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blog.naver.com/starshine867/223615261363
시인 이상을 향한 진실 탐구(1)("월하의 마음"- 김향안(변동림)지음/환기미술관)
글사랑 ・ 2024. 9. 18. 15:12
시인 이상을 향한 진실 탐구(1)
이충재(시인, 문학평론가)
시인 이상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말을 옮긴다. 그의 삶에 대해서도 이렇듯 많은 낭설을 쏟아놓는데, 작품 분석인들 오죽하겠는가 싶어서 수집에 접어 들었다. 이상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와 삶과 마음을 같이 했던 이들의 자료부터 수집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래전에 읽었던 도서들을 다시 들고 부분을 집중해서 읽고 메모형식으로 남기려고 이 글을 쓴다. 사실 이후로 유튜브를 통한 문학과 삶의 공통점 혹은 지향해야 할 생활의 지침서들을 서로 공유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본다. 세상에는 저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세인들의 평가가 달리 전달되어지는 현실을 목격하곤 참으로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세 명의 지인이 전문 유튜브 영상 전문가와 함께 그들의 삶과 가치관, 인생관의 중심을 들여다 보겠다는 것이 유튜부 촬영의 진실된 목적인 셈이다. 그 첫 번째 걸음으로 시인 이상을 선택하기로 했다. 그 증인으로」서 변동림(김향안) - 이상의 처음 아내이기도 했으며 그 이전에는 직, 간접적으로 많은 마음을 주고 받았던 <오감도>도와 ,<날개> 창작 이후의 이상을 만난 변동림의 이야기(『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환기미술관) 와 그의 동생 옥희 (『오빠 이상, 누이 옥희』푸른역사)를 첫번째 자료고 삼기로 했다.
"나는 이상 이전에 결혼한 일이 없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 드나들던 오빠같은, 보호자 같은 존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을 이상은 과대망상에서 일착이니 이착이니 하는 치졸한 이야기를 엮었다. 나는 그것이 우리 얘기를 쓴거라고 세상 사람들이 생각할 줄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 줄거리는 터무니없는 거잣말이기 때문에, 엊그제 처음으로 만난 평론가가 『동해』의 줄거리를 실제로 있었던 얘기라고 지금껏 생각하고 있어서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 p.380 <동해>
"구식말로 하면 병적인 의처증, 요새 말로는 피해망상 같은 고, 이 병적인 것이 이상문학의 성격이다. 상식적인 추리, 상상을 뛰어넘어서 심연을 파헤쳐서 스스로 부상하는 것을 향락하는, 어쩌면 결핵균이 만드는 고열의 상태가 만든 작희이었을지도, 작품 중 가상, 소녀의 과거를 고문하고 동이 틀 무렵 얻은 - 이것이 작가의 엑스터시의 극치이다. 병적인 환상의 향략" - p.382 <실화>
"이상의 문학은 작가가 발표한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와 수필 「산촌여정」외 몇 편을 들어서 평거되어야 할거다."
- p. 383 <나는 건강한 청년 이상과 결혼했다>
"당시의 우리의 탈출구는 동경으로 가는 길밖에 없었다. 거기서도 조선인은 구속된다는 것을 미처 모랐다.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줄로, 또 좀 더 공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동경행을 택했던 거다. 우리들이 그 시대는 식민지 치하라는 치명적인 조건하에서 아무도 절데로 행복할 수 없었다. 몇몇 친일 부유층을 제외하고는 조선인은 직장도 없었고 사업도 할 수 없었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다방 『제비』는 일경의 감시의 대상이었으므로 장사가 될 리가 없었다. 지식인들은 바(Bar)로 몰렸다 이상이 식스나인(69)이란 바를 경영한 것은 일경의 눈을 캄플라지하는 제스처이기도 했다. 해학이 심한 이상은 친구들을 만나면 농을 즐겼다. 놓을 못알아 들을수록 더욱더 심한 농을 해서 친구들을 웃겼다. 이상이 성적 어휘를 즐겼다는 일화는 이런 데서 나온 걸 거다."
