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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방 스크랩 수염 난 여자 이야기
김근혜(수필13) 추천 0 조회 76 15.12.13 21: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수염 난 여자 이야기
│김 용 희│
내 이야기를 들어봐.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야. 내가 어렸
을 때 조그만 읍내에서 일어난 일이지. 마을 어귀에는 폭 넓은 개울이 흐
르고 있었지. 겨울이 되면 개울은 꽁꽁 언 비늘만을 번들거리곤 했어. 그
러면 나는 눈이 오는 들판에서 눈을 받아 먹으며 뛰어다녔어. 알싸한 눈
을 혀 밑에 넣으면 수천 마리 벌 떼가 소리내며 날아올랐어. 그래, 그랬
어. 그러면 내 목젖은 넘실대며 눈을 음미하고자 하늘을 쳐다보곤 했어.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었어. 눈은 지상에서 하늘로 솟아오르고 있
었던 거지. 습자기처럼 찢어지면서 습자지처럼 흐느끼면서. 그러면 나도
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해보곤 했어. 눈처럼. 제 눈물 꽝꽝 얼려서 맨몸
으로 허공을 향해 말이야.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게 아닌데.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 아니 수
십 년 전의 일이었는지 몰라. 아니 수 백 년 전부터 있어온 일인지도 모르
지. 그때 내 나이는 열 네 살이었어. 나는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지. 그 나
[ 대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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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도 이미 인생이 고달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별로 되고 싶
은 것도 없었어. 시골 조그만 의원 의사셨던 아버지는 무엇이든 조잘대며
따지길 잘 하는 나를 나이보다 일찍 초등학교에 집어 넣으신 거야.
오랫동안 어두운 안채에 어머니가 누워계셨어. 언니는 어머니의 수발
을 들면서 철이 들었지. 하지만 나는 달라. 나는 어릴 때부터 사내애들과
어울리면서 동네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던 것 같아. 어느날 아버지는 목뒤
로 한 뼘이나 머리가 길어진 나의 탐스러운 흑갈색 머리를 싹둑 잘라 버
렸어. 머리를 기르겠다는 내 항변은 가냘픈 풀처럼 힘없이 쓰러졌지. 그
리고 아버지는 “니 내일부터 니 중학교에 가야 한 대이-” 신념에 찬
목소리로 말씀하셨어. 사실 어른들은 쓸데없는 것에 얼마나 많은 신념을
거는 것뿐이야. 사내애에게 꿀밤을 먹이며 구슬 뺏기 놀이에 여념이 없던
내게 중학교는 권태로운 곳이었어. 쓸 데 없는 것에 신념을 거는 아버지
는 가장 적합한 곳에 나를 보낸 거야. 기름칠을 한 나무 복도를 지나 먼지
와 기름 냄새가 섞인 햇빛이 교실 허공중에 떠있던 때를 잊지 못해. 그럴
때면 지상이 굉장한 공허로 메워져 있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
여자 중학교 1학년 교실 나무문이 삐끄득하고 열리자 나는 내 평생에
나를 가장 괴롭힐 사람이 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어.
선생은 꼬부랑만 아니지 늙은이었어. 머리는 염색을 하여 흰머리를 감추
고 있었어. 쭈글쭈글한 피부는 싸구려 분 안에 싸여 있었지. 여자의 젖가
슴은 없었고 거의 군복에 가까운 짙은 청색 모직 양복을 입고 있었어. 플
레어 스커트 밑으로 나온 다리는 새다리처럼 가늘어 곧 휘어져 쓰러질 것
처럼 안쓰럽게 느껴졌어. 검은 안경 너머의 눈빛은 학생들을 보며 미소
짓는 것 같았어. 하지만 선생은 분명 뒤에 서 있던 학부모들과 교감 선생
단편소설 25
님을 보고 있었음에 틀림없었어. 인자함을 가장한 채 우리를 내려다보는
위태로운 눈빛. 휴, 나는 이미 세상에 대한 배반 같은 걸 느꼈어. 입학식
의 모든 과정이 끝나고 그 늙은 여선생과 교감, 학부모들이 인사하는 꼴
이라니, 정말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지.
그러나 아버지의 예감은 적중했어. 나는 한 달이 채 가기도 전에 우리
의 모든 마음 밑바닥을 다 읽고 있기라도 하는 듯한 그 늙은 여선생의 눈
빛에 장악당하고 말았지. 같이 놀던 사내녀석들이 대장을 시켜준다면서
나를 꼬드겼지만 중학교에 들어가자 모든 것이 달라졌어. 낙서하기, 오캐
바닥, 구슬치기, 말타기 모든 것들이 곧 시시한 놀이에 불과했지. 내게,
내겐 말이야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거야.
나는 사람들이 비굴해 보이는 얼굴 표정을 즐기고 있었어. 까만 교복
상의에 풀 먹인 하얀 칼라를 세우고 운동화 대신 검정 구두를 신은 나의
폼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흐려지는 눈빛들이란. 난 그런 눈빛을 촘촘히 관
찰하며 즐기곤 했어. 헝겊 가방 대신 모조가죽으로 된 책가방을 들고 다
녔지. 머리 속을 긁으면 머리털에서 서캐 한 뭉텅이가 떨어지는 다른 애
들과 달리 나는 참빗으로 정갈하게 정돈된 머리털을 찰랑거렸어. 가끔 식
사 때문에 낮에 집으로 오시던 아버지는 학교가 일찍 파해 집에 가고 있
던 나를 자전거 뒷좌석에 태우시곤 했어. 아버지의 뒷머리에서 나는 포마
드 기름 냄새에 현기증을 참아야했어.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아이들의 커
다랗게 뜬 눈들이란. 지금 생각해도 어금니가 간지러울 만큼 신나는 일이
었어.
