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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부석사, 소수서원
2024년 06월 01일(토요일)
영주 부석사
부석사(浮石寺)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676) 해동(海東)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 대사(義相大師)가 왕명으로 창건한 화엄종의 수사찰(首寺刹)입니다. 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깨달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이후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습니다.
부석사로 불리우게 됨은 무량수전(無量壽殿) 서쪽에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서로 붙어있지 않고 떠 있어서 ' 뜬 돌'이라 한데서 연유합니다.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혹은 흥교사(興敎寺)라 불리었습니다. 1916년 해체 보수 시에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부석사는무량수전 등이 크게 중창되었으나 공민왕(恭愍王) 7년(1358) 외적의 병화를 당하였고, 그 후로 우왕(禑王) 2년(1376)에 무량수전이 재건되었고, 우왕 3년(1377)에는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습니다.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대석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로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고려목판(보물 제735호) 원융국사비 등이 있습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조사당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 부석사 성보박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소조여래좌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상(塑造佛像)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것입니다.
부석사불교문화유산안내소
은행나무길
부석사 일주문
부석사 일주문은 1980년에 세운 맞배지붕에 다포식의 일주문입니다.
일주문에는 '태백산부석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일주문 현판에는 이렇게 산 이름과 사찰이름이 함께 들어갑니다. 일주문으로 사찰의 진입로 초입에 세우는 문입니다. 기둥이 한줄고 되어 있어 일주문(一柱門)이라고 부릅니다. 일주문에는 문 없이 기둥만 두 개가 서있습니다. 사찰의 이 문은 '물리적인 통제의 문이 아니라 마음의 문이라는 의미'여서 문이 없다고 합니다. 기둥 두 개로 어떻게 서 있나 싶지만, 그래서 더 특별해 보이는 문입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일주문은 대부분 지붕이나 기둥을 받치는 보조 기둥이 있지만, 오래된 일주문들은 온전히 기둥 두 개로만 지어진 것이 많습니다.
부석사는 소백산 줄기 봉황산 중턱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주문은 '태백산 부석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영주의 동쪽은 태백산, 서쪽은 소백산으로 두 산 사이에 영주가 있습니다.
고치재 동쪽 태백산맥이 국립공원 소백산에 편입이 되었습니다.
태백산 줄기에 부석사가 있다고 하여 태백산 부석사 이라는 편액을 볼 수 있습니다.
정면에 걸린 '태백산부석사(太白山浮石寺) ' 편액은 효남 박병규 (曉楠 朴秉圭 1925~1994)의 글씨입니다.
부석사일주문 뒤쪽
뒤쪽에 걸린 '해동화엄종찰 (海東華嚴宗刹)' 편액은 효남 박병규 (曉楠 朴秉圭 1925~1994)의 글씨입니다.
효남 박병규 선생은 달성군 하빈면 묘골 사육신 박팽년 선생의 후손으로 선대가 6대 진사를 지낸 명문가의 후손입니다.
부석사 당간지주(보물 제255호)
높이 4.28m, 통일신라시대, 양 지주의 기단부는 현존하지 않으며, 그 밑바닥에 장대석과 잡석으로 구축한 석단이 있을 뿐인데, 지주 아래쪾의 자연면석이 노출되어 점과 현재의 구축된 기대 등으로 보아 장방형의 기단이 시설되었던 뜻합니다.
부석사 당간지주(幢竿支柱)
절에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깃대를 당간이라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이 기둥의 높이는 428cm이며, 마주보는 안쪽 측면과 바깥쪽 측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앞면과 뒷면에는 3중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습니다. 당간지주 윗부분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먕의 홈이 파여 있습니다. 기둥 사이에 놓인 정사각형의 받침돌 위에는 연꽃을 조각하고 중앙에는 직경 30cm의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대체로 가늘고 길면서도 안정감을 주며,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입니다.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기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9세기 전후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기둥사이에 있는 간대(杆臺) , 간대 중앙에 있는 구멍(원공)에 당간을 끼워 넣었습니다. 구멍을 따라 둥그런 몰딩이 새겨져 있고 몰딩 주변에 연꽃무늬가 새겨져있지만 사진에서는 확인하기가 힘듭니다.
천왕문
사찰에 들어갈 때 일주문, 금강문 다음에 거쳐야 하는 문, 천왕문이라고도 합니다. 이 곳에는 수미(須彌)산의 4주(洲)를 수호하는 신(神)인 사천왕상을 안치하여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쫓아 불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각제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천왕문과 사천왕상은 1980년대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천왕문(天王門) 편액은 효남 박병규 (曉楠 朴秉圭 1925~1994)의 글씨입니다.