- pp.386-387 <이상의 식스나인(69)바 경영, 일경의 눈을 피하려고>
"이상은 동경으로 가자마자 메문용(원고료를 벌기 위한)으로 꽁트식 잡문을 여러 편 만들었다. 일경이 모두 압수했지만, 이 잡문들은 정치적 사연이 없기 때문에 흐트러진 채로 버려둔 것을 내가 얼마동안 간직하고 있다가 서울을 떠나게 될 때 동생 운경에게 맡겼다. 이상이 작고한 후 발표된 이러한 글들은 이상의 미발표의 작품이 아니다. 「실화」, 「종생기」를 기억한다. 이상에게 재간은 건축과 미술이요. 인간의 바탕은 시인이었다고 할 수 있을거다. -p.389 <매문용 꽁트식 잡문도 썼다>
" 이상의 문학은 쉬르(초현실-초현실주의는 전후(1차 세계대전)의 황폐화를 배경으로 이성과 인습을 반대하고 문명의 구속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혁명을 촉진하기 위한 것)의 영향은 받았지만, 그리고 막 태동한 실존의식이 움트기도 했지만, 「오감도」는 쉬르도, 다다(1차 세계대전 중에 등장했다. 이 시대는 엄청난 사회적, 정치적 불안, 환멸, 전통적 가치에 대한 의문이 가득했던 시기이다. 다다이즘은 스위스 취리히에서 시작되었지만 베를린, 뉴욕, 파리와 같은 다른 도시로 빠르게 펴졌다. 기성 질서에 환멸을 느낀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도발적이고 비 전통적인 수단을 통해 관습적인 사고와 예술적 규범에 도전하면서 대신 평범하고 무의미하고 터무니없는 것을 지향했다)도 아니다. 반세기 가까이 지나서 구라파에 유행한 개념의 예술 - 시는 보고(그림처럼), 그림은 읽는(시처럼) -을 시도한 거로 본다. 「오감도」는 동양의 불길한 '까마귀'와 서양의 불길한 숫자 '13'을 구성해서 무서운 그림을 그린거다. 처음엔 열 세 아이가 가직각색의 모양으로 달아는 모습이 재미나게 보이다가, 점 점 점 무서운 모습의 아해들로 변한다. 이 까마귀는 일본이었을 거다. 그러나 이 시는 동족한테서도 이해되기 불가능해서 그 당시의 「조선중앙일」보에 몇 편 회인지 실리고 중단되었다." -pp389-390 <오감도>
"과연 내가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증언한 것이 망발인가, 아니면 도식적인 추단만으로, 항일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망발인가, 이상은 '모국어를 내던져 둔 채 많은 시를 일본말로 쓴 것'이 아니라 모국어를 쓰기 위해서 많은 시를 일본말로 공부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가 이상의 아내가 아니었다라도, 동시대를 같이 산 증인으러서 증언한다.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고 기록이나 몇 가지 현상을 이해한 것만으로써, 그 시대상을 파악할 수는 없는 거다. 아무리 정확한 기록도 옮겨질 때는 자칫하면 비뚤어지기 마련이고 와전되어 왜곡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pp.392-393 <이상을 용서할 수 없었던 이유>
"이상의 불행은 식민지 치하라는 치명적인 모욕감을 당했을 때 치미는 분노와 저항의식이었다고 본다. .... 이상은 가장 천재적인 황홀한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살다간 27년은 천제가 완성되어 소멸되는 충분한 시간이다. 인간이 팔 구십 년 걸려서 깨닫는 진리를, 4분의 1의 시간에 깨달아 버릴 수 있는 경우,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천재라고 한다. 천재는 또 미완성이다. 사람들은 더 기대하기 때문에." pp.394-395 <으레 검문 당하면서도 한복을 즐겨 입었다>
"이상(본명은 김해경)은 이상이란 이름이 어디서 온 건지를 묻는 것이 귀찮아서 "그거 공사장에서 주운 이름이지 - 인부가 나보고 리상이 라고 그러지 않아? 리상도 재미나겠다 해서 붙인거야" 이상이 한 농을 사람들은 일화로 만들었다. 이상은 리상에서 창조된 이름인데." -p. 395 <이상은 "공사장에서 주워온 이름이지">
"「오감도」는 일본이 미처 그 뜻을 눈치 채지도 못했을 때 동족의 무지로서 말살된 거다. 시인은 언어를 창조하는 것인데, '사전에 없는 말', ;조감도'는 건축용어로서 존재했지만, '오감도'는 없다고 '미친 놈의 소리'라고 - 그래서 시인은 자기의 창작을 더 발표할 수 없었다." -p. <시인의 고독>
"귀에 가까이 대고 '무엇이 먹고 싶어?', '셈비끼야의 메론' 이라고 하는 그 가느다란 목소리를 믿고 나는 철없이 천필옥에 메론을 사로 나갔다. 안 나갔으면 상은 몇 마디 더 낱말을 중얼거렸을지도 모르는데....., 메론을 들고 와서 깎아서 대접했지만 상은 받아넘기지 못했다 향취가 좋다고 미소짓는 듯 표정이 한 번 더 움직였을 뿐 눈은 감겨진 채로, 나는 다시 손을 잡고 가끔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고 오랫동안 앉아 있었다. 담당의사가 운명은 내일 아침 열한시쯤 될 것이니까 집에 가서 자고 아침에 오라고 한다."