집안 뒷뜰에는 무성한 그늘 속에 이름 모를 나무들이 서 있었지. 울울
한 그늘 속에서 가끔씩 엄마의 기침 소리는 붉은 장미꽃잎처럼 내 가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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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곤 했어. 별로 개의치 않았어. 나는 학교에서 책상을 번쩍번쩍 들
면서 힘을 과시했으니까. 한 번 시작한 말싸움과 닭싸움에서도 지지 않았
어. 학교가 끝나면 먼 친척뻘로 식모살이 온 언니와 함께 쓰는 구석방에
서 아버지가 전집으로 사 준 계몽사 책과 세계 명작들을 읽곤 했어.
다음 아침 학교를 가서 적의로 칼질을 해 댄 카실카실한 나무책상에 아
이들을 불러 세워 놓고 나의 상상과 뒤섞어 읽은 책 이야기를 해 주었던
거야. 아이들의 거무튀튀한 뺨 위에 초롱초롱한 눈빛을 즐기면서 말이야.
지금은 그때 우리반 애들에게 내가 해 준 이야기가 기억이 나질 않아.
흘러간 시간의 저 안쪽 어디엔가에 숨어 있는 게 분명해. 전혀 기억해 낼
수가 없어.
아니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런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이야기하려
는 것은 그 여자에 관한 일이야. 수염 난 여자. 여자인데 길게 수염이 나
서 이상하고 기괴한 느낌이 드는 여자말이야. 나는 그 여자에 대한 소문
을 듣고 있었어.
그 여자,
그 여자는 노파였어.
우리 읍내 장터에서는 그런 노파를 자주 볼 수 있다고 했지.
나는 장 전날만 되면 마음이 들떴어. 어김없이 길가에 나가 서서 고개
를 넘어오는 장트럭과 장꾼들을 세곤 했지. 장날 교문 바로 옆에 책전이
벌어지곤 했어. 이야기책이며 유행가집들을 알록달록 늘어 놓았지. 잡화
전과 포목전 사이의 공터에서는 약장수가 기타를 쳐댔어. 처녀는 서투른
유행가로 약장수 가락에 흥을 더했지. 술집에는 장꾼들로 들끓고 커다란
가마솥에서는 뿌연 김을 올리면서 술국이 끓곤 했어. 나는 옹기전 부근
단편소설 27
땅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언니와 개피떡을 사먹었어.
그 여자와 같은 노파들은 머리에 커다란 양은 대야를 들고 와 허연 헝
겊 주머니에 담긴 나물과 곡물들을 신문지 깐 땅바닥에 늘어놓곤 했어.
그 여자도 산에서 캔 풀뿌리와 나무 뿌리가 가득 담긴 망태기를 매고
터벅터벅 걸어 읍내 시장장날에 좌판을 벌였어. 여자는…… 무서워 보였
어. 여자는 상당히 늙어 보였고, 턱에는 숱이 많고 길게 내려오는 수염이
달려 있었어. 아니 수염이라기보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여서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거야. 아니 몸 전체에 털이 많아 수염처럼 보였는지도 몰라. 지
나가는 사람들은 남자 같은 여자를 보고 적잖이 놀랐어. 그건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만한 거지. 하지만 여자는 별로 아랑곳
하지 않고 나물을 다듬곤 했어. 수염이 언제부터 여자의 몸에서 난 것인
지 알 수는 없었어. 여자는 수염만 아니면 다른 노인들과 별 다를 바 없었
어. 여자는 그냥 탈색된 빨래 같은 그냥 그런 노인에 불과했던 거야. 여자
는 아들이 학생 시절 입었던 늘어난 추리닝 상의와 보푸라기가 인 고쟁이
같은 바지를 입고 있었어. 사실 그런 옷은 농가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농
기구처럼 입은 느낌이 나지 않는 옷들이지.
늦가을인데도 햇빛과 바람에 피부가 짙은 밤색으로 변해 있었어. 혈관
이나 힘줄이나 근육이 전혀 구별되지 않았어. 얼굴과 손등은 껍질이 벗겨
진 호두나무의 울퉁불퉁한 나뭇가지처럼 보였지. 그 여자는 쉼 없이 도라
지와 더덕을 까고 있었어. 누런 종이봉지와 신문지로 나누어 정성스러운
자식처럼 가지런히 놓았어.
하지만 이 모습들도 다 들은 풍문이야, 소문으로 듣던 이야기지. 언니
와 개피떡을 사먹으면서 나는 그 여자를 찾아다녔어. 노파의 수염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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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었던 거지. 하지만 노파를 찾을 수 없었어. 이미 해는 떨어지고. 여자는
벌써 마수를 하고 집으로 돌아간 건지도 모르지. 며칠 전인가 나는 우리
집 수돗가 하수구 구멍에 다 몰래 오줌을 누고 있었지. 그러다 뭔가를 보
았어. 그것은 무수한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하수구 철망에 매달려 있었어.
눈을 가까이 대고 자세히 보려 했지. 그건 무수한 털이었어. 윤기나는 짧
고 굵은 털. 머리카락도 아닌 이 털들은 대체 어디서 생겨난 걸까. 나는
하수구 구멍을 한참을 들여다 보았지. 언니가 어머니를 씻긴 목욕물을 여
기에 버린 탓일까. 아버지가 씻은 물 때문일까. 알 수는 없었지.
사람들은 그 여자가 농가 가장 깊숙한 마을 맨 끝집에 살고 있다고 말
했어. 개울을 따라 끝없이 올라가면 그 여자의 집이 있다고. 짚으로 지붕
을 인 집이 마치 커다랗게 짠 바구니 같았어. 물이 귀하고 가물기를 잘 하
는 고장이었지. 그 여자는 시집을 온 열 일곱 살 때부터 우물에서 물을 날
라다 먹었대.
동네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그 여자는 그 집에서 오래 살았던 것 같
아.
