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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간의 인연 – 42년의 동행-
김한곤 / 사회학과
우리의 인생은 끊임없는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와 같은 다양한 형태의 크고 작은 인연 중에는 한 개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연이 있게 마련이다. 오늘 필자는 그런 인연을 소개하고자 한다.
캘리포니아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텍사스대학교 오스틴 캠퍼스의 박사과정 프로그램으로 옮긴 때가 1983년 1월 초순경이다. 사회현상을 연구하는 여러 사회과학 중에서 사회학은 사회학 나름의 독특한 시각으로 사회현상의 원인을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이다. 필자는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사회학 내에서 상대적으로 실용성이 높은 분야를 공부하겠노라고 내심 마음을 먹고 있었다. 1월 하순 봄학기가 시작되면 신입생들은 관심이 가는 교수와 연락하여 지도교수를 결정해야 한다. 마침 박사과정에 진학한 학교에는 미국 상원의회에서 핵심 펀드를 지원하는 미국 내 5대 연구기관 가운데 하나인 인구연구센터(Population Research Center)가 있었다. 박사학위 과정에서는 실용성이 높은 인구학 분야를 전공하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해 주신 Dudley L. Poston, Jr 교수님을 만나는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필자가 교수님의 연구실을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보면, 연구실 한쪽 벽에는 보스톤마라톤 대회에 참가하여 완주하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교수님은 오랫동안 마라톤을 즐겨하시는 분이었다. 지도교수님의 경우, 조부 때에 미국캘리포니아 북쪽 나파벨리로 이민하여 그 이후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종교를 가진 백인이다. 베트남전이 한창 막바지일 때 박사학위 취득 후 곧바로 대위로 임관하여 부인과 어린아이 둘을 남겨둔 채 베트남전에 참전한 전역 장교이기도 하다. 베트남에서 귀국하여 전역한 직후 The University of Texas, Austin의 사회학과 조교수로 학자의 길을 시작하셨다. 필자가 처음 만날 당시 지도교수께서는 40대 초중반의 나이에 연구 활동이 왕성한 인구연구센터의 책임자(Director)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서양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동양적인 정서를 가진 정이 많은 분이었다.
교수님의 관심과 지원으로 박사학위과정을 마칠 때까지 경제적인 부분은 별 걱정없이 지냈던 것 같다. 학기 중에 TA II(Teaching Assistant II)를 하게 되면 등록금 면제에 의료보험까지 학교에서 지원해 주고, 일주일에 20시간 업무를 담당하는 조건으로 월 780불 정도의 생활비를 받았기에 미혼이었던 나로서는 비교적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방학 때에는 학교에서 생활비를 지원하지 않았으므로, RA( Research Assistant) 업무를 수행함으로써 경제적인 면은 해결이 되었다. 학위논문을 쓰던 1년 동안은 TA 주당 20시간에 RA 10시간을 하게 되어 매달 약 1,200불 가까이 지급되었기에 그 당시 오스틴의 물가로는 비교적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지도교수님이 정해지면서 캠퍼스 본관 건물 타워 16층부터 20층까지 사용하던 인구연구센터에 공간을 배정받았다. 박사과정 1년 차에는 제법 넓은 방에 4명의 대학원생들이 공동으로 사용한다.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각자의 책상을 놓고서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다. 2년 차로 올라가면 공간은 좀 좁아들지만 2명이 공유하는 곳으로 옮겨 가며, 학위논문 작성을 위한 자격이 주어지면(ABD: all but dissertation), 공간은 작지만 홀로 사용할 수 있는 독립된 사무실을 제공받는다. 이때부터는 오롯이 학위논문 작성에 모든 시간을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필자가 공부했던 Population Research Center에는 그 당시 인구학 분야에 쟁쟁했던 거목들이 여러분 계셨으며 평등주의(Equalitarianism)에 입각하여 동부지역과는 다르게 학생이 교수를 호칭할 때 Last Name에 존칭을 붙이는 대신 First Name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평등주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경우에는 교수님들의 퍼스트 네임을 부르기까지 무려 2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하였다. 어릴 때부터 몸에 익숙한 문화적 차이를 걷어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교수님은 학기가 끝날 때 쯤이면 모든 대학원생을 당신의 자택으로 초대하여 포트락(potluck party) 형태의 종강파티를 열어 주셨다. 대학원생들은 그러한 자리를 통하여 교수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기회를 가졌으며, 대학원 동료들 사이에는 친목을 도모하는 장소가 되었다. 그때 받은 영향으로 필자 역시 영남대학교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후부터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학기말에는 비슷한 형태의 종강 모임을 실내 혹은 실외에서 정년 퇴임을 맞을 때까지 지속하였다.
