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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E. J. Waggoner의 실제적 기별(미네아 폴리스) - NO. 2
Ⅰ. 그리스도의 의의 큰 범위와 본질
1. 그리스도 - 입법자요 구세주이심
우리는 계속해서 제 7항(율법을 주신 분 그리스도)에 이르렀다. 사 33:22을 인용하여 “여호와는 율법을 세우신 자시오 ...우리를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와그너는 그리스도를 다른 특성으로 나타냈으나 다른 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율법을 주신 분으로서의 그의 권세는 자연히 찬조주로서의 그의 자위에서 귀결된다. 왜냐하면 창조하신 분은 확실히 인도하고 다스릴 권한을 갖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창조 사업에 아버지를 나타낸 것처럼 율법을 세우시고 행사하심에서 아버지를 나타낸다(p. 39). 이것은 민 21:4-6을 고전 10:9과 비교하여 예증되었다.
옛 이스라엘을 따르면 영적 반석을 그리스도였다(p. 39). 그는 40년간 광야에서 머무르는 동안 이스라엘 의 인도자요, 사령관이었다. 가서 내 00을 구원하라고 모세에게 명하신 분은 그리스도였다. 그 다음에 출 20장에서 율법을 주셨다(p. 41). 애굽에서 저들을 건져내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신 분은 그리스도였다.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요, 모든 심판이 위임된 분이셨다(p. 41, 42).
2. woflatl 그리스도의 외침
그리스도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무덤을 뚫고 죽을 자를 살리실 한 소리가 있을 것이다(살전 4:16, 요 5:28,29). 선자자 예레미야는 이 모든 것을 비슷하게 묘사했다.
“여호와께서 높은 데서 부르시며 그 거룩한 처소에서 소리를 발하시리니 세상 모든 거민을 대하여 포도를 밟는 자 같이 외치시리니 요란한 소리가 땅 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들 칼에 붙이심을 인함이라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5:30, 31). 이것을 계 19:11-21과 비교해 보라. 하늘 군대의 사령관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00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실 것이다. 모든 악인들을 멸하실 것이다. 땅의 모든 거민을 대하여 자기 처소에서 외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다. 만민과 다투시는 중에 3:16도 보라(p. 42)
3. 신성의 모든 00권능으로 구원하심
그러므로 주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실 때 그는 하늘과 땅을 진동시킬 음성으로 말씀하실 것이다. 땅은 침망같이 흔들릴 것이며(사 24:20), 하늘은 큰 소리로 떠나갈 것이다(벧후 3:10). 그 다음 와그너는 히 12:25, 26을 인용한다. - “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그 때에도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실 때 땅을 진동시킨 것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창조주의 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님으로서 그 외 백성을 구워하시려고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오실 때 비할 데 없고 두려움으로 다시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 번에는 하늘까지 흔들리는 그런 성량으로 말씀하실 것이다(p. 43). 그 다음에 그는 다음의 의미가 충만한 그의 제시의 요점이 되는 말씀을 했다. 그리스도가 신성의 보든 특성을 소유하신 모든 점에서 아버지와 동등이신 창조주와 입법자로서로서 신성의 한부분이라는 사실은 구속하는 일에 있는 유일한 힘이다. 오직 이것만이 구속을 위하여 가능하게 만든다.(p. 43, 44). 이 말의 중요성은 점차 더 확실하고 중요해 질 것이다.
4. 구속을 위하여 신성의 충만함이 필수 요건이다
와그너는 이같이 속죄를 십자가와 관련시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선하고(벧전 3:18), 부언하기를 “그러나 만일 그가 하나님과 동등 됨에 조금이라도 부족하다면 우리를 그에게 인도할 수 없다. 신성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그리스도사 신성이 아니라면 우리는 다만 하나의 인간의 희생만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주에서 최고의 피조된 지성적 존재라도 안 된다. 그런 경우에도 그는 자기 자신의 의무 이상을 할 능력이 없는 율법에 충성해야할 한 백성에 불과한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죄를 소유할 수 없다. 그 다음에 그는 즉시 계속하기를 일찍이 창조한 최고의 천사와 하나님과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최고의 천사는 타락한 사람을 구원할 수 없으며, 신의 참여자가 되게 할 수 없다. 천사들은 봉사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 신성의 모든 추안 함이 육체로 거하시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우리를 구워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인 그리스도”(p. 44).