- P.397 <식어가는 이상의 손을 잡다>
[출처] 시인 이상을 향한 진실 탐구(1)("월하의 마음"- 김향안(변동림)지음/환기미술관)|작성자 글사랑
이상 시인을 향한 진실 탐구(2)("오빠 이상, 누이 옥희"-푸른 역사)
글사랑 ・ 2024. 9. 18. 16:49
이상 시인을 향한 진실 탐구(2)
- 『오빠 이상, 누이 옥희』 -정철훈 지음.푸른역사 -
이충재(시인, 문학평론가)
이 글은 이상 시인을 향한 진실 탐구 시리즈의 일환의 두 번째 글이 된다. 이 글은 천재 작가 이상 사후의 가족비사에 속한다. 즉 오빠 이상과 누이 옥희에 관한 비사라고 할 수 있어서 이상을 향한 무엇인가 새로운 이야기들을 발췌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오래전 읽었던 도서를 서재에서 다시 꺼내들고 읽게 된 도서를 발췌 형식으로 옮겨본다. 한 사람의 시인의 삶을 반추해 보는 것은 이처럼 쉽지가 않지만,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현존하는 이들의 삶, 즉 뚜렷한 목적의식이나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만한 가치대상도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도서에서 누이 옥희가 이상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의 그 사실적인 것을 기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역시 충분히 참고가 되리라 본다. 그 예는 이 도서의 집필자인 정철훈 작가 이상에 대한 기사를 연재하는 등 오래동안 이상의 발자취를 밟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학문적이 아닌 르뽀형식의 그의 역사를 취재한 기자였기 때문에 더 사실적이고도 가치있는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겠다 싶다. 역시 발췌형식으로 참고가 되는 글을 옮기려고 한다.
"김옥희는 천제 이상에게 따라붙는 비운의 수식어를 떼어내고 평범하고도 효성 깊은 인간 김해경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건 이상의 생질인 문유성 씨도 마찬가지였다. 문유성 씨는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 과정에서 늘 낮은 목소리의 겸손을 보여주었다. 그 겸손은 천재를 낳은 가문의 보이지 않는 에의이자 본능에 가까운 자기 연민의 태도였다." -<우이동 글방에서 저자>
"옥희에게 '해경 오빠'는 문인보다 화가의 모습으로 먼저 각인되어 있다. ....이상이 동경으로 건너간 이래 불온사상 협의로 니시간다 경찰서에 수감된 후 한 달 정도 조사를 받다가 풀려나 숨을 거두기까지 그에게 가해진 고문과 취조기록이 여전히 미궁에 있다는 건 한일관계사의 비극일 뿐 아니라 우리 문학사의 비극일 것이다. 이러한 지지부진은 천재작가로서의 이상의 면모를 밝히는 일에 소홀했던 후대 문학인의 반성을 촉구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상의 항일작가로서의 면모는 생전의 박세창 여사가 품었던 한 맺힌 절규의 맥이 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pp.102-103 <26년 만에 쓴 옥희의 답장>
"옥희는 오빠의 괴벽스런 행동은 본질이 아니며 여기엔 동심이 작용하고 있는데 차라리 그걸 분석하기를 권고하고 있다. 그 동심이란 유희를 빼앗긴 소년 해경의 거세된 의식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백부의 사랑채에서 소년시절을 보낸 해경은 응석을 부릴 대상도, 장난감도 없는 유희 부재의 시간을 통과해야만 했다. 낳아준 부모와 길러준 부모 사이, 한 집안의 장자이자 한 집안의 양자라는 두 정체성 사이, 조선총독부의 웅장한 석조건물이라는 근대와 초간삼간으로 상징되는 전근데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해야했던 소년 해경은 그래서 일찍 조숙할 수밖에 없었다. 유희는 짧고 권태는 너무도 긴 성장기의 비틀어진 동심 말이다. 이상이 아이들의 유희를 지켜보면서 쓴 수필(<이 하해들에게도 장남감을 주라>에도 쉽게 권태를 느끼는 자아가 투영되어 있다." p.109