증장천왕(增長天王)
증장천왕은 수미산 남쪽 유리타에 살고 있는 천왕으로, 자신의 위엄과 덕으로써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고 있습니다.
오른 손에 용을 쥐고, 왼손에는 여의주를 쥐고 있으며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광목천왕(廣目天王)
광목천왕은 서쪽을 관장하는 천왕으로 눈을 부릅뜸으로서 그 위엄으로, 나쁜 무리들을 몰아 낸다고 해서 광목천왕이라고 합니다.
오른 손에는 삼차극(三叉戟)을 들고, 왼손에는 보탑(寶塔)을 들고 죄인에게 엄한 벌을 내려 매우 아픈 고통을 느기게 하는 하면서 죄인으로 하여금 반성하고 도심(道心)을 일으키게 합니다.
다문천왕(多聞天王)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며, 부처님곁을 부처님의 설법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듣는다하여 다문천왕이라고 합니다.
손에는 늘 비파를 들고 있습니다.
지국천왕(持國天王)
지국천왕은 사천왕 가운데 동쪽을 수호하는 천왕으로, 선한 사람에게 상을 내리고,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며, 늘 인간을 보살피고 국토를 지켜줍니다.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은 허리를 짚고 있거나 손바닥에 보석을 올려놓고 있는 형상입니다
회전문(廻轉門)
천왕문에서 직진하면 회전문이 보입니다.
대석단 위에 가로로 길게 세운 건물로 2013년 복원하였으며, 중생들에게 윤회전생(輪廻轉生)을 깨우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 문이라고 합니다.
천왕문에서 안양루까지 108계단이 있다고 합니다.
부석사 석축(회전문)을 오르고 나면 삼층 석탑이 나옵니다.
삼층석탑은 동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무량수전 옆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249호)과는 비슷하지만 조금 늦게 만들어진 석탑이라고 합니다.
삼층석탑(서탑)
높이는 동탑이 360cm, 서탑은 377cm로 이중기단(二重基壇)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것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원래는 가람의 동쪽 약사골 절터에 있던 쌍탑을 1966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왔다고 하며
특히 서탑에는 익산 왕궁리5층석탑에서 가져온 석존사리 5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전해집니다.
부석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부석사 삼층석탑
부석사 삼층석탑은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개의 탑입니다. 두 개의 탑은 처음부터 함께 만든 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매우 비슷합니다. 원래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절터에 있었는데, 1966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왔습니다.
부석사 삼층석탑은 무량수전 옆에 있는 보물(보물 제249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과도 크기와 모양이 비슷합니다. 다만 지붕돌받침이 4단이고 바닥돌 크기가 작다는 점에서 무량수전 옆의 삼층석탑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졌다고 판단됩니다.
바닥돌은 각 면의 모서리와 중앙에, 몸돌은 모서리와 기둥 모양 장식을 하였습니다. 지붕돌의 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살짝 치솟아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머리 장식부는 없어져서 새로 만들어 얹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비율이 좋으면서 짜임새가 있어 통일 신라 후기의 석탑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자료입니다.
범종각
부석사에는 오래된 누각이 두 곳 있습니다. 바로 범종각과 안양루입니다.
봉황산 부석사 현판이 있는 세 번째 누각을 지나게 되면 안양문이 나옵니다.
범종각은 일반적으로 종각이 사찰 좌우에 배치되는 것과 달리 사찰의 진입 중심축에 위치한 점, 아래층 가운데 칸을 지나 계단을 거쳐 안양루로 통하는 형식인 점, 지붕의 포와 포 사이에 놓여 무게를 받치는 부재인 화반을 덩굴나무 모양의 파련초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점, 지붕 내부에 범종각 재건 당시 것으로 판단되는 단청이 남아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가치가 있는 사찰 종각 건축입니다.
봉황산부석사(鳳凰山浮石寺) 편액 춘헌 서(春軒 書)
부석사 범종각(浮石寺 梵鐘閣) (보물 제2184호 2022년 10월 31일 지정)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의 형식을 가진,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종각 건축으로 입구에서 보면 옆으로 앉아 있습니다.
범종각은 부석의 종각으로 18세기 중엽을 대표하는 건축물입니다. "부석사 종각 중수기 (浮石寺 鐘閣 重修記)에 따르면 범종각은 영조 22년(1746)에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이듬해인 영조 23년(1747)에 고쳐 세웠습니다. "청량산유록(淸凉山遊錄)'에 범종각 내부에 쇠종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19세기 이후 범종의 소재는 알 수 없습니다.건물으 아래층은 모두 기둥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 칸에 계단을 두어 안양루로 향하는, 누하진입(權下進入)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위층 사방은 벽체가 없어 트여 있고,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며, 법고, 목어, 운판이 있습니다. 범종은 1979년에 신축한 범종각에 새로 조성하였습니다.