5. 구속함에서 그리스도의 초월성(탁월)
이같이 “신성의 충만함”, “신성의 대변자”, “신성을 나타내심” 그 안에 모든 충만함이 거하시는 분이란 말이 여러 번 반복된다(p. 44). 그것은 그리스도의 뛰어난 “창조주”, “입법자”, “중보자” - 자신을 우리위해 주신 분 - 속죄의 교리에 힘을 주는 많은 사람이 십자가의 행위와 분리시켜온 속죄의 교리에 한을 주는 자신을 주신 분은 그리스도이시다(p. 45). 그리고 이 모든 것 중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무죄하신 분이 고난당하셨고 불의한 자들을 위한 의인으로, 피조물을 위한 창조주, 위법자들을 위한 입법자, 그의 반여한 백성들을 위한 왕이시다(p. 45). 와그너가 “무한한 사랑 이보다 더 크게 나타낼 수가 없다고 감탄한 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가 그 이상 무엇을 더 하실 수 있겠는가?”
6. 의에 대한 율법의 관계
이제 우리는 이 연구의 주제인 제 8항(하나님의 의0을 연구하게 되었다. 마 6:33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를 인용하여 하나님의 의를 칭함을 생의 최상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와그너는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추상적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신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기 때문이다(p. 46). 의는 구약의 끊임없는 주제이다. 시 119:172; 52:6, 7에 보면 “구원”,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율법”등이 의미심장하게 섞여 있다. 참으로 그의 의를 아는 자들은 그 심중에 하나님의 율법이 있는 자들이다(p. 47).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의의 측정기이다(p. 48). 의와 죄는 서로 반대요, 죄는 불법과 불의다(요엘 3:4).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다른 의가 없다. 그것이 왜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 되는가의 이유였다(p. 48). 그리스도는 법의 월등한 넓이와 영성을 계시하셨다. 산상 설교는 이것을 예증한다. 그것은 마음의 사상과 의도 포함된다. 그리스도는 이것에서 새 진리를 계시하지 않으셨고 옛 것에 다만 빛을 두시고 밝히신 것이다(p. 50). 한 계명을 범하면 보통 다른 것도 포함된다. 이리하여 십계명은 처음부터 합치된다고 나는 말한다. 십계명은 우주만큼 큰 경계선을 가진 원이다. 그 안에 모든 피조물의 도덕적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것은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의 분량이다.
7. 율법으로 구원이 희망이 없음
법을 행하는 자들의 칭의에 관해서 와그너가 말하기를 칭의란 의롭게 만든다 또는 사람이 의롭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완전히 의로운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인간을 의인으로 만드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생명에 이르기 위하여 율법을 지킨다면 모든 사람이 이르지 못한다(롬 7:10). 모든 인류 중에 율법을 행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p. 51).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 앞에 죄 있게 서 있다(롬 3:9-19)
거룩하고 의로운 율법이 한 죄인도 의롭게 만들 수 없다. 행하려는 자는 자기 앞에 불가능한 일을 놓는 것이다(p. 53)
8. 문제의 방대함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을 아셨다. 그는 인간 속에 있는 것을 아신다(요 2:25). 인간은 의의 옷이 아닌 더러운 누더기밖에는 입을 수 없다. 그의 행위는 죄악적 마을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와그너가 말하기를 인간은 그가 먼저 선하게 되기 전에는 000 할 수 없다. 행함은 그의 죄악의 양을 더럽게 할 뿐이다. 그는 그 다음에 참으로 첨부하기를 “인간에게 요구한 그리고 그가 행하기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있기 전에 인간은 먼저 의롭게 만들어 져야 한다”(p. 55)법은 어느 사람에게도 의를 줄 아무 의도 없다(p. 56). 율법의 의를 소유하지 않으면 않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율법에는 우리 중 한사람을 위한 의는 없다(p. 56).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와그너는 묻는다. 의인이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 그는 자답하고 사 3:10; 26:1, 2; 시 119:142을 인용한다. 00이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누가 그리고 어떻게?
