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26
ㅡ 신라건국과 '박혁거세' 설화 ㅡ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국시대 삼국 중 건국년도가 가장 빠른 나라는 '신라'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건국은 BC 57년으로 나와 고구려건국 BC 37, 백제건국 BC 18년 보다 2, 30년 정도 빠르게 나온다.
그러나 역사전문가들은 당시 실제 역사상황을 살펴보면 신라건국이 가장 빨랐다는 것을 믿기힘들다고 한다. 그런데도 삼국사기에서 신라건국을 가장 빠르게 기록한 이유로 김부식이 신라중심 삼국사기를 썼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또한 김부식은 삼국사기 서문에
삼국사기를 비롯한 역사서들은 "자불어 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 괴이하고 난잡하고 신적인 이야기)과 술이부작(述而不作 기술은 하되 지어내지는 않았다)"에 입각해 제작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김부식은 삼국사기에 민족 자긍심 고취 등을 이유로 기록이 존재하지 않던 고대사나 국가 창설 설화 등은 그대로 기입 해놨다. 이에 김부식은 삼국사기 초반부에 "중국도 탄생설화가 기이한데 우리라고 없으란 법있냐!"라며 '주몽', '박혁거세'등 탄생설화를 상세히 기록한 이유로 설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김부식이 그런 이유로 주몽 박혁거세 설화를 기록했다고 설명하면서 그와 비슷한 '고조선의 단군신화는 왜 기록하지 않았냐?'는 이유이다. 100여년 후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단군신화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김부식이 '단군신화'를 몰랐을리 없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단군신화를 의도적으로 뺀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추정할 수 밖에 없다.
가장 크게 추정되고 있는 이유는 김부식이 철저한 유교주의자 입장에서 종교적이기 까지 하는 단군신화에 거부감을 크게 느끼고 삼국은 고조선보다는 중국을 이어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라고 본다. 이 때문에 김부식이 사대주의자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어쨌든 김부식은 신라건국 설화는 삼국사기에 상당히 상세히 적어 놓았다.
신라가 건국하기 전 그 지역은 진한지역으로서 부족연맹체 6촌 등이 있었다.
박혁거세(朴赫居世)설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 땅에는6촌이 있었다. BC 69년 6촌의 촌장들은 '알천' 남쪽 언덕에 모여 왕을 추대하는 회의를 열고 있었다.
이때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이라는 우물가에서 오색영롱한 빛이 비치고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을하는 모습이 보였다. 촌장들이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말은 간곳없고 자주색 알이 하나 있었다. 그 알을 깨뜨리니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동천'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박처럼 생긴알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성을 '박'으로 하고 빛을 내며 세상에 나왔다 하여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 짓는다.
이 아이는 서기전 57년 13세가 되던 해, 6촌장의 추대에 의해 신라의초대 왕이 된다. ]
ㅡ 삼국사기, 삼국유사 ㅡ
위의 내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박혁거세의 탄생신화 이야기이다.
이런 난생신화는 고구려 '주몽', 가야 '김수로왕'도 '박혁거세'와 마찬가지로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는 주몽의 아들임으로 알에서 태어났다고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신라 고구려 가야 시조들이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들 중 가장 큰 형님은 박혁거세 이다.^^
사실, 이러한 신화는 단군신화처럼 말 그대로 신화일 뿐입니다.
사실이 전혀 아니고 당시 삼국은 모두 태양을 신으로 모시며 숭배했다. 지도자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태양과 닯은 둥근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하지만 이 탄생신화만으로는 신라 전신인 '진한' 6촌의 촌장들이 무엇 때문에 박혁거세를 시조왕으로 추대하게 됐는지, 그리고 박혁거세 혈통은 어떻게 되는지 그 진실을 알기가 쉽지 않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신화만 적혀있을 뿐 그런 내용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 '환단고기'에 나와 있다.
그런데 '환단고기'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조작된 위서(僞書)로 알려져 있어 그 내용을 믿을 수는 없다. 그러나 내용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래도 현실적인 이야기라 간단히 소개한다.
['사로'(신라 전신나라 명칭)의 첫 임금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부여 지역으로 추정)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그때에 '소벌도리'라는 자가 이 소식을 듣고 가서 '파소'의 아이를 집에 데려다 길렀다. 나이 13세가 되자 뛰어나게 총명하고 숙성하여 성덕이 있었다. 이에 진한 6부가 함께 받들어 '거세간' 이 되었다. 서라벌에 도읍을 세워 나라 이름을 '서라'라 하였다.]
이 이야기는 신라시조도 단군조선을 이어받은 부여후손들이 세웠다는 즉 삼국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는 의미이다. '박혁거세'가 '단군'의 직계후손이라 왕으로 세워졌다는 이야기이다. 100% 믿을 것은 못 되지만 난생실화보다는 현실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신라 건국설화에는 특이하거 박혁거세 죽음과 왕비와 관련된 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는 현재도 경주에 존재하고 있는 '오릉'과 관련이 있다.
박혁거세와 시조왕비를 모신 ‘오릉’에 대해 알아보자면,
오릉은 경주시 탑동 67-1에 있는
신라왕릉으로 사적 제172호 이다.
신라시조왕 박혁거세 거서간과 그 부인 알영왕비 2대왕 남해 차차웅, 3대왕 유리 차차웅, 5대왕 파사 이사금. 등 박씨 왕이 네릉이고 '알영왕비' 무덤까지 합쳐 '오릉'이라 한다. 하지만 이것도 추정일뿐지 확실한 것은 아니다.
신라 초기에는 왕이란 호칭을 쓰지 않았다. 우리 학창시절에 배웠던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으로 부르다 22대 '지증왕'때 와서야 처음으로 '왕'이란 호칭을 쓴다. 또 지증왕 때 와서야 국호도 정식으로 '신라'로 확정한다.
그런데 '오릉'에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지
61년(서기4년)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땅에 떨어졌으며 왕후도 곧 바로 죽었다고 한다.
국인(나라사람)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뱀이 나와서 내쫓아 못하게 하므로 5체(體)를 5릉(五陵)에 각각 장사지내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 이라고도 하니 담엄사(曇嚴寺)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즉 '오릉'이 박혁거세가 죽어 하늘로 올라간 뒤에 하늘에서 시신이 다섯갈래로 나누어져 떨어져 그 시신 조각들 무덤이라 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묘를 발굴하면 정확한 사실은 알 수 있겠지만 '오릉'이 박씨 시조묘로 성역화 되어있는데 발굴한다고 무덤을 파 헤친다는 것은 500만 박씨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삼국유사 내용보다는 왕비와 네 왕이 묻혀있다는 것이 더 정설로 받아들이고 박씨 대종친회는 '신라오릉보존회'를 만들어 그렇게 모시고 있다.
어쨌든 삼국 건국시조 중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이라도 남아있는 것은 '박혁거세'가 유일하다.
이처럼 신라건국은 '박혁거세' 설화로 시작된 것이다.
이어서 가야건국과 김수로왕 설화가 이어집니다.
ㅡ 초롱 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