종각은 사찰의 좌우에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부석사 범종각은 사찰의 진입 중심축 선에 있으면서 아래층은 출입을 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목어를 울리면 물속에 사는 모든 중생들과 수중 고혼들이 제도된다고 합니다. 목어의 형태도 처음에는 단순한 물고기 형태에서 차츰 머리가 용을 닮아 용두어신(龍頭魚身:용머리에 고기모양의 몸)의 형상으로 변하여 지금은 입에 여의주를 문 형태를 취한 것도 있습니다.
부석사 범종각 좌측배면 모습
범종각도 부석사 내에 자리하고 있는 종각으로,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는 점이 특징이며, 범종각의 가장 큰 특징은 지붕의 형태인데 정면의 지붕은 팔작지붕, 뒷면의 지붕은 맞배지붕의 형태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누각 위에는 몸은 물고기,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한 목어가 여의주를 물고 있습니다. 잉어가 용으로 변한다고 하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을 표현한 것으로, 해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범종각
범종각 좌우에 있는 건물들로 1980년의 보수 정화공사 이후에 신축한 건물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의 익공계 맞배집으로 기둥만 세워 개방하였는데 기둥 사이는 홍살로 막았습니다.
원래의 범종각에는 법고와 목어, 운판만 있고, 이곳 서쪽에 새로 건립된 이곳에는 불교 의식구인 범종이 있습니다. 범종의 장엄한 소리는 중생을 착한 길로 인도하며, 해탈의 길로 승화시켜주는 의식구입니다. 서편에 건립된 범종각에서 여름이면 6시쯤에 종이 울리며 이 법구 사물들은 저마다 생명을 되찾고 아름다운 화음으로 예불합니다.
범종각(梵鐘閣) 편액 경오 남송(庚午 南松 1990)
법종각 범종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입니다. 항아리 모양의 종신부에는 화려한 보상당초문과 공양상이 주조되어 있으며, 유곽 안에는 유두 대신 기하학적인 문양을 장식하였습니다. 꼭대기에는 여의주를 들고 있는 용뉴와 음통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표면에는 '봉황산 부석사(鳳凰山 浮石寺)'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실제로 부석사가 자리한 산은 봉황산입니다.
범종의 공양상비천상(供養飛天像), 비천상(飛天像)은 양각된 연화좌 위에 무릎을 끓고 공양하는 공양상입니다. 그 주위로 보상화(寶相華)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응향각
향기가 모이는 곳이란 뜻이며, 스님들의 요사채입니다.
응향각(凝香閣) 편액
장경각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榮州 浮石寺 高麗木板)이 보관되어 있는 장경각
바람이 통하고 습기가 제거되도록 살창을 내었습니다.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榮州 浮石寺 高麗木板)은 1982년 5월 22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크기는 24.3cm×45cm이다. 3종 634장(진본 239장, 주본 273장, 정원본 122장)으로 된 고려각판은 13∼14세기에 제작되었으며, 한역본(漢譯本)의 《대방광불화엄경》을 새긴 고려시대의 목판입니다.
장경각(藏經閣) 편액
획의 후박, 강약이 없어 다소 단조로운 듯하나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습니다. 경자의 실사 부분과 각자의 단순화된 문 문자, 각자의 필체가 힘차게 꺾이면서 휘돌아나간 획이 인상적입니다. 좁은 공간에서도 기세가 꺾이거나 옹색하지 않는 점은 서법의 중요한 비결이라고 합니다.
괘불지주,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한 눈에 바라보이는 석축 단 아래서 안양루를 바라봅니다.
괘불지주는 주불전 앞에 큰 대형 불화를 걸게 되는데 이 대형 불화를 쾌불이라고 하고, 이를 받치기 위한 석물이 괘불지주입니다.
안양루(安養樓) (보물 제2183호 2022년 10월 31일 지정)
안양루는 부석사 무량수전 앞마당 끝에 위치한 누각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다포계 팔작지붕의 형식을 가진 16세기 사찰문루 건축의 대표적인 건물입니다.
『계암일록(溪巖日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浮石寺 安養樓 重刱記)」등의 문헌자료에 의하면, ‘강운각(羌雲閣)’이라는 단층 건물이 1555년 화재로 소실되어 1576년에 현재의 ‘안양루’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안양’은 극락을 의미합니다. 안양문을 지나면 아미타불이 계신 극락세계, ‘무량수전(無量壽殿)’이 나오는데,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소백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 정말 천상의 세계 같다고 합니다.