9. 그리스도가 길을 준비하신다
이제 모든 것이 열쇠인 제 9항(여호와 우리의 의)이다. 그 문제의 해답은 복음의 가장 중대한 일이다(p. 57). 칭의에 대한 첫 논리에서 눅 18:9-14을 인용한다. - p과 세 관리. 그 세리는 의롭다 - 의롭게 되어 청함을 받고 집으로 갔다. 그는 그 자신의 의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죄를 슬퍼함” 이상을 했다. 그는 자비를 구했다(p. 59). 하나님 우리 죄를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옮기신다(시 103:11; 미 7:18, 19). 우리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미 7:18, 19). p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죄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4-26).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물로서만 온다(롬 5:17). 그리고 의의 보상인 영워한 생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선물이다(p. 60). 그는 예수님을 그의 죄를 위한 대리자로서 믿는 죄인 위에 그리스도 자신의 의를 그 위에 둔다. 그는 그리스도 자신의 의로서 죄인을 덮는다. 그러므로 그의 죄는 보이지 않는다(사 61:10). 그것은 확실 죄인을 위한 유리한 교환이다. 그리스도는 무한히 거룩하신 고로 공급이 결코 바닥나지 않는다.
10. 그의 의로 옷을 입음
거기엔 모순이 없다. 이로 말미암아 율법이 무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주셨다. 그는 하나님과 꼭 같은 권위를 가지신 분으로서 말씀하셨다(P. 61). 율법은 그의 품성의 의를 선포이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이 선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의는 율법에 요약된 의이다.” 율법은 죄인에 대한 증인으로서 서 있다. 그것은 변할 수 없다. 그것은 죄인을 의인이라고 일컫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고행이나 소위 00의 뇌물은 받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신께 죄인을 부르시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다. 와그너는 이것은 영광스런 결과라고 말한다. “드디어 율법에서 의를 얻으려고 헛된 투쟁을 하다 지친 죄인은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의 펴신 팔에 의지 한다. 그리스도안에 감추어 그는 그리스도의 의로 덮인다. 이제 보라. 그는 그리스도안네 믿음을 통해서 그가 이제까지 헛되이 투쟁해 오던 것을 얻었다. 그는 법이 요구하는 의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참된 것이다. 그는 그것을 바로 그 분에게서 율법이 나온 의의 근원으로부터 얻었다”(p. 62).
11. 초월적인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함
이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동시에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와그너는 다음에 그 큰 교환의 기초를 인상 깊게 선언했다.” “예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신다. 그는 모든 특성 면에서 아버지와 동등이시다. 결과적으로 그 안에 있는 구속은 잃어버려진 인류를 다시 사는 무한하다”(p. 63). 그리고 그는 이것을 자발적으로 하였다.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롭고, 오래참고, 선과 진리가 풍성하고 락과 고실을 용서하신다. 동시에 공의로우시다(출 34:5-7). 이것이 다음의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결코 죄를 없이하시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고도 의로우실 수 없다. 그러나 그 분은 훨신 더 좋은 일을 하신다. 그 분이 죄를 제거하신다. 그러므로 이전에 죄지은 자가 깨끗이 할 필요는 없다. 그는 의롭게 되고 그가 한 번도 죄를 짖지 않는 것처럼 인정받는다.”(p. 64).
입혀주시는 의에 대한 여하안 트집에 관하여 와그너가 할하기를 누가 그 의를 입히려고 애쓴다면 우리에게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실제로 아무것도 아이요 더러운 옷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것은 우리에게 입힐 때는 그것은 경멸히 여기거나 거절해서는 않된다. 이사야서에 있는 표현을 주복해 보라. “그가 의의 옷으로 네게 입히셨나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의이다. 죄는 만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족히 여기셨다면 인간은 반드시 더 좋은 무엇을 찾으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p. 65)
12. 부흥 그 다음 칭의
와그너는 그의 의의 옷으로 덮으실 때 죄에 대한 외투(가면)를 얻는 것이 아니라 죄를 내쫒는 것이다. 이것은 형식 이상이다. 그것은 단지 하늘에 있는 기록 책에 기록하는 것 이상 죄를 수술한 결과의 무엇이다. 그것은 실지로 그에게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죄에서 깨끗게 된다면 그는 의롭게 되고 의롭게 만들어진다. 그는 그리스도안에서 죄가 제거된 고로 이 의를 얻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입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것이다. 이것은 기적적인 신성으로 말미암아 온 것이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고후 5:17)(p. 66). 죄 사함이 성령으로 불붙은 의에 대한 갈망으로 대치된다(p. 67). 이리하여 인간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된다(롬 5:1).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준비(롬 3:22) -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믿음을 통하여(갈 3:26)(p. 67, 68) 믿는 자들의 경험이다. 이것을 바울은 딛 3:4-7에서 설명한다. -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를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보여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하심이라.”