박사학위 과정에서 요구하는 학점을 모두 취득하고 종합시험을 통과한 후에, 학위논문계획서를 제출하여 통과하게 되면 학위논문을 쓰기 시작한다. 학위논문을 작성한 1년 동안 거의 2주에 한 번씩 지도교수님과의 미팅을 통하여 논문의 진행 정도를 점검받고, 무수한 수정 및 보완과정을 거쳤었다. 작성된 논문의 일부를 가지고 지도교수님과 미팅을 할 때면 항상 붉은색 필기도구로 틀린 영어문장이며 바로잡아야 할 내용을 꼼꼼하고도 친절하게 하나하나씩 수정해 주셨다. 제자에 대한 헌신과 열정이 없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 당시의 모습이 눈앞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지도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의 도움 덕에 1985년 12월 18일 박사학위 최종 구두시험에 통과하면서 학위취득이 결정되었다. 최종 구두시험에 통과할 당시 지도교수님은 “오늘부터 독자적으로 연구를 수행할 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니, 앞으로 학문적 동료로서 많은 발전을 기대하네.”라는 말씀을 주셨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는 길에 지도교수님께서는 하와이대학에 소재하는 동서문화센터(East West Center) 방문을 주선해 주셨다. 덕분에 East West Center 숙소에 머물면서 당시 Vice Director로 계시던 조리재 박사님과 하와이대학에 근무하고 계시던 한국계 교수 여러분들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는데, 필자에게는 무척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리하여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86년 1월 16일 당시 김포공항을 통하여 귀국하였으며, 같은 해 3월 1일 영남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교수님께서는 1987년에 6개월간 대만국립대학교에서 사모님과 함께 안식년을 보내고 계셨는데, 그해 여름에 교수님을 한국으로 초청할 기회가 있었다. 교수님으로서는 생애 최초의 한국 방문이었는데, 그 당시 새내기 신부였던 아내를 비롯하여 부모님 등 가족과 첫 만남을 가졌다. 그 이후 교수님은 1988년 코넬대학교 농촌사회학과 학과장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코넬대학교는 사회학과보다는 농촌사회학과의 인구학 전공이 훨씬 활성화되어 있었다. 1989년에는 Rockfeller Foundation이 지원하는 연구사업에 필자와 공동으로 신청한 연구과제가 선정되어, “Women’s Status and Fertility in the Republic of Korea,”이란 연구과제를 수행한 바 있다. 1990년에는 이 연구와 관련하여 한국을 두 번째 방문하셨는데, 방문 기회에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서울여자대학교 그리고 영남대학교에서 특강을 실시하였다. 1991년에는 연구보고서 마무리 작업을 위하여 필자가 코넬대학교의 연구교수 자격으로 약 한 달 남짓 머물면서 이타카를 방문하여 보고서를 마무리한 바 있는데, 그때 교수님께서는 당신이 쓰시던 숙소를 필자가 사용하도록 배려해 주셨다. 코넬대학교에서 연구보고서 집필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어느 날, 교수님은 왕복 6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나이아가라폭포 여행을 제안하셨다. 그 후 다시 방문한 적은 있지만, 그 당시 나이아가라폭포 관광은 나에게 처음이었다. 웅장하고 장엄한 폭포를 내려다본 후 폭포 바로 아래까지 운항하는 크루즈를 탔다. 비옷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온몸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로 흠뻑 젖었지만 무척 즐겁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교수님과 함께 한 시간이었다.
그 이후 1992년 가을에 교수님은 Cornell대학교를 떠나 Texas A&M University의 사회학과 석좌교수로 이직을 하셨으며, 필자는 미국에서 개최되는 학회 참석 때에는 그 대학을 방문하여 특강을 하기도 하였다. 한 번은 학회 참석차 뉴올리언즈(New Orelans)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교수님께서 필자에게 Texas A&M University를 며칠간 방문하여 학생들 대상의 특강을 제안하셨다. 그 대학교에는 호텔학과에서 운영하는 호텔이 캠퍼스 내에 있었는데, 교수님의 배려로 그 호텔에서 며칠간 휴식을 취하면서 특강을 하였다. 저녁에는 자택으로 필자를 초대하여 사모님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시내로 나와 아이스크림을 교수님 부부와 함께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필자가 2021년 2월 정년 퇴임을 할 때까지 교수님께서는 모두 16번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셨는데,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필자와 관련된 공동연구, 국제학술회의 연사 혹은 특강을 위해 방문하셨다. 사실 미국에서 한국을 방문하는 일은 최소한 열 몇 시간 이상의 장거리 항공편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는 일정이 중복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제자의 요청을 거절한 바가 없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제자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교수님의 한국 방문은 매번 특별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가운데 특히 필자가 한국인구학회장을 맡고 있던 시기에 있었던 일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세계인구학회는 매 4년마다 개최되는데 2013년 8월 말 부산 벡스코에서 세계 곳곳에서 수천 명의 인구학자들이 참석하는 제27차 IUSSP(International Union for the Scientific Study of Population) 학회가 개최된 바 있다. 필자는 조직준비위원회 위원 중 한 명이기도 하였지만 교수님과 ‘출생시 성비불군형 분과’를 조직하여 함께 발표하고 토론하였는데, 그 행사에는 우리 대학원생 약 50여 명이 참석하였다. 행사 후 저녁에 해운대 바닷가 식당에서 함께했던 시간과 기억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남아 있다.