그 여자는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큰 가마솥이 있
는 부엌으로 내려갔어. 부엌은 삐걱거리는 나무 마루를 지나 높은 층계의
툇돌에서 다시 검정 고무신을 눌러 신고 내려가야 있었어. 겨울철에 고무
신은 돌멩이보다도 차고 무거웠어. 그 여자의 발을 옥죄곤 했지. 추위로
눈물을 찔끔거리며 그 여자는 머리에 쉰내 나는 수건을 동여맸어. 부엌
으로 통하는 문은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서 나온 검댕이 연기가 묻어 있었
지. 그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 여자는 높은 문턱을 건넜어. 아직 새벽의
미명도 들어오지 않은 어둑한 부엌의 고요 속에서 여자는 더듬더듬 수 십
단편소설 29
년 동안 익숙해 온 손으로 행주가 올려져 있는 가마솥과 쌀 항아리를 쓰
다듬었지. 손끝으로도 볼 수 있는 것들이었어.
그 여자가 처음 마을로 시집을 왔을 때 여자의 얼굴에는 어떤 털도 나
지 않았어. 야위었지만 고운 얼굴이었다지.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해. 가마에서 내리고 대문 문턱을 넘어 방안을
들어서서 한나절이 되도록 그 여자는 고개를 들 수 없었어. 그 여자는 자
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자신없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어. 뭔가 두려
움에 찬 눈을 크게 뜨고서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이었지. 잠깐씩 옆을 곁눈
길하며 앞을 쳐다볼 뿐이었어. 여자는 심한 갈증을 느끼면서도 족두리를
쓴 채 몇 겹의 한복을 입고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던 거야. 첫날밤을
치르고 시어머니는 그 여자에게
야야, 새 아기야, 밥 한번 해보거래이.
찬물을 끼얹듯 말씀하셨어. 그 여자는 말없이 누비이불에서 일어나 부
엌으로 더듬더듬 내려갔던 거야.
그래, 지금 들은 기억이 나는데 여자는 꽤 부지런했다고 해.
그 여자는 시집 온 이후로 쉬는 법이 없었어. 아침소반을 준비하고 밥
상을 다 치웠어. 그리고 그 여자는 소죽을 끓였어. 소를 먹인 다음에는 돼
지와 닭과 고양이와 개와 염소를 먹여야 했어. 그리고 나서 그 여자는 챙
이 크고 흰빛이 누렇게 탈색이 된 <조국건설>이라고 쓰인 모자를 쓰고 호
미를 들고 밭으로 갔어. 밭은 두엄냄새가 나는 뒷간을 지나야 했어. 커다
란 감나무를 돌아 돌이 몇몇 박힌 황톳길을 오르면 곧 밭이었지. 고랑이
늘어선 밭에는 고추와 담배가 심겨져 있었어. 담배와 고추는 가장 이윤이
많이 남는 농사였다지. 하지만 담배농사는 맵고 독하고 고된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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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가 소 꼴을 먹이러 산에 갈 때도 아이들이나 노인들과 이야기
를 하지 않았어. 수염난 여자를 아이들이 놀려대곤 했기 때문이지. 하지
만 여자는 개의치 않았어. 오히려 여자는 어흥, 하며 수염을 가지고 흔들
어댔어. 그러면 아이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가곤 했어. 여자는 낄낄대며
수염을 다시금 제자리에 가지런히 놓곤 했지. 가끔씩 밭에서 쪼그리고 있
던 다리를 펴고 허리를 젖히면 모든 뼈 마디에서 일제히 소리가 났어. 커
다란 동굴에서 반사되어 울려나오는 소리 같은 거였지.
여자는 그리웠던 거야. 그 여자의 친정집 동생들이 말이야. 고개를 들
면 그 여자의 친정집이 있는 산을 볼 수가 있었어. 밭에서는 그 산이 잘
보였어. 민둥산이기 때문에 색채라기보다 한줄기 섬광이 지나가는 산이
었지. 어떤 때는 그 위에 떠 있는 구름이 산과 혼동되기도 했어. 산은 하
늘에서 솟아난 것 같은 느낌을 주었어. 태고 적에 석화된 듯한 곤두박질
치는 동세 때문에 말이지. 산은 하늘에서 흘러 내려와, 아니 우주 공간에
서 솟아 나와 거대한 암석 덩어리로 굳어 버린 듯한 느낌을 주었어. 산 밑
에서 솟구쳐 오르는 바위절벽을 보며 여자는 건조한 한숨을 내쉬었어.
산 아래 마을에 그 여자의 어릴 적 집이 있었어. 친정집이라야 그 여자
의 아버지와 의붓오빠, 그리고 재취로 들어온 여자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었어.
여자와 나이 차이가 열 살이나 나는 오빠는 부리부리한 눈에 각진 턱을
가진 청년이었어. 어느날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여자와 그 여자의
여동생을 건조대 창고로 불러냈어. 자기의 호주머니에서 돈이 없어졌다
고 눈을 부라리며 그들을 도둑으로 몰아세웠던 거야. 오빠는 얼굴이 시뻘
겋게 된 채로 콧구멍을 벌렁거렸어. 오빠는 이미 마대자루에서 어린아이
단편소설 31
키만한 굵은 몽둥이를 꺼내고 있었어. 어린 그 여자와 여동생은 공포감으
로 눈을 뜰 수조차 없어 벌벌 떨고만 있었지. 온 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
어. 입에서 이 마디가 부딪치고 두 손이 저절로 떨렸어. 매질은 가리지 않
고 온 몸에 가해졌어. 구석으로 도망치는 그들을 오빠는 돼지 몰듯이 몰
며 성난 짐승처럼 쫓아다녔지.
건조대 창고 안에서 살점이 튀듯이 절망적인 울음과 비명이 울려왔어.
어린 여동생은 더 울 힘이 없어 피리처럼 작은 소리를 냈어. 그들을 구원
해 줄 어느 누구도 없었어. 거짓으로 자백을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창고
를 빠져 나오지 못했을 거야. 건조대 안의 건초처럼 그들은 퍼런 몸뚱아
리와 누렇게 된 얼굴로 창고를 기어 나왔어.