13. 이 모든 것의 영광과 경탄(기적)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요 상속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기 전에 어떤 시련기를 통하여 나아가 어느 정도의 거룩함의 표준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분(하나님)은 우리 현재 그대로 받으신다. 우리의 선함 때문이 아니요, 그 분이 우리를 선하게 만드시려고 양자 삼으시는 것이다. 엡 2:8-10에 의하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로서 구원을 받는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창조함을 받는다. 와그너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 항을 맺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죽은 상태에서 있는 동안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분은 그의 성령을 보내사 그리스도안에서 우리를 살게 하신다. 그 같은 성령께서 우리를 하늘 가족의 양자로 인치신다. 그리고 그 분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우리가 하나님이 예정하신 선한 일을 하도록 우리를 이렇게 양자를 삼으신다.”(p. 69) - 이것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영광이요, 기적이다.
Ⅱ. 의의 영광스런 결과
1. 그리스도의 피로 사셨다
제10항 (하나님께 가납됨) 주로 실질적인 것으로서 하나님께 가납되었는가를 의심하는 자들의 실제적인 문제와 단순한 확신의 문제들이다(p. 69). 와그너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산 물건을 받겠는가? - 특히 그 선물을 위해 고가를 지불했다면?(p. 70)라는 반문으로 응수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셨다. 우리는 값으로 산 바 되었기 때문이다(고전 6:19-20). 그 값은 자기 자신의 죄이다(행 20:28). 그의 생명, 그의 고귀한 보혈(벧전 1:18-19), 그는 우리와 우리 죄를 위해 그 자신을 주셨다(딛 2:14; 갈 1:4). 그 분은 온 세상 죄인들을 사셨다(요 3:16; 6:51). 그는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 죽으셨다. 그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롬 5:6,8). 지불된 값은 무한하다(p. 71). 주의 마음은 우리를 소유하는 것 위에 고착되었고 우리 없이는 만족할 수 없으시다(겔 2;6-8; 히 12:2; 사 53:11). 우리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안에 가능성을 보였고 그가 사신 것의 가치를 아셨다. 그는 그가 우리 속에서 만드실 수 있는 것 때문에 우리를 사셨다(p. 72)(흙, 모래, 철, 돌을 가지고 값비싼 예술품을 만든다.-역자주). 그는 그 자신 때문에 우리 죄를 제거하신다(사 43:25).
2. 우리가 의롭게 만들어 질 수 있도록(만드시려고) 우리를 사셨다
우리는 아무 의도 가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의로 만드시려고 우리를 사셨다(고후 5:21). 그 모든 것을 할 만한 놀라운 적합성은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ㅇㅍㄱ체로 거하신다는 사실 위에 놓여 있다(골 2:9-10).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처소에 우리로 함께 앉히시려고 우리를 일으키셨다. 그는 여러 세대에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우리로 하여금 나타내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를 일으켜 세우셨다. 왜냐하면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음이라” 그것은 “우리의 행함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우리가 그 가운데서 행하도록 선행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창조 되었느니라”
3. 무한한 성취의 비결
그는 부가치한 우리를 취하사 결국은 그 보좌 앞에서 우리를 흠 없이 바치신다(p. 73). 그러면 어떻게 그리고 왜이 모든 것이 성취되었는가? 그것은 그 분의 가치가 있고, 그가 죽임을 당하셨고 그의 죄로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이요 왕과 제사장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계 5:9, 10, 12). 느낌은 이 일에 있어서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다. 그는 우리를 위해 값을 지불했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를 받으신다. 그는 주인의 인자하심 때문에 우리 자신을 굴복하라고 요구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때 증거를 가지고 있다(요일 5:10). 그리고 믿음은 실상이요, 증거이다(히 11:1).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신 것을 우리에게 보증하신다(p. 76). 만일 우리가 주 예수를 고백하고 그의 준비를 믿으면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롬 10:8-11).
