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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강해 (1)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교회
살전 1:1~10
I. 서론
데살로니가전서의 주제는 “두 단어”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총 5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든 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주제이기 때문에, 한 번 찾아서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3: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니까, 데살로니가전서는 한 마디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조금 더 살을 붙이면,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어떤 교회를 이루면서 살았고, 또한 어떤 교회를 이루면서 살아야 하느냐의 이야기입니다. 이번 데살로니가전후서 강해를 통하여,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이루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II. 본론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우리는 1절을 통하여 두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대 사회의 편지 형식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편지 서두에 편지를 쓰는 사람과 편지를 받는 사람을 언급하고, 인사말을 남겼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도 그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편지를 쓴 사람은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입니다. 참고로, 실루아노는 실라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그리고 편지를 받는 사람은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인사말은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빈 것”이었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바울의 독특한 인사법입니다. 은혜에 해당하는 헬라어 인사인 “케이레인 (cheirein)”와 평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인사인 “샬롬 (shalom)”을 합한 인사법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유대인 사도들이 헬라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사할 때, “케이레인”이라는 헬라어 인사를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행 15:23,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여기서 “문안하노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인사가 “케이레인”인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끝내고, 사도들이 안디옥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받는 수신인을 고려해서 헬라식으로 인사를 한 것입니다. 어째든, 사도 바울이 은혜와 평강을 합해서 인사를 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축복으로 인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개인과 가정에도 늘 함께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둘째는 데살로니가전서의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 실루아노, 디모데, 이렇게 세 사람이 썼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바울 한 사람이 쓴 것이고,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그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넣어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할 때, 바울과 함께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수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데살로니가 전서 첫 시간이기 때문에 데살로니가 교회 개척 이야기를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데살로니가 전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행 17:1~10,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사도 바울은 2차 전도 여행을 시작할 때, 실라와 함께 안디옥에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루스드라에서 디모데가 합류하게 됩니다. 드로아에서 환상을 보고, 소아시아로 가지 않고, 유럽으로 선교 여행을 가게 됩니다. 이 때, 누가가 바울의 선교팀에 합류하게 됩니다. 퀴즈: 유럽을 복음화시킨 최초의 선교사 네 명은 누구입니까? 바울, 실라, 디모데, 누가.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에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를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빌립보에서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줌으로, 여종의 주인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힌 후,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전도하게 됩니다. 바울의 일행은 빌립보 감옥에서 나온 후,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왔습니다. (약 100마일 거리) 사도행전 17장 1절을 보시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지나서 데살로니가로 바로 갔다고 말합니다. 이 이유는 바울의 선교 전락 때문입니다. 바울은 대도시를 기점으로 선교를 했고, 새롭게 세워진 대도시의 교회가 주변 도시를 전도하는 식으로 선교를 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체류 기간도 대도시에서 가장 오래했습니다. 헬라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고린도에서는 약 2년동안 사역했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에베소에서는 약 3년 동안 사역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고, 헬라 전체 지역을 놓고 보면, 고린도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서도 오랫동안 머물면서 선교를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이루어 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박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시면,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말씀을 전한 기간이 3주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3주만 머물렀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최초한 3주이고, 대략 몇 달은 체류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째든 예상보다 아주 짧게 머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선교 전략에 차질이 왔다는 것이고, 이것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쓰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3절을 보시면,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서 3주 동안 전한 내용이 나옵니다. 구약 성경을 풀어서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 (메시아)라는 것을 전한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그 결과 큰 무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5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성에 소동을 일으켰고, 바울과 그의 일행이 머물던 야손의 집을 침입했습니다. 6절을 보시면, 다행히 바울과 그의 일행을 그 때 야손의 집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을 보시면, 유대인들이 거짓 고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0절을 보시면,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로 탈출시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왜 데살로니가전서를 쓸 수 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마게도냐에서 가장 큰 도시였지만, 바울이 짧은 기간 동안만 사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많은 열매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베뢰아와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까지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아테네에 있을 때에 디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보내어 그곳 교회의 사정을 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로 이동했을 때, 디모데가 돌아와서 데살로니가 교회 소식을 전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2~4절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첫 번째, 여기서 우리는 왜 데살로니가 교회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기억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고 있습니다. (2절, 3절) 바울의 기억 속에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사도 바울이 가장 좋아하는 표현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이 사도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을 최초로 언급한 부분입니다. 참고로, 대부분의 학자들은 데살로니가 전서가 사도 바울이 최초로 쓴 성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갈라디아서를 사도 바울이 쓴 최초의 성경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의견이 조금 나뉘어집니다. 어떤 학자들은 1차 전도 여행 후, 안디옥에 돌아와서 기록했다고 말하고, 다른 학자들은 2차 전도 여행 중, 고린도에서 데살로니가 전서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3차 전도 여행 중, 에베소에서 기록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째든 중요한 것은 사도 바울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을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서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세 가지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택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4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에 대한 내용은 마지막 부분, 9~10절에서 설명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떻게 3주 밖에 가르치지 않은 교회에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완벽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다음 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5절,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두 가지를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바울이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5절,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복음을 말로만 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바울이 복음을 말로 전했다는 것을 결코 잊으면 안 됩니다. 