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신은 츠빙글리 신학의 중심을 관통하는 키워드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주권에 기초한 예정 교리는 칼빈 이전에 츠빙글리가 먼저 신학적으로 스타트를 끊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은 인간의 믿음과 능동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점도 아울러 명심해야 한다. 구분선 아래에 W. P. 스티븐스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매우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츠빙글리의 사상을 접해보기로 하자.
(전략) 츠빙글리는 하나님 중심성을 상실해 버린 종교와 신학에 도전하였다. 그것은 창조자보다 피조물에 신뢰를 두는 종교와,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전통이나 가르침에 신뢰를 두는 신학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이중적인 도전이 처음부터 끝까지 츠빙글리 저작들의 특징이다.
하나님의 주권 혹은 영광에 대한 츠빙글리의 확신은 그의 신학 전체를 관통하여 흐르는 광맥이며, 그가 제시하는 모든 견해들을 특징짓는다. 그것은 섭리와 예정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 가장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예정이 후기 츠빙글리에게 중요한 것이기는 했지만, 1526년 재세례파의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 제시하게 되기까지 그의 작품들에서 그리 두드러지는 특징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해는 거의 모든 츠빙글리 작품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개인적인 경험과 지적인 신념 모두에서 분명하다.
1. 하나님에 대한 지식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근본적인 중요성은 츠빙글리가 자기 사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곳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도신경을 모델로 해서 씌어진 『신앙에 대한 설명』(An Account of the Faith)과 『신앙에 대한 해설』(An Exposition of the Faith)에서처럼 『주석』에서도 츠빙글리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에서 시작한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중심적 지위를, 즉 피조물보다 우월하신 창조자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확언한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그의 보다 체계적인 진술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신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로, 성서적 근거만큼이나 비성서적 근거들에 의존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 확실히 인문주의와 스콜라주의의 영향들이 츠빙글리의 사상에 스며들어 있다. 비록 그것들이 그를 통제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인문주의의 영향은 그가 고전 작가들, 특히 플라톤과 세네카에게 돌리는 지위에서 명백하며, 스콜라주의의 영향은 하나님(하나님의 본성과 존재)에 대한 지식을 논할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인문주의와 스콜라주의의 영향들은 『주석』과 『하나님의 섭리』(The Providence of God)에서 뚜렷하다.
『주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논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구별하는 전통을 따른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사람들에게 내재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1:19에서 밝히는 대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간주한다.(Z III 640.28-644.18) 더욱이 그는 종교가 인간 본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라고 보는데, 이것은 그가 아담에 관해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도피한 인간에게 돌아오라고 부르셨을 때 종교가 생겨났으며, 만약 이때 하나님이 부르지 않으셨다면 아담은 영원히 버림받은 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Z III 667.9-12,30-3; Works iii.89-90)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계없이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츠빙글리는 주석에서 이 문제를 직시하였는데, 이 책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복음을 다루기 전에 종교와 하나님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고찰에 거의 40페이지를 할애하였다. 츠빙글리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은혜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하는 그의 변호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로, 나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동시에 말할 수 없기 때문이고, 둘째로, 하나님과의 영혼의 결혼에 대해 내가 말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적용될 수 있는 것만큼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면서 인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사실의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보다 앞서기 때문이다.(Z III 675.25-34; Works iii.99)
로흐(Locher)는 츠빙글리의 수수께끼 같은 이 문장을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을 알아야만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1) 하지만 이 문장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기 전에 스스로를 계시하셨다는 역사적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울 것이다. 어떤 견해가 옳든지 간에 츠빙글리 신학의 출발점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남아있다. 하나님인가 혹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인가.(중략)