2014년 7월 중순에 제 18차 세계사회학대회(XIII ISA World Congress of Sociology)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개최되고 있었다. 그 당시 필자는 국제학술회의 개최와 그와 관련된 저서 출간을 조건으로 한국보건사회연구원(KIHASA)으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예산을 확보한 상태였는데, 세계적 석학을 설득하여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끔 할만한 학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당시 학회 일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후배 교수와 의논 끝에, 당시 요코하마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사회학대회에 참가하고 계시던 교수님을 만나 의논하기로 하고, 후배 교수와 함께 항공편으로 토쿄로 날아갔다. 요코하마의 어느 호텔 로비에서 교수님을 만나 전후 과정과 배경을 설명 드렸더니 교수님께서는 흔쾌히 그 역할을 맡아 주시기로 하였다. 학술대회 개최에 초청할 학자들의 명단을 함께 결정한 후, 그분들과의 모든 접촉 역시 교수님께서 해 주시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2014년 12월에 서울에서 ‘International Symposium on Demographic Dynamics and Societal Change in the 21st Century’가 개최되었으며 여러 국가에서 세계적 석학들이 참석하여 발표하였다. 이 학회의 결과물은 2017년 ‘Low Fertility Regimes and Demographic and Societal Change’란 제목으로 Springer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이와 관련된 국제학술회의와 책 출판은 교수님의 헌신과 열정없이는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 매일경제미디어그룹에서는 ‘세계지식포럼(World Knowledge Forum)’을 해마다 개최하는데, 조직담당자로부터 2014년 10월에 개최되는 매경세계지식초럼의 한 분과를 조직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와 관련하여 교수님과 의논한 결과 노인관련 분과를 조직하기로 하고 교수님을 비롯하여 미국에서 활동하는 일본계 학자와 대학원 시절 동료였던 중국 인구학의 석학 한 분을 모셔서 매우 뜻깊은 세션을 진행한 바 있다.
그 이후 특강과 학술회의 참석차 교수님은 두 차례 더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2019년 만 78세에 Texas A&M 대학교를 퇴임하셨으며, 현재는 명예교수 신분으로 따님 가족이 거주하는 San Antonio로 이주하여 사모님과 생활하고 계신다. 퇴임 후에도 여전히 학회 참석과 집필 그리고 언론에 꾸준하게 글을 게재하고 계신다. 2023년에는 Korea Herald 영문판에 여러 회에 걸쳐 한국사회의 인구문제에 관한 고정 칼럼을 쓰시기도 하였다.
영남대학교에 1986년 3월에 부임하여 2021년 2월에 정년 퇴임을 하기까지 35년간의 세월 동안 그리고 명예교수로 신분이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들의 관심과 도움이 있었다. 그 가운데 Poston 교수님은 학자로서 그리고 교수로서 오늘날의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신 분으로, 박사과정 지도교수로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42년간 한결같은 관심과 애정 그리고 지지를 보내 주고 계신다. 교수님은 지금까지 350여 편의 SSCI급 논문과 30 여권의 책을 저술하셨으며 여러 학술단체의 회장을 역임하셨다. 졸업 후에도 수 많은 제자들이 늘 소통하면서 한결같이 존경하는 것은 그분의 탁월한 학문적 업적뿐만 아니라, 평소의 인품과 제자들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렇게 훌륭한 분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오늘날까지 인연을 이어간다는 것이 필자에게는 큰 행운이라 하겠다. 교수님 내외분의 건강과 행복한 일상이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김한곤 hgkim@y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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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이 더위에 원고 시간 맞추어 주시느라 고생 많으셨겠어요. 글 부담에서 벗어나심을 축하드립니다. 논문 지도교수님과 평생 양국을 오가면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교수님의 연구생활도 부럽지만, 한편, 지도교수님은 얼마나 자랑스러우시겠는가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이런 사연이 묻히지 않고, 함께 나눌 수 있어서 기쁩니다. 또 연구주제를 정하는 과정, 80년대 유학비를 해결해 내는 방법 등 자세한 정보도 감사합니다. 교수님의 제자들에게도 큰 격려가 될 것 같습니다. 거듭 귀한 글 깊이 감사드립니다.
김정숙 편집위원장님의 요청(압력?)으로 에세이를 준비하긴 했지만, 제게는 오히려 학위논문 지도 은사님과 함께했던 지난 일들을 되돌아 보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글 솜씨가 부족하여 부끄럽고 민망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글쓴이의 민망함을 들어주기 위하여 댓글을 주신 김정숙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은사님과 함께한 세월동안 있었던 수많은 기억을 떠올려 가며 글을 쓰면서, 35년간 영남대에 근무하면서 함께 공부한 제자들과의 기억들이 떠올랐습니다. 한편 생각해보면, 제자들로부터 도움이 없었다면 재직기간 동안 수행했던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없었을거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습니다. 긴 세월 함께해 준 제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차분하게 정리된 김교수님의 글을 읽으니 교수님의 학문적 열정이 다시 샘솟는 것을 느낍니다. 초고령사회의 해결책 또한 계속 기대합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리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