善思惟)삼매에 들었습니다. 강설 ; 십행품의 설법주(說法主)는 공덕림보살이다. 화엄경 전편의 법문이 언제나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설한 것과 같이 공덕림보살도 역시 부처님의 깨달음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힌 것이다. 그것은 화엄경이 처음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정각을 이룸으로부터 시작한 뜻과 일치한다. 보살이 십행의 내용을 설하기 위하여 들어간 선사유(善思惟)삼매란 생각을 깊고 넓고 크고 바르게 한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선사유삼매다. 누구나 말과 행동을 시작하기 전에 잠간이라도 이 선사유삼매에 들어간다면 말과 행동에 일체 허물이 없을 것이다. 삼사일언(三思一言)이라는 말도 그와 같은 뜻이다. 만약 공덕림보살과 같이 깨달음을 성취하여 이러한 삼매에 들어갔다면 그 뒤의 말과 행동이 어떠하겠는가. 2. 부처님이 가피(加被)를 내리다 (1) 가피의 인연을 말하다 入是三昧已에十方各過萬佛刹微塵數世界外하야有萬佛刹微塵數諸佛이皆號功德林이라而現其前하사告功德林菩薩言하사대 이 삼매에 들고나니 시방으로 각각 일만 부처님 세계의 작은 먼지 수처럼 많은 세계 밖에 일만 세계의 작은 먼지 수 같이 많은 여러 부처님이 계시었는데, 명호(名號)가다 같이 공덕림불(功德林佛)이었습니다. 공덕림보살의 앞에 나타나서 말씀하였습니다. 강설 ; “일만 부처님 세계의 작은 먼지 수처럼 많은 세계 밖”이라면 얼마나 먼 거리일까. 예컨대 한 부처님 세계의 작은 먼지수라면 우리가 사는 지구를 모두 작은 먼지로 만들었을 때 그 수효와 같은 것이다. 일만 부처님 세계라고 하였으니 그 수의 일만 배이다. 우리가 육안으로 보는 저 은하수의 몇 억만 배일까? 몇 억 광년의 거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먼 곳에 있는 그 많은 부처님의 이름이 모두 십행법문을 설할 공덕림보살과 같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무한한 허공도 큰 깨달음에는 태평양바다의 작은 물거품 하나에 불과하다[空生大覺中 如海一漚發]. 그래서 큰 깨달음이란 한 마음의 거리며 일체가 우리들 한 마음공덕의 이치에서 펼쳐지기 때문에 부처님도 보살도 중생도 모두가 공덕림이다. 善哉라 佛子여乃能入此善思惟三昧로다善男子야此是十方各萬佛刹微塵數同名諸佛이 共加於汝시며 亦是毘盧遮那如來의往昔願力과威神之力과及諸菩薩의衆善根力으로令汝入是三昧하야而演說法이니라 “잘하는 일이다. 불자여, 그대가 능히 이 선사유(善思惟)삼매에 들었도다. 선남자여, 이것은 시방으로 각각 일만 부처님세계의 작은 먼지 수처럼 많은 명호가 같은 모든 부처님들이 그대에게 가피(加被) 하려는 것이니라. 역시 비로자나 여래의 옛날 서원하신 힘과, 위신(威信)의 힘과, 모든 보살들의 여러 가지 선근의 힘으로써 그대로 하여금 이 삼매에 들어서 법을 연설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강설 ; 일만불찰 미진수나 되는 공덕림부처님이 다 같이 공덕림보살 앞에 나타나서 선사유삼매에 든 것을 말씀하신다. 시방의 무수한 공덕림부처님이 그대에게 가피하신 것이다. 또 비로자나부처님이 지난 세상의 원력과 위신력으로 가피하신 것이다. 또 모든 보살들의 여러 가지 선근의 힘으로 이 선사유삼매에 들어서 법을 연설하게 한 것이다. 공덕림보살이 십행법문을 설하는 데는 이와 같은 부처님과 보살들의 큰 가피가 그 힘이 된 것이다. 필자가 문수경전연구회에서 스님들과 신도들에게 화엄경을 설하고 다시 강설을 이렇게 쓸 수 있는 것도 모두 부처님과 보살들과 일체 화엄성중들의 큰 가피를 입었기 때문이다. 또 현전의 대중들과 “염화실 카페” 법우님들의 큰 호응과 격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가까운 인연과 먼 인연 모두들의 염려와 기도가 있어서 이와 같은 불사를 하게 된 것이다. (2) 부처님의 가피가 하는 일을 말하다 爲增長佛智故며深入法界故며了知衆生界故며所入無礙故며所行無障故며得無量方便故며 攝取一切智性故며覺悟一切諸法故며知一切諸根故며能持說一切法故니所謂發起諸菩薩十種行이니라 “부처의 지혜를 증장하려는 연고며, 법계에 깊이 들게 하려는 연고며, 중생세계를 분명히 알게 하는 연고며, 들어가는데 걸림이 없게 하려는 연고며, 행하는 일이 장애가 없게 하려는 연고며, 한량없는 방편을 얻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 지혜의 성품을 거두어 지니는 연고며, 일체 모든 법을 깨닫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 모든 근성을 알게 하려는 연고며, 일체 법을 가져서 말하게 하려는 연고이니라. 이른바 모든 보살의 열 가지 행을 일으키려는 것이니라.” 강설 ;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공덕림보살에게 가피하는가? 앞으로 보살의 열 가지 행[十行]을 설하려면 열 가지 조건을 갖춰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열 가지 조건을 먼저 설하였다. 열 가지 조건이란,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가 있어야 하고, 우주 법계에 깊이 들어가야 하고, 중생들의 세계를 잘 알아야 하고, 법계에 들어감에 걸림이 없어야 하고, 법계에 들어가서 중생교화 활동에 장애가 없어야 하고, 중생들 교화하려면 한량없는 방편을 얻어야 하고, 일체를 깨달아 아는 지혜 성품을 거두어 지녀야 하고, 일체 모든 법을 깨달아야 하고, 일체 중생들의 일체 근성은 잘 알아야 하고, 일체 법을 잘 설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부처님이 가피를 내리는 것이다. (3) 가피의 상(相)을 보이다 <1> 말의 가피 善男子야汝當承佛威神之力하야而演此法이니라 “선남자여, 그대는 마땅히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이 법을 연설하라.” 강설 ; 가피에는 언제나 몸과 말과 뜻, 이 세 가지로 가피한다. 몸과 말과 뜻이 부처님의 전부며, 보살의 전부며, 사람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전체를 다하여 가피를 해야 온전한 가피가 된다. 말의 가피란 부처님이 이 십행의 법을 설하라고 당부하는 것에 큰 힘을 입어서 보살은 법을 설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의 사회에서도 자신보다 명성이 높은 어른이 어떤 일에 격려를 하고 당부를 하면 큰 힘을 얻게 마련이다. <2> 뜻의 가피 是時에 諸佛이卽與功德林菩薩에無礙智와 無着智와無斷智와 無師智와無癡智와 無異智와無失智와 無量智와無勝智와 無懈智와無奪智하시니何以故오此三昧力이法如是故니라 이때 모든 부처님이 곧 공덕림보살에게 걸림 없는 지혜와 집착 없는 지혜와 끊이지 않는 지혜와 스승 없는 지혜와 어리석지 않은 지혜와 다르지 않은 지혜와 허물없는 지혜와 한량없는 지혜와 이길 이 없는 지혜와 게으름 없는 지혜와 빼앗을 수 없는 지혜를 주었으니, 이 삼매의 힘은 법이 으레 이와 같은 까닭입니다. 강설 ; 이때에 모든 부처님이 공덕림보살에게 뜻의 가피, 즉 마음의 가피를 주었다. 마음의 가피란 앞으로 십행법문을 설하려면 무엇보다 지혜가 뛰어나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한 가지 지혜를 주는 것이다. 공덕림보살이 선사유삼매에 들어가면 그 삼매의 힘이 당연히 그러하기 때문이다. 선사유란 곧 모든 지혜를 출생하는 근본이 된다. 보통의 사람도 설사 수행이 없고 지혜가 없더라도 깊은 생각으로 사유를 철저히 하면 평소의 자신의 능력과 다른 특별한 지혜가 생기게 된다. 이것이 선사유삼매의 효력이다. <3> 몸의 가피 爾時에 諸佛이各伸右手하사摩功德林菩薩頂하신대 그때에 여러 부처님이 각각 오른손을 내밀어 공덕림보살의 정수리를 만지었습니다. 강설 ; 다음은 몸의 가피다. 모든 부처님이 오른 손으로 공덕림보살의 정수리를 어루만진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 아이가 귀엽거나 착한 일을 했을 때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것은 어른들의 순수한 감동에서 나온 행위이다. 모든 부처님들도 공덕림보살이 십행법문을 설하기 전에 선사유삼매에 들어가니 고맙고 감동한 나머지 격려하는 뜻에서 오른손으로 공덕림보살의 정수리를 어루만진 것이다. 3. 공덕림보살의 열 가지 보살행 (1) 보살행의 근본을 말하다 時에 功德林菩薩이 卽從定起하사告諸菩薩言하사대佛子야菩薩行이 不可思議 라與法界虛空界等하니何以故오菩薩摩訶薩이學三世諸佛하야而修行故니라 그때에 공덕림보살이 곧 삼매로부터 일어나서 모든 보살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불자들이여, 보살의 행은 불가사의하여 법계와 허공계로 더불어 평등하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에게 배워서 행을 닦는 까닭이니라.” 강설 ; 불교에서 행하는 일체 의식이나 법회에는 본 행사에 들어가기 전에 형식정이나마 반드시 입정을 하였다가 다시 출정을 하고나서 시작한다. 그 형식은 모두 이와 같은 화엄경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보살의 열 가지 행은 그 근본이 심오하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에게 배워서 행을 닦은 것이다. 스스로 아무렇게나 터득한 법이 아니다. 세상의 하찮은 학문이나 기술도 반드시 그 스승과 전통을 중요시한다. 하물며 보살의 십행법문이겠는가. (2) 열 가지 행의 이름을 열거하다 佛子야何等이 是菩薩摩訶薩行고佛子야菩薩摩訶薩이有十種行하야三世諸佛之所宣說이시니何等이 爲十고一者는歡喜行이요二者는 饒益行이요三者는 無違逆行이요四者는 無屈撓行이요五者는 無癡亂行이요 六者는 善現行이요七者는 無着行이요八者는 難得行이요九者는 善法行이요十者는 眞實行이니是爲十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행이라 하는가? 불자여,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행이 있으니,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니라.” “무엇이 열 가지인가? 하나는 환희행(歡喜行)이요, 둘은 요익행(饒益行)이요, 셋은 무위역행(無違逆行)이요, 넷은 무굴요행(無屈撓行)이요, 다섯은 무치난행(無癡亂行)이요, 여섯은 선현행(善現行)이요, 일곱은 무착행(無着行)이요, 여덟은 난득행(難得行)이요, 아홉은 선법행(善法行)이요, 열은 진실행(眞實行)이니라. 이것이 열이니라.” 강설 ; 화엄경 7처 9회 39품 중 제4회 법문의 본론인 십행법문(十行法門)의 이름을 열거하였다. 십행 하나하나의 깊은 뜻과 10바라밀과과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것은 본문에서 다시 설명한다. (3) 제1 환희행(歡喜行) <1> 보살은 대시주(大施主)다 佛子야何等이 爲菩薩摩訶薩歡喜行고佛子야此菩薩이 爲大施主하야凡所有物을 悉能惠施호대其心平等하야無有悔吝하며不望果報하며不求名稱하며不貪利養하니라 “불자들이여, 무엇을 보살마하살의 환희행이라 하는가.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대시주(大施主)가 되어 가진 물건을 다 능히 보시하느니라. 그 마음이 평등하여 뉘우치거나 아낌이 없으며, 과보를 바라지 아니하며, 이름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양(利養)을 탐하지도 아니하느니라.” 강설 ; 환희행(歡喜行)은 남을 기쁘게 하는 행이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은 주는 일, 즉 보시행이다.10바라밀 중에서 보시바라밀이 주(主)바라밀이고 나머지 아홉 가지 바라밀은 조(助)바라밀이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 십행에서 주 바라밀과 조 바라밀을 서로 바꿔가며 수행한다. 사람이 하는 일 중에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일은 보시하는 일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보살의 첫째 덕목으로 보시를 꼽는다. 6바라밀도 10바라밀도 첫째가 보시다. 금강경에서도 보시를하되 상(相)에 머물지 말고 보시하라고 권하고 있다. 보시에는 재(財)보시와 법(法)보시와 무외(無畏)보시와 무재칠시(無財七施)등이 있다. 대승불교의 보살은 언제나 모든 사람, 모든 생명에게 대시주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무엇이든 일체생명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베풀어야 하는 것이 의무다. 