오빠는 정말 그네들을 도둑으로 생각한 것일까. 그것은 아직도 여자에
게는 의문으로 남아 있어. 오빠의 친엄마는 정말 울고 있는 오빠를 마루
턱에 남겨 두고 도망을 간 것일까. 그런데,
내가 어떻게 이 많은 이야기들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걸까.
여자 오빠의 매질은 쉼이 없었다고 해. 어느 날은 변소 뒤에서, 어느
날은 어른들이 다 밭일을 나간 한가한 오후에도 벌서기와 매질은 계속되
었어. 아무런 변명도 주어질 수 없는 폭군의 매질이었지. 몸뚱아리의 멍
이 다 가시지도 않은 채 여자는 또 다시 매질을 당하곤 했어. 매를 자주
맞으면 맷집이 생길 만도 하지. 하지만 여자는 언제나 매가 무서웠어. 여
자는 울고 싶지 않았어. 그러나 눈물이 절로 흘러내렸어.
여자는 생각했어. 차라리 개였다면 도망이라도 갈텐데. 여자는 길거리
에서 잘 수 없어. 그래. 그 여자는 사람이었어. 그러나 사람도 개보다 못
할 수 있지. 여러 번의 봄이 오고 갔어. 붉은 꽃은 그저 붉은 꽃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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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고, 푸른 잎은 그저 푸른 잎일 뿐, 그 여자는 여러 다른 색깔을 보지
만 모두 한 가지 색을 느꼈을 뿐이었어.
그 여자가 하리 마을로 시집을 온 이후에 매질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졌
어. 그 여자는 아무 말없이 사람들과 가축들을 먹이고 밭 농작물들을 살
피는 일을 하면 되었지. 아마, 그 여자의 수염이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
한 것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해. 그 여자는 소 여물을 작두로 잘라 커다란
가마솥에 넣어 소죽을 끓였지. 우물에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길러와 물독
을 가득 채워 놓았어. 그 여자는 물독에 물이 가득 채워지고 건초더미 옆
에 땔감들이 가득히 쌓여 있을 때면 흐뭇해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었어.
그러다가 바람이 사나워지면 밭에 배추가 얼지나 않나 걱정을 하며 잠을
뒤척이곤 했어. 어느 해 겨울에는 모든 것이 얼어붙는 혹한이 닥쳤지. 한
밤중에 일어나서 집에서 키우는 가축들이 얼어 죽지 않고 잘 살아 있는지
순찰을 돌지 않으면 안되었어.
그 여자가 하리 마을로 시집을 온 이후 많은 일이 있었어.
시집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는 풍을 맞았어. 그 여자는 삼 년
간 뒷수발을 다 들었어. 시어머니는 새사람이 잘못 들어와 액이 끼어 집
이 이렇게 되었다고 눈을 부라렸어. 그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 여자가
오빠에게 당한 매질에 비하여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 얼마 있
다가 시어머니마저 풍을 맞았고 뒷수발을 하는 것도 또 그 여자의 몫이었
어. 그 여자는 생에 순종하듯 그 모든 일들을 다 해냈어. 생은 그 여자에
게 침묵을 가르치고 겸허를 익히게 한 거야.
존재하는 것은 모두 탐욕스럽고 굶주려서 무엇이든 먹어치우려 하지.
그 여자가 먹이던 존재들은 시부모, 남편과 남편의 두 여동생과 일곱 명
단편소설 33
의 자식들과 네 명의 일꾼, 그리고 한 마리의 어미 소와 송아지, 돼지와
개와 닭들, 염소와 고양이였어.
그랬어. 그 여자는 시집을 와서 일곱 명의 아이들을 낳았어.
야야, 아들은 셋 있어야 한대이.
시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아들 타령을 했어. 그 여자는 아들
을 셋 낳지 않으면 이 집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했어. 그 여자는 시집을 와
서 거의 이십 년 동안을 아이를 낳았어. 그리고 아이들을 먹였지. 아이들
은 언제나 강아지처럼 그 여자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녔어.
큰 아들은 명민한 아이여서 5학년이 되던 해부터 읍내로 나가 초등학
교에 다니게 되었어. 그 여자는 아들이 하숙비 대신으로 쌀 한 말씩을 등
에 둘러매고 나무 대문을 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을 훔치곤 했어.
큰 애가 금방이라도 그 여자를 부르며 문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았어. 아
들은 이듬해 친척이 있는 서울 집으로 전학을 갔어. 나중에는 마을 사람
들이 부러워하는 명문대학에 입학을 했지.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에서 정
승이 나올 거구마 하면서 여자가 아들을 낳은 안방에서 자신들도 아이를
낳도록 방을 빌려달라고 했어. 그 여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피식피식
웃으며 평생에 느껴보지 못한 행복감이 가슴 아랫쪽으로 싸아하고 밀려
들어오는 것을 느꼈어. 그럴 때마다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곤 했지.
그럼, 아무렴, 그 아들을 이 배로 낳았지. 이 배로.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어. 그 여자는 저녁 밥상을 들고 안채로
들어가 남편을 부르고 양은 그릇 위에 김이 오르는 배춧국을 무심히 보고
있었어. 이제 아랫배를 쓰다듬는 것은 그녀의 버릇이 되었어. 저녁 밥상
을 물렸어. 그 여자는 남편의 발을 씻기기 위해 겨울 철 방안에 대야를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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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고 왔어. 딱딱한 갑충류 등 같은 그의 발바닥을 쓸면서 여자는 설핏 웃
었어. 내 새끼, 정말 대단하긴 하재.
남편은 무심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어. 남편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장
소팔과 고춘자의 만담을 들을 때만 조금씩 웃곤 했어. 구겨진 마분지처
럼. 라디오는 음질이 나빠 지지직거렸어. 하지만 남편은 정성을 다해 라
디오의 안테나를 올리고 볼륨을 조절했어. 갓 나은 아기처럼 라디오를 조
심스럽게 다루었어. 얼굴과 맞닿은 채로 라디오를 다 듣고 남편은 사랑방
으로 건너가 코를 골며 잠에 떨어졌어. 그 여자는 안채에 우두커니 남아
품에 있는 아들의 졸업사진을 꺼내 한참을 들여다 보았지.
