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
‘시간’의 화두 인식 및 풀이
유 한 근 (문학평론가)
우리의 모든 경험 속에는 시간적 지표(temporal index)가 박혀 있다. 많은 철학자나 사상가가 지적했듯이 시간은 인간의 가장 특수한 경험 양식이며 공간 경험과 함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여건으로서 계기(繼起), 변화, 흐름 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것들의 한 양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은 자아의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성장한다. 이른바 자아 혹은 인격이라 하는 것은 개인의 역사를 이룩하는 순간들과 변화들의 연속을 배경으로 할 때 경험되고 터득 된다. 우리가 시간을 중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이 우리의 자아 탐구에 있는 한 ‘시간 탐구’는 그 때문에 지속될 수밖에 없다. 김송배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의 서문 “시간에 대한 화두”에서 시인 자신이 ‘존재의 확인을 통해 진실의 향방을 유추하는 일은 시간과 비례한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시간적 지표는 단순히 인간 개인의 존재에만 관계 되어 있지 않고 사회와도 관계가 있다. 카시러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유기적 생명이란 그것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화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우리가 유기체의 어떤 상태를 기술하려면 반드시 그 유기체의 역사를 고려해야 하며, 이런 상태를 단지 하나의 통과점에 지나지 않는 미래의 상태와도 연결시켜야 한다.’고 . 이 말은 시간적 지표는 인간의 자아의식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회 연구와도 깊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적 연계에서 그것이 설정됨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 시인의 시간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남아 있는 나의 시간’ 즉 생명에 대한 인식만의 몫이라 할 수 없고 사회 인식에도 깊은 뿌리를 두고 있게 된다. 이에 따라 김송배 시인은 서문에서 ‘불감증 시대에 이러한 시간의 화두는 약간 어눌하지만 진지하’ 며 ‘소멸과 재생과 창조가 진정한 시적 구도로써 시간이 제시하는 무한으로 합일되어’ ‘구원과 화해가 성취’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시간은 빛깔이 없다
늦여름인지
초가을인지
정말 분간하기 어려운 아침
청승스레 비가 내린다
비 맞은 나뭇잎 하나 둘 까맣게 지고
열매 한 톨 영글지 못하는 부끄러움
무엇인가 우리 스스로 껴안은 업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우들우들 산성비 두렵지만
이 모두가 눈 먼 아아 우둔이어라
어디선가 지금도
물인지
독인지
어둠으로 쏟아지는 저 개울의 눈물
눈물 마신 피라미 하나 둘 온몸 휘어지고
무수한 생명 비틀거리는 페허
어쩌면 우리가
어지럽게 밟고 지나간 자국이었다
시간의 무게 그토록 무거웁다.
이 시는 연작시 [「시간에 대하여」]의 열일곱 번째 시이다. 이 시는 시간에 대한 시인의 주관적 인식이 객관화된 시이지만 그 보다는 시간과 자연 혹은 시간과 환경 공해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시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빛깔이 없는 시간과 무거운 시간의 의미 공간을 자연 공해라는 사회 문제와 연계시켜 쓰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우리의 시간 경험은 순간의 연속성과 변화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이 연속과 변화 내에 관류하는 특성을 물리적 개념 속에 반영해야 한다고 베르그송은 지적하고 있으며 이를 ‘지성이 시간을 공간화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말의 의미는 물리학은 시간을 공간의 차원으로 변화시킨다는 말로, 위의 시처럼 빛깔 없는 시간과 무겁게 느껴지는 시간이 자연이라는 공간, 공해라는 인식으로 반영되는 것을 의미한다. 빛깔 없는 시간이 시대 혹은 사회 인식에 의해서 까만 나뭇잎과 몸통이 휘어진 고기로 변화하며 그것이 존재의 무거움으로 인식한 시인의 의식이 이 시의 전개 구조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단적인 그 예이다.
그러나 김송배 시인이 이 시집에서 시간 탐구를 통해 노렸던 것은 ‘구원과 화해’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 시간 탐구는 인간 구원 문제를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 되는 셈이다. 연작시 「시간에 대하여」 마지막 편인 (.20)을 보자.
아직도 그곳에서 피는 꽃들 // 문득 / 잔물결로 일렁이다가 끝내 한 자락 바람으로 / 달려가 보는 세월의 한스러움 // 하지만 / 이방인이 되찾은 두메 옛 집터 / 비켜 선 산기슭 싸리꽃마저 서글픈데 // 학생의성김공지묘(學生義城金公之墓)/ 유인김령김씨지묘(孺人金寧金氏之墓) / 허물어 지는 봉분에 꾸벅 절만하고 돌아선다 // 잊어진 오솔길에 이슬은 젖어 / 가난이 묻힌 그 흔적들 / 그 길은 시간의 향기가 없다 // 그곳에는 무심(無心)의 꽃들만 지금도 피어 있다.