베풀되 그 마음이 평등해서 베푼 뒤에 후회하거나 아끼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과보나 대가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찬사를 받을 생각을하지 말아야 한다. 되돌아오는 이양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보시를 하고 상을 내지 않는 아름다운 행위이다. <2> 중생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但爲救護一切衆生하며攝受一切衆生하며饒益一切衆生하며 “다만 일체 중생을 구호하며, 일체 중생을 거두어주며, 일체 중생을 이익케 하기 위한 것이니라.” 강설 ; 보시행으로 일체 중생을 기쁘게 하며, 일체 중생을 구호하며, 일체 중생을 섭수하며, 일체 중생을 이익하게하며 행복하게 한다. 그것이 보시의 목적이다. 爲學習諸佛本所修行하며憶念諸佛本所修行하며愛樂諸佛本所修行하며淸淨諸佛本所修行하며 增長諸佛本所修行하며住持諸佛本所修行하며顯現諸佛本所修行하며演說諸佛本所修行하야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신 행을 배우며,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시던 행을 생각하며,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시던 행을 좋아하며,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시던 행을 청정히 하며,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시던 행을 증장하며,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시던 행에 머물러 지니며,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시던 행을 나타내며,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시던 행을 연설하기 위함이니라.” 강설 ; 보시행은 모든 부처님이 닦으신 본래의 수행을 다시 학습하는 일이다. 보시행은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신 수행을 기억하는 일이다. 보시행은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신 수행을 좋아하는 일이다. 보시행은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신 수행을 청정히 하는 일이다. 보시행은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신 수행을 증장하는 일이다. 보시행은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신 수행을 머물러 지니는 일이다. 보시행은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신 수행을 나타내는 일이다. 보시행은 모든 부처님의 본래 닦으신 수행을 연설하는 일이다. 令諸衆生으로離苦得樂이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여의고 낙을 얻게 하려는 것이니라.” 강설 ; 이 모든 설법의 결론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이고득락(離苦得樂)하게 하는 것이다. 중생들로 하여금 이고득락하게 하는 것은 불교가 세상에 존재하는 목적이다. 만약 불교가 세상에 있으면서 그 임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그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3> 보시의 행을 밝히다 佛子야菩薩摩訶薩이修此行時에令一切衆生으로歡喜愛樂하며 隨諸方土의有貧乏處하야以願力故로往生於彼豪貴大富의財寶無盡하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 행을 닦을 때에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환희하고 즐겁게 하려고 하여 어느 지방에나 가난한 곳이 있거든 원력으로써 그 곳의 호사스럽고 크게 부귀하여 재물이 다함이 없는 집에 태어나느니라.” 강설 ; 일반불교에서는 청빈한 생활을 높이 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재산이 넘쳐나고 부귀와 공명이 세상을 덮을 정도의 넉넉한 집안에 태어나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그 재부를 일체 중생의 환희와 안락을 위해서 잘 쓸 수 있기를 서원한다. 이것이 대승보살불교의 적극적인 삶의 모습니다. 假使於念念中에有無量無數衆生이詣菩薩所하야白言호대 仁者我等貧乏하야靡所資贍일새飢羸困苦하야命將不全이로소니 惟願慈哀로施我身肉하사令我得食하야以活其命하소서하면爾時에 菩薩이卽便施之하야令其歡喜하야心得滿足케하며 “가령 잠깐잠깐 동안에 한량없고 수없는 중생들이 보살에게 와서 말하기를 '어지신이여, 우리는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갈 수 없으며, 굶주리고 곤고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불쌍히 여기어 나에게 몸의 살을 보시하여 먹고 살아나게 하소서.'라고 한다면, 그때에 보살은 곧 보시하여 주어 그들로 하여금 환희하고 만족하게 하느니라.” 강설 ; 앞에서는 부귀한 집에 태어나서 많은 재보를 보시하여 중생을 환희하고 즐겁게 해주는 것을 밝혔다. 다음은 어떤 사람이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갈 수 없으며, 굶주리고 곤고하여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사람이 몸의 살을 보시하기를 원한다면 보살은 흔쾌히 몸의 살을 보시하여 중생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다. 몸의 살도 떼어내어 보시하는데 그 외의 가진 재산이나 물건이나 이름이나 소임이나 절이나 명예 따위겠는가. 如是無量百千衆生이而來乞求라도菩薩이 於彼에曾無退怯하고但更增長慈悲之心일새 以是衆生이咸來乞求에菩薩이 見之하고倍復歡喜하야作如是念호대我得善利니此等衆生이 是我福田이며是我善友라不求不請호대而來敎我入佛法中하니我今應當如是修學하야不違一切衆生之心이라하나니라 “이와 같이 한량없는 백 천 중생이 와서 구걸하더라도 보살은 그 일에 조금도 물러서거나 겁약한 기색이 없고, 다만 자비한 마음이 더욱 증장하나니라. 그래서 중생들이 모두 와서 구걸하는 것을 보살이 보고는 더욱 환희하여 이렇게 생각하느니라. ‘나는 지금 좋은 이익을 얻었도다. 이 중생들은 나의 복전(福田)이며 나의 선지식(善知識)이로다. 구하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았지마는 일부러 와서 나로 하여금 불법 가운데 들게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서 일체 중생의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리라.’라고 하느니라. 강설 ; 만약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음식을 구걸하거나 옷을 구걸하거나 신발을 구걸하거나 돈을 구걸하거나 심지어몸의 피나 살을 구걸할 때라도 우리는 이와 같이 생각해야 한다. ‘나는 지금 좋은 이익을 얻었도다. 이 중생들은 나의 복전(福田)이며 나의 선지식(善知識)이로다. 구하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았지마는 일부러 와서 나로 하여금 불법 가운데 들게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고 닦아서 일체 중생의 마음을 어기지 아니하리라.’ 근래의 우리나라 사찰에는 승속을 막론하고 ‘전국구’라는 구걸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행사가 있을 때나 아니면 정기적으로 들른다. 그 사람들이 찾아올 때 위와 같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 또는 ‘내가 우정 찾아가서 보시를 해도 할 것인데 이렇게 찾아와서 나에게 복을 짓게 하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라고 하면서 흔쾌히 베풀어야 하리라. 又作是念호대願我已作現作當作所有善根으로令我未來에於一切世界一切衆生中에受廣大身하야以是身肉으로 充足一切飢苦衆生호대乃至若有一小衆生이未得飽足이라도願不捨命하고所割身肉도亦無有盡하니라 “또 생각하기를 '원컨대 나는 이미 지었거나 지금 짓거나 장차 지을 모든 선근으로서, 오는 세상에는 일체 세계의 일체 중생 가운데서 엄청나게 큰 몸을 받고, 그 몸의 살로써 일체 굶주린 중생들의 배를 채워 만족케 하되, 한 조그만 중생까지라도 배가 차지 않은 이가 있으면, 나는 생명을 버리지 말고, 베어내는 내 몸의 살도 또한 없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원할 것이니라.” 강설 ; 부유하여 경제적인 능력으로 일체 중생을 다 먹여 살리기를 원하는 것도 훌륭한 보살의 보시행이다. 더구나 자신이 가장 아끼는 몸의 살로써 굶주린 중생의 배를 채워 만족케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보살행인가. 그러면서 생명을 버리지도 않고 배어내는 살이 없어지지도 않아서 두고두고 오랫동안 공양할 수 있기를 서원하는 것은 참으로 보살의 중생을 향한 비원(悲願)이다. <4> 깨달음으로 회향하는 보시 以此善根으로願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야證大涅槃하고願諸衆生이食我肉者도亦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야獲平等智하야 具諸佛法하야廣作佛事하며乃至入於無餘涅槃이니若一衆生이라도心不滿足이면我終不證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하니라 “또 생각하기를 ‘이러한 선근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대열반(大涅槃)을 증득하기를 원하느니라. 또 나의 살을 먹은 중생들도 역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평등한 지혜를 얻으며, 모든 불법을 갖추어 불사를 널리 짓다가 무여(無餘)열반에 들기를 원하느니라. 만일 한 중생이라도 마음이 만족하지 않는다면, 나는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지 않으리라'라고 하느니라.” 강설 ; 재물이나 몸의 살을 보시하여 가난한 중생을 구원하는 것은 보시의 일차적 목적이지만 그 보시가 더 나아가 깨달음으로 회향할 때 진정한 불교적 보시가 된다. 단순하게 중생의 굶주림만 해결하는 보시라면 정부의 사화복지부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의 수많은 복지단체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며 개인에게서도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물질 보시는 반드시 깨달음으로 회향되어야 한다. 만약 물질만 보시하고 불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불교적 보시라고 할 수 없다. 작은 물질의 보시도 끝내는 최상의 깨달음으로 회향되어야 한다. <5> 보시의 인(人)과 법(法)이 다 공(空)함 菩薩이 如是利益衆生호대而無我想과衆生想과有想과 命想과種種想과補特伽羅想과人想과 摩納婆想과 作者想과 受者想하고 “보살이 이와 같이 중생을 이익케 하지만, '나'라는 생각, 중생이란 생각, 있다는 생각, 목숨이란 생각, 여러 가지란 생각, '보특가라(補特伽羅)'란 생각, 사람이란 생각, '마납파(摩納婆)"란 생각, '짓는 이'란 생각 '받는 이'란 생각이 모두 없느니라.” 강설 ; 보시를 행하되 보시를 했다는 상을 떠난 것을 밝혔다. 상에는 주관으로서의 상과 객관으로서의 상이 있다. 이것을 인(人)과 법(法)이라 한다. 보특가라(補特伽羅)는 푸드갈라의 음역이다. 생사윤회를 거듭하면서 여러 취(趣)를 거듭하여 왕래하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인간의 정신적 주체를 말한다. '마납파(摩納婆)는 한역으로는 유동(儒童), 연소(年少), 인(人), 장자(長者), 선혜(善慧), 연소정행(年少淨行)이다. 但觀法界衆生界無邊際法과空法과無所有法과無相法과無體法과無處法과無依法과無作法하나니라 “다만 법계와 중생계의 끝없고 경계가 없는 법과 공하다는 법과 있는 바가 없는 법과 형상 없는 법과 체(體)가 없는 법과 처소가 없는 법과 의지가 없는 법과 지음이 없는 법을 관찰하느니라.” 강설 ; 보시를 행함에는 반드시 “삼륜(三輪)이 청정함을 관찰하라.”는 말이 있다. 삼륜이란 보시하는 물건과 보시하는 사람과 보시를 받는 사람이다. 