2.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츠빙글리의 이해에는 다양한 영향들이 작용하였다. 성서라는 근본적인 것 외에,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그리스도교 저술가들과 세네카와 같은 비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의 영향이 있었다. 하지만 츠빙글리의 사상에 대한 이러한 지적인 영향들에 덧붙여 츠빙글리의 개인적인 경험들도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의 이해를 확증하거나 강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는 1519년 흑사병으로 고통을 당했는데, 후에 이에 관한 시를 써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로서의 강력한 존재감을 표현하였다.(중략)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신뢰는 츠빙글리의 편지들에서 분명하다. 그는 1520년 7월 24일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가 그리스도께 간청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그가 나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담대하게 견딜 수 있도록 해 주시고, 토기장이의 그릇처럼 나를 부수든지 강하게 만들든지 그분의 뜻대로 해 주시기를 간구할 뿐입니다."(Z VII 344.15-17; Jackson 148) 인간이라는 존재가 토기장이의 손에 들린 그릇이라는 이러한 인식은 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뿐만 아니라 매일의 사건들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였다. 따라서 1524년 3월 28일 바디안(Joachim Vadian)에게 보낸 편지에서 츠빙글리는 자신이 엄청난 압력을 받으면서 일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글을 쓰던 중에 자신이 원래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를 잊어버리게 된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는 즉시 “이 모든 일에서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다"라고 덧붙였다.(Z VII 166.14-167.4)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츠빙글리의 인식과 초기저작들에서 그가 섭리에 대한 이해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을 보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그의 확신이 성서와 개인적 경험에 의해 진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그의 이러한 확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인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가 로마서 8:31-32의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든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가?"라는 구절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 데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모든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라고 말하는 야고보서 1:17과 같은 일련의 성서 본문들에 의해 확증된다.(Z II 96.27-34) 이것은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올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며, 그가 명하지 않으면 참새 한 마리도 땅으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나타났다. 『67개 조항에 대한 해설』(An Exposition of the Articles)에서 마태복음 10:28-31을 인용한 다음, 그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선한 행실들도 하나님에 의해 명해진 것이며 우리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Z II 178.32-179.20)
츠빙글리가 자유의지와 공덕에 대한 에라스무스와 다른 사람들의 믿음에 대항하여 사용한 무기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었다. 츠빙글리가 전개시켰던 구체적인 주장에 대해 세밀히 파고들 자리는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믿는 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일하심을 알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돌리지만 반면에 믿지 않는 자들은 외견상으로 자기들이 선한 일을 하면 그것을 자신들에게 돌린다고 주장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반면 믿는 자는 경험으로 그것을 안다.
처음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언급들은 구원에서 일부 역할을 인간에게 돌리려고 하는 자유의지와 공덕의 교리에 반대할 때나 하나님께 대한 신자들의 전적인 신뢰를 표현할 때 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츠빙글리는 자신의 보다 상세한 신학적 논의를 담고 있는 주석에서 우주의 모든 것이 유일한 근거이신 하나님께 의존한다는 사실과,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게 된다면 하나님이 하나님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혜요, 지식이요, 예지이기에 아무것도 그에게서 숨길 수 없고, 그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없으며, 그 어느 것도 그에게 불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과 예지가 없다면 한낱 모기도 날카로운 침이나 윙윙거리는 소리를 지닐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는 만물이 존재하기 이전일지라도 그것들을 아시며, 그의 지식은 만물을 완전히 꿰뚫고 있으며, 그의 예지는 만물을 규정하신다. 왜냐하면 지고의 지혜인 동시에 지고의 예지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지고의 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Z III 647.7-16; Works iii, 66)
따라서 츠빙글리는 "만물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지고 폐하여지기에 그의 뜻이나 명령 없이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었다.(Z III 842.28-30; Works iii. 372)
『주석』과 『하나님의 섭리』는 츠빙글리의 접근방식이 신학적인 것만큼이나 논리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주석』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에 관해 지금까지 진술되어 온 모든 것들에 말씀 자체의 증거를 제시할 때"라고 주장한 데서 그 핵심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서적인 증언이 단지 논리를 보충해 주는 어떤 것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는 "구약성서 전체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Z III 648.21-2, 649.13; Works iii, 68-9)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 세상을 먼저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로마서 1장에 있는 바울의 선례를 따랐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독자들에게 맞추었다.
