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는 푹 젖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푹 젖게 되면 책과 내가 융화되어 하나가 된다.
푹 젖지 않으면 읽으면 읽는대로 다 잊어버려, 읽은 사람이나 읽지 않은 사람이나 별 차이가 없
다.
소나기가 내릴 때는 회오리바람이 불고 번개가 꽝꽝 쳐서 그 형세를 돕는다. 빗줄기가 굵은 것
은 기둥만하고, 작은 것도 대나무 같다.
급할 때는 화분을 뒤엎을 듯 하고, 사납기는 벽돌도 세울 것 같다.
잠깐 사이에 붓도랑은 넘쳐 흘러 못처럼 되니 대단하다 할만 하다.
하지만 잠깐 사이에 날이 개어 햇빛이 내려 쬐면 지면은 씻은 듯이 깨끗해진다.
땅을 조금만 파보면 오히려 마른 흙이 보인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못이 된 것이 능히 푹 젖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만약 하늘과 땅의 기운이 성대히 교감하고 거세게 장마비를 내려 부슬부슬 어지러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리게 되면 땅 속 깊은 데까지 다 적시고 온갖 사물들을 두루 윤택하게 한다.
이것이 이른바 푹 젖는다는 것이다.
책 읽는 것 또한 그러하다.
서로 맞춰보고 꿰어보고 따져 살피는 공부를 쌓고, 그치지 않는 뜻을 지녀, 푹 빠져 스스로 얻음
에 이르도록 힘써야 한다.
이와 반대로 오로지 빨리 읽고 많이 읽는 것만을 급선무로 한다면,
비록 책 읽는 소리가 아침저녁 끊이지 않아 남보다 훨씬 많이 읽더라도 그 마음속에는 얻은 바
가 없게 된다.
이는 조금만 땅을 파면 오히려 마른 땅인 것과 한가지 이치이니, 깊이 경계로 삼을만 하다.
푹 젖는다는 말은 종이가 기름에 절은 것처럼 푹 젖어 완전히 나와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푹 젖으려면 많이 읽어야 한다.
읽기만 해서는 안되고 생각으로 깨쳐야 한다.
글 쓴 사람의 마음까지 투철하게 읽어, 책 속의 사람과 내가 대화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러
야 한다.
행간이 훤히 다 보이고, 낱낱의 맥락도 놓치지 않는 그런 독서를 말한다.
공부도 그렇다. 벼락치기로 하는 공부는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다.
그때는 알 것 같고 외운 듯 한데, 막상 시험 문제지를 받아들고 나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도 없
다. 비싼 과외를 하고 학원을 열심히 다닌다고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오뉴월의 소나기처럼
한때 잠깐 무성한 형세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잠시 전에는 도랑이 넘쳐흘러 길 위로 시냇물이 흘렀는데, 금세 흔적도 없다. 조금만 파면 말짱
한 마른 흙이다.
푹 젖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내 것이 되지 못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푹 젖으라는 말은 그러니까 바탕 공부를 다지라는 말이다.
생각하는 힘을 기르라는 뜻이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길이 보인다.
첩첩산중에 오리무중으로 보이지 않던 길이 어느새 모습을 드러낸다.
오성이 열린 것이다.
오성이 열린 순간 모든 것은 달라진다.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다.
평범한 것 속에서 비범을 읽어내고, 일상의 모든 것들이 예민한 촉수를 내민다.
이제 독서는 경이롭고, 신비한 모험이 된다.
하지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새벽부터 밤까지 책만 읽었던 임성주나, 책을 읽더라
도 그냥 읽기만 해서는 안되고 푹 젖어야 한다고 주문했던 이덕수처럼 끝없는 자기 갱신의 노력
이 있어야 했다
덮어놓고 많이 읽고 보자는 다독은 무모한 독서다.
그렇다고 한 권을 통째로 밑줄 그어가며 읽는 정독도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정독해야 할 책을 훌훌 뛰어 넘어도 곤란하지만, 가볍게 읽어야 할 책을 심각하게 읽어도 문제
다. 그러니까 다독도 정독도 정답은 아니다.
독서에 정답은 없다.
다만 내 정신을 나날이 향상시켜 주는 독서와, 읽으나 마나한 독서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김창흡(1653-1722)은 이렇게 말했다.
"독서에는 죽은 독서가 있고 산 독서가 있다. 책을 덮은 뒤 책 속의 내용이 눈앞에 또렷히 보이
면 산 독서고, 책을 펴놓았을 때는 알 것 같다가 책을 덮은 뒤에 아득해지면 죽은 독서다."
- 정민 교수의 한국한문학 홈에서...-
첫댓글 저 경지에 도달하려면...
부족함이 절로 넘칩니다.
그래도 한걸음 두걸음...
좋은글 잘 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