"한창 자유연애가 새로운 사조로 여겨지던 속에서도 우리들을 향한 윤리관은 항상 좀 더 봉건적으로 엄했던 터요. 그러나 모든 일에 신문학인다운 관용으로 대해주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일본에 건너가서까지 동생들에게 부친 편지에도 늘 빼놓지 않고 부모님과 집안 걱정을 해오시곤 하였습니다. 천하의 탁객이요 탕아로 알려진 오빠, 권태로운 삶에 완구없는 촌아들의 유희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신에게 빌던 오빠, 손수건만한 일광이 새어드는 방안에서 부정한 여인의 체취를 맡다 못해 숫자를 거꾸로 나열하던 오빠, 그런 오빠가 그 누구 못지않은 동양의 착실한 모랄리스트였다면, 오빠의 글만 읽어온 사람은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만는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었으니까요 하는 수 없습니다." -pp.110-111
"오빠에게는 그렇게 비밀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침울한가 하면 명량하고, 한없이 밝은 성격의 그 또 이면에 숨은 칠흑같은 어두움 - 그런 생활에 사회와 인간의 보잘것없는 비밀은 여간 아니꼬운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에서 키워드는 '아니꼬움'일 것이다. 이 아니꼬움은 크게 나라를 빠앗은 일본 사람들의 속임수에서부터 때묻은 버선 짝만 두고 달아난 금홍이란 여인의 비밀, 그리고 빌딩 안에서 벌어졌다고 오빠가 임이란 여인의 비밀, 이런 것을 알고도 모른 척 해야 했던 오빠의 심경이요. 오빠만큼 많은 비밀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생각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또 오빠가 왜 동경으로 건너갔는지 또 어떻게 해서 피검되었는지는 모두 어빠란 한 인물의 비밀에 속하는 '아니꼬움'인 것이다." p.116 <오빠 해경을 위한 병명>
"김옥희는 금홍의 인상과 해경이 이상이라는 필명을 갖게 된 여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 다방에 못 들어가게 할 만큼 봉건적이고 엄한 오빠였기에 주방에서 돈만 주어 보냈지요. '제비다방'는 효자동 집을 저당 잡혀 운영했던 것 같습니다만....., 금홍이라는 여자는, 자다가 부수수 일어나 나온 모습을 몇 번 보앗어요. 이미 밝혀져 있듯이 금홍이는 황해도 여자죠. 사리원 여자였던가. ...별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없지만 굉장히 살결이 곱고 에쁜 여자였어요. 살결이 희지는 않았지만 곱고, 작고, 참 이쁘고 얼굴이 깨끗하니까 차보였어요. .... 이상이란 이름도 전매청 공사장 시절에 지었던 것 같은데 오빠가 수염이 굉장히 빨리 자라니까 거기 여사무원이, <선생님, 수염이 왜 그렇게 빨리 자라세요? 참 이상해요>라고 한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들었어요. 그랬더니 큰 오빠가 <그래 거울을 보고 있으면 수염이 나오는 게 보인다. 이상하다, 이상해>라고 했다고 합니다." pp.159-190 <오빠의 여자 금홍과 친구들>
"옥희 추억은 임이 언이 '변동림(김향안)에게 가닿는다. 옥희에게 변동림은 시누이와 올케라는 관계 이상의 존재이다. 동경에서 숨진 오빠의 유해를 갖고 귀국한 이도, 그리고 옥희가 만주에 가 있는 동안 비록 짧은 기간일지언정 경성 친정집을 돌본 이도 변동림이다. 자신의 부재 시기에 친정 사람들이 음양으로 의탁했을 변동림은 그래서 옥희에게 여전히 어려운 존재이다. 옥희는 오빠 해경과 변동림이 결혼 할 때조차 만주에 가 있었다. 그렇기에 옥희가 기억하는 변동림은 오빠와의 짧은 동거 시절에 불과하다. .... 변동림(임이 언니)은 옥희와 같은 1916년 경성 태생으로 경성여고보를 거쳐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온 인텔리 여성이었다. 이상의 친구 변동욱의 여동생인 동림은 오빠 동욱이 경영하고 있던 조선호텔 건너편의 다방 '낙랑 팔러'에 들르곤 했다. 하루는 '낙랑 팔러'에서 동욱과 함께 차를 마시던 이상 앞에 동림이 나타났다. 이상은 여동생을 소개해달라고 동욱을 졸랐다. 동림은 이상의 친구인 화가 구본웅의 서모 변동숙괴 이복자매이다. .... 변동림과 이상 두 사람은 1936년 6월 일가친척과 '구인회'동인 7~8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북동 신흥사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결혼의 전제조건이 함께 동경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pp.188-194<임이 언니, 변동림>