이 주제에 관한 츠빙글리의 대표작인 『하나님의 섭리』는 그의 전체 저작들 중에서 가장 덜 성서적이고 더 철학적이다. 그는 지고선(the highest good)으로서의 하나님의 본성에서 시작하여, 섭리에 대한 교리를 논리적인 일관성을 갖춘 주장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의 제1명제는 "지고선은 필연적으로 만물을 돌보고 정렬하기 때문에 섭리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었다.(Z VI iii. 70.7-8; Works ii. 30) 섭리에 대한 츠빙글리의 이해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논증의 성격과 비성서적인 표현들은 이 논의를 초기저술들과 구별짓는다. 그는 자신이 "모든 논쟁의 근원인 성서의 증언보다 논증을 더 폭넓게 사용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Z VI iii. 229.20-230.4; Works ii. 233) 그는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근거 위에서 의식적으로 철학적인 접근방법을 사용하였고, 모세와 바울과 더불어 플라톤과 세네카를 중인들로 인용하였으며(Z VI iii. 83.15-16), 아리스토텔레스, 플리니우스, 플루타르크, 피타고라스에게도 의존하였다.
여기에서 츠빙글리의 인문주의자로서의 깊은 뿌리가 분명해진다. 하지만 섭리에 대한 이러한 강력한 철학적 진술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츠빙글리의 견해가 성서적이라기보다 철학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록 몇몇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의 주장은 성서에서 나와서, 자기 자신의 하나님 경험을 통해 형성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주장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우연이나 인간의 행위와 같은 다른 어떤 원인보다 위에 놓여져야 한다. 왜냐하면 소위 이차적 원인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수단이거나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근본적인 관심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섭리나 주권에 대한 믿음은 단념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순종으로 인도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수동적인 상태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선한 도구라는 자각을 하게 되는 능동적인 상태로 이끈다.
1) G. W. Locher, Die Theologie Huldrych Zwinglis im Lichte seiner Christologie (Zurich, 1952), 55 n. 14.
<약어표>
Z Huldreich Zwinglis Smtliche Werke (Berlin, Leipzig, Zurich, 1905- ).
W. P. 스티븐스 지음, 박경수 옮김,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pp. 81-90.
첫댓글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던 연재 글입니다. 츠빙글리가 개혁의의 조상임을 확실히 알려주는 좋은 글입니다.
공감합니다.
츠빙글리의 신학은 영국 청교도 신학에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단순한 신학과 스콜라주의처럼 보이는 신학이지요.
김남준 목사가 위대한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을 설명하면서 개신교 스콜라주의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요. 테오도르 베자, 윌리엄 퍼킨스도 카톨릭 등의 잘못된 신학(카톨릭 스콜라)에 대응하고 반격하기 위해서 개신교 스콜라주의 방법을 사용한 바가 있고요. 학문적 기술이고 츠빙글리나 청교도의 경건과 믿음은 매우 성경적인 것이었습니다.
좋은 댓글에서 배우며 공감합니다.
'개신교 스콜라주의(protestant scholasticism)'는 종교개혁 1세대들이 발견한 참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변증함에 있어 학문의 방법론으로서 중세 스콜라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파 신앙을 공격하는 무리들은 중세 스콜라주의에 익숙한 학자들이었고 인과율을 중심으로 한 스콜라주의의 방법으로 논쟁을 하였기 때문에 개혁파 정통 신학자들 또한 같은 방법으로 응전하고 논리를 계발하게 되었다.