그 다음 “성령 자신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영과 함께 증거 하신다.”(롬 8:16, 17).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진리의 성령은 주의 말씀을 기억나게 함으로 증거 하신다.(오 14:16). 그 기록은 참되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0의 말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완전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p. 77). 그는 우리가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요, 그 축복의 힘을 촌해서 우리의 죄에서 돌이키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축복하신다(p. 77, 78). 우리는 이렇게 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자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요 1:12; 벧후 1:4).
4. 믿음의 놀라운 승리
이제 제 11항에 “믿음의 승리”가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의 의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롬 1:17). 우리의 인식을 위해 성경상 예증을 든다.(롬 15:9). 여호사밧과 암몬족 군대의 경우를 들어보자(대하 20:1, 2). 이스라엘은 함께 모여서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여호와를 구했다(3, 4장) 여호사밧은 그의 기도중에서 만믈의 창조주이신 하늘의 하나님 그 분을 대항할 수 있는 권세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5, 6절). 저들의 눈은 “마음이 그에게 향하여 완전한 자들을 인하여 강하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분으로서 그 분을 바라보았다(16:9). 그 결과로 그 싸움은 저들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대하 20:15). 이리하여 큰 승리를 하리라”(20절)고 외쳤다. 그리하여 저들은 거룩함의 아름다움과 여호와를 찬양했다. 그의 자비가 영원하심이라(21절). 혼돈의 암몬족에게 왔다. 주께서 복병을 두어 피차 서로 멸하게 하셨고 하나도 도망하지 못했다(22-24절). 와그너가 말하기를 믿음의 승리의 신령한 철학이다(p. 81). 이스라엘은 증원병을 받았다(여호와의 군대). 엘리사의 종이 유력한 병거와 마병을 보았던 것처럼 저들의 믿음은 사실이었다(요엘 5:14을 보라). 하나님의 약속은 실제로 성취된 것처럼 선하게 생각되었다(p. 82).
5. 믿음은 약속을 붙잡고 결과로 승리가 왔다
이것을 응용하여 우리는 믿음의 주요, 완성자이신 예수님께 우리 눈을 돌려야 한다(히 12:2).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도움을 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한다. 우리는 우리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승리를 주장한다(요일 5:14). 이것들이 죄와 투쟁에서 우리에게 주는 기초 원칙들이다. 때를 따라 돕는 자비와 은혜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한 힘을 인정한다(p. 83). 우리는 그의 구원의 약속을 탄원해야 하며, 구원의 약속, 그가 어떻게 우리를 즐겨 도울 것이다(롬 8:32). 우리는 그의 구원의 약속을 탄원해야 하며, 그리고 그의 놀라운 사랑을 찬송할 때 우리에게 우리 증원병에게 승리의 선물을 보내 주신다(p. 84) (빌 4:6을 보라).
6. 거듭나지 않은 자의 초조한 생활
제 12장은 “노예와 자유인”에서는 승리를 가져오는 믿음의 능력을 매우 실제적으로 다룬다. 그 제목은 죄인은 노예 -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요한의 증언 같이 - 라는 전제에 기초된 것이다(요 8:34). 그리고 바울이 “죄 아래 팔린 자”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롬 7:14), “팔린 사람은 노예이다 글므로 죄 아래 팔린 사람은 죄의 노예이다. 베드로도 이와 일치한다. 누구든지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라”(벧후 2:19). 노예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고 아무리 진절머리 난다 할지라도 다른 이의 뜻대로 얽매여 복종해야 한다(p. 85). 이리하여 바울이 어떤 사람에 관하여 말하기를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향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행함이라”(롬 7:15). 그런 상태가 그가 행하기 원하는 선까지도 할 수 없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물가능성이다. 되풀이 하는 신실한 결심은 물같이 약하다. 왜냐하면 저들의 눈이 저들 자신과 원수에게 있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투쟁과 패배가 그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 그리스도의 경험이 아니다”(p. 86).