[출처] 이상 시인을 향한 진실 탐구(2)("오빠 이상, 누이 옥희"-푸른 역사)|작성자 글사랑
시인 이상을 향한 진실탐구(3)("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 역사시대의 종말과 제4세대 무명의 꿈/신범순 지음
글사랑 ・ 2024. 9. 24. 12:55
시인 이상을 향한 진실탐구(3)
- 『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 - 신범순 지음/현암사 -
이충재(시인, 문학평론가)
장미의 병과 오만한 치욕들
김기림은 언제나 이상의 지적 수준을 당대의 가장 첨예한 부분과 견주며너 묘사한다. 그가 이상의 야유와 독설이 섞인 잡담 속에서 "오늘의 문명의 깨어진 '메커니즘'이 엉켜 있었다고 느낀 것, "번영하는 위선의 문명에 향해서 메마른 찬 웃음을 토할 뿐"인 비평적 얼굴을 대한 것 등에는 이상에 대한 그의 높은 가치평가가 스며 있다.
그는 삼사문학 동인을 20세기의 영웅들이라고 추켜주면서 자신은 19세기적인 인물이라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 버린다. 이러한 겸손 뒤에는 유행하는 전위적 사조에 대한 그의 거대한 비판적 사상이 숨어 있다. 타인이 본 이상의 전위적 성격과 이상 자신이 생각한 것은 서로 이렇게 어긋나 있다. 이상은 그러한 전위적 흉내와 모방 대열에 자신을 합류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가 20세기 전위 속에서 본 것은 껍질에 불과한 기교였다. 그가 어디선가 말했듯이 그것은 '절망이 낳은 기교'였다. 그의 독자적 영역에 대한 자뷤이 이러한 때에는 겸양의 태도로 나타난다.
식민지에 불과한 우리에게는 주도적으로 거기에 개입할 만한 아무런 여지도 없었다. 그러한 정원의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던 식민지 지식인 이상은 새로운 세계 정신을 표상으로서의 '쥬피타'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광범위한 이권투쟁의 혼란 한가운데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상항에서 어떻게 그는 '세기의 아픈 상처'라고 규정될 수 있는 것인가? 김기림은 이상의 어떤 측면을 두고 이 말을 썼는가? 이 세계사적 혼란을 감당할 만한 어떤 사상사적 위상을 이상에게서 발견했단 말인가? 이상을 '세기의 아픈 상처'라고 규정한 김기림의 생각은 단지 시적인 언술에 불과한 것일까? 그의 날카로운 직관은 자신의 구체적인 분석을 너무 앞서고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공허한 다락같은 말
이상은 마티스와 피카소 풍을 좋아한 것으로 알려 있다. 문종혁의 회고에 의하면 이상은 회화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마티스의 색체와 제작과정, 파카소의 입체주의에 이르면 그의 찬사는 절정에 이른다."했다. 제비다방에 걸려있던 이상의 자화상이 일종의 야수파적인 필치이지만 너무 부드럽게 느껴졌다는 문종혁의 증언이 있다. 문종혁은 이상의 <자화상>에 대해 이렇게 묘사했다. " 이 작품은 10호가 좀 넘었다. 12호 정도였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세잔느의 자화상은 물감을 풀어서 그리기는 했지만 입체감이 있다. 딱딱한 예리한 맛이 있다. 그러나 이상의 <자화상>은 마티스의 그림에서 보는 부드러운 맛뿐이다. 이 그림은 배색도 물체도 빛깔의 교차에서 이룩되는 몽롱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겨눈 것 같다.
