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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특징적인 국수는 냉면이 아닌가 싶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국수이기 때문인데 우리처럼 일부러 국수를 차갑게 만들어 먹는 민족도 드문 것 같다. 물론 일본에도 차갑게 먹는 메밀국수인 냉소바가 있지만 우리 냉면처럼 그렇게 차갑지는 않다. 여름철 중국 음식점 메뉴로 등장하는 중국식 냉면은 한국인의 입맛에 맞도록 현지화한 것이다. 원래 중국의 차가운 국수인 량몐은 사실 차가운 것이 아니라 뜨겁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국수를 차갑게 만들어 먹었을까? 냉면의 기원을 찾기란 쉽지 않다. 먼저 문자 그대로 차가운 국수라는 뜻의 냉면(冷麪)이 문헌에 보이는 시기는 조선시대 중반이다. 17세기 초반, 인조 때 활동한 문인 장유의 《계곡집》에 처음으로 냉면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냉면을 먹으며 쓴 시인데, 자줏빛 육수의 냉면을 먹으면서 독특한 맛[異味]이라고 표현해놓았다. 글자 뜻 그대로 보면 평소에 먹지 못했던 색다른 맛이라는 의미겠는데, 시 한 편을 놓고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독특하다는 표현, 그리고 냉면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는 사실에서 조선 중반까지만 해도 냉면이 그다지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전에도 차가운 국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냉도(冷淘)라는 음식이 있었는데 고려 말기의 목은 이색은 냉도를 먹으니 시원하다는 내용의 시를 읊은 적이 있고,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도 고려의 환관들이 유두절이면 더위를 피해서 머리를 감으며 냉도를 먹었는데 그 맛이 수단(水團)과 비슷하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냉도는 중국에서 먹는 차가운 밀가루 국수 내지는 찬 수제비 종류였으니 여름철 시원하게 먹을 수는 있지만 메밀로 만든 우리 냉면과는 차이가 많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냉면은 언제 만들어진 음식일까? 조선시대 문헌에서 냉면이라는 음식이 본격적으로 보이는 것은 18세기 이후다. 다산 정약용은 면발이 긴 냉면에다 김치인 숭저(菘菹)를 곁들여 먹는다고 했다. 정약용과 같은 시대를 산 실학자 유득공 역시 평양을 여행하면서 가을이면 평양의 냉면 값이 오른다고 했다. 이때면 벌써 겨울철에 접어들 무렵이라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서 냉면 값이 오를 정도로 평양 사람들은 냉면을 많이 먹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냉면은 냉면이 널리 보급되며 바로 유명세를 탄 모양이다. 《동국세시기》에도 겨울철 계절 음식으로는 메밀국수에 무와 배추김치를 넣고 돼지고기를 얹은 냉면을 먹는다고 소개했는데 그중에서도 관서(關西) 지방의 국수가 제일 맛있다고 했으니 바로 평양냉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다산 정약용과 유득공보다 두 세대 뒤의 인물인 실학자 이규경은 평양의 명물로 감홍로와 냉면, 그리고 비빔밥을 꼽았는데 감홍로는 계피와 생강을 꿀에 버무려 소주를 붓고 밀봉해 담그는 술이다. 40도가 넘는 독주로 감홍로 중에서는 평양에서 담근 것이 유명했다. 평양에서는 고기 안주에 감홍로를 마신 후 취하면 냉면을 먹으며 속을 풀었기에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이 생겼다.
시원한 동치미 국물을 베이스로 해 만든 육수에 메밀국수를 말아 먹는 평양냉면은 감칠맛과 구수한 맛이 일품이다. 평양냉면의 특징은 꿩고기나 양지머리를 삶아 기름기를 걷어낸 후 잘 익은 동치미 국물을 같은 양으로 섞어 시원하고 감칠맛이 도는 냉면 국물에 있다.
요즘 우리가 먹는 평양냉면은 현대인의 식성에 맞도록, 또 서울 사람들의 입맛에 맞도록 바뀌어 전통 평양냉면의 맛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 본래의 맛을 기억하는 연세 드신 평양 출신 인사들의 한결같은 이야기다. 다행히 서울에도 전통 평양냉면 집이 몇 집 남아 있다.
현대인의 입맛에는 밍밍하기 짝이 없는 전통 평양냉면이지만 평양 출신들에게는 중독성이 꽤 강했던 모양이다. 평양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서도 고향에서 먹은 냉면 맛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한다고 한다. 예전 한국인이 외국에 나가면 김치를 가장 그리워했던 것처럼 평양 사람들도 타향에서 살 때면 문뜩문뜩 떠오른 것이 겨울에 먹는 평양냉면 맛이라고 하니까, 냉면의 맛이 그리운 것인지 고향을 그리는 향수가 짙은 것인지 그 선후를 알 수 없다 하겠다.
#음식#역사일반
#음식으로읽는한국생활사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