7. 그리스도를 통하여 노예에서 해방을 얻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구원이 있다(롬 7:25). 그는 스스로 우리 인성을 입으시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 잡은 자, 즉 마귀를 멸하시고 일생 노예 되었던 자들을 구원하신다(히 2:14, 15).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사명은 온유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맘 상한 자를 싸매고 노예 되었던 자에게 자유를 선언하시고 옥에 갇힌 자에게 문을 여는 것이라고 선포하셨다(사 61:1). “죄의 노예”는 유전적인 힘과 습득한 악의 경향과 습관의 힘에 의하여 의지까지도 죄에 굴복당하고 있다.
8. 정죄와 패배에서의 자유
로마서 7장에 묘사된 노예는 하나님의 자녀의 경험이 아니요, 죄의 종의 경험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현세에 사는 동안 전쟁과 투쟁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고 패배에서 구원하여 주 안에서 강하게 되고 그의 힘의 능력 안에서 강하게 외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다(p. 87). 구원은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온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롬 8:1).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고(갈 3:26, 27), 믿음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맘에 거하실 때이다(p. 88).
9. 이름을 믿는 믿음이 치료 한다
와그너 박사의 마지막 항 13장“노예에서 구원 얻는 실제적 예증들”에서 먼저 눅 13:10-17에 18년 동안 불구였던 여인이 안식일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즉시 해방되어 허리가 펴지는 것을 인용하고 S이 00를 사로잡았다는 사실을 인용한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우리 발이 사단의 올무에 걸려 우리의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서 우리는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같은 자비하신 대제사장이 지금 하늘에 계신데 그가 우리의 질고를 느끼신다. 그리고 “같은 말씀이 우리를 건지실 것이다.” 그리스도의 병 고치는 치료의 목적은 죄를 정복하시는 그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다(마 9:28; 요 20:30, 31). “너희도 믿으면 그의 이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p. 89). 이것들은 사단의 일을 정복하시는 그리스도의 증력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물 교훈으로서 기록된다(p. 89, 90). 그 다음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문에 앉아 있는데 나면서부터 40년간 절름발이가 있었다. 베드로가 성령에 삼동하여 은이나 금보다 더 좋은 무엇을 주기 위하여 그를 일으키니 즉시 그의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p. 90). 그리하여 그는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놀랐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것은 자기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 있고 그 이름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그 사람이 치료 받았으며, 그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에게 빛이 되셨다(시 51:5). 결과적으로 우리는 또한 본성적으로 너무 약하여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반복하는 죄의 행위로 인해 우리가 그리스도께 자유가 계속 유지되는가? “우리는 모두 천성적으로 나면서부터 죄와 사단의 종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순복하자마자 우리는 사단의 권세에서 풀린다.”(p. 91, 92). 와그너는 롬 6:16을 인용한다. 우리는 자신을 굴복하는 자의 종이다.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 우리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서 죄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는 바로 그 행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받아들인 증거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그러나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다(고후 3:17을 보라).
10. 하나님의 직공의 주관 하에 있는 예증들
그러나 그곳엔 투쟁이 있다. 사단은 자기의 종을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강력한 시험, 다시 자기의 종으로 만들려는 시험의 채찍 끈이 있었다. 슬프게도 사단은 우리보다 강하다. 도움을 받지 않고는 우리는 그를 저항할 수 없다(p. 92). 우리는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우리는 그의 종들이기 때문에(시 116:16) 그리하면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것을 이루실 것이다(빌 12:6). 우리는 이 확신 안에서 강하게 되어 이끌 수 있다. 우리는 주의 손에 있는 의의 도구이다. 무감각한 도구가 이대로 살아 있는 지성적 도구이다. 누가 우리를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의 능력을 가진 도구이다. 기구라는 뜻을 가진 도구라는 말은 어떤 직고의 완전한 주관 하에 있는 무엇이다(p. 93). 우리는 누가 우리를 사용할 것인가와 어떤 종류의 봉사에 종사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선택을 한 후에 우리는 자신들을 일단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순복한다. 이 순복은 그 분이 우리를 빚으셨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으면 않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복할 때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우리를 만드시도록(사용하시도록 ) 토기쟁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이 그의 손에 있어야 한다. 우리의 의지력은 우리가 그 분이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하시도록 허용하느냐 않느냐를 선택하도록 주어졌다(p. 93).