청정이란 텅 비어 공함을 뜻한다. 물건도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다 텅 비어 공함을 관찰해야 비로소 보시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 상을 떠난 보시이다. <6> 인(人)과 법(法)이 공(空)한 이익을 밝히다 作是觀時에不見自身하며不見施物하며不見受者하며不見福田하며 不見業하며不見報하며不見果하며不見小果하며不見大果니라 “이런 관찰을 할 때에는 제 몸도 보지 않고, 보시하는 물건도 보지 않고, 받는 이도 보지 않고, 복 밭도 보지 않고, 업(業)도 보지 않고, 과보(果報)도 보지 않고, 결과도 보지 않고, 작은 결과도 보지 않고, 큰 결과도 보지 않느니라.” 강설 ; 보시에는 흔히 삼륜이 텅 비어 공함을 관찰하지만 화엄경에서는 삼륜과 아울러 복전과 업과 과보와 작은 결과와 큰 결과까지 보지 않는다. 이와 같이 보아야 진정한 보시가 된다. 세상에 보시를 행하는 사람은 많으나 보살의 대승적 안목에서 보시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은 적다. 10행중에 그 첫 환희행이 원만선취하려면 철저히 상을 떠난 보시로서 인(人)과 법(法)이 모두 공해야 한다. <7> 법의 보시를 행하기를 원하다 爾時에 菩薩이觀去來今一切衆生의所受之身이尋卽壞滅하고便作是念호대奇哉라 衆生이여愚癡無智하야於生死內에 受無數身하야危脆不停하야速歸壞滅이若已壞滅하며若今壞滅하며若當壞滅호대而不能以不堅固身으로求堅固身일새 “그때에 보살이 과거, 미래, 현재의 일체 중생의 받아 난 몸이 곧 소멸하는 것을 보고 문득 생각하되, '이상하다, 중생이여, 어리석고 지혜가 없어서 생사하는 속에서 수없는 몸을 받지마는 위태하고 연약하여 머물러 있지 못하고 속히 소멸하는데, 만약 이미 소멸하였거나 지금 소멸하거나 장차 소멸할 것이거늘, 마침내 견고하지 못한 몸으로써 견고한 몸을 구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하니라.” 강설 ; 보살이 일체 중생들의 받은 몸이 빨리 괴멸(壞滅)하는 것을 관찰하는 내용이다. 불교에는 수많은 선지식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훌륭한 선지식은 스스로의 몸이 빨리 괴멸(壞滅)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신기하게도 어리석고 무지하여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이 몸은 위태롭고 연약하여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한 순간도 머물지 않는 것이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이 타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문제에서 벗어나려하지 않는다. 허망한 육신으로서는 견고한 법신을 구할 수 없는데도 육신에만 매달려 있다. 보살은 이러한 사실을 관찰하고 일체 지혜를 증득하여 중생들에게 무너지지 않는 법신의 이치를 설법하여 가르친다. 我當盡學諸佛所學하야證一切智하며知一切法하고爲諸衆生하야說三世平等隨順寂靜不壞法性하야 令其永得安隱快樂이라하나니佛子야是名菩薩摩訶薩의第一歡喜行이니라 “또 ‘내가 마땅히 모든 부처님이 배우신 것을 모두 배우며, 일체 지혜를 얻어 일체 법을 알고는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삼세(三世)에 변함없이 평등한 적정을 따르는 무너지지 않는 법의 성품을 설하여 주어 그들로 하여금 편안한 쾌락을 얻게 하리라.’하나니, 불자들이여, 이것이 이름이 보살마하살의 제1 환희행(歡喜行)이라 하느니라.” 강설 ; 보살은 어리석은 중생들을 깨우치려고 스스로 일체 지혜를 증득하고 일체 법을 알아서 삼세에 변함없으며 적정하여 괴멸하지 않는 법성의 이치를 설하여 준다. 괴멸하지 않는 법성이 참다운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영원한 안락을 얻게 될 것이다.물질을 보시하여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불교가 진정으로 세상에 베풀어야 할 보시는 법을 보시하는 것이다. 한 순간에 괴멸하고 마는 이 육신을 벗어나서 영원히 괴멸하지 않는 법성의 자리에서 영원히 편안하고 쾌락한 삶을 얻게 하는 것이 불교적 보시로써 환희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제1 환희행(歡喜行)이다. (4) 제2 요익행(饒益行) <1> 계(戒)를 가지는 행(行)을 밝히다 佛子야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饒益行고此菩薩이護持淨戒하야於色聲香味觸에心無所着하고亦爲衆生하야如是宣說호대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요익행(饒益行)인가. 이 보살이 깨끗한 계율을 수호하여 가지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하여 마음이 집착하지 아니하고, 또한 중생들을 위하여서도 이와 같이 말하느니라.” 강설 ; 제2 요익행은 지계바라밀이 주(主)바라밀이고 나머지 9바라밀은 조(助)바라밀이다. 보살은 보시행을 하든 지계행을 하든 자신이 먼저 행하고 다음에는 반드시 중생들에게 설하여 준다. 계행을 가진다는 것은 5계와 10계와 10중 48계와 250계와 348계 등을 받아서 그 모든 조목들을 낱낱이 가지어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에 대하여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집착이 있으면 그것은 청정한 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지계(持戒)바라밀을 닦는 근본은 집착하지 않는데 있다. 이것이 계를 가지는 행이다. 不求威勢하며不求種族하며不求富饒하며不求色相하며不求王位하야如是一切에皆無所着하고但堅持淨戒하야作如是念호대 “권세를 구하지도 않고, 문벌을 구하지도 않고, 부귀를 구하지도 않고, 몸매를 구하지도 않고, 임금의 지위를 구하지도 아니하여, 이와 같은 일체 것에는 조금도 집착이 없고, 다만 청정한 계율을 견고하게 가지면서 이와 같이 생각하느니라.” 강설 ; 또 계를 가지는 바른 행으로서, 불법을 잘 배워 그것을 잘 실천한 뒤에 세속적인 부귀공명을 얻으려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밝혔다. 세속적인 일체 부귀영화에는 일체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한다. 이것이 또한 지계(持戒)바라밀을 닦는 근본정신이다. 我持淨戒하야必當捨離一切纏縛과貪求熱惱와諸難逼迫과毁謗亂濁하고得佛所讚平等正法이라하나니라 “‘내가 청정한 계율을 가지는 것은 반드시 온갖 얽힘과 온갖 속박과 탐심과 시끄러움과 모든 재난과 핍박과 훼방과 탁란(濁亂)함을 버리고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평등한 정법을 얻는 것이니라.'라고 하느니라.” 강설 ; 지계(持戒)바라밀을 닦는 사람은 반드시 이와 같은 서원을 세워야 한다. “온갖 얽힘과 온갖 속박과 탐심과 시끄러움과 모든 재난과 핍박과 훼방과 탁란(濁亂)함을 버리고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평등한 정법을 얻는 것”을 맹세코 다짐해서 실천해야 그것이 계를 가지는 정신이다. 이와 같은 맹서도 없이 계율의 조목만 따진다면 그것은 결코 계를 지닌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2> 섭율의계(攝律儀戒) 佛子야菩薩이 如是持淨戒時에於一日中에假使無數 百千億那由他諸大惡魔가詣菩薩所호대一一各將無量無數百千億那由他天女하야皆於五欲에善行方便하며端正姝麗하야傾惑人心이라執持種種珍玩之具하고欲來惑亂菩薩道意하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와 같이 청정한 계율을 가질 적에, 하루 동안에 가령 수없는 백 천억 나유타의 여러 큰 악마가 보살이 있는 곳에 나오면서, 저마다 각각 한량없고 수없는 백 천억 나유타 천녀를 데리고 왔는데 모두 다섯 욕심에 대하여 방편을 잘 행하며, 단정하고 아름다워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게 하며, 갖가지 훌륭한 물건을 가지고 와서 보살의 도심(道心)을 혹란하고 어지럽게 하고자 하리라.” 강설 ; 대승 불교의 세 가지 기본적인 계법으로서 삼취정계(三聚淨戒)가 있다. 곧 악을 막는 섭률의계(攝律儀戒)와 선을 행하는 섭선법계(攝善法戒)와 남에게 공덕을 베푸는 섭중생계(攝衆生戒)를 이르는 말이다. 그 삼취정계를 하나하나 설하는 내용이다. 첫째는 일반적인 계율은 잘 지키는 섭률의계다. 수많은 악마가 아름다운 천녀를 데리고 와서수행자를 파계하도록 유혹한다. 또 욕심이 나기 쉬운 훌륭한 물건을 가지고 와서 도심이 흐리도록 유혹한다. 이러한 경계를 만났을 때,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으로 느끼고 하는 다섯 가지 욕망을 잘 단속하여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爾時에菩薩은作如是念하되此五欲者는是障道法이라乃至障礙無上菩提라하여是故不生一念欲想하야心淨如佛이니라 “이때에 보살은 이렇게 생각하되 '이 다섯 욕심은 도를 장애하는 것이며, 가장 높은 깨달음까지도 장애하는 것이라.'하여 잠깐도 탐욕을 내지 아니하고 깨끗한 마음이 부처님과 같으니라.” 강설 ; 계율이란 스스로 마음을 잘 단속하여 도에 장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그르려면 스스로를 다스리는 자기만의 주문이 있어야 한다. ‘다섯 욕심은 도를 장애하는 것이며, 가장 높은 깨달음까지도 장애하는 것이니 삼가하고 또 삼가라.’ 이와 같은 주문(呪文)으로 스스로를 잘 지켜야 한다. <3> 섭중생계(攝衆生戒) 唯除方便으로敎化衆生호대而不捨於一切智心이니라 “오직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되 일체 지혜의 마음을 버리지 않는 것은 제외하느니라.” 강설 ; 섭중생계(攝衆生戒)란 어떤 경우라도 중생의 이익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것을 우선으로 하는 계이다. 계도 결국에는 중생의 이익을 위해 시설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사 계율을 중요시하더라도 중생을 교화하여 일체 지혜를 얻게 하기 위한 방편이라면 일시적 파계는 가능하다는 이론이다. 이것이 중생을 섭수하는 계다. 佛子야菩薩이 不以欲因緣故로惱一衆生이니寧捨身命이언정而終不作惱衆生事하나니라 “불자들이여, 보살은 탐욕으로 인하여서는 한 중생도 괴롭게 하지 아니하나니,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마침내 중생을 괴롭게 하는 일을 짓지 아니하느니라.” 강설 ; 사람을 괴롭게 하여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중생을 괴롭히면서 자신이 편안하려고 하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온갖 생명을 빼앗으면서까지 자신의 이익이나 나라의 이익을 삼으려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보살은 차라리 자기의 목숨을 버릴지언정 그와 같은 일은 하지 않는다. 菩薩이 自得見佛已來로未曾心生一念欲想이어든何况從事아若或從事인댄無有是處니라 “보살이 부처님을 친견한 후로는 일찍이 잠깐도 탐욕하는 생각을 내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하물며 실제로 일을 행할까보냐. 혹시 그런 일을 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느니라.” 강설 ; 평범한 사람으로서도 불교를 알고부터는 모든 것을 참다운 이치[眞理]대로 살아야 한다. 참다운 이치에 어긋나는 탐욕의 생각을 내면 그는 불자라고 할 수 없다. 탐욕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욕심을 채우려고 실제의 행동에 옮겨서야 되겠는가. 불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爾時에 菩薩이但作是念호대一切衆生이於長夜中에想念五欲하며趣向五欲하며 貪着五欲하며其心決定하며耽染하며 沈溺하며隨其流轉하며不得自在하나니 “그때 보살은 이렇게 생각하나니, '일체 중생이 오랜 세월에 다섯 욕심을 생각하고, 다섯 욕심으로 향하여 나아가고, 다섯 욕심을 탐착하면서, 그 마음에 결정하여 물들고 빠져서 그를 따라 헤매고 자재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니라.’” 강설 ; 보살이 중생들을 바라볼 때 중생들은 이와 같이 살고 있음을 생각한다. 