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연대가 2010년 여름 수련회로 10일부터 12일까지 2박3일간 일정으로 ‘제주 4.3유적지 역사탐방’(4.3역사탐방)을 위해 항쟁의 땅 제주도에 왔다. 이번 추모연대 수련회에는 추모연대 본부를 비롯해 수도권지역, 부산경남지역, 광주전남지역에서 참가했다. 아울러 유관단체로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연합회(한전연), 4.9통일평화재단의 인혁사건유족 그리고 제주도 현지에서 양용찬열사추모사업회가 합류하는 등 모두 90여명이 참가했다. 다음은 본사 기자가 4.3역사탐방 일정에 참가해 동행한 참관기이다. / 편집자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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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역사탐방 첫날 참관자들은 4.3평화기념관 앞에서 약식으로 출정식을 치르고 기념촬영을 가졌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4.3역사탐방의 제주는 첫날부터 화창했다. 가을 햇살이 살갗을 아프게 할 정도로 따뜻했다. 서울에선 폭우 소식도 들렸으나 제주도는 완연히 달랐다. 제주도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추신(秋信)을 가장 먼저 한반도 남단의 땅에서 보여주려는 듯했다.
박중기 추모연대 공동의장은 이번 4.3역사탐방의 의미에 대해 “제주도를 오랫동안 벼르고 별러서 왔다. 제주도를 관광의 땅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다”고 운을 떼고는 “제주도는 역사의 현장이다. 제주도는 외세에 의해 주인이 쫓겨난 땅이다. 이번 역사탐방을 통해 우리 선배들이 어떻게 살았고, 학대받고 싸웠는지를 배우자. 제주 4.3이 있었기에 4.19가 있었고 5.18, 6.10이 있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4.3평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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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령제단에서 각 단체 대표를 비롯한 참관자들이 분향, 참배를 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첫째 날 참관자들은 4.3평화공원을 찾았다. 시간을 달리해 추모연대 본부를 비롯해 수도권지역, 부산경남지역, 광주전남지역에서 각각 제주도에 내려온 4.3역사탐방 참관자들은 제주시 소재 제주4.3평화공원에서 총집합했다.
☞ 제주4.3사건이란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ㆍ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ㆍ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추모연대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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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참관자들은 공원의 맨 꼭대기에 있는 위령제단에 올라가 참배를 했다. 4.3평화기념관을 지나 위령제단으로 오르는 길에 위령탑, 각명비, 상징조형물, 추모승화광장을 거쳤다. 넓은 대지에 자리 잡은 조형물들은 각기 위용을 떨쳤다. 특히 각명비는 공원의 핵심공간인 위령탑을 중심으로 원형 모양으로 들어서 있는데, 희생자 약 1만 4천명의 이름을 새긴 군집(群集)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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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평화기념관을 지나 위령제단으로 오르는 길에 군집(群集)비석인 방대한 각명비를 지났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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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령제단에서 참배를 마친 참관자들은 뒤에 있는 위패봉안소를 둘러봤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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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패봉안소 우측 뒤쪽에 있는 4.3행불인 표석들. 한창 공사 중이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위령제단에서 참배를 마친 참관자들은 뒤에 있는 위패봉안소를 둘러봤다. 위패봉안소 우측 뒤쪽에는 원형 모양으로 4.3행불인 표석을 세우느라 한창 공사 중이었다.
4.3평화기념관은 크기가 웅장하고 내용도 다양했다. 기념관에는 ‘4.3은 알고 있다’ 저자인 4.3연구자 양조훈 4.3평화공원 상임이사가 직접 참관자들을 맞이하며 평화전시관을 함께 둘러보면서 안내와 설명도 곁들였다.
평화전시관은 초입부터 긴 동굴의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해설자는 “이 동굴의 터널은 4.3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정의 첫 관문으로서, 오랫동안 지하에 묻혀 있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아주 명쾌히 설명했다.
동굴을 지나 참관자들이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기묘하게도 원형의 천장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는 ‘백비’였다. 백비란 비문 없는 비석을 뜻한다. 해설자는 이름 없이 누워있는 이 돌판에 대해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등 큰 사건들이 제 이름을 가졌는데 4.3사건은 아직 제 이름을 갖지 못했다”면서 “4.3사건도 정식으로 제 이름을 갖게 될 때 이 돌에다 명칭을 새겨 설치할 것이다”고 설명했다.