----------------------------
존 오웬의 청교도 신학은 종교개혁 후기 역사 전체의 맥락에서 먼저 관찰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먼저 '개혁파 정통 스콜라주의'라는 용어를 살펴보자. '개혁 신학' 혹은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 tradition' 라는 말은 로마 가톨릭의 오류를 시정하려는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사상과 삶의 태도를 모두 포함하며, 그 영향을 이어받아 발전한 이후 개신교 신학 사상 전체를 일컫는 포괄적인 용어다. '정통신학(orthodox theology)'이라는 용어는 종교개혁이 발생한 다음 한두 세대가 흐르고 난 후에 발전한 신학 체계를 말하는데,
종교개혁 1세대들이 정립한 신학의 범위 내에서 상세하게 풀지 않은 것들을 총체적으로 다시 재정립하는 바른 가르침' 의 체계화 작업을 통해 정립된 신학을 말한다. '개신교 스콜라주의 (protestant scholasticism)'라는 이름이 여기에 첨가되기도 했는데 종교개혁 1세대들이 발견한 참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변증함에 있어 학문의 방법론으로서 중세 스콜라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혁파 신앙을 공격하는 무리들은 중세 스콜라주의에 익숙한 학자들이었고 인과율을 중심으로 한 스콜라주의의 방법으로 논쟁을 하였기 때문에 개혁파 정통 신학자들 또한 같은 방법으로 응전하고 논리를 계발하게 되었다. 오웬은 이러한 개혁파 정통 스콜라주의 시대의 전성기에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대륙에서 활동하던 개혁파 정통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은 끊임없이 자기 시대의 논적들 그리고 신학적 동지들과의 교류 속에서 개혁 신학을 수립해 갔고 존 오웬은 그러한 신학적인 변화와 진전들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이 존 오웬의 신학을 영국의 신학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개혁파 정통주의의 전성기에 활동했던 신학자들과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가 화란에서 활동하였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한다.
김남준, 『존 오웬의 신학』,pp.50~51.
@장코뱅 상세한 댓글 감사합니다. 가톨릭 스콜라신학자들에게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을 잘 이해할 수가 있겠네요.
@코람데오 공감합니다.
오스왈드 미코니우스
오스왈드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 , 1488 – 1552년 10월 14일)는 스위스의 종교개혁 신학자이다. 그는 츠빙글리의 추종자였다.
생애-
그는 스위스 루체른에서 태어났다 . 에라스무스와 한스 홀벤과 친분을 가졌다. 바젤대학교에서 공부하고 후에 쥬리히 가서 즈빙글을 따랐다. 츠빙글리가 사망하자(1531) 그는 바젤로 옮겨 그곳에서 도시의 설교자와 (1541년까지) 신약성경주석학 직의 교수를 역임했다. 1534년에 그는 바젤 신앙고백서 을 저술했다 . 고해성사에 있어서 그는 모든 개신교도들의 연합을 지지했다. 비록 츠빙글리안이었지만, 공재설을 주장하는 루터란들과 타협하려는 그의 준비는 강경파 츠빙글리안과 문제를 일으켰다. 신학자이자 언어학자인 Theodore Bibliander는 그의 저명한 추종자이다.
작품-
'De H Zwinglii vita et obitu (1536)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미코니우스가 최종 편집한 바젤 신앙고백
----------------------------------------------
바젤 신앙고백 Confession of Basel
요약- 온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파가 공포한 12조항의 개혁신앙 교리 진술서.
초안은 바젤의 종교개혁자 요한 외콜람파디우스가 작성했고, 1532년 바젤에서 그를 계승한 오스발트 미코니우스가 더욱 완전한 형태로 편집했다. 1534년 바젤 시 당국에 의해, 2, 3년 뒤에는 알자스의 뮐하우젠 시에 의해 채택되었으며, 바젤 교회는 이를 19세기까지 사용했다. 바젤 신앙고백은 제2의 바젤 신앙고백이라 부르기도 하는 제1차 헬베티아 신앙고백과 구분해야 한다.
좋은 내용입니다.
츠빙글리와 종교개혁에 대해서 잘 알려주는 좋은 글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회사에 대한 유익한 포스팅을 올려 주셔서 저와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