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1) † 일곱 교회의 보내는 메시지/ 사르디스(사데)에 있는 교회 신자들에게 보내는 말씀/ * 종교개혁과 개신교 시대에 대한 하느님의 예언(묵시3,1-6)
1. 우리는 지금까지 사도시대에 니골라당의 행위를 보았고, 또 니골라당의 행위가 있은 후 페르가몬(버가모) 교회가 큰 죄를 지어 세상이 교회 안에 흘러 들어온 것을 보았다. 이어서 니골라당 후에 이세벨이 있었고, 그 때 많은 우상을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그러나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으니 그것은 티아티라(두아디라) 교회에 이세벨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심판은 그녀를 침상에 던져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어느 날 사망으로 그녀의 “자녀”들을 죽이리라는 것이다.
이 예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묵시록 17장의 바벨론이 무너질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티아티라 교회의 역사는 이세벨이 우상을 교회에 가지고 들어옴으로써 시작하여 심판을 받는 데까지 이른다. 이제 티아티라 교회는 니골라당과 이세벨의 교리로 굳어짐으로써 오늘날 각종 인본주의 이단이 들어와도 정화의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이 하락하고 혼합된 교회를 하느님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게 되었고, 이로부터 사르디스(사데) 교회가 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르디스”라는 말은 곧 “남은 수, 남아있는 것들, 새로운 것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르디스 교회는 곧 티아티라 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반응이다! 전 세계의 교회 부흥의 역사는 모두 하느님의 반응이다! 언제든지 하느님이 부흥의 역사를 시작하실 때, 하느님은 거기에서 반응을 일으키신다. 하느님의 반응은 곧 인간의 회복이다! 주님께서 티아티라 교회의 상황을 보셨으므로 사르디스 교회가 온 것이다.
2. 예언은 우리의 눈을 열어준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아무나 눈이 열리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귀 있는 자들만 그런 경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일곱 교회 예언에서 모든 교회마다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곧 “ 1) 내가 교회의 전달자에게 편지를… .
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3) 이기는 자에게는 … .”
각 시대마다 예수께서 보내신 전달자(종)들이 있는데, 그들은 예수께서 그 시대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을 전한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각 시대에 이루어지는 사단의 기만과 미혹을 경고하고 교회 안에 들어 온 죄와 배도를 가르쳐 주신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각 시대마다 교회와 대다수의 사람들이 예수께서 보내신 전달자들의 말씀을 거절하거나 무시하거나 죽이거나 이단시해 왔다는 것이다. 오직 말씀을 들을 귀가 있고 예수님의 음성을 아는 성도들만 하늘의 기별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요한10,14-16절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말한다. 주께서 인도하시는 양은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귀 있는 자들은 온 마음과 생애를 다해서 이 시대를 위해 주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풍성히 임하시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3. <종교개혁과 분열되는 개신교회> 중세기 종교암흑기 동안 광야에 피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던 성도들의 정신을 계승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개신교회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 기간은 16세기 초에서 18세기 말엽까지에 이른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향해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함으로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되었는데, 그때가 사르디스 교회의 시작인 것이다.
1798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 나폴레옹 혁명군에 의해서 교황 피우스 6세가 체포되어 파리의 감옥에서 옥사함으로써 중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천 년의 권세가 무너지게 되었다. 곧 중세 종교암흑시대가 끝나고 개몽주의 시대가 도래된 것이다. 그러나 이 후 사르디스 교회와 티아티라 교회는 모두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또한 사르디스(사데) 교회는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와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로 구분할 수 있다.
천 년이라는 길고 긴 배도와 핍박의 세월을 지나면서 티아티라 교회는 성서적 신앙을 거의 잃어버렸고 말씀을 왜곡하여 우상과 혼합되었고 이를 화려한 의식과 교리로 포장해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이 되자, 중세기 종교암흑기 동안 광야에 피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았던 성도들의 정신을 계승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고, 개신교회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러나 사르디스 교회 시대동안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성서적 믿음이 회복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었고, 그들의 후예들은 제각기 교파를 만들어서 현실에 안주하였으며, 마침내 종교개혁운동은 교파와 교단에 의해서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피로써 시작한 종교개혁운동이 사실상 중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사르디스 교회의 모습이다.
4. <예수님의 책망> 묵시3,1절은 “사르디스(사데)에 있는 교회 전달자에게 이렇게 편지하여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요한묵시록에는 서로 대응하는 몇 교회가 있다. 사르디스(사데)는 에페소와 관련되고, 스미르나(서머나)는 라오디케이아(라오디게아)와 관련된다. 오직 티아티라(두아디라)만이 단독이다.