평화전시관은 해방시기부터, 미군정 치하 그리고 3.1발포사건을 시작으로 해서 4.3무장봉기와 5.10단선단정 반대운동, 이어서 군경의 초토화 작전과 민간인 대량학살 등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이었다. 4.3평화기념관을 두루 참관한 참관자들은 기념관 앞에서 약식으로 4.3역사탐방의 출정식을 치르고 기념촬영을 가졌다. 이후 참관자들은 숙박처로 가서 첫날의 피로를 풀었다.
진아영할머니 삶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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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아영할머니 삶터 내부 전경. 가운데 사진이 다치기 전의 모습이고 좌우 양편 사진은 사고 후 무명천으로 턱을 감싼 모습. 진할머니는 이 모습으로 평생을 살았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10일 4.3평화공원 관람 및 위패봉안소 참배를 마친 참관단은 11일 본격적인 ‘제주 4.3유적지 역사탐방’ 일정에 올랐다. 이날 역사탐방에는 김남훈 전 제주통일청년회 회장이 안내를 해주었다. 참관단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북제주군 한경면 판포리 소재 진아영할머니 삶터.
진아영할머니는 ‘무명천할머니’라고도 불린다. 진아영할머니는 4.3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9년 1월, 35살의 나이에 집 앞에서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탄에 턱을 맞고 쓰러졌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은 건졌으나 턱을 크게 다쳤기에 그 후 말을 할 수도 없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55년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살아오다 2004년 9월8일 타계했다.
그때 다친 턱을 무명천으로 감싼 채 평생을 살았기에 ‘무명천’할머니라 불리었다. 주변 사람들은 진할머니가 턱을 감싼 무명천을 벗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단다. 말하자면 4.3의 고통을 안고 그러나 그 고통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채 인고의 삶은 산 것이다.
‘섣알오름 사건’의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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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조일손 묘비와 ‘섣알오름 사건’ 희생자들의 무덤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다음으로 들른 곳은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송악산 소재 백조일손지묘(百祖一孫之墓). 한날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일백조상이 죽었지만 자손(유족)은 하나다라는 뜻의 백조일손 묘비를 세우게 된 것이다.
제주도 태생인 좌융수 한전연 대외협력위원장은 ‘섣알오름 사건’의 묘지 앞에서 그 사건에 대해 설명하면서 ‘백조일손’이란 기묘한 이름을 얻게 된 사연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모두 234명이 ‘제주 예비검속 섣알오름 사건’으로 처형당했다. 1956년에야 비로서 시신발굴이 허용되었으나 서로 뒤엉킨 뼛조각으로는 누구의 시신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논의 끝에 칠성판에 머리뼈 1, 몸통뼈 1, 팔다리뼈 2개씩을 얹혀 하나씩의 봉분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 이곳에는 132개의 봉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림읍 소재 만뱅듸에도 62개의 봉분이 있다. 이 사건의 행방불명자는 40명이나 된다.”
이어 그는 “이곳에 공동묘지를 조성해놓고 논의 결과 묘지 명칭을 유족회장이던 이성철 유족께서 비록 일백 조상이 한곳에서 돌아가셨으나 자손(유족)은 하나다라고 하여 위령비의 명칭을 백조일손지묘라고 명명하여 위령비를 세웠던 것이다”고 말했다.
☞ ‘섣알오름 사건’이란?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해 이승만 정권이 예비검속령을 하달하자 제주 해병사령부에서는 자체적으로 25일 당일부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경찰서별로 과거 4.3사건과 관계되었던 사람과 그 가족, 마을 유지, 각급 학교 교사, 면직원(국가공무원), 우익인사, 청년회장, 농민, 부녀자,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다양하게 예비검속 하였다.
이후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고 부산까지 도망간 이승만은 마지막 도피처로 제주도를 반공기지로 삼고자 미리 불순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하여 처형했다. 즉, 8월 중순이 지나면서 제주지역에서는 비밀리에 예비검속자들을 처형하기 시작한다.