이 시의 행간에 숨은 이야기는 성묘이다. 시인은 성묘길에서 시간의 향기를 인식한다. 성묘길에서의 시간의 향기 없음을, 그리고 꽃들의 무심(無心)을 느낀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시어 혹은 인식은 ‘무심’이다. 마음 없음, 텅 빈 마음, 이것은 시인의 불교적 인식의 소산이지만 ‘시간’이라는 화두 풀이의 결과이기도 하다. 즉 시간에 대한 탐색을 통해 ‘구원’이 ‘무심’이라는 시어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이러한 불교적 인식으로 얻은 시어들은 그의 연작시 「시간에 대하여」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컨데 ‘섬광으로 분해된 우주의 한켠에서 스스로 사그라지고 혹은 새로운 변신으로 생성되는 태초의 어둠’, ‘생사고락의 굴레’, ‘원점으로 회귀하는 순환의 섭리(.1 에서’, ‘탄생과 소멸의 공존 그 모순’, ‘형체 없는 그림자’, ‘부재를 향한 우수(.2 에서)’, ‘짧은 한 생명의 끝자락은 향촉의 불꽃’, ‘사고팔고(四苦八苦)의 굴레(.5 에서)’,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반거충이들(.11 에서)’, ‘칠흑 육계에서 잉태한 생명(.12 에서)’, ‘흔적 없는 허행(虛行)(.14 에서’, 그리고 ‘낡은 헌옷가지 훌훌 벗어 던지고(.16 에서)’ 등이 그것이다.
이들 시어를 통해서 시인의 불교적 인식을 살펴볼 때, 시인의 불교 사상은 ‘무심’으로 모아진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에 의해서 가능해 진다. 하지만 마음 자체는 인식에서 제외된다. 마음을 인식하려는 그 자체도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마음’ 그것에 대해 우리가 물을 때, 그 물음의 대상이 되는 마음은 마음의 그림자 혹은 개념화된 그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은 어떤 모양으로도 포착되지 않는다. 무(無)일 뿐이다. 또는 공(空)일 뿐이다. 마음이 일정한 형태가 있다면 그것은 제한을 갖기 마련이다. 사과의 다른 모습을 상상할 수 없듯이 그 형태 이외의 다른 모습은 가능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은 텅 비어 있고 일정한 틀이 없어야 다른 모습을 가질 수 있고 다른 것을 담을 수도 있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마음은 무이며 공이라 가르친다. 반야경의 “과거의 마음을 포착할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을 포착할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을 포착할 수 없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또한 유마경의 “마음은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다.”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심(無心)은 마음의 없음이다. 대집경(大集經)에서 “온갖 중생의 심성은 본래 청정해서 번뇌의 여러 결(結-얽매임)이 더럽히지 못한다. 허공을 더럽히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설한 것처럼 마음은 본래가 청정하여 없는 것과 같다. 마음은 본디 고뇌나 고통도 없으며 욕심도 없다. 인연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은 다 무상(無常)하다. 이에 따라 불교의 시간관은 순간과 영원을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시간의 길에는 향기가 없으며 무심한 꽃들이 피어 있다. 그렇게 김송배 시인은 성묘길에서 느낀 것이다. 그동안 김송배 시인은 여섯 권의 시집 『서울허수아비의 수화』, 『안개여 안개꽃이여』, 『백지였으면 좋겠다』, 『황강』, 『혼자 춤추는 이방인』 그리고 『시인의 사랑법』 등을 통해 내면의 근저에 숨겨져 있는 불교적 색깔을 보여 왔다.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 삶을 어떻게 위로하며 그것이 정신의 깊이를 어떻게 더하는가를 보여줬다.
이 시집에서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는 「겨울 詩 몇 편(11)-寒行」이다.
어둡다
저문 산사(山寺)
풍경 소리 까맣게 차가웁다
낙엽더미
부서지는 발길 따라
어리석음 또한 미로에 나뒹굴고
이미 끝나버린 독경
지금 잠들 수 없는 새 한 마리
저리도 가슴 시리다
우듬지에 내려앉은 별빛
딩그렁 딩그렁 그렇게 울려준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아, 언제쯤 지혜의 영원을 찾을 것인가
산문(山門)밖 개울물 속
야윈 육신 다 녹아 흘러버린 채
어인 까닭이냐, 제 영혼만 건져 다시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내 걸어야 할 겨울길 아직도 멀다.
시인은 위의 시에서 현실적인 삶을 한행(寒行)으로 인식한다. 이는 단순한 시인 개인의 삶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의 삶을 시인은 대변하고 은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내 걸어야 할 길 아직도 멀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시인이 가고자 하는 길은 이 시를 통해서 볼 때, 대승적 길인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지혜의 길이다. 이 길은 성직자나 불자들만이 가는 길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가야할 길이다. 어리석기만 한 우리 모두가 가야할 길, 그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인간 존재 또는 자아의 인식에서부터 비롯되고 자아 인식의 길은 시간과 공간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가능하며, 특히 시간 지표를 통해 가능할 것이라는 시인의 인식이 이 시집의 출간을 가능케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집에는 연작시 「시간에 대하여」 20편 이외에도 연작시 「겨울 詩 몇 편」 14편, 「봄 詩」 6편, 「응시」 10편, 「늦가을 산책」 6편 그리고 「떠돌이 詩」 4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연작시가 많은 이유는 시인의 집중적인 주제 탐구 때문이다. 연작시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연작시의 테마는 계절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 시집에서 시인이 탐색하려 한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리고 시간에 대한 탐구를 시인의 자연물을 통해 성취하려 한다. 그러니까 김송배 시인의 시간 탐구를 시인의 자연과 자아의 관계를 통해 실현하려는 우리 시가의 전통 시법에 따른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 인간 실존의 기본 범주는 다른 하나인 ‘공간’은 다소 등한시 하고 있다는 점, 다시 말하면 ‘공간 체험’의 철학적 사유를 제외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 시집에 필자는 기대를 건다. 시인의 원 체험 공간과 시대 공간 체험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에 주목하게 된다.
(’99. 3. 『예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