대처로 나간 아들은 결혼을 하여 손자 사진을 보내주었어. 그 여자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머리에 쓴 수건을 풀어 내리고 손자가 웃고 있는 사
진을 몇 번이나 들여다 보곤 했어. 도회로 나간 아들은 그녀에게 각별하
게도, 그렇다고 무시하며 대하지도 않았어. 그 여자는 다시 자신의 누렇
고 쭈굴쭈굴해진 아랫배를 딱딱한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어. 아랫배 가죽
은 배와 겉돌듯 축 늘어져 있었지. 팔과 다리에는 손가락 반마디만큼의
털들이 자라 있었고. 여자의 늘어진 몸 구석구석에 털이 자라 정숙하게
늙은 들짐승처럼 보였어.
내가,
어떻게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지 나 자신도 의아스러워. 아무래도 어
렸을 때 들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 머리 속에 깊이 새겨져 하나의
설화처럼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어. 여자에게 왜 수염이 나고 털이 났는지
는 알 수가 없어. 어쩌면 그건 질병이었는지도 모르지. 중학교에 올라가
나는 스커트 밑으로 나온 내 종아리에 털이 검게 자라 있는 것을 보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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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끔찍했어. 여름 하복 하의 아래를 가리기 위해 나는 어떻게 했지?
털을 뽑고 가위로 자르기도 했지. 그러나 자르면 자를수록 털은 치욕처럼
솟아났어. 자고 일어나면 아침마다 털을 잡아 뜯었어. 그럴 때면 안채에
서 어머니가 코록거리며 기침을 하셨지. 아버지는 사랑방에서 언니와 아
침기도를 드리고 계셨고. 마당에 떡갈나뭇잎이 뚝뚝 소리내며 떨어지고
있었어. 시간은 반복과 기다림의 연속 같았어. 밤마다 밀물처럼 밀려들어
와 내게 왜 사는지를 묻곤 했으니까. 종아리에 털을 뽑으며 나는 약간의
비명을 준비하고 있을 뿐인데. 다시 어머니의 기침소리가 들렸어. 언니가
물대야와 수건을 들고 대청마루를 황급하게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어.
해바라기는 그 커다란 목을 뚝 부러뜨린 채 자결하듯 마당에 고개를 박았
지. 그럴 때면 나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세상에 혼자 남은 듯 몸을 종이배
처럼 접은 채 움직이지 않았어.
그 여자는 털이 났지만 손놀림은 매우 능숙하고 섬세했지. 여자는 아들
에게 줄 스웨터를 짜고 있었어. 해가 순교하듯 스러져 가는 저녁 무렵이
었지. 남편이 혈압으로 쓰러진 거야. 남편은 일어나질 못했어. 풍을 맞은
거지. 아이들도 모두 대처로 나가 각각 가정들을 일구었던 때였어. 그 여
자는 혼자 남게 되었어.
그 여자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없었어. 그 여자는 마을의 맨 마지막 집
에서 여전히 소를 먹이고 밭을 일구고 산에 약초를 캐러 다녔어. 속이 들
여다 보이는 망태기를 매고 진흙이 묻은 나이론 바지를 입고 산을 올랐
어. 주름살이 가득 덮이고 검게 그을린 그 여자의 얼굴에는 수염만이 자
라있었어. 여자가 들숨과 날숨을 쉴 때면 털은 팔자좋게 펄럭이기도 했는
데. 누렇게 늙은 옥수수자루처럼 편안해 보이기도 했어.
36 제1회 농어촌희망문학상 수상작품집
구름이 하늘을 무겁게 덮고 있었어. 며칠 궂은 날씨가 계속되었지. 갑
작스레 추워진 날씨에 겨울이 오고 있다고 그 여자는 생각했어. 그 여자
는 쉴사이 없이 무언가를 중얼중얼거리며 야산을 올랐어. 여자는 길쭉하
고 구부러진 호두나무 가지로 된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어. 여자는 오른
손으로 쥐고 있던 지팡이를 앞쪽으로 밀면서, 그것으로 땅을 찍으며 온
힘을 다해 몸을 앞쪽으로 쭉 밀어냈어. 불룩 튀어 나온 바위의 허리께를
짚으며 여자는 내년 봄에는 어떤 식물을 심어야 할까 하고 광에 있는 씨
앗들을 생각했어.
가을이 지고 있었어. 그 여자는 떡갈나뭇잎들이 쌓여있는 좁은 산길을
처벅처벅 걸었어. 새벽녘의 찬 서리로 땅에 누워 있던 나뭇잎들이 신발에
척척 달라붙었어. 갑자기 커다란 나무 둥치가 나타나더니, 이내 불규칙하
게 뻗은 나뭇가지들이 하늘 높이 활짝 펼쳐졌어. 그 여자는 늙은 소나무
아래의 미끈미끈한 땅 위에 등걸 같은 손을 쑥 집어넣었어. 그 여자는 자
연산 송이버섯이 있는 늙은 소나무 밑을 아무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송이는 날이 추워져서인지 잡히질 않았어. 그 전에 이미 그 여자는 송이
를 다 캐내었는지도 몰라. 캐어서는 대처에 있는 자식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던 거야.
다시 그 여자가 산 중턱까지 왔을 때 그 여자는 숨을 들이쉬면서 버릇
처럼 안개같은 한숨을 쉬었어. 이미 허옇게 된 수염이 한번 너풀거리며
다시 가라앉았지. 풀빛이 누렇게 된 몇 개의 봉분 옆에서 말라비틀어진
다리를 오무려 앉았어. 짙은 자주색 나이론 고무줄바지에는 누른 흙이 장
단지까지 묻어 있었어. 땅의 물기는 종아리까지 젖어 있었어. 한기 있는
바람이 싸악 하고 불었지.