다섯 욕심이란 눈은 좋은 것만 보려하고, 귀는 좋은 소리만 들으려하고, 코는 좋은 향기만 맡으려 하고, 혀는 좋은 맛만 보려하고, 몸은 좋은 감촉만 닿게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를 하고자하는 대로 욕심을 채우려고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행동으로 옮겨서 끝내 욕심을 채우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그것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그것만을 찾아서 흘러 다닌다. 이것이 어리석고 미혹한 중생들의 삶이다. 생들의 삶의 현실을 보살이 굽어보고는 아래와 같은 서원을 세운다. 我今應當令此諸魔와及諸天女와一切衆生으로住無上戒하고住淨戒已하야는於一切智에心無退轉하야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며乃至入於無餘涅槃케호리라何以故오此是我等의所應作業이라應隨諸佛하야如是修學이니라 “‘내 이제 마땅히 이 마군과 천녀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가장 높은 계율에 머물게 할 것이며, 청정한 계율에 머문 뒤에는 일체 지혜에 마음이 퇴전하지 않게 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내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다. 부처님을 따라서 이렇게 배워야 할 것이니라.'고 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중생들을 보고 하는 맹서의 생각은 계속된다. ‘중생들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잘못을 저지르게 하는 마군이나 천녀나 또는 그 마군과 천녀를 보고 욕심으로 허덕이는 중생들 모두에게 가장 높은 계(戒)에 머물게 해야 한다. 가장 높은 계에 머물면 곧 일체 지혜에 마음이 물러서지 않고 끝내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보살로서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부처님을 따라서 이렇게 배워야 할 것이다.’라고 맹서의 생각을 한다. 마군과 천녀와 중생에게 머물게한다는 가장 높은 계[無上戒]란 심계(心戒)며, 불계(佛戒), 또는 보살계(菩薩戒)다. 이 계는 사람이 곧 부처님이라는 인불사상(人佛思想)의 계다. 이 사상은 불교를 믿고 공부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신이며, 근본이며, 안목이다. 불교 안에서 무엇을 하든 인불사상이 갖춰지고 난 뒤라야 그것이 밝은 눈이 되어 불교의 바른 길을 갈 수 있게 된다. 불교의 가르침에서는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근본은 곧 부처님이라고 보는 것이 기본원칙이며 밝은 눈이다. 마군과 천녀와 중생에게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는 동등한 것이라는 계[心戒, 佛戒]에 머물게 한다는 것이다. <4> 섭선법계(攝善法戒) 作是學已에離諸惡行과計我無知하고以智入於一切佛法하야爲衆生說하야令除顚倒라하나니라 “이렇게 배우고는 모든 나쁜 행동과 '나' 라고 고집하는 무지(無知)를 떠나고, 지혜로 일체 부처님 법에 들어가서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여 전도(顚倒)를 버리게 하느니라.” 강설 ; 섭선법계(攝善法戒)란 선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총섭(總攝)하는 선량한 마음을 기준으로 하는 윤리원칙이다. 계율을 배워 익히고, 다시 중생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이치를 배우고, 그리고 다시 선한 일을 세상에 널리 펴서 자신과 타인을 함께 이롭게 하는 가르침이다. 먼저 악을 멀리해야 한다. 다음은 자기 고집에 머물러있는 무지한 삶을 떠나야 한다. 무지한 삶이란 일체 법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 속에 취생몽사하는 삶을 뜻한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선한 법이다. 그렇게 되면 지혜로서 일체 불법에 들어가 중생들에게 설법하여 진리와 거꾸로 뒤바뀐 전도된 삶을 벗어나게 된다. 然知不離衆生하고 有顚倒요不離顚倒하고 有衆生이며不於顚倒內에 有衆生이요不於衆生內에 有顚倒며 亦非顚倒가是衆生이요亦非衆生이 是顚倒며顚倒가非內法이요顚倒가非外法이며衆生이 非內法이요衆生이 非外法이라 “그러나 중생을 떠나서 전도(顚倒)가 있지 않고, 전도를 떠나서 중생이 있지도 않느니라. 전도 속에 중생이 있지도 않고, 중생 속에 전도가 있지도 않느니라. 또한 전도가 곧 중생도 아니고, 또한 중생이 곧 전도도 아니니라. 전도가 안[內]의 법도 아니고, 전도가 밖의 법도 아니며, 중생이 안의 법도 아니고, 중생이 밖의 법도 아닌 줄을 아느니라.” 강설 ; 전도란 참되고 바른 이치와 거꾸로 뒤바뀐 삶을 말한다. 그것은 곧 미혹한 중생들의 삶이다. 그래서 중생과 전도는 함께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도 속에 중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중생 속에 전도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분석해 들어가면 중생도 전도도 모두가 텅 비어 공적한 것이다. 一切諸法이虛妄不實하야速起速滅하야無有堅固호미如夢如影하며如幻如化하야 誑惑愚夫하나니如是解者는卽能覺了一切諸行이라通達生死와及與涅槃하야證佛菩提하야 “일체 모든 법이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하여 잠깐 일어났다 잠깐 없어지는 것이요, 견고하지 못하여 꿈과 같고 그림자 같고 환영과 같고 변화함과 같아서 어리석은 범부를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아는 사람은 곧 일체 모든 행을 깨달아 나고 죽는 일과 열반을 통달하여 부처님의 보리를 증득하느니라.” 강설 ; 불교의 기본을 밝혔다. 즉 불교의 기본은 일체 법이 허망하여 진실치 못하고 순식간에 변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허망한 것은 괴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다음은 모든 존재는 합성된 것이라서 변하지 않는 주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이 세 가지 진리를 알면 생사와 열반이 하나임을 통달하여 부처님이 깨달으신 보리를 증득하게 된다. “어리석은 범부를 속이고 미혹하게 한다.”라는 말에 청량스님은 “사실인즉 어리석은 범부가 스스로 속는 것이 마치 원숭이가 달을 집착하는 것과 같다. 원숭이가 달을 집착하는 것과 같다는 것은 달이 어찌 마음이 있어서 원숭이를 속이겠는가. 어리석은 범부가 허망한 것을 집착하여 실재하는 것으로 삼으니 스스로 속는 것이 분명하도다.”라고 하였다.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실재하는 것이라고 착각하여 그림자 달을 건져서 부처님께 공양하려하다가 모두 물에 빠졌다는 설화를 이끌어 온 것이다. 범부들이 현상을 보고 착각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림자인 현상에 속아서 그 그림자를 건지려고 하다가 물에 빠져 목숨을 잃는 것에 비유하였다. 自得度하고令他得度하며自解脫하고令他解脫하며自調伏하고令他調伏하며自寂靜하고令他寂靜하며自安隱하고 令他安隱하며自離垢하고令他離垢하며自淸淨하고令他淸淨하며自涅槃하고令他涅槃하며自快樂하고하고令他快樂이니라 “스스로 제도하고 남을 제도하게 하며, 스스로 해탈하고 남을 해탈케 하며, 스스로 조복하고 다른 이를 조복케 하며, 스스로 고요하고 다른 이를 고요하게 하며, 스스로 안온(安穩)하고 남을 안온케 하며, 스스로 때를 여의고 남도 때를 여의게 하며, 스스로 청정하고 남도 청정케 하며, 스스로 열반하고 남을 열반케 하며, 스스로 쾌락하고 남도 쾌락케 하느니라.” 강설 ; 생사와 열반이 하나임을 통달하여 부처님이 깨달으신 보리를 증득하게 되면 자신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저절로 이뤄지게 된다. 제도, 해탈, 조복, 적정, 안온, 이구(離垢), 청정, 열반, 쾌락 등을 그와 내가 다 같이 누리게 된다. <5> 더욱 수승한 행을 닦을 것을 생각하佛子야此菩薩이復作是念호대我當隨順一切如來하야離一切世間行하며 具一切諸佛法하며住無上平等處하며等觀衆生하며明達境界하며離諸過失하며斷諸分別하며捨諸執着하며善巧出離하며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다시 이렇게 생각하되 '나는 마땅히 일체 여래를 따라서 일체 세간의 행을 여의며, 일체 부처님 법을 갖추며, 가장 높은 평등한 곳에 머물며, 중생을 평등하게 하게 보며, 경계를 밝게 통달하며, 모든 허물을 여의며, 모든 분별을 끊고, 모든 집착을 버리고, 공교하게 뛰어나리라.’” 강설 ; 보살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까? 보살은 불교에서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삶의 본보기다. 그들은 이와 같이 생각하며 산다. “공교하게 뛰어난다.”는 것은 생사의 고통에서 능숙하게 뛰어나 해탈을 누리는 것이다. 心恒安住無上無說無依無動無量無邊無盡無色甚深智慧라하나니佛子야是名菩薩摩訶薩의第二饒益行이니라 “‘마음은 항상 위없고, 말할 수 없고, 의지할 데 없고, 변동이 없고, 한량없고, 한이 없고, 끝나지 않고, 모양이 없고, 깊고 깊은 지혜에 머물리라.’하리니, 불자들이여,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제2 요익행(饒益行)이라 하느니라.” 강설 ; 보살은 또 생각하기를, ‘부처님의 깊고 깊은 지혜에 머물 것이다.’라는 것이다. 불교수행의 궁극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에 있으므로 그 지혜를 여러 가지로 수식하여 설명하였다. 중생을 이익하게 한다는 보살의 제2 요익행을 설명하여 마쳤다. (5) 제3 무위역행(無違逆行) <1> 인욕행을 밝히다 佛子야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無違逆行고此菩薩이常修忍法하야謙下恭敬하야不自害하고 不他害하고不兩害하며不自取하고不他取하고不兩取하며不自着하고不他着하고不兩着하며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무위역행(無違逆行)인가. 이 보살이 항상 인욕(忍辱)하는 법을 닦아 겸손하고 공경하여 스스로를 해치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고, 둘 다 해치지 않으며, 스스로 탐하지 않고, 남을 탐하게 하지 않고, 둘 다 탐하지 아니하며, 스스로 집착하지 않고, 남을 집착하게 하지 않고, 둘 다 집착하지 아니하느니라.” 강설 ; 제3 무위역행(無違逆行)이란 자신의 마음을 어기고 거스르는 일이 앞에 나타나더라도 잘 참고 소화해서 어기고 거스름이 없는 행이다. 인욕바라밀이 주바라밀이 되고 다른 아홉 가지 바라밀은 조바라밀이 된다. 불문에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할 때 가장 먼저 강조하는 것이 하심(下心)이다. 참고 겸손하고 남을 공경하며 하심을 한다면 자신을 해치지 않으며 다른 사람도 해치지 않게 된다. 그것은 곧 탐욕과 집착으로 연결되어 나와 남의 관계가 화목하고 친밀하게 된다. 사람의 삶에는 어떤 사실이 옳고 그른 것을 결정짓기 보다는 친화가 우선이다. 교육에 있어서도 선정후교(先情後敎)라고 하여 듣는 사람들과 먼저 정감을 나누고 뒤에 가르친다는 뜻이다. 예컨대 가족들 끼리 남이 한 일에 대해서 옳고 그른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감과 화목이 넘치는 대화가 중요할 뿐이다. 亦不貪求名聞利養하고但作是念호대我當常爲衆生說法하야 令離一切惡하며斷貪瞋癡와 憍慢覆藏과慳嫉諂誑하야令恒安住忍辱柔和라하나니라 “또한 명예와 이양(利養)도 구하지 아니하고, 다만 이런 생각을 하나니 '내가 마땅히 항상 중생에게 법을 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체 나쁜 짓을 여의고 탐욕, 성내는 일, 어리석음, 교만, 감추는 일, 간탐, 질투, 아첨, 속임을 끊게 하여 항상 인욕과 부드럽고 화평하는 데 머물게 하리라.'하느니라.” 강설 ; 하심하고 겸손하고 공경하게 되면 명리를 탐하지도 않으며, 이양을 탐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사양하고 양보하게 된다. 