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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군(居昌郡) 위천면(渭川面) 수승대(搜勝臺) 계곡 일원 탐방 안내
1.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 종택가옥-[반월당 네거리에서 103km, 1시간 43분, 용추폭포에서 22km, 31분],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중요민속자료 제205호. 조선 중기의 문신 정온 선생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선생의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아버지는 정유명(鄭惟明)이며, 어머니는 장사랑 강근우(姜謹友)의 딸이다. 정인홍(鄭仁弘), 정구(鄭逑)의 문인. 정인홍이 대북(大北)의 영수로서 권신이 되자 절교하였다. 1601년(선조 39) 진사가 되고, 학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다. 1610년(광해군 2) 별시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해서 피살되자,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광해군이 분노하여 이원익(李元翼)과 심희수(沈喜壽)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였다. 인조반정 때까지 10년 동안 유배지에 있으면서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대정현감 김정원이 서재용으로 지어준 두 칸의 집에서 지방 유생들을 가르쳤고, 지방 사람들에게 예를 가르치고 애로를 해결해 주기도 하였다. 같은 시기에 유배된 송상인(宋象仁)·이익(李瀷)과 어울려 시문을 교류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축출되자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광해군 때 절의를 지킨 인물로 평가되어 사간·이조참의·대사간·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언관에 있을 때는 인조반정 공신들의 비리와 병권 장악을 공격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행재소로 왕을 호종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는 이조참판으로서 명나라와 조선과의 의리를 중시하여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 주장을 적극 반대하였다. 강화도가 청나라군에 함락당하고 항복이 결정되자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수치를 참을 수 없다고 하며 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죽지 않았다. 그 뒤 관직을 단념하고 덕유산에서 은거하다가 1641년(인조 19)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2. 거창(居昌) 수승대(搜勝臺)-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 구연동. [반월당 네거리에서 93KM, 1시간 29분, 동계 고택에서 1.2KM, 3분].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고 조선 때는 안의현에 속해 있다가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든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 후 조선 중종 때 요수신권(樂水 愼權)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龜淵書堂)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臺)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선생이 대의 면에다 새김에서 비롯되었다.
경내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관수루(觀水樓) 전사청(典祠廳) 요수정(樂水亭) 함양제(涵養齊) 정려(旌閭)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유적비(遺蹟碑) 암구대(岩龜臺) 등이 있는데 이는 유림과 거창신씨 요수종중에서 공동 관리하고 있으며, 솔숲과 물과 바위가 어울려 경치가 빼어나고 또한 자고암과 주변에는 고란초를 비롯한 희귀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3. 거창신씨 황산전통한옥마을-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에 위치한 전통한옥마을로 수승대국민관광단지 건너편 4-5분 거리에 있다. 1540년(조선 중종35년)에 요수 신권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1540년 '구연재'을 세우고 후학들을 양성했던 이후로 거창신씨의 집성마을이 되었다. '구연재'는 1573년 신권선생이 죽자 사림에서 '구연서원'으로 개칭하고, 석곡 성팽년과 함께 배향하였다. 이후 황산마을은 18세기 중엽 조선 영조 때 노론계 학자인 황고 신수이 선생이 입향을 하면서 번성하게 되었다. 이곳 황산전통한옥마을의 가옥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건축물로 대한제국 말기와 일본 강점기 시대의 지방 반가의 전통 한옥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남아 있는 한옥은 약 50여 호로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고, 모두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씨족 부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의 담장은 제법 큰 자연석을 이용한 토석담으로 약 1.2Km에 걸친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전통고가와 잘 어우러져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4. 거창 송계사(松溪寺)-경남 거창군 북상면 소정리 산 27. [수승대에서 10km, 15분]. 송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다. 이곳은 원효(元曉)와 의상(義湘)이 652년(진덕여왕 6) 영취사(靈鷲寺)를 창건한 뒤 5개의 부속 암자를 세우면서 송계암(松溪庵)이라고 이름 지어 창건하였으며, 그 뒤 많은 고승들이 이 절에서 배출되었다.
임진왜란 때 영취사를 비롯하여 5개의 암자가 모두 전소된 뒤 폐허로 있다가 숙종 때 진명(眞溟)이 송계암만을 중건하였다. 6·25전쟁 때 다시 전소된 것을 1969년 승민스님이 중창하였다. 1995년에 원정이 1969년 중창 때 건립한 영취루가 기울어진 것을 해체하여 다시 짓고 문각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보전(極樂寶殿)을 중심으로 대웅전. 문각(종각). 요사채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아미타여래좌상 1구·소종(小鐘)·탱화 3점 등이 있다. 또한 송계사 대웅전에서는 북덕유산 수리덤이 정면으로 볼 수 있으며, 겨울 송계사 설경은 북덕유산이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장관을 연출한다.
송계사는 덕유산 국립공원 내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상면 소정리 개삼불마을로 덕유산 지봉 남쪽 기슭에 송계사가 자리 해 송계사 계곡이라 부른다. 북덕유산 자락의 맑은 계곡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송계사 계곡은 봄. 여름의 녹음과 가을 단풍, 겨울 설경은 찾는 이로 하여금 찬사를 불러일으키는데, 송계사 앞 삼거리에서 북덕유산 골짜기를 따라가는 송계사 계곡은 일반인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아 청정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송계사 계곡은 송계사 버스 주차장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차장 곁에는 내원암 부도라 전하는 부도 1기가 있다.