난간 아랫부분의 편액은 안양문, 위부분의 편액은 부석사, 위층 마당 쪽은 안량루라고 쓰여 있는데, 문과 누락의 2가지의 기능을 부여한 것입니다.
원래 안양문(安養門) 현판이 걸려 있던 누각 처마에 부석사 현판을 걸고, 안양문 현판은 누각 아래에 걸려 있습니다.
부석사(浮石寺) 편액은 1956년 부석사를 방문하여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晩/ 1875∼1965) 전 대통령 글씨입니다.
안양문(安養門) 편액
안양루(安養樓) 편액은 소남 김종호 (小南 金宗鎬 1901~1985) 의 글씨입니다.
갑신 추 김종호 서(甲申 秋 金宗鎬 書) 1944년 가을 김종호의 서명과 관지가 있습니다.
우측에는 소백산인(小白山人)이라는 두인이 있습니다.
소남 김종호 선생은 영주출신으로 일제 강점기때 총독이 조선의 명필 5명을 초청한 적이 있는데, 그 5명 중 한 사람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소남은 그 이후 5대 국필(國筆)로 인정받았으며, 50대 이후에는 석당(石堂)이라는 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관지(款識) : 작가가 글씨나 그림에 자신의 이름이나 아호(雅號)를 쓰고 도장을 음각(양각)한 것입니다.
수인(首印)=두인:頭印)은 본문을 쓴 오른편 머리 쪽에 찍는 인장으로 그 모양은 장방형 또는 타원형 등이 있습니다.
석등과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말합니다.
무량수전을 다른 말로 '극락전'이라고도 합니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서방 극락정토로 왕생하게 하는 부처입니다.
'무량광여래(무한한 진리의 빛)' 또는 '무량수여래(수명장수)'라고도 합니다.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제17호 1962. 12. 20)로 지정
석등은 불을 켜서 어두운 곳을 밝히는 돌로 만든 등으로 광명등이라고도 합니다. 보통 대웅전이나 탑 앞에 석등을 세웁니다. 석둥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받침돌이 있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이 얹혀 있는 구조입니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맨 아래에 네모난 바닥돌이 있고 그 위에 3단의 받침돌, 화사석, 지붕돌이 차례로 놓여 있는 모습입니다. 바닥돌의 옆면에는 꽃 모양으 장식을 새겼습니다. 바닥돌 위에 있는 아래받침돌에는 큼직한 8개의 연꽃잎을 표현하였습니다. 아래받침돌 위에 놓인 팔각기둥 받침돌은 굵기와 높이에서 매우 아름다운 비례를 보입니다. 팔각기둥 위에 있는 윗받침돌에는 부드러운 연꽃잎 8개를 새겼습니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나오도록 4개으 창을 만들었고 창이 없는 나머지 4개 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겼습니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모서리 끝이 살짝 들려 있는 모습입니다. 지붕돌 위에는 머리 장식의 일부만이 남아있습니다. 석등 앞에는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향로를 놓았던 배례석이 있습니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석등 중 하나로서 각 부분의 정교한 조각 솜씨와 전체적인 비례감이 매우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화려한듯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어 통일신라의 석조 예술 수준을 가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석등입니다.
석등 중간사이로 뒤쪽 무량수전 글자가 나오게 찎으면 부처님이 보인다고 하네요...^^
석등은 높이 2.97m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라고 합니다.
상대석(上臺石)은 통식을 따라 평박(平薄)하나 여기에 조각된 8엽의 앙련(仰蓮)은 상당한 입체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아 돋보입니다. 지붕돌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하고 아름답습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 있습니다.
화사석 보살입상
화사석(火舍石: 석등의 점등하는 부분)은 팔각으로 4 곳에 장방형 화창(火窓)을 내었고 화창 주위에는 작은 구멍을 돌려 뚫었으며 나머지 4면에는 앙련 위에 보살입상 1구씩이 조각되었는데 조각수법이 매우 정교합니다.
무량수전이란 무량수를 일컫는 전(殿)으로 일一, 십十, 백百, 천千, 만萬, 억億, 조兆,
경, 해, 시, 양, 구, 간, 절, 재, 극, 항하사, 이승지, 나유다, 불가사이, 무량수로.
10의 12승이 조(兆)이고, 갠지스 강변의 모래알 수는 10의 52승이 항하사(恒河沙)이고
10의 68승이 무량수(無量數)라고 하며 그야말로 무한대에 가까운 숫자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주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적각으로 극락전 또는 미타전이라고도 부릅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부석사의 중심 법당으로 무량수는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무량수전은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에 지었다고 추정되지만, 그것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고려 헌종 7년(1016)에 고쳐지었으며 공민왕 7년(1355)에 왜적의 침입으로 불에 타서 우왕 2년 (1376)에 다시 짓고 조선 광해군 3년 (1611)에 수리하였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해체하여 수리하였습니다.