보살은 오로지 중생을 위하여 정법으로 설법하여 일체 악을 떠나게 하며, 탐욕, 성내는 일, 어리석음, 교만, 자기 허물을 감추는 일, 아끼고 탐하는 일, 질투, 아첨, 남을 속이는 일을 끊게 하여 항상 인욕에 머물게 한다. <2> 원한과 침해를 참는 인욕 수행 佛子야菩薩이 成就如是忍法에假使有百千億那由他阿僧祗衆生이來至其所하야 一一衆生이化作百千億那由他阿僧祗口하고一一口에 出百千億那由他阿僧祗語호대 “불자들이여, 보살이 이와 같이 인욕하는 법을 성취하면, 가령 백 천억 나유타 아승지 중생이 그 곳에 오는데, 중생마다 백 천억 나유타 아승지 입을 변화하여 만들어 낱낱 입으로 백 천억 나유타 아승지 말을 한다고 하자.” 강설 ; 원한과 침해를 참는 인욕 수행에는 먼저 무수한 사람들의 무수한 비난을 듣더라도 잘 참고 소화해서 마음에 남겨두지 않는 수행이다. 비난이나 나쁜 말을 듣고 마음에 어기거나 거스르지 않는 훈련부터 쌓아야 더 어려운 수행을 할 수 있다. 所謂不可喜語와非善法語와不悅意語와不可愛語와非仁賢語와非聖智語와 非聖相應語와非聖親近語와深可厭惡語와不堪聽聞語니以是言詞로毁辱菩薩하며 “이른바 기쁘지 못한 말, 선하지 못한 말, 반갑지 않은 말, 사랑할 수 없는 말, 어질지 못한 말, 성인의 지혜가 아닌 말, 성현과 맞지 않는 말, 성현에게 친근할 수 없는 말, 매우 싫은 말,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들이다. 이런 말로 보살을 헐뜯어 욕한다고 하자.” 강설 ; 마음에 맞지 않고 내 마음을 거스르는 말들을 열거하였다. 마음에 맞지 않는 말의 종류도 참으로 많다 . 우리는 세상을 살다보면 별의별 말을 다 듣게 된다. 특히 요즘 같은 말세에는 민주주의니 자유주의니 하여 해서는 안 될 말들까지 얼마나 많이 하는지 차마 다 들을 수가 없다. 고인들은 삼사일언(三思一言)이라고 하여 말 한마디에 세 번을 생각하고 하라고 경계하였다. 구시화문(口是禍門)이다. 입은 재앙을 불러오는 문이다. 삼가고 또 삼가야 한다. 又此衆生이 一一各有百千億那由他阿僧祗手호대一一手에 各執百千億那由他阿僧祗器仗하고逼害菩薩하야如是經於阿僧祗劫토록曾無休息하면 “또 이 중생들이 저마다 백 천억 나유타 아승지 손을 가졌고, 손마다 각각 백 천억 나유타 아승지 병장기를 들고 보살을 박해하기를 아승지 겁이 지나도록 하여 일찍이 쉬지 아니한다고 하자.” 강설 ; 인욕을 닦는데 어디 말 뿐이겠는가. 사람을 해치는 데는 말과 함께 칼이나 창이나 막대나 손과 발로 박해하는 일도 자주 있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마음에 거스르지 않고 다 참아 소화하는 것이 보살의 길이다. 菩薩이 遭此極大楚毒하야身毛皆竪하야命將欲斷이라도作是念言호대我因是苦하야心若動亂이면則自不調伏하며自不守護하며自不明了하며自不修習하며自不正定하며自不寂靜하며自不愛惜하며自生執着하리니何能令他로心得淸淨이리오하나니라 “보살이 이렇게 극심한 고초를 당하여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생명이 끊어지려고 하더라도 생각하기를, '내가 이만한 고통으로 마음이 흔들리면, 자기를 조복하지 못하고, 자기를 수호하지 못하고, 스스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스스로 닦지 못하고, 스스로 바르게 정하지 못하고, 스스로 고요하지 못하고, 스스로 아끼지 못하여, 스스로 집착을 내는 것이니, 어떻게 다른 이의 마음을 청정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느니라.” 강설 ; 보살의 인욕바라밀의 수행이란 참으로 무서운 결심이다. 극심한 고초를 당하여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목숨이 끊어질 듯 하는 경우라도 결코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끝까지 견디어낸다. 스스로를 자책할 뿐이다. 오직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청정하게하려는 생각뿐이다. 보살의 인욕행의 참 모습이다. <3> 고통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인욕 수행 菩薩이 爾時에復作是念호대我從無始劫으로住於生死하야受諸苦惱라하야如是思惟하고 重自勸勵하야令心淸淨하야而得歡喜하며善自調攝하야自能安住於佛法中하고亦令衆生으로同得此法이니라 “보살이 이때에 다시 또 생각하기를 '내가 끝없는 옛적부터 생사 속에 있으면서 모든 고통을 받았도다.'하고 이와 같이 생각하고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마음이 청정하여 환희하여지고, 스스로 잘 조화하고 거두어 들여서 불법 가운데 편안히 머물고, 또 중생으로 하여금 이러한 법을 얻게 하느니라.” 강설 ; 이 세상 누구나 끝없는 옛적부터 생사 속에 있으면서 모든 고통을 받았으나 중생은 어제일도 잊고 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잊을 것은 잊어야하고 잊지 않아야할 것은 잊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귀감이 되어 미래를 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받은 고통을 생각하여 다른 중생들은 그와 같은 고통을 받지 않도록 온갖 방편으로 법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4> 법의 이치를 관찰하는 인욕 수행 復更思惟호대此身이 空寂하야無我我所하며無有眞實하며性空無二하며若苦若樂이皆無所有하니라 “다시 생각하기를 ‘이 몸은 공한 것이어서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으며, 진실하지 아니하고 성품이 공하여 둘이 없으며, 괴롭고 즐거움이 모두 없는 것이니라.’” 강설 ; 보살이 생각한 것은 인생의 고(苦)와 공(空)과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밝힌 내용이다. 인생은 괴로운 것이며, 공한 것이며, 무상한 것이며, 아무런 주체가 없는 합성된 것이라는 관점은 불교의 기본적인 견해이다. 諸法空故로我當解了하야廣爲人說하야令諸衆生으로滅除此見이라是故我今에雖遭苦毒이나應當忍受니라 “‘모든 법이 공한 것을 내가 마땅히 이해하고 다른 이에게 널리 말하여 여러 중생들로 하여금 이런 소견을 없애게 할 것이니, 그러므로 내가 지금 비록 이런 고통을 당하여도 응당 참고 견디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라.” 강설 ; 한마디로 모든 법은 공한 것이다. 보살은 마땅히 알고 있으나 널리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가르쳐서 이와 같은 인생의 실상을 모르는 모든 중생들의 소견을 없애주기 위하여 숱한 고통을 능히 참고 응당 잘 받아드린다. <5> 인욕을 수행하는 의미 爲慈念衆生故며 饒益衆生故며 安樂衆生故며 憐愍衆生故며 攝受衆生故며 不捨衆生故며 自得覺悟故며 令他覺悟故며 心不退轉故며 趣向佛道故라하나니 是名菩薩摩訶薩의 第三無違逆行이니라 “중생을 사랑으로 염려하는 연고며, 중생에게 이익을 주려는 연고며, 중생을 안락케 하려는 연고며,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연고며, 중생을 섭수하는 연고며, 중생을 버리지 않는 연고며, 스스로 깨달으려는 연고며, 다른 이를 깨닫게 하려는 연고며, 마음이 퇴전하지 않는 연고며, 부처님 도(道)에 향하여 나아가기 위한 연고라고하나니, 이것이 이름이 보살마하살의 제3 무위역행(無違逆行)이니라.” 강설 ; 보살은 그 어려운 인욕수행을 왜 하는가? 그 까닭을 열 가지로 밝혔다. 그 근본취지는 언제나 보살이 중생을 향한 뜨거운 자비심이다. 중생을 염려하고, 중생을 이익하게하고, 중생을 안락하게하고, 중생을 섭수하고, 궁극에는 중생들이 부처님의 도에 나아가게하려는 까닭이다. (6) 제4 무굴요행(無屈撓行) <1> 열 가지의 정진 佛子야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無屈撓行고此菩薩이 修諸精進호대所謂第一精進과 大精進과勝精進과殊勝精進과最勝精進과最妙精進과上精進과無上精進과無等精進과普徧精進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무굴요행(無屈撓行)인가. 이 보살이 모든 정진을 수행하나니,이른바 제일 정진과 큰 정진과 수승한 정진과 특별히 수승한 정진과 가장 수승한 정진과 가장 묘한 정진과 높은 정진과 가장 높은 정진과 같을 이 없는 정진과 널리 두루 한 정진이니라.” 강설 ; 무굴요행(無屈撓行)이란 굽히거나 구부러지거나 중단함이 없이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이다. 그래서 정진바라밀에 해당한다. 불교에서 수많은 말 중에 정진이라는 말을 대단히 높이 산다. 정진에는 보통 정진, 가행(加行)정진, 용맹정진 등이 있다. 여기에는 열 가지 정진을 열거하였다. 수행에 있어서나 공부에 있어서나 농사를 짓거나 사업을 하거나 끊임없이 나아가야 성공을 거둘 수 있다. 계속되는 정진 없이 이뤄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나아가고 또 나아가서 열 번을 거듭하였다. <2> 과오를 떠나다 性無三毒하며性無憍慢하며性不覆藏하며性不慳嫉하며性無諂誑하며性自慚愧하야終不爲惱一衆生故로而行精進이요 “성품에 세 가지 독함이 없고, 성품에 교만이 없고, 성품에 덮어 숨김이 없고, 성품에 간탐과 질투가 없고, 성품에 아첨과 속임이 없고, 성품이 스스로 부끄러워함이니라. 마침내 한 중생이라도 괴롭게 하지 않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느니라.” 강설 ; 아무리 용맹정진을 하여 삼독을 제거하고 교만을 없애고 간탐과 질투를 없애려고 하더라도 우리들의 본성에는 본래로 그와 같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본래 없음을 알고 정진을 하는 것이 바른 정진이다. 육조단경에, “마음 땅에 잘못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요, 마음 땅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지혜요, 마음 땅에 산란함이 없는 것이 자성의 선정이요, 더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것이 몸의 금강이요, 몸이 오고 가는 것이 본래의 삼매라네.”라고 하였다. <3> 정진수행의 20가지 이유 但爲斷一切煩惱故로而行精進하며但爲拔一切惑本故로而行精進하며但爲除一切習氣故로而行精進하니라 “오직 일체 번뇌를 끊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번뇌의 근본을 뽑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습기(習氣)를 제하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느니라.” 강설 ; 먼저 세 구절은 번뇌와 미혹과 습기를 끊기 위해 정진함이다. 중생을 제도하려면 먼저 자신의 번뇌를 끊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 구절은 현행(現行)을 끊고, 다음은 종자(種子)를 끊고, 다음은 습기(習氣)를 끊는 내용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전국 사찰의 모든 법당에는 열심히 정진하는 불자들이 꽉꽉 차있다. 선원과 강원에도 정진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나 토굴에서도 정진의 열기는 계속된다. 이들의 정진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것을 20가지로 정리하였다. 만약 다른 뜻이 있다면 여기에 밝힌 20가지에 합당하도록 그 뜻을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오직 번뇌를 끊고, 번뇌의 근본을 뽑고, 일체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다. 오직, 오직 이와 같은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진한다. 但爲知一切衆生界故로而行精進하며但爲知一切衆生의死此生彼故로而行精進하니라 但爲知一切衆生煩惱故로而行精進하며但爲知一切衆生心樂故로而行精進하며 但爲知一切衆生境界故로而行精進하며但爲知一切衆生의 諸根勝劣故로而行精進하며 但爲知一切衆生心行故로而行精進하니라 “오직 일체중생의 세계를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중생이 여기서 죽어 저기 나는 것을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중생의 번뇌를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중생의 마음에 좋아함을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중생의 경계를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중생의 근성이 승(勝)하고 열(劣)함을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중생의 마음으로 행함을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느니라.” 