단편소설 37
여자의 몸은 몹시 쇠약해져 있었어. 잠깐 나왔던 햇빛도 이제 여자의
등 뒤에서 햇살을 거두었어. 해가 빛의 힘을 잃어가는 오후였지.
여자는 자신의 쭈글쭈글한 배를 만져 보았어. 짙은 고동색으로 그을린
여자의 굳은 얼굴에 잠시 웃음이 비치려 했어. 그러나 이내 굳은 얼굴이
일그러져 마치 우는 것처럼 보였어.
산 속으로 들어가면 목소리 하나 없어. 아무 소리도 없어. 개울에 흐르
는 물, 텅 빈 하늘, 물 위의 작은 파문, 멀리 있는 나무 꼭대기의 떨림, 모
든 것들은 그 비밀을 간직한 채 생명을 지켜 가고 있지.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때 낀 손끝으로 힘을 내어 약초를 캤어. 아무 소
리 없이,
그 여자의 배속에서 따뜻한 물이 흐르고 있는 것 같기도 했어. 바람이
잠깐 불었어. 수염이 흔들렸어. 수염은 흔들리며 여자의 야윈 몸을 비질
해주는 듯도 했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진눈깨비를 뿌리기 시작했어. 여자는 소
리 내 가래를 끌어올려 탁하고 땅에다 뱉었지. 손길을 서둘렀어. 흙뿌리
를 움켜쥐고 떨어지지 않으려는 약초를 캤어. 뒤늦게 핀 산도라지도 캐냈
어.
그 여자는 산을 어서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어. 진눈깨비는 어느새 하
늘에서 하얀 허무처럼 변하며 눈송이를 만들고 있었지. 누렇던 봉분 위에
하얗게 진눈깨비가 덮였어. 풀섶을 지나면서 억새가 서걱댔어. 그 여자의
아랫도리에 상처를 냈어. 그 여자는 또 하나의 다리처럼 지팡이를 척척
휘두르며 바위 사이를 짚었어.
그 여자가 눈길에 비칠거리며 넘어 진 것은 그 순간이었어.
38 제1회 농어촌희망문학상 수상작품집
아이유.
그 여자의 가벼운 몸은 바위와 바위 사이 돌멩이들이 만들어 놓은 좁은
길 위에 얹히게 되었지. 그 여자의 신음소리는 힘없는 갓난아이의 소리처
럼 들렸어. 왼 다리를 삔 것인지 골반에 무리가 간 것인지 그 여자는 움직
일 수가 없었어.
아이유
아이유
그 여자는 계속 같은 말을 중얼거렸어. 빨리 일어나서 집으로 내려가
소를 먹여야 할텐데 그 여자는 생각했어. 깨밭에 벗겨둔 비닐을 씌워야
할텐데, 여자는 생각했어. 그 여자는 머리 속에서 일감들을 되뇌었어.
눈들이 자꾸만 왔어. 죄 없는 눈이었지.
그 여자는 바위에 조금 기대었어. 차츰 그 여자의 몸에 감각이 없어지
더니 추위도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되었어. 공기는 호박빛으로 한껏 투명
해졌지.
눈 속에서 꿈꾸는 씨앗처럼 그 여자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어. 환상을
없애려고 애를 쓰지만 알 수 없는 힘이 그 여자를 현실 너머로 몰고 갔어.
그 여자가 먹이고 키운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어. 그 여자는 읍내에서
하숙을 하던 초등학생인 큰 아들이 나무대문을 세차게 열고 엄마하고 자
신의 품으로 뛰어 들어오는 환각을 느꼈어.
그래, 갸아를 이 배로 내가 낳았지. 일곱을 다 이 배로 낳았자아.
얼마 전 아들은 손자를 데리고 곡식과 김장거리 채소를 가지러 고향에
온다고 했어. 그 여자는 방안을 깨끗이 치우고 이불 호청을 벗겨 내 깨끗
이 빨래를 하고 풀을 먹였어. 시골에서 하얀 이불은 금방 누렇게 흙먼지
단편소설 39
가 타곤 하지. 아들 결혼 때 사가에서 받은 원앙금침을 가지런히 개어 짙
은 나무 색 장롱 위에다 올려놓았던 거야. 불안한 그 장롱은 그 여자가 시
집 올 때 가지고 온 것인데 한 쪽에는 온 거울이 박혀 있고 다른 한 쪽의
문은 나사가 빠져나가 문을 열 때마다 문짝이 삐걱거렸어. 장롱문을 열
때마다 여자는 경첩이 빠지지 않게 조심을 하곤 했지.
물독을 가득 채우고 땔감 나무도 많이 해서 뒷간 옆에다 쌓아 두었어. 언
덕을 내려가 마을 어귀에서 아들이 오는 길목에 한참을 서 있었어.
그 날 아들은 오지 않았어.
무슨 일 때문이라는 아들의 전화 목소리를 듣긴 하였는데 그 여자가
잘 모르는 어떤 일 때문이었어.
아들은 거의 시골집을 오지 않았어. 그 여자는 아들에게 조금도 서운
한 것이 없었어. 아들은 늘 전화로 혼자 있는 늙은 어머니를 염려했어. 그
여자는 군불을 때기 위해 쇠꼬창이로 아궁이를 헤집으며, 일이 많은 게지
했어. 하얀 연기가 노파의 눈에 들어가 눈이 매웠어.
저녁이면 이 마을의 굴뚝에 군불연기가 올라왔지. 사람들은 모두 그들
의 고통만큼 군불을 태웠어. 여자는 서두르지 않았어. 도대체 여자에게
시간은 얼마든지 있는 거 아니겠어? 그 여자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시간 못지 않게 그 여자가 죽은 이후에도 있을 그 막대한 시간 말
이다. 눈발이 내리는 저녁의 이 가득한 시간들이, 기대할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음을 그 여자에게 가르쳐 주었어. 수염이 털처럼 여자의 몸을 감
쌌어. 여자는 따뜻한 온기를 느꼈어. 여자는 겨울털짐승처럼 겨울잠을 잘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그 여자가 키운 많은 짐승들처럼 여자
는 털에 감싸여 있었으니까. 그 위로 눈이 그 여자의 몸 전체를 하얀 천사
40 제1회 농어촌희망문학상 수상작품집
처럼 만들었어. 그 여자는 잠이 온다는 것을 느꼈어. 여자는 많은 것들을
먹이고 키웠어. 이제 그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그 여자 혼자 하얗게 남게
된 거지.