11. 승리의 온전한 비결
하나님의 손에 도구가 된다는 이 사상은 인단 충분히 파악되었을 때 믿음의 승리에 놀라운 도음이 된다(p. 93). 우리가 사단의 종이 되었을 때 우리는 아무 선도하지 못했다(롬 6:20). 그러나 하나님의 손에 있을때 우리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지체를 거룩함에 이르는 의의 종으로서 순복했다(롬 6:8). 이것이 하나님께 순복을 통한 승리이다. 그러므로 승리의 온전한 비결은 주의 뜻을 알려고 열망하되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굴복하는 것에 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순복함으로 주께서 우리를 당신의 종으로 받아 주셨다는 것을 알고 주께 순복하기를 계속 유지 하고 우리 자신을 주의 순에 맡겨 두는 덕이다. 우리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육체의 욕망대로 마옵소서하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나는 스스로를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만일 내가 악에서부터 보존되려면 나를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않된다.(p. 94). 이리하녀 하나님의 평화가 마음에 충만해지고 우리는 악에서 보존된다. 원수는 후퇴 당한다. 이것이 승리 생활의 비결이다.
12. 우리의 최선보다 더 좋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는 것을 특별히 주복하라. 믿음은 율법을 범하도록 인도하지 않고 순종하도록 인도한다(p. 95). 믿음은 결정적으로 항상 도덕율 폐기론자는 반대된다. 더욱이 그것은 어떤 사람의 능력 안에는 의를 그가 원할지라도 행할 능력이 없다(갈 5:17). 와그너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하거 말하는 잘못이다고 역설 한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안다. 아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만이 그를 통해서 역사하실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p. 96).
하늘과 땅이 므든 권세가 그리스도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 권세는 우리 맘대로 할 수 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자신까지도 우리 맘에 오셔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요구사 불가능하다고 트집 잡을 아무 근거가 없다.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눅 18:27). 그러므로 우리는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인간이 내게 어찌 하리오”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다(히 13:6).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승리자가 된다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다(롬 8:35). 이것과 영관해서 아무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을 것이다(롬 8:37).
Ⅲ. 창조안에 있는 복음 빗나가지 않는 강조
1. 그리스도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구세주이심
와그너 박사의 미네아 폴리스에서 계속적이니 강조점과 다른 부분은 1893년에 그가 쓴 “창조 속의 복음” 중에 나타났다(국제 소책자 회의에서 출판, Battle Creak, London, Melbourne). 창조주의 날과 일을 기초로 하여 와그너는 다시 창조주와 구세주로서의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위치를 강조한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하나님이요, 창조주라고 선언하셨다. 창조적 능력은 신성을 구별하는 표이다(p. 14, 15) 땅은 그의 권능으로 만드셨고 그의 지혜로 세우셨다.(렘 10:10-12). 와그너는 다시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p. 1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창조주로서의 그의 권세의 덕택으로 구세주가 되신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창조주가 아니라면 구세주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p. 15, 16).
2. 그의 입 기운으로 만드심
와그너는 과학의 현상을 인용한다. 고부풍선에 입김으로 바람을 넣어서 놔두면 고운 가루가 터진다. 넣게 열린 튜브위에 탄력성 있는 얇은 막을 펴 놓으면 그 위에는 고운 가루를 풍겨 놓는다. 그 다음에 튜브 속으로 그대가 말을 하면 그 진동에 의하여 식물 , 꽃 기타 다른 생명의 모양이 생긴다. 물론 이것들은 생명이 없다. 그어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 세상이 생겼고 모양이 형성되었다(p. 23, 24).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있었다. 이들은 그의 입김으로 형성되었다(p. 26).
3.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것이 된다
하나님은 신령한 말씀들을 통하여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심이라(엡 2:14)(p. 26). 하나님의 평화와 의는 항상 그 신령한 말씀(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를 믿고 신뢰하는 자들에게 온다(고전 1:30).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신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생애이다. 그리고 이 생애는 그리스도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고로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안 있는 고로(p. 59) 그리고 이 생활은 그리스도가 저들 안에 계실 때 인간들 속에 나타난다(갈 2:20).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있다. 완전한 신성(p. 147)이리하여 인간을 위한 영원한 생명은 오직 아들 안에만 있다(요 5:28, 29). 이런 것들이 와그너의 계속적인 주제요 빗나가지 않는 강조이다.