무량수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 크기의 목조건물입니다. 지붕은 옆면이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웅장한 느낌을 줍니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중간이 두꼅고 아래와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모양이어서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줍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공포를 기둥 위에만 짜서 올리 주심포 양식으로 전체적으로 간결한 인상을 줍니다. 무량수전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량수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고려시대 사찰 건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전각입니다.
무량수전(無量壽殿) 편액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이 썼다고 전해지는 무령수전 편액입니다. 홍건적의 침략을 피해 영주, 안동으로 몽진하다 개경으로 돌아간 1361년(공민왕 10년)에 쓴 것으로 전해집니다. ‘무량수전’의 편액은 정사각형 형태입니다. 두 장의 널빤지를 연결해서 정사각형 바탕 판재를 만들었습니다. 바탕은 윤기가 흐를 정도로 옻칠을 입혀 검게 마감했습니다. 바탕을 얕은 부조로 양각한 후, 글에 금박을 입혔습니다. 금박은 세월에 벗겨져 흰색 글씨로 보이지만, 글씨에 금박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정사각형 바탕을 4 등분하여 무량, 수전 두 자씩 세로로 써 내렸습니다.
편액 테두리는 비스듬한 각을 가진 네 개의 빗각 판재로 결구했습니다. 빗각 테두리의 표면엔 삼청으로 가칠단청 하였고, 테두리 단면은 봉긋봉긋한 구름 형상처럼 우아하고 대칭적이게 잘라냈습니다. 편액 구성이 단순하고 간결함에도 불구하고 아담하고 세련된 구성미가 살아있습니다. 글은 골기가 있는 굵은 해서체의 획으로 편액에 가득 차게 썼습니다. 부석사 ‘무량수전’ 편액은 650여 년 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그것도 그림과 글에 뛰어났던 14세기 고려 공민왕의 글씨입니다. 그것은 한국산사가 간직한 서예의 미(美)이자, 또 하나의 고려시대 기록문화 목판이며,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목공예 걸작입니다.
신미년(1691) 여름엔 이 절 화승 영필이 마음을 내서 액자 테두리를 다시 만들었다(金堂題字, 恭愍王之親筆也, 〈중략〉 到于辛未孟夏間, 寺畵僧瑛珌慨然傾心四雪角改造也)” 묵서명은 글씨는 고려 공민왕의 것이고, 편액의 테두리는 17세기 후반에 보수한 것임을 알게 합니다.
무량수전 소조여래좌상(아미타부처님)은 국보 제45호입니다.
부석사 아미타부처님은 다른 불상과 달리 서에서 동쪽으로 바라보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동쪽에 극락이 있다고 하여 동쪽을 바라보도록 불상을 배치하였다고 합니다.
무량수전의 배흘림 기둥에 손때가 타서 반질반질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좋은 기운을 받는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만지게 되면서 손때가 탔다고 합니다.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부석사 무량수전에 봉안되어 있는 고려시대 소조불좌상. 국보(1962.12.20 지정). 불상높이 278cm, 광배높이 380cm. 〈무량수전불상개금기문(無量壽殿佛像改金記文)〉에 따르면 1723년(경종 3)에 정상주를 비롯한 신도 94명에 의해 개금되었으며, 1975년에 또 1차례 개금되었다고 합니다.
불상이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는 점에서 아미타불로 볼 수 있으나 손 모양이 석가불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이 상의 명칭을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절의 동쪽에 있는 원융국사탑비의 비문에 협시보살이 없는 아미타불을 조성하여 모셨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발이 표현된 머리 위에는 커다란 육계가 얹혀 있고, 얼굴은 양감이 있는 편이나 길게 올라간 눈꼬리라든가 작고 두툼한 입의 표현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 나타나 있습니다.