실밥이 풀어진 고동색 니트 사이로 바람이 들어 왔어. 그 여자의 옷을
바람이 짜기 시작한 거야. 바람의 베틀은 고달픔으로 가득차 있었지. 바
람은 세찬 힘줄로 실을 짰어. 바람의 힘줄이 그 여자의 가녀린 몸을 휩싸
고 돌았어.
쑥대밭처럼 자란 노파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수염과 함께 초겨울 바
람에 흩날렸지. 그 여자의 머리카락과 털은 그 여자의 고민과 피곤을 뒤
덮고 자라 있었어.
그 여자는 나무뿌리처럼 나온 발목 정강이를 축 늘어뜨렸어.
눈들이 내려 그녀의 거친 살결을 부드럽게 토닥거렸지.
그 여자가 죽은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마을의 젊은 청년이었어.
그는 그 다음날 나무를 하러 갔다가 그 여자가 아기처럼 잠들어 있는 것
을 보았어. 아니 털짐승처럼 따뜻하게 겨울잠을 자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
어. 그는 두려움에 가득찬 목소리로 아지매요 아지매요 하면서 노파를 불
렀어. 그는 노파를 흔들다가 다급하게 그 여자를 지게에 업고 산길을 내
려 왔던 거야.
그 날은 일요일이었어. 나는 그때 마침 읍내 의원에 아버지의 점심을
갖다 주기 위해 병원 진찰실 방에 있었어. 아버지는 찬합을 열어 식모 언
니가 싸 준 도시락을 드시고 계셨어. 나는 소파에서 <건강과 사람>이라는
잡지를 들추고 있었지. 그 때 유리창으로 하리 마을 청년이 황급하게 숨
단편소설 41
을 헐떡이며 병원으로 달려들어 오는 것을 보았어.
샘요, 샘요,
아지매가, 글쎄 아지매가…….
후딱 가셔야겠심더.
그는 숨을 쉴 수 없는 듯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헐떡거
렸어. 아버지는 상황을 듣고 언제나 그 예의 침착함대로 왕진가방을 준비
했어. 마을에 운니네 아저씨 택시를 전화로 불렀지.
나는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운니네 아저씨 택시 뒷좌석에 탔던
거야. 그런데 끝내 아버지는 나를 택시에서 내리게 하셨어. 안된다. 내리
거라. 아버지를 태운 택시는 눈길을 따라 미끄러지듯 사라져 버렸어. 종
종걸음을 치며 택시를 따라가려 했지만 난 우두커니 남겨진 채였지. 머쓱
해진 표정으로 달아나는 택시를 바라보았어. 수염난 여자를 꼭 보고싶었
는데. 나는 까만 운동화 속 내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을 뿐이었지.
맛질마을이라고 했던가. 그곳은 나도 한때 자전거를 타고 간 적이 있던
마을이었어. 읍내로 흘러드는 개울 다리를 건너는 곳. 미루나무가 늘어선
긴 신작로 한참을 달리면 맛질 마을이 나타나지. 마을 입구는 언덕배기
위로 올라가는 좁은 산길로 되어 있어. 운니네 아저씨는 아무 문제 없심
더 하면서 울퉁불퉁한 경사길을 위태롭게 올라갔을 게 분명해. 택시가 달
릴 때마다 돌들이 튕겨져 나갔겠지만 아버지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을 거
야. 며칠 째 온 눈으로 눈꽃에 싸여 있는 길 옆 낙엽송들이 환하고 흰 아
궁이를 피워놓았을 거구.
노파의 집은 마을의 집들이 다 끝난 맨 끝 집이었어. 운니네 아저씨 택
시는 노파의 집 못 미처 멈추었어. 길이 너무 좁았기 때문에 차가 오를
42 제1회 농어촌희망문학상 수상작품집
수가 없었던 거야. 아버지는 눈이 녹아 질척한 진흙길을 걸어 올라갔어.
얼굴에 버짐이 일어 허옇게 된 동네 청년도 함께였지. 하늘에는 한낱 부
호일 뿐인 몇 마리 떼까치들이 삭정이 같은 날개를 펴고 들 가운데로 날
아갔어. 그들은 갈대 속에 묻혀 있다 가끔씩 피리소리처럼 울곤 했지.
노파는 청년의 등에서 안채에 눕혀져 있었어. 마을 사람들이 수근거리
며 노파의 마당과 방안에서 서성이고 있었어. 방안에 들어서자 퀴퀴한 냄
새가 났다지. 온기나 훈기는 거의 사라져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어. 카시
미론 이불은 개어져 있었고 붉은 색 담요는 펼쳐져 있었는데 그 옆으로
스테인리스 밥그릇에 밥이 담겨 있는지 밥그릇 하나가 방바닥과 담요 사
이로 비죽이 나와 있었어. 창호지로 발라진 유리창 너머에서 여자가 키웠
던 고양이와 닭이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모습이 비쳤어. 벽과 천장 가까
이에 사진들이 액자에 담겨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사진들은 모두 노파가
낳은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 사진이었어. 그들은 맘껏 행복하게 웃으며
누워 있는 노파를 내려다 보고 있었지.
노파의 얼굴에는 눈이 녹아 콧잔등과 턱에서 빗방울 같은 물이 흘렀어.