강설 ; 다음으로 일곱 구절은 중생제도를 위해 정진함을 밝힌 내용이다. 오직 일체 중생들의 갖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정진한다. 불교의 화두는 오직 중생이기 때문이다. 보살의 화두도 부처님의 화두도 오직 중생의 문제해결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음이며, 보살의 마음이며,불교의 마음이며, 화엄경의 마음이다. 但爲知一切法界故로而行精進하며但爲知一切佛法根本性故로而行精進하며 但爲知一切佛法平等性故로而行精進하며但爲知三世平等性故로而行精進하며 “오직 일체 법계를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불법의 근본 성품을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불법의 평등한 성품을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삼세의 평등한 성품을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느니라.” 강설 ; 네 구절은 법을 알기 위해 정진함을 밝혔다. 청량스님은, “다음 네 구절 법을 아는 내용 중에 첫 구절은 총체적으로 해석하였고, 다음은 따로따로 해석하였다. 따로 해석한 것은 사법계(事法界)와 이법계(理法界)와 사리무애법계(事理無碍法界)다.”라고 하였다. 但爲得一切佛法智光明故로而行精進하며但爲證一切佛法智故로而行精進하며 但爲知一切佛法一實相故로而行精進하며但爲知一切佛法無邊際故로而行精進하며 但爲得一切佛法廣大決定善巧智故로而行精進하며但爲得分別演說一切佛法句義智故로而行精進이니라 “오직 일체 불법의 지혜광명을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불법의 지혜를 증득하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불법의 한결 같은 실상을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불법의 끝닿는 데 없음을 알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불법의 광대하고 결정하고 공교한 지혜를 얻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고, 오직 일체 불법의 구절과 뜻을 분별하여 연설하는 지혜를 얻기 위하여 정진을 행하는 것이니라.” 강설 ; 여섯 구절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정진함을 밝혔다. 불법이란 깨달음의 지혜광명이며, 불법의 지혜를 증득함이며, 불법의 실상(實相)이며, 불법의 무변함이며, 불법의 광대한 선교지혜며, 법의 구절과 뜻을 분별하여 연설하는 지혜다. 이와 같은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정진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정진하는가를 이 경문을 거울삼아 잘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4> 다시 문답으로 정진행을 밝히다 佛子야菩薩摩訶薩이成就如是精進行已에設有人이言호대 汝頗能爲無數世界의所有衆生하야 以一一衆生故로於阿鼻地獄에經無數劫토록備受衆苦하야令彼衆生으로一一得値無數諸佛이出興於世하고 以見佛故로具受衆樂하며乃至入於無餘涅槃하야사汝乃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리니能爾不耶아하면答言我能이니라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정진행을 성취하고는, 가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를 능히 무수한 세계에 있는 중생들을 위할 적에, 하나하나의 중생을 위하여 아비지옥에서 수없는 겁 동안에 모든 고통을 두루 받으면서 저 중생들로 하여금 낱낱이 수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심을 만나게 하고, 부처님을 친견한 연고로 여러 가지 낙을 받으며, 내지 무여열반에 들게 하고야 그대가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하면, ‘나는 능히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리라.” 강설 ; 지장보살은 서원의 보살이다. 지장보살의 서원은 세 가지로 요약한다. “중생을 다 제도하고 나서 그때에 비로소 깨달음을 이루겠다. 지옥의 중생들을 다 제도하여 지옥이 텅 비기 전에는 맹서코 성불하지 않겠다. 내가 지옥에 들어가서 지옥중생들을 제도하지 아니하면 누가 지옥에 들어갈 것인가.”라는 것이다. 위의 경문을 정리하면 지장보살의 서원으로 대신할 수 있다. 設復有人이作如是言호대有無量阿僧祗大海어든汝當以一毛端으로 滴之令盡하며 有無量阿僧祗世界어든盡末爲塵하고 彼滴及塵을一一數之하야悉知其數하야爲衆生故로經爾許劫토록於念念中에受苦不斷이라도菩薩이 不以聞此語故로 而生一念悔恨之心하고但更增上歡喜踊躍하야深自慶幸호대得大善利로다以我力故로令彼衆生으로永脫諸苦하니라 “또 다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한량없는 아승지 큰 바닷물을 네가 한 털 끝으로 찍어내어 다하게 하고,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를 모두 부수어 먼지를 만들어서 그 물방울과 그 먼지를 낱낱이 세어 그 수효를 알고는, 중생을 위하여서 그렇게 많은 겁을 지나면서 생각 생각마다 고통 받기를 간단없이 하라.’고 하더라도, 보살이 이 말을 들었다고 해서 잠깐이라도 후회하는 마음을 내지 아니하고, 다시 더욱 환희용약(歡喜踊躍)하여 깊이 스스로 다행하게 생각하고 큰 이익을 얻노라 하면서, 나의 힘으로써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하리라 하느니라.” 강설 ; 한량없는 아승지 큰 바닷물을 털끝으로 찍어서 헤아리고, 또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를 먼지로 만들어 그 두 가지의 숫자만큼 많은 겁 동안 중생을 위해서 고통을 받더라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중생을 위한 일이라면 오히려 환희용약하여 오히려 큰 이익을 얻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중생을 위한 끝없는 정진이다. 이 경문을 한번 읽기만 하거나, 듣기만 하더라도 보살이 중생을 위하는 마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깨닫고 무량대복을 받으리라. 실로 감동, 감동, 또 감동이로다. <5> 일체 중생에게 열반을 얻게 하다 菩薩이 以此所行方便으로於一切世界中에令一切衆生으로乃至究竟無餘涅槃하나니是名菩薩摩訶薩의第四無屈撓行이니라 “보살이 이렇게 행하는 방편으로 일체 세계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내지, 구경에는 무여열반을 얻게 하나니, 이것이 이름이 제4 무굴요행(無屈撓行)이니라.” 강설 ; 구경에 얻는 무여열반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안락이다. 최상의 편안함이다. 일체 세계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최상의 안락과 최상의 편안함을 누리게 하는 것, 그것이 인생에서 굽음이 없는 무굴요행이다. (7) 제5 이치란행(離癡亂行) <1> 어리석음과 산란을 떠나는 행 佛子야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離癡亂行고此菩薩이成就正念하야 心無散亂하며堅固不動하며最上淸淨하며廣大無量하며無有迷惑이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이치란행(離癡亂行)인가. 이 보살이 바른 생각을 성취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견고하여 동하지 아니하며, 가장 높고 청정하며, 넓고 크고 한량없어, 미혹하지 않느니라.” 강설 ; 사람들의 마음이 잘 흔들리고 산란한 것은 생각이 바르지 못한 까닭이다. 생각이 바르면 태산부동으로 견고하다. 가장 청정하고 텅 빈 마음이 된다. 광대하고 무량해서 일체 미혹이 없다. 이것이 진정한 선정이다. <2> 경계에 나아가도 어리석음과 산란함이 없이 以是正念故로善解世間一切語言하고能持出世諸法言說하나니所謂能持色法非色法言說하며 能持建立色自性言說과乃至能持建立受想行識自性言說에 心無癡亂하니라 “생각이 바름으로써 세간의 온갖 말을 잘 알고 출세간법의 말을 능히 지니나니, 이른바 색법(色法)과 색이 아닌 법의 말을 능히 지니며, 색의 자성을 건립하는 말을 능히 지니고, 내지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자성을 건립하는 말을 능히 지니어 마음이 우치하거나 산란치 않느니라.” 강설 ; 선정바라밀을 잘 닦으면 어떤 경계에 나아가도 어리석음과 산란함이 없다. 그 사실을 여러 가지 상황을 이끌어 예를 들었다. 선정이란 바른 생각[正念]이다. 바른 생각은 첫째 세간의 일체 말을 잘 이해하게 된다. 세간의 말을 잘 이해하면 능히 출세간 제법의 말을 이론정립하게 된다. 색법(色法)과 색이 아닌 법의 말과 색의 자성을 건립하는 말을 이론정립하게 된다. 색법뿐만 아니라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의 자성을 건립하는 말을 이론정립하게 되어 마음이 우치하거나 산란치 않게 된다. 설법을 하거나 설법을 듣기 전에 반드시 선정에 드는 까닭이 이것이다. 於世間中死此生彼에心無癡亂하며入胎出胎에心無癡亂하니라 “세간에 있어 여기서 죽고 저기에 태어나는데 마음이 우치하거나 산란치 않으며, 태(胎)에 들고 태에서 나오는데 마음이 우치하거나 산란치 않느니라.” 강설 ; 사람이 정신을 잃고 산란하게 되는 경우 중에 죽을 때와 태어날 때다. 어지간히 선정을 닦은 힘이 있다하더라도 죽음을 당해서 마음이 산란하지 않기는 어렵다. 또 죽을 때는 설사 정신을 차린다하더라도 태어날 때 다시 어두워져 버린다. 그것을 흔히 정신이 매(昧)한다고 한다. 선정의 힘이 뛰어난 사람은 죽을 때나 태어날 때 모두 정신이 매하지 않는다. 發菩提意에心無癡亂하며事善知識에心無癡亂하며勤修佛法에心無癡亂하니라 “보리심을 내는데 마음이 우치하거나 산란치 않으며, 선지식을 섬기매 마음이 우치하거나 산란치 않으며, 불법을 부지런히 닦는데 우치하거나 산란치 않느니라.” 강설 ; 보리심을 발할 때에나 선지식을 섬길 때, 또 불법을 부지런히 닦을 때, 이와 같은 경계는 수행자로서 모두 순경계인데 그와 같은 순경계에 오히려 정신이 매하지 않기 어렵다. 선정을 제대로 닦은 보살은 이와 같은 경계에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다. 覺知魔事에心無癡亂하며離諸魔業에心無癡亂하며於不可說劫修菩薩行에心無癡亂이니라 “마군의 일을 알아서 마음이 우치하거나 산란치 않으며, 모든 마군의 업을 여의어 마음이 우치하거나 산란치 않으며, 말할 수 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닦으매 마음이 우치하거나 산란치 않느니라.” 강설 ; 마군의 일을 알거나, 마군의 모든 업을 버리거나, 오랜 세월동안 보살행을 닦는 이 모든 것도 역시 차원 높은 순경계다. 이와 같은 경계에서도 선정을 잘 닦은 보살은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른 생각, 즉 정념이다. <3> 선정의 힘으로 온갖 법을 듣다 此菩薩이成就如是無量正念하고於無量阿僧祗劫中에從諸佛菩薩善知識所하야聽聞正法하나니 “이 보살이 이렇게 한량없는 바른 생각을 성취하고는, 한량없는 아승지 겁 동안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에게서 바른 법을 듣느니라.” 강설 ; 바른 생각인 선정을 성취해야 오랜 세월 동안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으로부터 정법을 듣고 잘 기억할 수 있게 된다. 비록 큰 법문이 아니고 세속적인 말을 듣거나 책을 읽더라도 바른 생각과 바른 사고력이 매우 중요하다. 사찰에서 법문을 듣기 전에 형식적이나마 반드시 입정을 하는 것은 그래서 대단히 중요하다. 所謂甚深法과廣大法과莊嚴法과種種莊嚴法과演說種種名句文身法과菩薩莊嚴法과 佛神力光明無上法과正希望決定解淸淨法과不着一切世間法과分別一切世間法과 甚廣大法과離癡翳照了一切衆生法과一切世間共法不共法과菩薩智無上法과一切智自在法이라 “이른바 매우 깊은 법, 넓고 큰 법, 장엄한 법, 갖가지 장엄한 법, 갖가지 낱말, 구절, 소리의 굴곡[名句文身]을 연설하는 법, 보살의 장엄하는 법, 부처님의 신력과 광명의 가장 높은 법, 바른 희망으로 결정한 이해인 청정한 법, 일체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 법, 일체 세간을 분별하는 법, 매우 깊고 광대한 법, 어리석음을 떠나 일체중생을 분명히 아는 법, 일체 세간이 함께 하고 함께 하지 않는 법, 보살 지혜의 가장 높은 법, 일체 지혜로 자재한 법들이니라.” 