넓고 당당한 어깨에 걸쳐진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옷주름은 가슴 앞에서 비교적 촘촘하게 흘러내려 몸의 곡선을 드러내었고 결가부좌한 양 다리 사이에서 부채꼴 형태로 모아져 있습니다. 광배는 목조로 따로 만들어졌는데 화려한 당초무늬와 화염무늬가 장식되어 있고, 두광과 신광에는 7구의 화불을 붙였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소조불상은 의상대사가 676년 이 절을 창건했을 때 모셨던 본존의 불상 형식을 그대로 따랐을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엄한 얼굴표정, 당당하면서 안정감있는 모습, 옷주름선의 표현 등은 8세기 중엽의 석굴암 본존불을 충실히 따르고 있어 고려 초기에 많이 만들어진 촉지인 계통의 한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법당은 앞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불단이 있고 불단 위에 본존불을 모시지만, 무량수전의 불상은 특이하게도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또 하나 특이점은 협시불(주불의 좌우에 모신 불상)이 없이 홀로 앉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치한 데는 까닭이 있다고 하는데, 정면에 배치하면 입구에서 거리가 너무 가까워 공간감각을 확보할 수 없기에 왼쪽 끝에 불상을 배치하여 참배객들과 먼 거리의 공간을 만들어 낸 것이며, 또한 불상 앞에 늘어선 기둥과 겹쳐보이게 되어 일반 법당에서 볼 수 없는 신비함과 장엄함까지 더해주는 고려인의 지혜와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처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진리의 빛을 표현한 광배는 불상뒤편에 따로 나무로 만들었는데, 가장자리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잘 표현하였고,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습니다. 손 모양은 무릎 위에 올린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진인인데 흔히 석가모니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수인입니다.
안양루와 석등
무량수전 옆면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입니다. 1956년에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고, 석탑의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습니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끕니다.
삼층석탑 앞에 서 있는 버섯 모양의 석물은 석등입니다. 화사석, 상대석, 상륜은 소실되어 없고 남아있는 하대석과 중대석 및 지붕돌만 세워 놓은 것입니다.
부석사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입니다. 기단부의 바닥돌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습니다. 탑신부의 몸돌은 각모서리에만 기둥 모양을 새겼고, 몸돌위에 놓인 기붕돌은 밑면 받침을 5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상륜부의 머리 장식은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1956년네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고, 석탑의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습니다. 이때 사리를 넣어 봉안하는 공간이 사리공을 확인하였으나, 사리기는 없었습니다. 다만 기단분에서 소형 철제탑, 불상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부석사 조사당(국보 제19호)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습니다. 또한 조상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앞면 3칸, 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맞배지중으로 꾸몄습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합니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조사당은 굳게 닫혀있습니다.
조사당 벽화(국보 제46호)는 고려 때 그려진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그리고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었는데, 1916년 건물을 수리하면서 무량수전을 옮겼다가 지금은 부석사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입니다.
조사당(祖師堂) 편액
조사당 편액은 독특하게 세로글씨입니다.
조사당 입구 우측 철창 안에 있는 선비화(仙扉花)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가 나무로 자랐다는 전설이 있는 골담초 나무입니다.
여성이 골담초 잎을 따서 삶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다고 합니다.
나뭇잎을 마구 따가는 일이 생기게 되면서 현재는 철책으로 나무를 보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상기 나무는 1300년을 살아온 골담초로 불가에서 선비화로 불리고 있습니다.
취현암
조사당 동쪽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1997년도에 복원되어 2002년까지 선원으로 활용되고 있다가 지금은 부석사 산내암자로 쓰이고 있습니다.
취현암(醉玄菴) 편액
자인당, 응진전은 갈 수 없습니다.
부석사 삼층석탑 앞에서 내려다본 부석사 경내 전경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과 공포
흘림기둥은 궁궐과 사원같은 권위를 세우는 건물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고래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양식에서도 불 수 있는 양식인데 '엔타시스'라고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배흘림기둥은 지면에서 3분의 1이 되는 지점에서 가장 굵은 것이 보통이라고 합니다.
무량수전의 평면의 안허리곡, 기둥의 안쏠림과 배흘림기둥은 착시에 의한 왜곡 현상을 막으면서 효율적인 구조를 만들기 위해 수용된 수법으로 고려시대의 법식이라고 합니다.
무량수전 모서리기둥(우주)의 공포
부석사의 부석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이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하였다고 합니다.
선묘는 용으로 변하여 의상대사를 보호하며 이곳까지 따라왔습니다.
선묘는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날려버린 뒤 바위 뒤에 내려앉았다고 합니다.
부석사의 명칭은 선묘의 전설에 의해 명칭이 생겼다고 합니다.
선묘를 모신 전각을 선묘각이라고 합니다.
선원녹봉안사 낭원군 계유동(璿源錄奉安使 朗原君 癸酉 冬)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선조의 증손자 낭원군이 계유년(1693) 겨울에 다녀간 모양입니다.
1681년 완간된 "선원록"을 태백산사고에 봉안하기 위해서 숙종의 교지를 받고 봉산사로 임명되어 각화사로 향하던 낭선군, 낭원군 형제가 부석사에 들러 무량수전 현판을 보고 공민왕 친필임을 고증하였습니다.