Ⅳ. 기쁜 소식(1900) 미네아 폴리스 제시의 일 부분
1890년에 와그너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첫 번 출판한지 10년 후인 1900년에 태평양 인쇄소에서 “기쁜 소식”이 출판되었다. 이때에 와그너는 1890, 12, 29. 시조 편집 직을 마치고 런던에 가 있었다. 실제로 로마서와 연관된 갈라디아서의 6장을 다른 것으로 그의 미네아 폴리스 강조점 중 하나인 “기쁜 소식”은 1890년의 그리스도와 그의 의와 완전히 조화된다.
1. 그리스도 - 그의 모든 충만함의 하나님
이 말은 세 번째 결론적인 책에서 인용한 비슷한 말에서 따온 것이다. “모든 복음의 기르침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사실에서 그 권위를 기초로 하고 파생된다.”(The Glad Tidings, p. 132)
“그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은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의 신성은 하나님의 신성이다”(p. 35).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골 1:15). 그의 영광의 광채와 그 본체의 형상(바른 형상) - 히 1:1-3)(p. 13) -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을 동등한 구절에 두었다. 두 분 다 한 보좌 위에 앉으셨고 평화의 의논이 서로 사이에 있었다”(p. 13, 14).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요 의의 태양.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세상에 오는 각 사람에게 비추시고 모든 믿는 마음속에 그리스도가 그의 모든 충만함으로 거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온 세상을 위하여 그의 생명을 주신다”(p. 17). 10년 전에 나타났던 본질이란 말, 그리스도와 그 외에 기록되었던 말이 다시 반복된다.
2. 우리 죄를 지셨으나 오점이 없음
우리의 죄를 지신 분의 무죄를 다시 강조하고 그가 우리 죄를 대신 지신 고로, 와그너는 말하기를 “그는 우리 죄를 사셨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그에게 속했고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 이 믿음에 의가 있다”(p. 17). “그는 우리 죄을 사신 것을 우리에게 옮기실 것이다”(p. 19). “구원은 우리의 것이다”(p. 21). 그 다음에 “Christ Made a Curse for us”라는 제목하에 와그너가 특별히 부인하기를 : “모든 인간들의 죄가 그 위에 있었으나 아무도 그에게서 죄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죄를 지시고 흠 없을 수 있으시다.그는 자신 위에 죄를 지셨으나 그의 권세에서 구원 받았다”(p. 118). 와그너는 온 세상의 죄를 지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한다(p. 91). 그는 그리스도는 실제로 우리 죄를 지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p. 117). 그는 이 기초적인 진리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한 층 빛을 더 내고 적용한다. 그를 그럿게 눌렀던 것은 누구의 죄냐, 그리고 누구의 죄로부터 그가 구출을 받았는가? 그 자신의 죄가 아니요, 그는 아무 죄도 짓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여러분의 죄는 내 죄이다(p. 119).
3.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께로 온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중보자로서의 사업으로 돌아가서 와그너는 말하기를 “그는 사람의 타락시에 중보자가 처음으로 되신 것이 아니요 영원한 때부터 되셨다. 한 사람도 단지 한 사람뿐만 아니라 아무 피조물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오지 못한다.”(p. 141). 그는 영원부터 이러했다. 그리고 의와 생명의 관계에 관하여 와그너는 논리적으로 부언한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의이시다”(p. 145). 이 초월적인 그리스도에 관하여 와그너는 “오직 그 안에서만 세상의 불안과 근심과 열망에서 구원이 발견될 수 있다. 그는 항상 열려있는 안전의 문이시다. 그는 죄인이 도망하여 항상 환영받을 수 있는 도피성이다(p. 151). 이와 같이 10년간 사이를 둔 와그너의 세 책 사이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1888년 미네아 폴리스에서 한 번에 제시한 것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신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에 누가 제시한 것보다 더 넓은 전망이었다. 이상이 기록상의 미네아 폴리스의 연구이었다. 우리가 이에 대해서 들어온 이것들이 대표자들 중의 어떤 이들을 크게 감동시킨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총회에서 엘렌 화잇의 권면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음에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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