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0. 30
사우디아라비아의 정부 조직은 독특하다. 한국을 상대하는 주무 부서가 경제기획부다. 지난주 한국을 방문한 경제기획부 장관은 한국 담당 장관이라는 직함도 갖고 있었다. 사우디인은 한국인을 주베일의 건설자로 처음 만났다. 1970년대다. 사우디 최초의 주베일 산업항 건설현장은 24시간 망치 소리로 요란했다. 눈빛이 반짝거리고 기능이 뛰어난 현대건설 기술·노동 인력의 민첩함은 지금도 그 나라 파워 엘리트들 사이에 전설처럼 회자된다. 사우디 사람들에게 한국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경이로운 국민으로 기억된다. 한국을 경제장관이 맡아야 할 나라로 규정한 사우디의 정부조직은 이런 역사적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세계 석유의 5분의 1을 생산하는 중동의 패권국, 사우디가 수교 55주년을 맞은 2017년 10월 한국을 다시 부르고 있다. 김정은과 같은 또래인 실권자 무하마드 빈 살만(32) 왕세자는 전무후무한 거대 스케일의 사우디 대개조 계획을 세웠다. 560조원을 투입해 홍해 연안에 서울 면적의 44배 되는 디지털 사막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 40년간 작동한 석유 의존적 국가체제로 30세 이하 인구가 70%인 이 나라를 더 이상 끌고 갈 수 없다. 석유는 싸구려가 됐고 세계는 디지털로 가고 있다”(뉴욕타임스 27일 자). 외신은 빈 살만 왕세자가 국민을 먹여살리기 위해 고민하는 현실 인식을 실감 나게 표현했다.
빈 살만이 작성한 ‘사우디 비전 2030’ 계획엔 “한국을 비롯한 일부 소수 국가를 전략적 협력국으로 선정해 도움을 요청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내용은 사우디 경제기획부 장관의 방한과 동행했다 다시 돌아간 권평오 사우디 대사의 정부 보고에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권 대사는 사우디가 전략적 협력국에 도움 받길 원하는 8대 산업 분야를 제시했다고 한다. 보고를 직·간접적으로 받은 사람은 청와대 홍장표 경제수석,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 등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당·정·청 핵심 인사들이 원전 수출에 집념을 보이는 듯하다는 점이다. 특히 집권당의 김태년 정책위의장은 “사우디 원전 수출에 두 가지 청신호가 있다. 첫째는 사우디가 이미 중소형인 100MW급 스마트 원전을 도입하기로 하고 핵심 기술인력 41명을 한국에 파견해 기술 훈련을 받고 있다는 점, 둘째 한국에서 1400MW급 대형 원전을 수입해 만족스러워하는 아랍에미리트(UAE)의 왕세자와 사우디 빈 살만 왕세자가 인간적으로 사이가 좋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UAE의 한국 신뢰가 한국형 원전에 대한 사우디의 호감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는 얘기다.
김 의장은 “사우디 원전 수출에 정부 역량을 집중하겠다. 중국·프랑스·러시아·미국과 5파전을 벌이게 될 텐데 한번 해볼 만한 게임”이라고 열정을 보였다. 사우디는 올해 안에 최근 건설 재개된 신고리 5·6호기와 똑같은 타입의 원자로 2기를 국제입찰에 부칠 예정이다. 마치 한국형 원자로를 염두에 둔 것 같다. 이렇게 좋은 조건에서 원전 입찰에 실패하면 정부의 무능을 탓할 수밖에 없다. 한국인 일자리 수만 개가 생기는 20조원짜리 사업이다. 성공하면 2030년까지 이어질 200조원 이상의 또 다른 17기 원자로 계약에까지 유리해진다. 이 정권이 명운을 걸고 따내야 할 국책 사업이다. 그렇게 안 하면 두고두고 욕을 먹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탈원전과 원전수출을 동시에 하겠다는 이 정부의 의식 분열에 절망했다. 홍장표·백운규·김태년 3인의 중간 권력자들이 사우디 원전 수출을 성공시킨다면 절망의 일부를 거둬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전영기 /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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