입은 약간 벌어져 있었고. 그 여자의 입술이 조금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
지. 피부는 자글자글하게 깨어진 거울같이 실금이 가 있었어.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지만 백발은 아니었어. 희끗희끗 할 정도였지. 수염은 길게
자라 여자의 몸을 위엄있고 따뜻하게 감싸고 있고. 여자의 목과 팔과 발
에도 털이 자란 것처럼 보였어.
아버지는 침착하고 용의주도한 몸놀림으로 노파의 손목 맥박을 짚었
어. 코밑에 손가락을 대고 목뒤를 짚어 보았어. 그리고 노파의 눈꺼풀을
뒤집었지.
단편소설 43
사망한 것 같군.
짤막하고도 건조한 말이었어. 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이 기
다렸다는 듯이 자기마다의 소리들을 했어. 어떤 아낙들은 아이고 아지매
하고 울음을 터뜨렸어. 혀를 차거나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노파를 내려다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 아버지는 청년과 몇 마디의 말들을 주고받았던 것
같아. 마을사람들도 모두 한마디씩들을 했어.
음,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내게 해준 거야. 그래,
이제야 사람들이 해준 이야기들이 다 떠오르는군. 그래, 사람들은 그날
본 그 미소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어. 그날 노파의 입가에서 맴돌고 있
는 희미한 미소에 대해서 말이야. 고요 속에서 맴돌고 있는 미소, 그 미소
가에 떠도는 향기 같은 거 말이야. 그건 연한 향냄새 같다고 했어. 털로
감싸인 채로 여자는 잠든 것처럼 보였다지.
노파는 깨어 있을 때 사람들과 동물들을 먹였어. 사람들은 먹고 나서
또 먹었으며 또 늙어갔지. 시간은 화살과 같은 거야. 자연은 그 여자의
가녀린 몸을 자연의 내장으로 소화할 거야. 그 여자는 나무 등걸과 같은
원래의 모습대로 흙과 길로 돌아갈 거야. 그 여자는 낳고 키우는 대지의
법칙에 한줌의 삶을 기탁한 거야. 아니 여자는 털짐승처럼 깊은 겨울잠
에 빠져 든 것인지 몰라. 따뜻한 날개처럼 털과 수염이 여자를 감싸고 있
을 때 여자는 고치 속의 애벌레처럼 코를 골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고추
가 마를 때 고독한 매운내를 풍기듯이. 가지가 마를 때 보랏빛 어둠이 고
이듯이 그렇게 단단하고 깊숙한 겨울잠을 자고 싶었는지도. 거친 손금에
고인 길들을 가슴에 감싸 안은 채.
그러나 생각해 봐. 세상에 수염 달린 여자가 어디 있겠어. 옷 사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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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고 팔과 다리 털이 비죽히 나와 있는 털짐승같은 여자. 세상에 그런 여
자가 어디 있겠어. 내가 어릴 때 동네 사람들이 해준 이야기는 사실일까.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가 사실일까. 지어낸 이야기인지도 모르지. 아님
장난 삼아 해준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내가 읽은 알 수 없는 먼 나
라의 책들이 나에게 어떤 기괴한 상상을 심어준 것일지도 모르고. 기괴하
고 이상하게 털이 난 여자 이야기. 결국 자신의 털 속으로 달려가 털 속에
서 잠들어 버린 여자 이야기. 나는 끝내 수염 난 여자를 보지 못했지.
운니네 아저씨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별로 말씀이 없었
지. 밖은 이미 잘 자란 어둠이 마당에 그득했지. 그 노인은 어떻게 됐나?
아버지. 아버지는 한참을 계시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어. 그러자 뭔가
종아리를 타고 올라오더니 허벅지를 꽉 물고 울기 시작했어. 갑자기 심한
요의를 느낀 거야. 뒷간으로 가기에도 급한 요의였어. 나는 마당으로 뛰
어 내려갔지. 시멘트로 발라 만든 수돗가에서 급하게 바지춤을 내렸지.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었어. 오줌은 참지 못하고 홈이 파진 구멍을 따
라 흘러내려 가더군, 오줌은 수돗가 수챗구멍을 지나 흙길을 따라 제 길
을 흘러갔어. 순간 사타구니가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슬그머
니 가랑이 사이로 손을 가져갔어. 털이었어. 몇 가닥의 털이 촘촘하게 사
타구니 사이에 나 있었어. 나는 그 깜깜한 음부를 볼 수가 없었어. 손가락
을 조심스럽게 펴서 눈먼 짐승처럼 잠잠히 아래를 다시금 더듬고 보았지.
까끌까끌한 수염처럼 털이 칭칭 몸을 감싸는 중이었어.
어둠 속에서 하얀 눈이 지상에서 하늘로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지.
단편소설 45

 

수상소감

 

<두근거리는 입술을 찾는 내 붉은 혀>
한때 나뭇가지 위에 앉은 새를 본 적이 있습니다. 새는 나무에 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새가 앉아서 울 때 나뭇가지는 꿈적도 않았습니다. 새가 떠나가자
나뭇가지는 비로소 혼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흔들림, 뭔가 내 곁에 있다 떠나
가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흔들림이 있습니다.
저의 내면은 항상 알지 못하는 무언가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내 속에 있었
는데 날아가버리고 사라진 듯한 그 결여. 내 붉은 혀는 떠나버린 누군가의 두근
거리는 입술을 찾고 있었습니다. 갈구하고 갈급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 소설쓰기는 뒤뚱거리고 때로 적막했습니다. 저는 자주 아팠고 자기연민
을 쉽게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쓸쓸한 사랑이고 절박한 오류입니다. 소
설쓰기라는 욕망의 흔들림 속에서, 이 기우뚱한 생 속에서, 비평과 소설이라는
이중의 몸 속에서 저는 휘청거렸습니다. 이 불안정함 속에 저는 서 있습니다. 수
염 난 여자처럼. 기괴하면서 단정하게, 묵묵하면서도 뜨겁게. 그러나 어쩌면 이
불안정한 욕망의 기우뚱함이 제 욕망의 정체이며 제 삶의 알리바이인지 모릅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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