강설 ; 바른 생각의 선정으로 정법을 듣는데 그 정법을 열다섯 가지로 밝혔다. 눈으로 보는 법이나 귀로 듣는 법이나 글과 문장으로 이해하는 법이나 보살들의 장엄법이나 부처님의 신력인 광명법이나 온갖 법을 다 열거하였다. 어떤 법이든지 바른 생각인 선정을 수행하지 아니하면 듣고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바른 생각인 선정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菩薩이 聽聞如是法已에 經阿僧祗劫토록 不忘不失하고 心常憶念하야 無有間斷이니라 “보살이 이런 법을 듣고는 아승지 겁을 지내도 잊어버리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고, 마음에 항상 기억하여 간단함이 없느니라.” 강설 ; 앞에서 열거한 열다섯 가지 법을 듣더라도 바른 생각인 선정의 힘으로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고, 마음에 항상 기억한다. 보통 사람들은 어릴 때는 그나마 듣고 본 것을 기억하지만 나이가 들면 잘 잊어버린다. 경문을 외거나 어학을 공부할 때 오래도록 기억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던가. 뛰어난 기억력이 있는 것도 하나의 큰 능력이다. 정신집중인 선정을 잘 닦으면 기억력도 향상된다. <4> 선정 수행의 인과를 밝히다 何以故오 菩薩摩訶薩이於無量劫에修諸行時에終不惱亂一衆生하야 令失正念하야 不壞正法하며 不斷善根하야 心常增長廣大智故니라“ 무슨 까닭인가. 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겁 동안 모든 행을 닦을 때에 한 중생이라도 뇌란케 하여 바른 생각을 잃어버리지 않으며, 바른 법을 파괴하지 않고, 선근을 끊지 아니하여 마음에 항상 광대한 지혜를 증장하게 하는 연고이니라.” 강설 ; 선정수행을 하는 것도 결국에는 중생을 위한 일이다. 대승불교는 그 어떤 수행과 공부도 모두가 중생을 위한 것이다. 특히 선정은 한 중생이라도 뇌란하지 않게 하며 바른 생각으로 바른 법을 닦아 선근을 끊지 않고 광대한 지혜를 증장하게 하는 것이다. <5> 선정을 성취하면 어떤 음성도 산란케 하지 못한다 復次此菩薩摩訶薩은種種音聲이不能惑亂하나니所謂高大聲과 麤濁聲과極令人恐怖聲과悅意聲과不悅意聲과諠亂耳識聲과沮壞六根聲이라“ 또한 이 보살마하살은 갖가지 음성으로도 산란케 하지 못하나니, 이른바 높고 큰 음성, 거칠고 탁한 음성, 지극히 사람을 공포케 하는 음성, 뜻에 기쁜 음성, 기쁘지 않은 음성, 귀를 시끄럽게 하는 음성, 육근(六根)을 망가뜨리는 음성이니라.” 강설 ; 선정을 닦는 사람에게는 어떤 소리로도 그를 산란하게 하지 못한다. 사찰의 선원에서는 도량에서 수련대회를 하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나 건축공사 등으로 소리를 좀 낸다고 하여 그것을 문제 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이유는 소리 때문에 산란해서 공부가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소리가 없을 때는 선정이 얼마나 잘 성취되었던가. 선정이 이뤄지지 않는 까닭은 밖의 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 속에서 일으키는 삼독번뇌의 소리일 것이다. <6> 온갖 음성에도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다 此菩薩이聞如是等無量無數好惡音聲호대假使充滿阿僧祗世界라도 未曾一念心有散亂하나니所謂正念不亂과境界不亂과三昧不亂과 入甚深法不亂과行菩提行不亂과發菩提心不亂과憶念諸佛不亂과 觀眞實法不亂과化衆生智不亂과淨衆生智不亂과決了甚深義不亂이니라 “이 보살은 이와 같이 한량없고 수없는 좋고 나쁜 음성을 가령 아승지 세계에 가득함을 듣더라도, 잠깐 동안도 마음이 산란치 아니하느니라. 이른바 바른 생각이 산란치 않고, 경계가 산란치 않고, 삼매가 산란치 않고, 깊은 법에 들어감이 산란치 않고, 보리행을 닦음이 산란치 않고, 보리심을 내는 것이 산란치 않고, 부처님들을 생각함이 산란치 않고, 진실한 법을 관찰함이 산란치 않고, 중생을 교화하는 지혜가 산란치 않고, 중생을 청정케 하는 지혜가 산란치 않고, 깊은 이치를 분명히 아는 것이 산란치 아니하니라.” 강설 ; 선정으로 다져져서 행하는 보살의 바른 법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그 어떤 소리가 아승지 세계에 가득 차더라도 결코 한 순간도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다. 어떤 법이 산란하지 않는가? 보살의 바른 법이 산란치 않고, 보살의 경계가 산란치 않고, 보살의 삼매가 산란치 않는다. 만약 악한 소리나 유혹하는 소리 등에 보살이 하는 불사가 산란하여 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보살이 깊은 법에 들어가고, 보리행을 닦고, 보리심을발하고, 부처님을 생각하고, 진실한 법을 관찰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등의 불사가 한 순간도산란하지 않는다. 그것은 선정을 깊이 닦았기 때문이다. 선정의 힘은 이와 같다. <7> 모든 장애를 떠나다 不作惡業故로無惡業障하며不起煩惱故로無煩惱障하며不輕慢法故로無有法障하며不誹謗正法故로無有報障하니라 “악업(惡業)을 짓지 아니하므로 악업의 장애가 없고, 번뇌를 일으키지 아니하므로 번뇌의 장애가 없고, 법을 가벼이 여기지 아니하므로 법의 장애가 없고, 정법을 비방하지 아니하므로 과보의 장애가 없느니라.” 강설 ; 선정으로 바른 생각[正念]을 가지게 되면 악업을 짓지 않게 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게 되고, 불법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정법을 크게 드날리게 된다. 이와 같지 못하다면 선정에 의한 바른 생각을 갖지 못한 것이다. <8> 선정을 닦은 보살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佛子야如上所說如是等聲이一一充滿阿僧祗世界하야於無量無數劫에未曾斷絶하야悉能壞亂衆生身心의一切諸根호대而不能壞此菩薩心이니라菩薩이 入三昧中하야住於聖法에思惟觀察一切音聲하야善知音聲의生住滅相하며善知音聲의生住滅性하나니라 “불자들이여, 위에 말한 음성들이 낱낱이 아승지 세계에 가득하여 한량없고 수없는 겁에 잠깐도 끊이지 않으면서 중생의 몸과 마음과 모든 근(根)을 무너뜨리더라도 이 보살의 마음은 무너뜨리지 못하며, 보살이 삼매에 들어 성인(聖人)의 법에 머물고, 일체 음성을 생각하고 관찰하여, 음성의 생기고 머물고 소멸하는 모양을 잘 알며, 음성의 생기고 머물고 소멸하는 성품을 잘 아느니라.” 강설 ; 아무리 오랫동안 온갖 음성으로 중생들의 몸과 마음의 모든 근을 무너뜨리더라도 보살의 마음은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 까닭은 보살은 선정의 힘으로 성스러운 법에 머물기 때문이다. 또 보살은 일체 음성을 잘 관찰하여 음성이 무상하고 공하며 실체가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실로 음성과 같이 허망하고 무상한 것은 없다. 그럼에도 그 허망한 음성에 집착하여 울고 웃고 하며 분노와 기쁨에 정신을 잃고 만다. 그러나 보살은 선정에 의한 바른 생각으로 음성의 실상을 꿰뚫어 알아 이끌리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9> 청정을 얻다 如是聞已에 不生於貪하며 不起於瞋하며 不失於念하야 善取其相호대 而不染着하며 知一切聲이 皆無所有하야 實不可得이라 無有作者하며 亦無本際하야 與法界等하야 無有差別이니라 “이와 같이 듣고는 탐심을 내지 아니하고, 성을 내지 아니하고, 생각을 잃지 아니하며, 그 모양을 잘 취하되 집착하지 아니하며, 일체 음성이 다 없는 것이어서 실로 얻을 수 없느니라. 지은 이도 없고 또한 근본의 경계도 없어서 법계와 평등하여 차별이 없느니라.” 강설 ; 보살은 아름다운 소리를 듣되 소리에 탐하지 않으며, 나쁜 소리를 듣되 그 소리에 성내지 않으며, 어떤 생각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설사 일체 상을 잘 취하더라도 그 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마치 일체 소리가 들리지만 그 소리의 실체는 없는 것과 같이 안다. 실로 소리는 없다. 말도 없다. 그런데 무엇을 붙잡고 시시비비하는가? 착각으로 눈앞에 나타난 환영을 실재한다고 고집하면서 시시비비하는가? 바른 생각을 지킬 수 있는 선정이 이와 같이 중요하다. <10> 선정(禪定)의 공덕 菩薩이 如是成就寂靜身語意行에 至一切智하야永不退轉하고善入一切諸禪定門하야知諸三昧가同一體性하며 了一切法이無有邊際하며得一切法眞實智慧하며得離音聲甚深三昧하며得阿僧祗諸三昧門하야增長無量廣大悲心하나니 “보살이 이와 같이 적정한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행을 성취하고는 일체 지혜에 이르도록 영원히 퇴전치 아니하고, 일체 모든 선정의 문에 잘 들어가서 모든 삼매가 동일한 성품임을 알며, 일체법이 끝이 없음을 알며, 일체법의 진실한 지혜를 얻으며, 음성을 여윈 깊은 삼매를 얻으며, 아승지의 모든 삼매문을 얻어서 한량없이 광대한 대비심(大悲心)을 증장하나니라.” 강설 ; 선정(禪定)의 공덕은 실로 무량하다. 선정은 바른 생각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일체 법에 선정으로 바른 생각만 지킬 수 있게 된다면 적정한 몸과 말과 뜻으로 행하는 행을 성취하게 되리라. 얼마나 침착하고 품위가 있겠는가. 그것이 곧 일체 지혜에 이른 것이다. 是時에 菩薩이於一念中에得無數百千三昧일새聞如是聲호대心不惑亂하야令其三昧로漸更增廣하니라 “이때에는 보살이 잠깐 동안에 수없는 백 천 삼매를 얻어서 이와 같은 음성을 들어도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그 삼매로 하여금 점점 더 크고 넓게 되느니라.” 강설 ; 한 생각이 선정에 들면 무수한 백 천 삼매가 저절로 따라 온다. 그 때에는 칭찬하는 소리에도 악담하고 헐뜯는 소리에도 결코 마음이 산란하지 않는다. 어떤 소리든지 소리의 실상을 꿰뚫어 알고 있으므로 일체 삼매가 더욱 크고 광대해진다. <11> 중생들을 더욱 이익케 할 것을 생각하다 作如是念호대我當令一切衆生으로安住無上淸淨念中하야 於一切智에得不退轉하야究竟成就無餘涅槃이라하나니是名菩薩摩訶薩의第五離癡亂行이니라 “또 생각하기를 '내가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위가 없이 청정한 생각에 편안히 머물러 일체 지혜에서 퇴전치 아니하고 구경에는 무여열반을 성취케 하리라.'하나니, 이것이 이름이 제5 이치란행(離癡亂行)이니라.” 강설 ; 어리석고 산란하지 않는 행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보살은 선정을 통하여 어리석고 산란하지 않는 행을 닦으면서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가장 높은 텅 빈 청정한 생각에 편안히 머물러 일체 지혜에서 퇴전하지 않고 결국 최상의 열반을 성취하게 되기를 서원한다. (8) 제6 선현행(善現行) <1> 선현행(善現行)을 해석하다 佛子야何等이 爲菩薩摩訶薩의善現行고此菩薩이身業淸淨하며 語業淸淨하며意業淸淨하며住無所得하며 示無所得身語意業하야能知三業이皆無所有하며無虛妄故로無有繫縛하며凡所示現이無性無依니라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선현행(善現行)인가. 이 보살들의 몸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고, 말로 짓는 업이 청정하고, 뜻으로 짓는 업이 청정하여, 얻은 것 없는 데 머물러서, 얻을 것 없는 몸과 말과 뜻의 업을 보이느니라. 세 가지 업이 모두 없어서 허망함이 없는 줄을 아는 까닭에얽매임이 없으며, 무릇 나타내 보이는 것이 성품도 없고 의지함도 없느니라.” 강설 ; 잘 나타내는 수행의 선현행이란 반야지혜로 신, 구, 의, 삼업이 텅 비고 청정하여 그 무엇에도 얻을 것이 없음에 머무는 것이다. 만약 삼업이 텅 비어 청정하지 못한 데 머문다면 몸과 말과 뜻의 하는 일이 잘 나타나지 못한다. 비었으므로 비로소 잘 나타나는 것이다. 삼업의 일체가 텅 비어 없고 허망할 것도 없으므로 속박이 없어서, 다시 삼업을 우정 나타내더라도 성품도 없고 의지함도 없는 자유로운 나타남이 된다. <2> 선현행의 상(相)을 널리 분별하다 住如實心하야知無量心自性하고知一切法自性이나無得無相하야甚深難入하며 住於正位眞如法性하야方便出生호대 而無業報하야不生不滅하며住涅槃界하고住寂靜性하고住於眞實無性之性하야言語道斷하니超諸世間하야無有所依니라 “실제와 같은 마음에 머물러 한량없는 마음의 자성을 알며, 일체 법의 자성을 알지마는 얻은 것도 없고 형상도 없어서, 매우 깊어 들어가기 어려우며, 바른 자리(正位)인 진여의 법성(法性)에 머물러서, 방편으로 출생하여 업보가 없는 것이어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열반의 경계에 머물고 고요한 성품에 머물고, 진실하여 성품이 없는 성품에 머무르며,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모든 세간을 초월하여 의지한 데가 없느니라.” 