공원관리사무소 매표소에서 송계사로 가는 1킬로미터의 숲속 산책길은 하늘을 찌를듯한 해묵은 전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전나무숲길을 산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다 절에 이르면 어느새 자연과 하나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절로 드는 길과 정을 에워싸고 있는 숲속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해묵은 전나무들이 장관을 이룬다. 둘레의 울창한 숲과 더불어 영취봉에서 시작한 맑은 물이 흘러 남치어 토속신앙의 산실이 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철의 경치가 더 없이 아름답다. 송계사 계곡은 덕유산 향적봉 산행길의 관문으로 수백년 된 소나무들이 쉼터를 만들고 그 아래 영천 약수가 샘솟아 여름 피서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5. 거창 갈계숲-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송계사에서 귀로 7.1km, 9분]. 송계사나 송계사계곡을 탐방하고 돌아나오는 길에 혹 시간 여유가 있다면 잠시 들러볼 만한 곳으로 북상면 소재지의 갈계숲이 유명하다. 갈계숲은 수령 200~300년 된 소나무·물오리나무·느티나무·느릅나무로 이루어진 숲이다. 면적은 약 2만m²라 한다. 1982년 11월 23일 거창군 천연보호림 제2호로 지정되었다. 북상면의 13경 중 제3경으로 꼽히는 만큼 유명한 곳이다.
갈계숲은 조선 명종 때 6현신(六賢臣)의 한 사람으로 언양현감·비안현감·광주목사 등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효행으로 이름 높았던 임훈(林薰 1500~1584)이 노닐던 숲으로, 갈계숲과 갈계리라는 명칭 모두 임훈의 호인 갈천(葛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숲에는 임훈과 그의 형제들과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임훈의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1934년 숲 속에 건립한 가선정이 있다. 또 하나의 정자는 임훈의 첫째 아우인 도계 임영(林英)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도계정(道溪亭)이 있다.
갈계숲을 끼고 있는 갈계마을에는 임훈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둘째아우 임운(林芸)과 함께 건립한 갈천서당(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95호), 임훈이 살던 집인 거창 갈계리 임씨고가(경상남도민속자료 제9호)를 비롯해 1564년 임훈이 생전에 받은 효자정려(旌閭), 사당 등의 유적이 즐비하다.
★ 거창사건추모공원-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수승대에서 35KM, 52분]. 거창사건(居昌事件), 일명 거창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 .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집단학살한 사건.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국방부는 후방에 흩어져 있던 인민군 병력과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 제11사단을 창설했고 육군본부 작전명령에 따라 제9연대와 제13연대·제20연대를 예하부대로 두었다. 제11사단은 1950년 10월 4일부터 1951년 3월 30일까지 경상남도 일부와 전라남도·전라북도 전역에서 작전을 벌였다. 거창사건은 토벌작전의 제4기에 해당하는 1951년 2월 1일부터 3월 31일 사이에 발생한 것이다.
제11사단의 토벌작전 개념은 견벽청야(堅壁淸野)인데, 이는 최덕신(崔德新) 사단장이 제시한 것이었다. 이 작전은 군이 꼭 지켜야 할 전략거점을 점령한 후 군 보급로를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고, 인민군이나 빨치산이 주민들로부터 식량을 확보하거나 인력과 물건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산간벽촌의 물자를 옮기고 가옥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화된 시기에 유족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고 유골을 한 곳에 모아 봉분을 만들고 위령비를 세웠다. 유족들은 1951년 2월 사건 발생 당시 신원면장이었던 박영보(朴榮輔)를 잡아 실신시키고 생화장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는데, 그만큼 유족들의 분노와 한은 깊었다. 1960년 4대 국회는 거창사건을 비롯해 한국전쟁기 학살사건을 조사하려고 했으나 형식적인 피해신고 접수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국회는 정부를 상대로 학살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특별법 제정과 피해자 구제조치 등 권고안을 채택하는 성과도 보였다. 그렇지만 이런 노력은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모두 좌절되었는데, 유족들이 박산골에 세운 비석은 군인들의 지시에 따라 징으로 쪼여져 땅속에 묻혔고 유해는 흩어졌다.
1987년 민주화가 성취되고 유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김영삼(金泳三)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관련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 피해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이 사건에 대한 국군과 경찰의 가해와 민간인 피해는 언론보도와 유족들의 증언으로 명백히 밝혀졌으나 1951년 군사재판과 1960년 제4대 국회 조사, 그리고 특별법에 의한 명예회복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진상조사’는 이뤄지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거창사건은 이승만 정권과 군사정권 하에서 진상이 은폐된 채 묻혀 있다가 1987년 민주화 이후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정부가 피해자 인정과 명예회복 조치로 기념관을 건립하였으나, 공식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조사한 적이 없는 상태로 남아 있다. 6·25전쟁 중에 일어난 많은 민간인 학살처럼 이 사건 역시 군이 작전이라는 명목 하에 주민들을 의도적으로 살해한 집단학살로서 대규모 인권침해 행위에 해당한다.
**참고. 거창사건추모공원의 정문-천유문(天유門)-'유'자는 '羊'字 아래 '久'를 쓴 자-인도할 유]