8월20일 새벽 거센 빗줄기 속에서 군인과 경찰들이 예비검속자들을 두 차례에 걸쳐 호명해 200여명을 트럭에 태워 모슬포 소재 송악산 서쪽 알오름(야산)으로 싣고 가서 대기 중인 해병 제3대대 기간병들이 무참히 학살했다. 그 후 이곳은 경찰에 의해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육군훈련소 시절에는 군인들이 경비를 담당하고 외부인 출입이 철저히 차단됐던 곳이다. (좌융수 한전연 대외협력위원장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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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섣알오름 사건’의 학살 현장으로 가는 길, 일제시대 일본군들이 만든 비행기 격납고가 보였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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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알오름 사건’으로 당한 희생자들의 묘와 묘비를 참관한 참관자들은 이어 그 사건의 학살 현장으로 향했다.
이 학살지는 일제시대 때 탄약고터였다고 한다. 묘비가 있는 지역에서 학살지로 이동하는 초지 일대에는 일제시대 때 일본 공군 가미카제(神風)특공대 자리로서 지금도 여러 곳에 비행기 격납고가 보였다. 격납고는 초지로 위장한 채 비행기 머리와 날개가 들어갈 수 있게끔 형체를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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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섣알오름 희생자 추모비’에서 간단한 참배식을 가졌다. 특히 한전연 회원들의 감회는 남다른 듯했다. 좌측부터 윤호상 공동대표, 좌융수 대외협력위원장, 장경자 감사, 김화자 총무, 정명호 운영위원장.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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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관자들은 ‘섣알오름 사건’ 학살지에 세워진 추모비에서 간단한 참배식을 가졌다. 특히 이 사건과 연관이 있는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연합회(한전연) 회원들의 감회는 남다른 듯했다. 한전연의 윤호상 공동대표를 비롯해 좌융수 대외협력위원장, 정명호 운영위원장, 장경자 감사, 김화자 총무가 이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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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악산 정상에 있는 일제고사포진지. 이곳에서 멀리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였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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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참관자들은 송악산을 걸어 정상에 있는 일제고사포진지를 참관했다. 야산 정상에 오르니 멀리 가파도와 그 뒤로 한반도의 최남단 마라도가 보였다. 참관자들은 동알오름으로 내려와 해안가 일대에서 점심식사를 가졌다. 해설자는 제주도에서는 큰 산이 아니라 야트막한 야산을 보통 ‘오름’이라 하는데 ‘섣알오름’이란 서쪽에서 오르는 야산 그리고 ‘동알오름’이란 동쪽에서 오르는 야산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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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악산 ‘섣알오름’에서 올라 ‘동알오름’으로 내려오던 중, 방목중인 제주 말들이 보였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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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용찬 열사 묘역 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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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용찬 열사 묘역에서 간단한 참배식을 가졌다. 왼쪽부터 배은심 유가협 회장, 박중기 추모연대 공동의장, 윤호상 한전연 공동대표.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점심식사 후 참관자들은 남원읍 신례리 소재 양용찬 열사 묘역을 찾았다. 이 자리에는 양용찬열사추모사업회 회원들과 가족들이 나왔다. 열사의 묘는 동네 공동묘지에 있었다. 각 묘의 경계 표시로 현무암을 무릎 높이만큼 쌓아올린 것이 특이했다.
19년이 지났지만 지인들은 양 열사를 ‘제주도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동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양 열사는 1991년 나라사랑청년회 옥상에서 “세계의 관광지 제2의 하와이보다는 우리의 삶의 터전으로서 생활의 보금자리로서 제주도를 원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제주도 개발 특별법 저지’를 외치며 분신, 투신해 운명했다. 참배를 마친 참관자들은 양 열사의 생가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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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안 '항몽순의비' 앞에서.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이어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를 찾았다. 참관자들은 13세기 몽골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거한 고려 무인의 정서가 서린 삼별초군이 마지막 보루였던 항파두성(缸坡頭城)을 둘러보았다. 참관자들은 4.3 최후의 무장대 ‘이덕구 산전’을 가길 원했으나 갑자기 뿌린 비와 차가 들어가지 못해 걸어서 한 시간씩이나 걸린다기에 아쉬움을 달래며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했다.
셋째날인 마지막 날은 아침부터 부산했다. 각 지역의 귀환 시간이 달랐기 때문이다. 수도권 지역이 서둘러 제주공항으로 향했고, 광주전남지역과 부산경남지역의 참관자들은 이후 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간단한 해단식에서 각 대표들과 참관자들은 2박3일 간의 역사탐방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귀환하게 된 것에 축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