낭원군 이간(李偘)은 인조18년(1640)출생하여숙종25년(1699))사망했습니다.
부석(浮石)
무량수전 왼쪽 뒤편에는 절 이름의 근원이 된 '부석(浮石)' 바위가 있는데 자세히 보면 '돌 석(石)' 자에 '점'이 찍혀있는데 이는 누가 왜 새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부석 바로 아래에 조성된 석조석가모니좌상
부석 아래에 항모촉진인의 수인을 한 석가모니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삼성각
칠성, 독성, 산신 세 분을 한 곳에 모신 전각으로 무량수전 서쪽 석축 아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삼성각은 우리나라 재래의 수, 복, 재의 삼신 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현재 삼성각은 원래 축화전이라 불렀는데 영조 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건물이라 합니다. 1979년의 부수 때까지는 원각전이라 하였고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모셨습니다.
현재 내부에는 불단 중앙칸에 미륵 반가사유상을 봉안했고 후벽에는 칠성 탱화를 모셨습니다. 외쪽 칸에는 산신도를, 오른쪽 칸에는 독성을 모시고, 독성 탱화를 걸었습니다.
삼성각(三聖閣) 편액
삼성각 안에는 미륵반가사유상을 봉안했고 후불탱화는 칠성탱입니다. 왼쪽에는 독성탱을, 오른쪽에는 산신탱을 모시고 있습니다.
미륵반가사유상과 칠성탱
요사채
관음전
관음전(觀音殿) 편액
관음전 내부에는 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역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
부석사 석축
천왕문을 지나면 두 번째 돌계단 부석사 석축을 만나게 됩니다.
부석사 석축은 창건 당시 산비탈을 깎고, 자연 그대로 석축을 쌓은 것이 특징입니다.
부석사의 석축과 돌계단을 지나게 되면 극락을 이르게 된다고 합니다.
사실 오르는 길이 완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걸어보면 상당히 가파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극락으로 가는 길이 그만큼 험난 한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차장 입구에 조성된 연못
소수서원
소수서원
백두대간의 정기를 머금은 소백산자락 영귀봉(靈龜峰)아래 위치한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평소 고려말 유현(儒賢)인 안향(安珦)을 흠모하던 주세붕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542년(중종 37), 안향선생의 고향에 사묘를 세워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다음 해 1543년에는 학사를 건립하여 사원(祠院)의 체제를 갖춘 것이 백운동서원의 시초입니다.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은 가지가 길게 축축 늘어지고 키가 커서 낙락장송(落落長松)으로 불리는 소나무 군락으로,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운치 있게 뻗은 소나무 가지들은 서원에 가까운 것일수록 서원 쪽으로 숙이고 있어서 마치 서원에 공경을 표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이 소나무 숲은 소수서원의 경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주계와 닿은 평지에 있는 소수서원이 풍수적으로 뒤쪽이 허하다는 단점이 있어 소나무 숲을 만들어 보완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소수서원의 소나무 숲 소나무들은 겉과 속이 모두 붉은 적송으로, 수령이 수백 년에 달하는 것이 많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 19년(15886)에 풍기의 유성 황응규, 광해군 5년(1614)에 창석 이준이 소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또한 효종 5년(1654)에 영귀봉 아래에서 남쪽 냇가에 이르기까지 소나무 1천여 그루를 심었는데 산 것이 겨우 5백그루였다고 합니다. 그 후 소를 방목하거나 화재가 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소나무를 더 심어 소나무 숲을 무성하게 하였습니다.
소나무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항상 푸름을 간직하는 것이 선비의 기개와 닮았기 때문에 학자수(學者樹)로도 불립니다.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
당간지주는 절의 위치를 알리는 상징적인 조형물입니다. 절에서는 불교의식이나 행사가 있을때 당이라는 깃발을 높이 달았습니다. 당간지주는 당을 매달던 깃대, 즉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돌기둥입니다. 유고의 성지인 소수서원에서 불교유적이 만나는 것이 이채로운데,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숙수사(宿水寺) 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출토된 유물이나 유적을 보면 인근 부석사 못지않게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간지주 역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절터에 서원이 세워졌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제59호)
당간지주는 2개의 지주가 0.59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 서 있으면 높이는 3.65m, 한 변의 길이 0.53m, 0.36m입니다.
죽계(竹溪) 건너 내려다보이는 취한대(翠寒臺)
소수서원 가는 길의 보호수
은행나무 수령 500년
서원의 대문, 지도문(志道門)
표적을 향해 활을 쏘듯, 도(道)를 향해 뜻을 세우고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지도문(志道門) 편액은 삼여재 김태균(三餘齋 金台均 1934~2022)의 글씨입니다.