이상의 문학작품은 대략 그러한 '사상'과 '지성' 사이의 틈 속에서 방황하며, 그러한 틈을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 과정이나 그 결과에 대한 기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수염이 텁수룩한 얼굴, 즉 슬픈 얼굴을 한 말은 우리를 식민화 일보의 동경 거리를 방황하면서 그렇게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 높은 다락 속에 처박혀 있지만, 그 이전 언젠가는 열정적으로 야심찬 사상적 탐구를 했었다. 그것은 문학에 뛰어든 초창기 시절이었으며, 그 탐구는 시적 열정 속에 녹아 있다.
거울 탈출로서의 거꾸로 달리기
이상의 탈출은 일종의 '거꾸로 걷기'이다. 일상에서 모든 것을 반대로 하면, 거울세계(이것이 바로 근대세계의 일상인데)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역설적인 삶의 양식을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그 하나는 '거꾸로 걷기'와 '초검선적 걷기'를 결합함으로써 현실에서 탈출구로 모색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거울 세계에 자신이 설계한 거울을 서로 마주보게 통합시킴으로써 무한한 반사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을 <얼마 안되는 변해>의 한 장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기대
이상은 자신의 사업(제비다방)이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자신의 사상을 펼칠 수 있는 탈출구조차 가로 막혀서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모든 것을 잊고 싶은 심정으로 서울을 떠났다. 아폴리네르의 '학살된 시인'이란 주제를 마음 속에 품고 평남 성천을 향해 떠난 것이다. 거기에는 고등학교 시절 동창 원용석의 회고에 의하면, 어느날 사무실의 책상 앞에 한 사람이 찾아와서 말도 없이 그저 멀거니 한참 서 있었는데, 바로 그가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사무적인 볼 일로 자신을 찾아온 것으로 생각해서 하던 일을 마저 끝내려 고개도 들지 않고 무슨 이야기인가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말이 없어서 쳐다보니 초췌한 얼굴의 이상이 자기를 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상은 거의 페인처럼 보이는 몰골로 성천 지역을 찾은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한 수필 중 하나인 <첫번째 방랑>을 보면 이상이 모든 면에서 완전히 절망적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집안과 사업 그리고 문학 그 모든 것에서 절망적이었기에(<오감도> 이후<날개>를 발표하기까지 그는 문학방면에서 그렇게 대단한 홀동을 보이지 못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또 잊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상적인 발견(무한정원/무한호텔)을 잊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이 여행에서 그동안 상처받고 죽어가던, 거의 숨죽이고 있던 무한사상의 향기가 기억 속에서 다시 솟구치며 더 강렬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기억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정신에선 이상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이 뼈만 남은 몸을 적토 있는 곳으로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의 투명한 피에 이제 바야흐로 적토색을 물들여야 할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적토 언덕 기슭에서 하 마리의 뱀처럼 말라 죽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르다운 0꺾으면 피가 묻는 고대스러운 꽃을 피울 것이다.")
근대라는 감옥을 부수는 절망
이상은 초창기 시 중의 하나인 <LE URINE>에서 황량하게 얼어붙은 황무지 위헤서 "무의미하고 신성한 미소와 더불어 소규모이기는 하나 이동되어가는 실과 같은 동화"에 대해 노래했다. 자신의 왜소해진 성기에서 분출된 한줄기 오줌은 뱀과 '유리의 유동체'라는 이미지로 변주되면서 황무지적 산을 뚫고 바닷가에 도달한다. 이런 행위를 통해 그것이 비록 이 황무지적 세게에 가느다른 실처럼 미미한 한줄기 흐름이지라도 거기에 미래의 희망을 담은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는이상이 끄덕 하면 '자살', '죽음' 등 절망적인 언어를 내세우기 때문에 그를 허무주의자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그의 자살과 죽음 같은 것은 대지와 우주 자연에 대한 허무주의적 인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다만 그러한 대지와 우주에 대한 강렬한 긍정 위에서, 그 대지와 우주 속에 황량해진 모습으로 떠 있는 근대세계 속에서의 삶에 대한 절망이다.
[출처] 시인 이상을 향한 진실탐구(3)("이상의 무한정원 삼차각나비"- 역사시대의 종말과 제4세대 무명의 꿈/신범순 지음|작성자 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