주님은 사르디스 교회에서 자기의 이름을 밝히셨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분께서”이다. 에페소 교회에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은 이”라고 하셨고, 사르디스 교회에서는 “일곱 별을 가진 분께서”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에페소 교회는 사도 시대 이후에 느슨해져서 좋은 것이 나쁘게 변한 것이고, 사르디스 교회는 티아티라 교회에서 회복되어 나쁜 것이 좋게 된 것이다.
곧 행위는 있으나 사랑이 없는 것이 에페소 교회이고, 이름은 살았으나 실제는 죽은 것이 사르디스 교회이다. 그러므로 이 두 교회는 서로 대응하는 것이다. 주님은 여기에서 자신을 일곱 영을 가진 분으로 드러내신다. 하느님의 일곱 영은 하느님이 세상에 보내어 역사하는 강화된 영으로서 그 역사는 곧 생명의 역사를 가리킨다. 일곱 별은 에페소에 있는 전달자를 지칭하며 빛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흥의 역사의 절반은 영에 있고 절반은 빛에 있는 것이다!
사르디스 교회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이 터를 닦아 놓은 교회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께서 사르디스 교회에게 칭찬하시는 말씀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마르틴 루터나 요한 칼빈 같은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이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기 때문에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들이 제 각기 교파와 교단을 만들면서 종교개혁운동이 교단주의로 전락되고 말았다. 결국 사르디스 교회가 “죽은 자”가 된 것이다.
중세기 티아티라 교회는 태양신교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복음과 계명을 변질시켰고, 그 결과 깊은 영적 어둠에 빠졌다. 몇 년, 몇 십 년, 몇 백 년이 아니라, 천 년 이상 어둠의 길을 걸었다. 복음과 구원에 대한 말씀이 거의 사라져 버리고 독립 국가로서 우상과의 혼합을 교리화 권력화 함으로써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종교개혁운동을 일으키셔서 제자들과 사도들이 가르쳤던 원래의 복음과 가르침을 회복해 나가기를 원하셨는데, 종교개혁의 후예인 개신교회가 교단주의로 분열됨으로써 그 일이 더욱 혼란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단되어 버린 것이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백 년도 안 되어 개신교회는 “오직 성경” 말씀만 순종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형식주의와 교단 사이의 이단 논쟁에 빠지게 되면서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몇몇 가르침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졌지만, 중세기 로마 가톨릭교회가 세워 놓은 잘못된 교리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개혁은 중단되었고 더 밝은 빛 가운데로 나가지 못하게 되었으며, 사르디스 교회에게 주어진 하늘의 부르심과 기대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르디스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지 못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꼭 이해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는데, 마르틴 루터와 같은 개혁자들은 개혁을 시작한 것이지, 중세기에 무너졌던 복음과 계명을 모두 회복시키고 완성시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묵시 3,2).
묵시3,1하-3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씀하셨다. 마르틴 루터가 하느님의 종인 것을 의심하거나 종교개혁이 하느님의 역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격미달의 일부 신부들의 글이나 말에서 보면, 종교개혁이 하느님의 역사임을 부정할 뿐 아니라 이를 폄하하고 부정하며, 인본주의 이단적 해석을 늘어놓는 잘못 배운 자들도 자주 눈에 띈다. 인간의 교육이란 믿을 것이 못된다!
5. 종교개혁은 실로 위대한 역사요, 하느님의 반응이었다. 하느님은 확실히 루터를 들어 쓰셨는데, 그는 하느님이 특별히 선택한 사람이었다. 루터가 일어난 때가 곧 사르디스 교회이다. 그의 목적은 전적으로 회복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의 역사 이후, 주님의 눈에 그것이 완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모두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완전한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루터 이후로부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 믿음으로 하느님 앞에서 평화를 얻게 된 것이다. 루터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알려 주었을 뿐 아니라, 성경을 볼 수 있도록 열어 준 것이다. 전 유럽을 통하여 동 시대에 마르틴 루터로부터 시작하여, 요한 칼빈, 파렐, 벌퀸과 같은 개혁자들이 계속해서 일어나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인도하였다.
티아티라 교회에서는 권위가 이세벨의 수중에, 바꿔 말하면 로마 천주교회에 있었다. 문제는 “주님이 말씀하신다”라고 하지 않고, “교회는 이렇게 말하는 바이다.” 라고 한 것이다! 모든 문제는 교회, 정확히 말하면 로마 가톨릭 바티칸 모회(母會)에서 정한 바라 했고, 로마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 모회의 말을 듣는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의 “자녀”를 사망으로 죽이리라고 하신다(2,23).
루터는 하느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다면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로마 천주교에서 말하는 것이 다름을 그 사람 스스로 알 수 있다! 성경이 열려졌을 때 모든 교회는 밝아졌다! 인간에게 구원을 가지고 오는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고행과 의식과 행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진리를 선포하였다. 행위가 아니라“믿음”의 중요성을 밝혀낸 것이야말로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이룩한 가장 큰 공적일 것이다.
알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