강설 ; 불교의 일체 수행은 실제와 같은 마음에 머물기[住如實心] 위한 것이다. 만약 실제와 같은 마음에 머물면 마음의 자성과 일체 법의 자성을 안다. 또 바른 자리(正位)인 진여의 법성(法性)에 머물러 방편으로 출생하여 업보가 없는 것이어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즉 생사에 자재하게 된다. 열반에 머물며, 적정한 본성에 머물러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모든 세간을 초월한다. 이것이 잘 나타나는 형상의 모습이다. 入離分別無縛着法하며入最勝智眞實之法하며入非諸世間所能了知出世間法하나니 此是菩薩의 善巧方便으로示現生相이니라 “분별을 여의어 속박이 없는 법에 들어갔으며, 가장 수승한 지혜의 진실한 법에 들어갔으며, 모든 세간으로는 알 수 없는 출세간법에 들어갔나니, 이것이 보살의 교묘한 방편으로 시현하여 내는 모습이니라.” 강설 ; 실제와 같은 마음에 머물면 분별을 여의어 속박이 없는 법에 들어가게 되며, 가장 수승한 지혜의 진실한 법에 들어가게 된다. 또 모든 세간으로는 알 수 없는 출세간법에 들어가게 된다. 진정한 잘 나타나는 선현행이다. <3> 이치로써 사상(事相)을 알다 佛子야此菩薩이作如是念호대一切衆生이無性爲性이며一切諸法이無爲爲性이며一切國土가無相爲相이며 一切三世가唯是言說이며一切言說이於諸法中에無有依處며一切諸法이於言說中에亦無依處라하나니라 “불자들이여, 이 보살이 생각하기를 '일체중생이 성품이 없으므로 성품을 삼았고, 일체법이 함이 없으므로 성품을 삼았고, 일체 국토가 형상이 없으므로 현상을 삼았으며, 일체 삼세가 오직 말뿐이니, 일체 언설이 모든 법 가운데 의지할 곳이 없고, 일체 모든 법이 언설가운데 또한 의지한 곳이 없다.'고 하느니라.” 강설 ; 일체 중생은 본래 그 자성이 없다. 일체 법은 본래 함이 없다. 일체 국토는 본래 형상이 없다. 일체 과거 현재 미래는 모두 오직 언설일 뿐이다. 일체 언설도 또한 일체 제법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은 없다. 일체 법도 언설로 표현하지만 언설 중에 또한 의지할 데가 없다. 일체가 환영이요,영상이요, 그림자일 뿐이다. 이것이 이치로 본 사상이다. <4> 이치와 사상(事相)이 걸림이 없다 菩薩이 如是解一切法이皆悉甚深하며一切世間이皆悉寂靜하며一切佛法이無所增益하며佛法이 不異世間法하고 世間法이 不異佛法하며佛法世間法이無有雜亂하고亦無差別하며了知法界가體性平等하야普入三世하니라 “보살이 이와 같이 일체 법이 모두 깊고 깊으며, 일체 세간이 다 적정하고, 일체 불법이 더함이 없고, 불법이 세간법과 다르지 않고, 세간법이 불법과 다르지 않으며, 불법과 세간법이 섞이지 아니하며, 또한 차별도 없음을 이해하느니라. 법계의 자체성품이 평등하여 삼세에 두루 들어감인 줄을 분명히 아느니라.” 강설 ; “일체 법이 모두 깊고 깊다.”는 것은 이치와 사상. 즉 이(理)와 사(事)가 걸림이 없음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다. 세간상은 공하고 불법은 평등하다. 그래서 세간법과 불법이 둘이 아니다. 이치마다 사상 아닌 것이 없고, 사상마다 이치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세간법과 불법이 다르지 않다. 만약 세간법을 버리고 불법을 찾는다면 그것은 물결을 버리고 물을 찾는 격이다. 그래서 본래로 이와 사가 무애하고 불법과 세간법이 무애하다. <5> 이치를 따라서 자비를 일으永不捨離大菩提心하며 恒不退轉化衆生心하며轉更增長大慈悲心하야與一切衆生으로作所依處니라 “큰 보리심을 영원히 버리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는 마음이 항상 퇴전하지 않으며, 큰 자비심이 더욱 증장하여 일체중생의 의지할 데가 되느니라.” 강설 ; 보살은 어떤 수행의 단계에 있든 관계없이 큰 보리심을 영원히 버리지 않아야 한다. 또 중생을 교화하는 마음이 항상 퇴전하지 않아야 한다. 큰 자비심이 더욱 증장하여 일체중생의 의지할 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보살의 길이다. \ <6> 내가 교화하지 않으면 누가 교화하겠는가 菩薩이 爾時에復作是念호대我不成熟衆生이면誰當成熟이며我不調伏衆生이면誰當調伏이며我不敎化衆生이면 誰當敎化며我不覺悟衆生이면誰當覺悟며我不淸淨衆生이면誰當淸淨이리오此我所宜요我所應作이라하니라 “보살이 이때에 다시 생각하기를 '내가 중생을 성숙시키지 않으면 누가 성숙시키며, 내가 중생을 조복하지 않으면 누가 조복하며, 내가 중생을 교화하지 않으면 누가 교화하며, 내가 중생을 깨우치지 않으면 누가 깨우치며, 내가 중생을 청정케 하지 않으면 누가 청정케 하겠는가. 이것은 나에게 마땅한 일이니 내가 하여야 하리라.'하느니라.” 강설 ; 중생을 향한 보살의 뜨거운 서원이 잘 표현된 내용이다. 중생을 성숙시키고, 중생을 조복하고, 중생을 교화하고, 중생을 깨우치고, 중생을 청정케 하는 일 이 모든 것을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하겠는가. 보살은 언제나 이와 같은 원력이 있어야 한다. 주변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볼 때 이것은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보살의 마음이다. <7> 나만 이 법을 알면 다른 중생은 어찌 되겠는復作是念호대若我自解此甚深法인댄唯我一人이 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獨得解脫이요而諸衆生은盲冥無目하야入大險道하며爲諸煩惱之所纏縛하며如重病人하야恒受苦痛하며處貪愛獄하야不能自出하며不離地獄餓鬼畜生閻羅王界하며不能滅苦하고不捨惡業하며常處癡闇하야不見眞實하며輪廻生死하야無得出離하며住於八難하야衆垢所着이며種種煩惱가覆障其心하며邪見所迷로不行正道니라 “또 생각하기를 '만일 나만 이 깊은 법을 알면 오직 나 한 사람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홀로 해탈할 것이다. 다른 중생들은 캄캄하고 눈이 없어 큰 험난한 길에 들어갈 것이며, 모든 번뇌에 속박이 되어 중병에 걸린 사람이 항상 고통을 받는 것 같을 것이며, 탐애의 옥에 떨어져 나오지 못할 것이요, 지옥. 아귀. 축생. 염라왕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고통을 소멸하지 못하고, 악업을 버리지 못할 것이며, 어두운 데 항상 있으면서 진실한 이치를 보지 못하고, 생사에 윤회하면서 벗어나지 못하고, 팔난(八難)에 있으면서 더러운 때에 물들고, 갖가지 번뇌가 마음을 가리어서 삿된 소견에 빠져 바른 도를 행하지 못하리라.'하느니라.” 강설 ;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음을 스스로 증득하는 것을 자각(自覺)이라 하고,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것을 각타(覺他)라고 한다. 자신도 깨닫고 다른 이도 깨닫게 해서 각행(覺行)이 원만한 것을 불교 최고의 이상이라고 한다. 만약 자신만 깨닫고 다른 사람은 깨닫지 못한다면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돌아 올 불이익이 이와 같이 많음을 열거하였다. <8> 중생들을 먼저 교화하라 菩薩이 如是觀諸衆生하고作是念言호대若此衆生이未成熟未調伏이어늘捨而取證阿耨多羅三藐三菩提인댄 是所不應이니我當先化衆生하야於不可說不可說劫에行菩薩行하야未成熟者를先令成熟하며未調伏者를先令調伏이라하나니라 “보살이 이렇게 중생을 관찰하고는 이런 생각을 하느니라. '만약 이 중생들이 성숙되지 못하고 조복되지 못한 것을 그냥 버려두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내가 먼저 중생들을 교화하면서 말할 수 없이 말할 수 없는 겁에 보살의 행을 행하되, 성숙하지 못한 이를 먼저 성숙케 하고, 조복하지 못한 이를 먼저 조복케 하리라.'하느니라.” 강설 ; 보살이 중생을 위한 서원의 극치다. 보살은 자신의 깨달음이나 교화나 성숙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중생들의 깨달음과 교화와 성숙을 먼저 생각한다. 이것을 흔히 자미득도선도타(自未得度先度他)라고 한다. 자신을 제도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한다는 뜻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들을 다 제도하여지옥이 텅 비기 전에는 맹서코 성불하지 않겠다. 또 중생을 다 제도하고 나서비로소 내가 깨달음을 이루겠다.”라는 비장한 서원을 세운분이다. 일체 보살의 정신은 본래로 이와 같다. <9> 이와 같은 보살을 섬기면 깨달음을 是菩薩이 住此行時에 諸天魔梵沙門婆羅門과 一切世間乾達婆阿修羅等이 若有得見이어나 暫同住止어나 恭敬尊重이어나 承事供養이어나 及暫耳聞하야 一經心者라도 如是所作이 悉不唐捐하야 必定當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나니 是名菩薩摩訶薩의 第六善現行이니라 “이 보살이 이 행에 머물러 있을 때에 모든 천신, 마군, 범천, 사문, 바라문과 일체 세간과 건달바, 아수라들이 만일 만나보거나 잠깐이라도 함께 있거나 공경하고 존중하고 섬기고 공양하거나 잠깐 귀로 듣거나 마음에 한 번 거치기만 하여도, 이런 일이 헛되지 아니하여 반드시 아뇩다라삼먁보리를 이룰 것이니, 이것이 이름이 보살마하살의 제6 선현행(善現行)이니라.” 강설 ; 앞에서 밝힌 보살의 중생을 위한 뜨거운 서원을 실천할 때에 천신, 마군, 범천, 사문, 바라문과 일체 세간과 건달바, 아수라들이 이 사실을 알거나, 듣거나, 보거나, 생각에 한 번 스치고 지나가기만하여도 결코 헛되지 아니하여 반드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십행품 중에 여섯 번째 행인 선현행(善現行)까지를 설명하여 마쳤다. 화엄경 제19권은 부처님이 야마천궁에 올라가시는 품과 야마천궁에서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는 품과 십행품 전반을 설한 내용이다. 십행품 1 제19권 끝 |
첫댓글
반야심경에 “오온이 모두 공한 것으로 비춰보면
일체 고액을 제도한다 하였고, 또 공한 것에는 색이 없으며
수, 상, 행, 식도 없으며, 안, 이, 비, 설, 신, 의도 없으며,
색, 성, 향, 미, 촉, 법도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오온의 본성은 본래로 불생불멸이다.
부처님의 큰 광명이란 우리가 공부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이다.
또 대방광불화엄경은 우주 삼라만상과 천지만물들이다. 이것이 곧 큰 광명이며,
큰 광명이라는 사실을 경전을 통해서 깨닫게 한다. 이와 같은 사실보다 더 큰 이익은 없으리라.
너와 내가 본질에서는 하나이지만
현상에서는 우리는 또한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육조 혜능스님은 진여생명의 구족성을 깨닫고 스승 오조(五祖) 홍인스님에게 말하였다
. “내 자성은 본래 청정하거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자성은 본래부터 생멸이 없거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자성은 본래부터 모든 것을 갖추고 있거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자성은 본래 아무런 동요가 없거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자성은 능히 일체만법을 만들어 내거늘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걸림 없는 지혜와
집착 없는 지혜와
끊이지 않는 지혜와
스승 없는 지혜와
어리석지 않은 지혜와
다르지 않은 지혜와
허물없는 지혜와
한량없는 지혜와
이길 이 없는 지혜와
게으름 없는 지혜와
빼앗을 수 없는 지혜를 주었으니,
이 삼매의 힘은 법이 으레 이와 같은 까닭입니다.
매우 깊은 법,
넓고 큰 법,
장엄한 법,
갖가지 장엄한 법,
갖가지 낱말, 구절, 소리의 굴곡[名句文身]을 연설하는 법,
보살의 장엄하는 법, 부처님의 신력과 광명의 가장 높은 법,
바른 희망으로 결정한 이해인 청정한 법,
일체 세간에 집착하지 않는 법,
일체 세간을 분별하는 법,
매우 깊고 광대한 법,
어리석음을 떠나 일체중생을 분명히 아는 법,
일체 세간이 함께 하고 함께 하지 않는 법,
보살 지혜의 가장 높은 법,
일체 지혜로 자재한 법들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