성생단(省牲壇)
안향의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할 가축의 흠결을 살피고 잡는 제단터.
경렴정(景濂亭)
원생들이 詩를 짓고, 학문을 토로하던 정자.
경렴정(景濂亭) 편액 중 해서 편액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1571)의 글씨입니다.
정자 내부에는 이황과 주세붕 등이 자연을 노래한 시를 적은 시판이 걸려 있습니다.
경렴정(景濂亭) 초서 현판은 이황의 제자이면서 초서의 대가인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 1521~1575)의 글씨입니다.
조선 중기의 명필로 알려진 황기로는 퇴계 이황의 제자입니다. 어느 날 퇴계는 제자인 황기로를 만나 자리에서 경렴정 편액을 하나 써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스승이 보는 앞에서 글씨를 쓰기가 부담스러워 머뭇거리자 스승이 슬며시 자리를 피하자 일필휘지로 써 내려 갔다고 합니다.
백운동서원의 강학당(講學堂) (보물 제1403호)
백운동(白雲洞) 편액
만력경술춘각(萬曆庚戌春刻)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1543년(중종 38) 백운동 서원 건립 당시 현판을 1610년(광해 2) 봄에 새로 새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학당 내부
강학당 안에는 소수서원( 紹修書院)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소수서원 편액은 소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명종(明宗 재위기간 1545~1567)이 직접 쓴 글씨를 교서관에서 제작하여 하사한 것입니다. 소수서원글자를 중심으로 오른쪽 위에는 명묘어필(明廟御筆)이, 왼쪽에는 가정 29년(1550) 4월에 하사( 嘉靖二十九年 四月 宣暘) 하였습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2001년 11월 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3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문성공묘(文成公廟) (보물 제1402호 2004년 4월 6일 지정)
제향 인물의 위패를 봉안한 곳.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선생의 위패를 모신곳(사당)으로 후에 안축(安軸,1297~1348), 안보(安輔 1302~1367),주세붕(周世鵬)선생을 함께 모셨으며 매년 음력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에 제향하고 있습니다.
묘당 문성공묘(文成公廟) 편액
장서각(藏書閣)
서원 강학과 관련한 교재와 목판 등을 보관하던 곳.
정료대 (庭燎臺, 서원을 밝히는 조명시설, 관솔 이용),
관세대 (盥洗臺, 사당을 참배할 때 손을 씻는 대야를 올려놓는 받침돌)
장서각(藏書閣) 편액
전사청
제향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 제향을 준비하는 건물.
전사청(典祀廳) 편액
일신재
직방재와 함께 서원 임원의 집무와 숙소를 위한 건물.
직방재(直方齋) 편액
일신재(日新齋) 편액
지락재(至樂齋)
학구재와 함께, 유생들의 기숙과 개인학습을 하던 건물.
지락재(至樂齋) 편액
학구재(學求齋)
지락재와 'ㄱ'자 모양으로 배치
학구재(學求齋) 편액
일영대(日影臺) 해시계
맑은 날, 윗 부분 돌에 꽂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합니다.
자연석 주춧돌 위에 문지도리석을 올려놓은 것으로 숙수사의 유적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영정각(影幀閣)
고려의 학자 안향, 조선 중기의 문신 주세붕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영정각(影幀閣) 편액
주자와 회헌(晦軒) 안향의 영정(국보 제111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왼쪽에 허목과 이원익
오른쪽에 주세붕(보물 제717호 1981년 3월 18일 지정)과 이덕형
영정의 원본은 소수박물관에 있으며 전시된 영정은 복제본입니다.
사료관
고직사
서원의 잡일을 도맡아 하는 관리인이 거처하는 건물입니다.
소수서원 관리사무소
옛 숙수사지의 유물들
숙수사는 통일신라시대 초기 창건된 사찰로, 남아있는 유적과 유물들로 보아 매우 큰 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축의 죽계별곡에도 실려있습니다. 세조 3년(1457) 단종복위운동의 실패로 순흥 지방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그 영향으로 폐사 된 것으로 보입니다. 서원 입구에는 당간지주가 있고, 석들, 주춧돌, 광배 등의 석재 유물들과 25구의 금동불상이 출토되었습니다.
경렴정 옆의 보호수, 은행나무 (이것도 수령 500년)
취한대(翠寒臺)
서원의 교류와 휴식을 위한 정자
취한대는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한 다음 직접 흙과 돌을 쌓아 올려 사방을 볼 수 있게 만든 곳이라고 합니다.
취한대(翠寒臺) 편액
취한대로 건너가는 죽계처 징검다리
돌아서 다시 소나무숲길을 지나 소수서원 밖으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