복음은 낙하산이 하늘에서 떨어지듯 데살로니가 지역에 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직접 복음을 들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데살로니가로 와서 그들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그곳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열매가 맺히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은 우리가 방금 읽은 사도행전 17장에 잘 나와 있었습니다. 행 17:2~3,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울은 구약 성경을 가지고, 메시아가 해를 받고 죽을 것이며, 그 메시아가 다시 살아날 것을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일서에서 살펴봤듯이 예수님 안에 생명 (조에: 영원한 생명, 영적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전한다는 것은 생명을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이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반드시 말로 전달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말만 있으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변화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있을 수 있었던 이유도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순서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능력과 큰 확신 사이에 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령께서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셨고, 복음을 듣는 자에게 큰 확신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복음을 전해도 성령께서 능력 주시는 설교자의 설교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똑 같은 복음을 들어도 성령께서 큰 확신을 주실 때, 청중의 마음은 변화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성령은 항상 함께 가야 합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으로 묘사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무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성령은 무기가 없는 것이고, 성령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매주 설교를 하는데, 저에게 있는 한 가지 기도 제목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께서 설교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성령께서 성도님들에게 큰 확신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을 때, 우리 모두가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데살로니가 교회가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이유는 그들이 복음의 전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5~8절,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두 가지를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하여 복음이 흘러갔다는 것입니다. 5절,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즉, 복음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6절,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즉, 데살로니가 교회가 말씀을 (복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8절,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즉, 데살로니가 교회가 받은 말씀을 주변 지역에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 지구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모든 사복음서 마지막 부분에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이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찾아서 읽어 보기 원합니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막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눅 24:46~48,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요 20:21,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복음서에 나오는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받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빚진 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롬 1:14~15,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다 내가 빚진 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빚진 자가 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돈을 빌린 다음에 그 돈을 갚지 않으면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지 않아도 빚진 자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돈을 전달해 달라고 우리에게 돈을 맡기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돈을 받았다가 그 사람에게 그 돈을 전달해 주지 않으면, 우리가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복음을 주신 것은 그 복음을 헬라인과 야만인에게 전해주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헬라인은 헬라 사람을 말하고, 야만인을 그 외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께 받은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 주기 전까지는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사람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복음을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것은 우리만 복음의 은혜를 받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빚진 자의 심정으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둘째, 데살로니가 교회는 복음만 흘러 보낸 것이 아니라, 믿음의 소문도 흘러 보냈습니다. 8절,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소문은 앞에서 살펴 본,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그 다음 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9~10절,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믿음의 역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to turn to God from idols) 사랑의 수고는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to serve the living and true God) 소망의 인내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to wait for His Son from heaven)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1) 첫째, 믿음의 역사는 한 마디로 믿는 대상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역사는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상을 믿으면 안 될까요? 시편 기자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시 115:4~9,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우상은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것이고, 참인 것 같으나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는 다 우상과 같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와 우상을 의지하는 자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죽은 자이고, 참된 것을 믿는 자 같으나 거짓에 속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생명의 복음이 들어가고 성령께서 역사하시자,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이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2) 둘째, 사랑의 수고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섬긴다”는 의미는 “누군가의 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의 수고를 한다는 것은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수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사랑의 수고를 하기 원하실까요? 우리가 지난 10주 동안, 요한일서를 통하여 배운 내용입니다. 요일 3:16~17,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궁핍한 형제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이 사랑의 수고를 잘 한 교회였습니다. 살전 4: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3) 마지막으로, 소망의 인내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서 말씀 드렸듯이 예수님의 재림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동족의 박해와 유대인들의 박해가 함께 있었습니다. 살전 2:14~16,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받게 함을 그들이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그들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리고 장차,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로마 황제의 박해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심각한 박해의 상황에서도 인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들도 이 상황에서 인내하려면, 반드시 소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서방 국가들이 도와줄 것이라는 소망, 선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소망, 만약 이것도 아니라면, 저 세상에서라도 반드시 악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박해나 고난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 때문에 어떤 박해나 고난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궁극적인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는 진리가 항상 승리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의 권면의 말을 읽고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살전 4:16~18,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III.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는 우리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듣고, 복음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또한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로만 복음을 전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의 소문까지 날 정도로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가 회복해야 할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한 주간 살아가면서, 우리 안에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으로 우리가 받은 복음을 우리의 이웃에게 증거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